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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
아흐레 전(올해 3월 8일), 한성백제 박물관의 특별전시전인 < 히타이트 : 오리엔트 최강의 제국 >을 보고 배운 점과 느낀 점들을 간단히 적는다.
먼저 나는 이 전시회가 “튀르키예 문화관광부/초룸시/국립 김해박물관/김해시”가 “한성백제 박물관”과 함께 준비한 전시회였다는 것을 알고 흥미를 느꼈다. 다른 곳은 몰라도, “국립 김해박물관”과 “김해시”가 히타이트 제국을 다룬 전시회를 준비하는 데 협력했다니! 나는 그들이 가야와 고대 왜국(倭國) 말고는 다른 곳에 흥미를 느낄 리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사실이 좀 뜻밖이었다.
그리고 전시회의 설명문에 “약 3700년 전 근동 지역을 호령한 제국 히타이트”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근동(近東)”이라는 말은 유럽에서 보았을 때 ‘가까운 동양’이라는 뜻이니, 그런 유럽 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이름 대신 ‘아시아의 서쪽’이라는 뜻이자, 더 정확한 이름인 “서(西)아시아”라는 말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한국 박물관이 마련한 특별 전시회에서 유럽 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이런 말들을 본다는 건,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히타이트의 최전성기 영토가 (서북부 일부를 뺀)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대부분/레바논/수리야(‘시리아’)/쿠르디스탄(또 다른 이름은 ‘대[大] 아르메니아’) 서부/이라크의 서북부/요르단 일부라는 건 이 전시회를 보고 나서 처음 알았고(나는 히타이트가 아나톨리아의 거의 전부만 차지한 나라인 줄 알았다), 히타이트의 이웃나라가 케메트(오늘날의 ‘이집트’)/아시리아(오늘날의 이라크/쿠웨이트)/에게 문명(미케네와 크노소스)이라는 것도 – 카데시 전투를 보고 히타이트와 케메트의 관계만 알았던지라 – 새롭고 신선했다.
전시회의 설명문에 따르자면 히타이트의 수도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보아즈쾨이’인 ‘하투샤’였는데, 이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가 원래는 ‘파르사’로 불렸던 사실과 비슷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수도의 이름이 나라의 이름과 엇비슷하다는 건, 먼저 수도의 이름이 정해지고 나서 나라의 이름이 정해졌기 때문일까?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주제다.
지금으로부터 3620년 전인 “기원전” 1595년에 히타이트의 임금 ‘무르실리 1세’가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던 고(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큰 명성을 얻었다는 설명은 카데시 전투나 케메트와의 충돌/교류만으로 히타이트를 이해했던 내 기존의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를 일깨웠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지만(그리고 흥미로웠지만), ‘한국 학계가 꼭 “기원전”이라는 말을 써야 할까? “서기전”이라는 명칭이 더 정확한데?’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게 해서 이것도 아쉬운 점으로 남았다.
내가 잘 알고 있던 카데시 전투는 서기전 1274년에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와 케메트의 ‘람세스 2세’가 카데시라는 도시에서 벌인 전투였는데, 설명문에 따르면 케메트(‘이집트’)의 전차는 빨리 움직이기 위해 마부와 궁수(弓手. ‘활잡이’라는 쉬운 배달말을 쓰면 안 되었을까?) 두 명만 탔지만, 히타이트의 전차는 마부와 방패병과 창병 세 명이 타서 속도는 느린 대신 파괴력이 강했다.
그리고 카데시 전투에는 “용병” 2만 명이 참전하였는데, 그 가운데 2분의 1(‘가봇’)인 1만 명은 히타이트가 고용한 용병이었고, 나머지 1만 명은 케메트가 고용한 용병이었다는 설명문을 읽을 때는 (나름대로 카데시 전투를 잘 알고 있다고 여긴 나도 몰랐던 사실이라) 참으로 흥미로웠다.
(나는 카데시 전투에 참전한 군사들이 모두 정규군인 줄 알았기 때문에, 두 나라가 용병을 쓰면서 싸운 것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들은 정규군이 죽거나 다치는 게 아까워서 용병을 쓴 것일까, 아니면 잘 싸우는 용병들을 써야 전투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여긴 것일까?)
