神武王 張保皐 그리고 궁예
신무왕(神武王)이 즉위하였다(839년). 왕의 이름은 김우징(金祐徵)이다. 원성왕의 손자고,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요, 희강왕의 사촌 동생이다. '순천 김씨 족보'에 의하면 이 신무왕이 궁예의 아버지라 한다. '순천 김씨 족보'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을 찾아 보자. 신무왕 우징은 즉위하자마자 아들 경응(慶膺)을 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장보고에게 보답하는 당연한 행위로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실(食實) 2천 호를 봉한다.
한편 정치적 반대 세력이었던 이홍(利弘)은 처자를 버리고 산 속으로 숨어 버렸으나 기병들이 샅샅이 뒤져 그를 잡아 죽여 버렸다. 그러나 즉위 원년 7월에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고 절치부심하여 얻은 왕위인데, 신무왕 김우징은 그만 병들어 눕게 되고 말았다. 어느 날 병환 중 잠시 꿈을 꾸었는데, 꿈에 갑자기 이홍이 나타나 자기를 향해 한 발의 화살을 쏘는 것이 아닌가. 신무왕은 화살을 피해 뒤돌아 도망가다가 그만 화살에 맞아 놀라 깨어났다. 다음날 화살 맞은 그 자리에 등창이 나 몸이 급격히 나빠지고, 그리하여 그 달 23일에 이르러 그만 죽고 말았다.
신무왕 김우징이 죽자 '삼국사기' 편찬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기를 마다 하지 않았다. '논(論)컨대, 구양자(歐陽子)의 논에서 '노나라의 환공은 은공을 시해하고서 자립하고, 선공은 자적을 시해하고서 자립하고, 정나라의 여공은 세자 홀을 내쫓고서 자립하고, 위공 손표는 그 임금 연을 내쫓고서 자립한 것인데, 성인 공자는 춘추(春秋)에 그들이 모두 군주에 있는 것을 없애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모두 그 사실을 전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 두게 한 것이다. 그런즉 이 네 임금의 죄는 가히 사람들의 귀를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니, 곧 사람들은 악함을 깨닫고 이를 그칠 만하다. 신라의 김언승은 애장왕을 시해하고서 즉위하고, 김명은 희강을 시해하고서 즉위하고, 김우징은 민애왕을 시해하고 즉위한 것이니, 이렇게 모두 그 사실을 적은 것도 또한 춘추의 뜻이라 할 것이다.'
신라는 이렇게 질서가 흐트러지고 서서히 패망의 길로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비로소 궁예가 태어나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아, '순천 김씨 족보'에는 신무왕이 궁예의 아들이라 했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이에 대한 대답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신무왕이 붕어했으므로 아들 태자 경응(慶膺)이 당연히 왕위에 올랐다. 서력 839년이다. 즉위한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김경응이 처음 한 일은 대사면과 함께 아버지 우징과 자기를 도운 청해진 대사 장보고(궁복)에게 성은을 베푸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성왕 원년 8월에 '청해진 대사 궁복은 일찍이 군사로써 신고(神考;선왕 우징)를 돕고 선조의 거적(巨賊)을 토벌하였으니 어찌 그 공을 잊으랴.' 하며 장보고를 청해진 장군으로 삼고 겸하여 의복을 하사하였다. 가옥 의복 등에 의해 계층을 구별하던 당시 사회로 보아서 의복을 하사한 것은 궁복의 신분 상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일이란 항상 좋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세월은 다시 흘러 8 년. 서력 846년 봄. '삼국사기'는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이 왕이 자기의 딸을 맞이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거하여 모반하였다.' 하고 있다. 여기서 '맞이하지 않는 것'이란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후비)로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렇다면 그 이전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는 약조라도 한 적이 있다는 의미를 함장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하다. 문성왕의 할아버지 정균과 당숙 벌인 제륭이 왕권다툼을 할 때 싸움에 패해 할아버지 정균은 죽고 아버지 우징과 함께 그 먼 남도 길을 달려 완도에까지 가서 장보고의 보호 아래 거할 때, 아마도 상상해 보거니와, 혹은 그들 또한 낭만적이고도 약한 한 인간일 따름이기에 개연성 있는 하나의 로맨스를 가정해 보거니와, 그랬으므로, 권력 싸움에 패해 도망와서 바라보는 남해 푸른 바다였으므로 아버지 김우징과 아들 경응의 마음이 어떠했으랴.
이 때 장보고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고대에는 항차 이런 경우 이런 일들이 벌어지던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과년한 딸을 그들에게 바친다는. 이런 상상이 지나치지 않다면 김명이 희강왕을 죽이고 밍애왕으로 즉위하던 시절, 도망가 완도에서 패배의 쓰린 가슴을 안고 비극적 생활을 하던 그 시절에 아버지 김우징이 장보고의 딸을 맞았다면 궁예 같은 아이의 아버지는 신무왕 김우징일 수 있고, 아들 경응이 장보고의 딸을 맞았다면 궁예의 아버지는 문성왕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모두가 잘 되고 난 뒤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맞을 것을 요구했으나 어찌 가능한 일일 터인가. 신라가 어떤 나라인데. 골품제라고 하는 엄격한 신분제가 상존하는 나라인데. 골의 등급. 혈통의 존귀함과 비천함에 따라 특권 또는 제약이 주어지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궁궐 내 중앙 귀족이 비천한 '해도인(海島人)'을 왕비로 맞는 데 동의할 리 만무했던 것이다. 같은 계층이라도 왕경인과 지방인이 차별되던 시대였는데.
아마도 궁복(장보고)이 반란을 일으키는 그 무렵 궁예와 같은 아이가 태어났을지 모른다. 궁복은 아이를 업고 딸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왕위 쟁탈전을 벌였을 것이다. 왕권측은 염장(閻長)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고, 그는 왕권 쟁탈의 원인자 궁예를 죽이려고 다락에서 아이를 내던지고 여비(女婢)가 받고 그러다가 눈을 찌르고 피 흘리는 아이를 안고 어디론가 멀리 도망가 사라져 버리고, 그리하여 한 세대가 지난 뒤 역사는 개혁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궁예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하나의 추론이요 추단이요 상상의 산물일 따름이다.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궁예를 대체로 헌안왕의 아들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집어내기에는 사료의 부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궁예의 부모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면 궁예 평설은 훨씬 더 리얼하게, 그리고 역사적 당위와 설득력을 더욱 분명히 하면서 순조로이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매우 아쉬운 한 순간일 뿐 아니라 이런 면에선 '삼국사기'는 궁예의 조상을 감추는 것에 성공했지만 역사에 또 하나의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궁예가 신라 왕족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다는 사실, 태생적으로 궁예는 반(反)신라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사실, 동시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궁예가 그렇게 무모하거나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 아닐 것이란 사실, 오히려 진지하고 자기 인생에 깊은 성찰과 고뇌가 있었으며, 그런 만큼 철저히 구시대를 척결하고 새 시대를 개척하려는 역사적 사명감에 불타 있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런 면에서 우리는 궁예의 아버지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헌안왕이나 경문왕이든 혹은 몇몇 가문의 족보에서처럼 신무왕이나 문성왕이든 결과적으로 궁예의 삶의 뿌리나 철학에 큰 변화 없었으리란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이 부분에서 공연한 헛수고를 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이처럼 역사란 결코 어느 집단의 의도대로 진행되거나 의미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출: 강원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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