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은 과학 기술 면에서도 뛰어난 나라로서 핵무기를 개발, 보유했다가 스스로 폐기한 최초, 유일한 나라이다.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나도 이번에 남아공을 여행하면서 새삼 알게 된 사실이다.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과 폐기의 과정을 간단히 살펴 본다.
1. 초기 평화적 이용을 위한 개발 (1948 - 73년)
남아공은 우라늄 매장량이 호주, 카자흐스탄, 캐나다, 미국에 이어 세계 5위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까지도 20 년 동안 미국, 영국에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을 판매했다. 남아공의 핵 개발은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두 나라는 평화적 핵기술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57년 원자력 협정을 체결, 핵 폭발 장치 제조 기술을 배웠다.
1965년 3월 연구용 원자로 사파리 1호, 67년 2호를 완공하고, 69년 발린다바에 실험용 우라늄 농축 시설 Y-Plant를 건설했다. 1971년 칼드비트 공업장관이 광산 개발용 핵 폭발물 연구 계획을 승인하였다.
2. 핵무기 개발 전환 및 보유(1974 - 89)
1970년대 들어 인종 분리 정책으로 흑인들의 무장 반란이 발생하고,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된 데다가 이웃 앙골라에서도 친소 공산 정부가 등장하여 쿠바와 북한을 끌어 들이는 등 국내외로 안보 불안이 증폭되자 핵폭탄 개발을 시작한다.
1974년 존 볼스터 수상이 이스라엘의 페레스 국방장관과 제제바에서 비밀 회동한다. 회담 내용을 공개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은 핵무기 관련 기술과 장비를 제공하고, 남아공은 우라늄 원광과 핵실험 장소를 제공하는 데 합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78년 발린다바 시설은 무기용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76년 소련이 이를 탐지하고 미국에 관련 시설을 공습하자고 제의했으나 거절된다. 1977년 1차 핵실험이 있었고, 이후 남아공은 비공식적 핵 보유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78년 11월 남아공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국제적 제재가 가해졌다.
79년 9월 22일 미국의 인공위성 벨라와 미 해군 음파 탐지기에서 남아공과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실시한 중성자탄 을 포함한 핵실험인 오퍼레이션 피닉스를 관측했다. 그러나 미 정부는 한번도 공식적으로 이를 핵실험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을 제재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2년부터 방위사업청이 핵 폭탄 생산을 시작, 89년까지 약 400kg의 농축 우라늄과 6기의 우라늄 핵폭탄을 제조했다.
3. 핵무기 개발 중단 및 해체(1989 - 93)
80 년대 후반 들어 안보 상황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 89년 앙골라, 쿠바, 남아공이 휴전에 합의하고, 쿠바는 자국군을 철수했고, 나미비아 독립도 합의되었다. 내부적으로도 인종 분리 정책의 재검토 등으로 핵무기 보유의 필요성이 낮아졌다.
89년 9월 14일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레데릭 데 클라르크는 비핵화 정책을 추진, 12월에 핵폭탄 해체 방안을 수립하였다. 96년 7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핵 폭탄 6기를 해체하고 바로 이어서 NPT에 가입하였다.
NPT 가입 1년 전 남아공은 우라늄 해외 판매를 허용하고, 이웃나라 들의 동시 가입을 조건으로 NPT에 가입하겠다고 제의했고, 이에 미,소가 잠비아와 탄자니아를 설득하여 이들과 함께 NPT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남아공은 핵무기를 개발, 보유했다가 스스로 폐기한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