카데시 전투를 다룬 영상이 전투를 제대로 보여 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그리고 그것은 칭찬받아야 하지만) 그 영상에서 “케메트”와 “하티”가 나오면서도 “케메트”에 대한 보충설명이 없다는 점은 이 전시회의 확실한 단점이었고, 박물관은 “하티”가 히타이트의 바른 이름임을 알려주는 것처럼(히타이트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하티’라고 불렀지, ‘히타이트’로 부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케메트도 흔히 ‘이집트’로 알려진 나라의 옛 이름이자 바른 이름임을 알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전시회에서 접한 히타이트 제국의 전쟁과 전투와 군사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히타이트 왕(나라는 ‘제국’인데 그 임금은 왜 ‘황제’가 아니라 ‘왕’인 건지 모르겠다. 용어를 잘못 쓴 것 아닌가?)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직접(몸소 – 옮긴이) 군대를 이끌고 주요 원정을 떠났”는데, ‘이는 군대의 사기를 북돋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단결을 이끌어내고 군대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대의 총사령관인 임금이 몸소 전쟁과 전투에 참가하였으므로, 현실을 보다 정확히 알아채고 그에 걸맞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강점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관행이었다.
다만, “(히타이트의) 왕은 (원정 때문에) 오랜 기간 고국을 떠나 있었다.”는 사실은 좀 마음에 걸렸는데, 이는 관람객인 나로 하여금 ‘이렇게 자기 본거지를 오랫동안 비우면, 옥좌를 지키기가 어렵지 않나? 본국에서 신하나 왕족이 다른 마음을 품고 옥좌를 노리면 어떡하라고?’ 하는 걱정을 하게 했다.
그리고 나의 선입견을 깨뜨린 또 다른 설명은 “히타이트 군대는 보병과 전차로 구성되어 있었”고 “보병이 주력”이라는 설명이었는데, 나는 그 설명문을 읽기 전에는 히타이트 사람들은 유목 기마민족이고, 따라서 기병이 주력이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그러니 자신의 선입견만으로 갈마[‘역사’]와 현실을 보지는 말지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기록과 증언과 유물과 유적 같은 물증이지, 선입견은 아니다).
비록 히타이트의 군사가 “보병이 주력”이기는 했지만, “전차 부대 또한 유명”했고, 히타이트 군의 “병사들은 주로 청동으로 만든 단검과 창, 도끼로 무장했”다. “보병은 기본적으로 창을 사용했지만(‘썼지만’), 원거리 공격용 활도 갖추고 있었”으며, “투구와 갑옷도 착용하여 실제로 수도 하투샤 유적에서는 비늘갑옷이 많이 확인”된다.
그리고 방패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집트의 아부심벨 신전에 묘사된 카데시 전투 장면 속 히타이트 방패는 8자 모양이지만, (히타이트의) 거푸집에 묘사된 것은 사각형이다(이래서 갈마[‘역사’]를 연구할 때, 한 나라나 한 겨레나 한 집단의 사료만 참고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케메트가 하티의 방패 모양을 잘못 그렸듯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참 모습을 비틀어서 그릴 수도 있으니까).”
