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권력을 가진 남자와 아무것도 없는 남자, 그 사이의 한 여자라는 설정, 시종일관 한 남자를 쫓아가는 카메라, 공간에 비치는 작은 빛 한 조각, 소외된 이들끼리의 가난한 위로,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여자를 굳건히 믿어주는 한 남자의 순정 같은 의리, 인간이 짓는 죄와 인간에 의한 단죄에 대한 물음, 파국적인 결말.....8년 만에 만난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그의 지난 작품들을 연상케하는 편린이 구석구석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버닝>은, <초록물고기>같은 비장미 흐르는 느와르가 아니며, <박하사탕>처럼 노골적인 사회역사적 시선도 아니며, <밀양>이나 <시>처럼 구원과 속죄, 용서의 서사도 아닌 전혀 다른 질감의 영화로 다가왔다.
고작 한 두 줄이면 요약될 만한 줄거리로 14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은 대체로 빼곡하고 빠듯한 서사와 숨가쁜 리듬과 도약이 공통적이었는데, 이번 영화는 전문가가 아닌 내 눈에도 음악과 음향의 효과적인 사용, 침침할만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검푸른 새벽과 짧게 빛나는 노을의 효과적인 색감 대비, 군더더기 없는 서사와 화면 등 이전의 어느 영화보다 여백이 많은 영화이자 언뜻 관객에게 친절해보이는 영화이기도 하였다. 어깨에 힘을 빼고 만든 듯 하달까.
그러나 이창동 감독답게, 이런 저런 물음을 던지고 남겨놓은 바, 확증 없는 범죄에 대한 단죄에 대해, 희망없는 청년 세대에 대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날 인간들에 대해, 더이상 대안을 말하는 것조차 촌스러워진 듯한 무관심과 단절에 대해, 삶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기도 하였다. 과연 종수는 벤을 정말로 죽였을까. 사라진 해미의 방에 앉아 드디어 무언가 글을 쓰기 시작한 후에 등장한 장면이므로, 소설적 형상화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게끔 그려놓았다.
공무원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엄중한 재판을 받는 주인공 종수의 아버지와, 연쇄살인의 심증이 가도록 그려놓은, 아예 공권력의 범주 바깥에 있는 듯한 벤의 대비를 비롯해 이름도 없이 ‘1번, 2번’으로 불리거나 한 점 빛도 아쉬운 종수와 해미의 공간과 늘 따스하고 안락해보이는 벤의 공간도 노골적일만큼 대비가 많지만 다소 거칠고 상투적일 수 있을 내용을 상쇄하는 미덕이 있다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일종의 문학적 체험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좋은 소설을 끝까지 읽고 책장을 막 덮은 듯한 여운. 그런 여운을 안겨주는 한국영화가 어디 흔하던가 말이다.
첫댓글 5월 26일 토요일이었던 오늘. 같은 교화단 정혜언니와 동래롯데에서 <버닝>을 한 번 더 보았다. 양산물금 CGV는 무슨 마음으로 좌석에는 그리 호화롭게 투자를 하고 정작 영화관의 알짬일 스크린은 코딱지만하게 설치를 해 놨던지, 원. 좀 더 큰 화면으로, 종수를, 벤을, 해미를 만나고 나니 처음 보았을때보다 더 마음이 아려온다. 전에는 놓쳤던, 성당 미사에 벤이 가족들과 같이 신부님께 인사드리는 장면도 보았고, “위대한 개츠비네? 한국엔 개츠비가 너무 많아!”라는 대사도 똑똑히 들렸다. 종수, 종수들......이 시대 아프고 외로운 청춘들에게, 65세인 이창동 감독이 바치는 헌사임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