이런 설명들을 접하면서, 비록 이들이 스키타이인처럼 기마군단을 꾸리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청동기시대의 서아시아에서 가장 힘이 센 군대를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건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야기도 하자. 서기전 1650년에 세워져 서기전 1200년에 멸망한, 그러니까 무려 450여 년 동안 유지된 나라인 히타이트의 전성기는 서기전 14~13세기였는데, 그런 “히타이트 화살촉 대부분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히타이트가 세계 최초로 쇠를 만든 나라라, 화살촉도 철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투샤에서 출토된 비늘갑옷은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히타이트에서는 돌망치와 돌도끼도 쓰였다.”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서나 쓸 돌망치와 돌도끼가 히타이트 제국에서 쓰였다고? 그러나 박물관의 설명문에 따르면,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한다. 히타이트의 기록에 “<타바르나> 대왕(역사서의 히타이트 황제인 ‘텔리피누’로 추정된다)의 말씀은 철과 같아서, 무시하거나 깨뜨릴 수 없다.”는 글귀가 나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 나라가 쇠를 만든 건 사실이지만, “철은 주로 작은 크기의 물건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무기 제작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난 히타이트 제국이 철기를 많이 만들어서 쓰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히타이트인들은 철을 잘 다루었지만, (그 나라가 있던 시기는) 청동기가 가장 발전한 시기였기 때문에(그리고 철 자체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철은 일부 도구와 장신구(‘치레거리’/‘꾸미개’)를 만들 때에나 썼고, 이 또한 (예전에 만들었던 것들을) 재활용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게다가 잘 녹슬고 쉽게 삭아 없어지는 철의 성질 때문에라도 철기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실제로, 히타이트인들은 청동기를 많이 썼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라면, 이 설명을 담은 설명문을 읽으면서 ‘철기의 나라 히타이트’/‘강철 제국 히타이트’라는 기존의 내 선입견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으며, 그 빈 자리에는 실망과 ‘결국 히타이트도 청동기 시대의 제국이자 문명일 뿐이다.’ 하는 깨달음이 채워졌다. 만약 이 전시회를 보러 오지 않았다면, 나는 이 사실을 영영 모르고 잘못된 믿음을 품고 히타이트를 마주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고치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전시회를 보러 오기를 백 번 잘 했다고 생각한다)
이 전시회를 보면서 히타이트 제국에 대한 선입견 뿐 아니라 고대 서아시아 세계 전체에 대한 선입견도 깨지거나 부서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들라면 히타이트 제국 뿐 아니라 서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썼던 쐐기문자(‘설형문자’라고도 한다)는 “점토판 말고도 가죽, 나무, 밀랍에 적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모두 부패되고(‘썩고’) 없어서 지금은 점토판만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쐐기문자’는 “점토판”에만 적는 줄 알았기에, 이 설명이 너무나도 뜻밖이었고, 나 자신의 무지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점토판”조차도 “크기”가 다양해서, “작은 것은 3~4cm 정도고 큰 것은 27~31cm라고 한다.”니, 나무 판자처럼 크고 넓적하고 두꺼운 점토판만 생각하고 살았던 나는 얼마나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
종이를 쓰는 오늘날에도 수첩 크기인 종이가 따로 있고, 공책/연습장 크기인 종이가 따로 있고, 스케치북 크기인 종이가 따로 있고, A4 용지 크기인 종이가 따로 있고, 책 크기인 종이가 따로 있는데, 그렇다면 점토판도 작은 크기로 만들어 수첩이나 쪽지처럼 썼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 않은가?
(갈마는 정말이지 오늘날까지 남아 있거나, 보이거나, 들리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옛 사람들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야기들도 전시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사실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전시회의 설명문에 따르면 서기전 1350 ~ 1320년에 히타이트를 다스린 ‘슈필룰리우마 1세’는 바빌로니아 공주와 결혼(‘혼인’)하기도 했는데, 이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략혼인이 동아시아나 유럽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증거라, 히타이트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전쟁만 하는 겨레는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실이라, 반갑기도 했다.
“히타이트어는 (인도 – 유럽 어 가운데)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언어”라는 설명은, 전시회에 들르기 전부터 그 언어가 인도 – 유럽 어족에 속하는 말임은 알았지만, ‘기록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인도 – 유럽어’임은 몰랐던 나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사실이었고, 히타이트가 “쐐기문자로 자신의 언어 외에도 8개 이상의 다양한 언어를 기록”했으며 이는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샤 유적 문서고에서 확인된 점토판”에 “히타이트어, 아카드어, 수메르어, 후르리어, 루위아어 등”이 나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는 설명은 셈족과 엘람인 연합군에게 멸망한 키엔기르(‘수메르’의 바른 이름이자 정식 명칭)의 말이 키엔기르가 멸망한 지 수 세기가 흐른 뒤에도 살아남아 ‘글말(문어)’로 계속 쓰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자,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라틴어가 서유럽/북유럽의 글말로 계속 쓰인 사실과 비슷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또 히타이트에서는 “왕실(‘황실’) 내(안) 업무와 관련된 기록은 주로 쐐기문자를 사용했지만, 도장이나 공공장소의 기념물에는 주로 상형문자가 새겨졌”는데, 이는 근세조선과 대한제국이 공식 기록은 한자로 적어서 남기면서도 민간에서는 훈민정음을 쓴 사실과 비슷하여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그 상형문자가 “이집트 상형문자와는 전혀 다른 체계를 지닌 ‘루위아’어 상형문자로,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쐐기문자가 사라진 뒤에도 몇백 년 동안 계속 사용되었”다는 설명을 접할 때는, (흔히 ‘서하[西夏]’로 알려졌으나 올바른 이름은 ‘폰으빈이혀타’고, 뵈[서양 이름 ‘티베트’]족에게는 ‘미냐크’로 불렸으며, 자신들을 ‘대하[大夏]’사람으로 불렀던) 폰으빈이혀타의 글자가 나라가 몽골 군사에게 망한 뒤에도 그 유민들에 의해 명나라 말기까지 계속 쓰인 사실과, 라틴 알파벳이 서로마 제국이 망한 뒤에도 서유럽에서 계속 쓰인 사실이 떠올라, ‘나라는 망했어도 산천은 그대로이네.’라는 말을 ‘나라는 망해도 글자는 살아남네.’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품었다.
덧붙이자면 히타이트에서 “쐐기문자의 사용은 왕(‘황제’), 왕비(‘황비’), 왕족(‘황족’) 일부에게만 부여된 특권”이었는데, 이는 지배층만 한자로 한문을 쓸 수 있었던 동아시아 문화권/한자 문화권의 상황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달랐다. 후자는 적어도 그 한자를 피지배층에게 가르치려고 애쓰기는 했으니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쐐기문자가 히타이트 제국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글자이자, 히타이트 사람들이 받아들인 글자이기 때문에 ‘고급 글자’라고 여겨서 그랬던 것일까? 전시회에는 그런 의문을 풀 수 있는 설명이 없었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두 글자를 쓴 나라답게 히타이트의 도장(히타이트 사람들이 가지고 다닌 것이기도 하다)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직위는 ‘서기관’이었는데, 이는 서기관의 소유인 도장이 많았다는 뜻이고 그들이 신분증 대신 도장을 갖고 다녔다는 뜻이기도 해 히타이트가 무력만 강한 나라가 아니라 문화도 발달한 나라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도장에 새겨진 쐐기문자에는 ‘○○의 아들’이라는 문구(‘글귀’)가 포함되어 있어서, 왕실 계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아무개의 아들(히브리어로는 “벤 아무개”)’이라고 부르고, 켈트인이나 헬라스 사람들이나 앵글로 색슨족도 같은 일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서기전 1350 ~ 1200년에 만들어진 히타이트의 점토판 가운데는 ‘지혜의 서’로 불리는 “히타이트어 번역이 포함된 후르리어로 작성된 6개의 이야기가 적힌 점토판”이 있는데, 이것은 “짧은 이야기와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며, 그 “주요 내용은 신들이 범죄,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잘못을 어떻게 처벌했는지”이고 점토판에는 “후르리어와 히타이트어가 함께 적혀있”다는 설명은 내게 때때로 배달말과 영어가 함께 인쇄된 책이 나오는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게 했고, 나아가 ‘이솝 우화와 비슷한 우화들은 히타이트 시절에도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했다.
히타이트의 점토판들이 말해주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최초의 근대적인 법’으로 평가받는 ‘텔레피누 칙령’에서는 세계 최초로 왕위 계승 원칙을 성문화(成文化. 문장으로 나타냄/문장으로 옮겨서 나타냄)하였다. 사형죄는 8가지 범죄로 한정하고, 체벌보다는 금전적 배상이 중심이었다. 또한 법적으로 모든 자유 시민은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았고, 사유재산을 보호받았다.” 그야말로 현대 문명국가의 시민/국민이 누리는 법적 권리와 인권을 히타이트 사람들은 일찌감치 보장받았던 것이다.
히타이트 고왕국 시기(서기전 1500 ~ 1475년)의 토지 기부 문서를 보면, 히타이트에는 왕이 개인에게 토지를 기증한 사실과 왕(‘황제’)이 문서에 인장을 찍은 사실, 그리고 히타이트 제국에 “소송”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도 히타이트 제국의 법이 크게 발전했고 사회가 문명화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송이라니! 3525년 전의 히타이트 사람들이 오늘날(서기 2025년 현재)의 한국인들처럼 법정에 상대방을 고소했다는 걸 보면,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나니”라는 옛 사람의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갈마(‘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내가 히타이트 사람들이 오늘날의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까닭은 또 있다. 전시회의 설명에 따르면, 히타이트에는 “세탁소”와 “세탁업자”가 있었고, 이는 오늘날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생이 보장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 똑같았단 말이다.
또, “히타이트는 농업국가이면서도 다양한 산업을 장려”하였는데, 내가 볼 때는 이 점이 여름지이(‘농업’/‘농경’/‘농사’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이자 옛 배달말)만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산업은 천시한 근세조선과는 다른 점이었다.
게다가 전시회에는 “(손잡이와) 뚜껑이 있는 찻주전자”가 히타이트제로 나왔고, 이는 오늘날 영국의 찻주전자를 떠올리게 했다. 또 다른 히타이트제 토기는 “손잡이”가 달린 잔이었는데, 이것은 근세 프랑스에서 맨 먼저 만든 ‘손잡이 달린 찻잔/커피잔’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자신의 필요를 똑같은 방식으로 충족하게 되어있는 법인가? 이것들을 떠올리며, 지금 이 글을 쓰며 나는 그런 의문을 품는다.
히타이트에는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금속 “톱”도 있었는데, 그 톱의 생김새가 오늘날 우리가 쓰는 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인상깊었다. 문화와 문명의 생명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고 질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끝으로 세 가지만 더 쓰고 이 글을 매듭짓자.
첫째, 나는 히타이트인들이 자신들이 정복한 땅의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신들을 섬기라고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원주민들의 신을 같이 모시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 ‘상대방을 존중해서 그러는 건가?’하는 의문을 품었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 나온 설명문을 읽은 뒤, 그건 착각이었을 뿐임을 깨달았다.
설명문을 그대로 옮기자면, “히타이트인들은 도시를 정복하고 나면 그곳의 모든 신상을 가지고 와서 자신들의 신전에 모셨습니다. 신상을 빼앗긴 사람들이 더 이상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없어서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많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칠수록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다수의 신을 모시려고 하였습니다.”
아, ‘관용을 베푸는 히타이트의 종교 정책’이 알고 보니 이런 까닭 때문에 펼쳐진 것이라니, 상당히 실망스러워 말이 안 나왔다. 결국 고상한 정책도, 얼핏 보면 인도주의적인 배려도 알고 보면 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이야긴가? 히타이트의 종교 정책도 그런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과연 고대 히타이트만 이럴까?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하는 나라들이 있지 않은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둘째, 전시회는 히타이트가 멸망한 해를 서기전 1200년으로 설명하는데, 그들의 멸망이 ‘바다 사람들’로 불리는, ‘고대 동지중해 세계에 떨어졌던 핵폭탄’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는 소개하지 않아 이 점이 아쉬웠다. 히타이트의 멸망까지 제대로 다뤄 주었으면 여러모로 유익했을 텐데 말이다.
셋째, 전시회에 대한 ‘불만’은 또 있다.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바에 따르면, 히타이트 사람들은 제국이 멸망한 뒤 오늘날의 수리야로 옮겨 가서 살았고, 거기서 수 세기 동안은 정체성을 유지하다가 사라졌다고 하는데(히타이트 양식의 미술품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이다), 왜 전시회는 그 사실은 쏙 빼고 이야기하지 않는 건가? 만약 그 사실을 말한다면, 한국의 ‘우방’인 튀르키예 사람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인가? (튀르키예는 튀르크 사람들의 나라고, 수리야는 아랍 사람들의 나라니까) 히타이트 제국의 소속 문제를 놓고 한국 사람들이 ‘그렇다면 히타이트의 후계자는 오늘날의 수리야 사람들 아니야?’하는 의문을 품을까봐, 그런 의문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박물관은 ‘진실을 말하지 않은 죄’를 지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나는 이 글에서 전시회에서 보고 들은 많은 것을 적었고, 느낀 점이나 깨달은 점이나 생각한 점들도 적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시회의 모든 것을 적지는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 전시회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이 있고, 그것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디 그 점은 독자 여러분이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시기 바란다. “이것으로 내 말을 마친다.”
- 단기 4358년 음력 2월 18일에, 잉걸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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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