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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적 자질들에 관하여
우리가 이 장에서 함께 이들 세 교회의 사자(천사)들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큰 차이점을 발견할 것이다. 사데와 라오디게아의 이들은, 전자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름을 얻게 하고, 후자로 스스로 높이 평가하게 하는, (그것은 가능성이 있고), 많은 은사들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 중에 어떤 사람도 은혜로 인하여 큰 칭찬을 소유하지 못했고, 그 반대이다. 사데의 그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었고, 그의 사역들은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드러나든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않았다. 라오디게아의 그가 어떠했는지를 그 서신이 또한 분명하게 할 것이다. 열매에 대하여 사데의 사자는 적었지만, 약간의 이름을 가졌고, 라오디게아의 그는 적게 혹은 전혀 어떤 것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필라델피아의 사자는 이들 모든 세 가지에 있어 반대다. 그는 거의 역할이 없었지만, 작은 능력을 가졌고, 하지만 정직과 결과에 대한 좋은 증거를 가졌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 목회자들 사이에 은사의 다른 분량들이 있다는 것. 2.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다(honest)는 것. 3. 가장 정직한 자가 종종 모습에 있어 가장 비천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그것들을 증진함에 있어 가장 큰 은사들을 소유한 자가 종종 가장 양심적이지 않다는 것. 4. 성실하고, 정직한 목회자가 은사들에 있어 고려되거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과 같이, 매우 비천한 은사들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증진함에 있어 더 신실할 수 있고, 그의 작은 분량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더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그들의 행실에 있어 온유함이 없이 더 빛나는 은사들을 가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매들과 더 큰 결과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 -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사역자에게 어떤 자질들이 적합한지 물을 기회를 또한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특히, 배움이 목회자에게 어떤 식으로 유용하다면? 또는 연약한 필라델피아가 칭찬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해롭게 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언제 책망을 받는가? 혹은 은혜가 목회적인 자질들 사이에 고려되어야 하는지? 여기에 극단적인 것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배움에 너무 많은 것을 주고 은혜에 너무 적게 주면서, 다른 사람들은 반대로 행하고 있다. 이것들은 일관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일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데의 사자의 책망은 그가 이름이나 은사를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들에 합당하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작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필라델피아의 칭찬이 아니었고, 그가 소유한 작은 것을 잘 증진시켰다는 것이다. 아니면, 한 달란트가 다섯 달란트와 마찬가지로 숨겨지고 남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일에 한 마디 말을 하면, 이들 셋이 한 목회자나, 목회사역의 한 사람의 완전한 자질을 구비하는 것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즉, Ⅰ. 은사들. Ⅱ. 학식(learning). Ⅲ. 은혜. 두 번째는 첫째를 관리하는데 도움을 준다.; 셋째는 양자를 거룩하게 하고, 그것들은 바른 목적과 표적을 겨누게 만든다. 하지만 이들 주지사항을 취하자: 1. 이들 모든 것에 정도들(degrees)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 중에 어떤 것에 어떤 엄격한 척도(measure)나 정도(degree)를 제한하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2. 비록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동등하지 않고, 혹은 동일한 방식을 따르지 않을지라도, 첫 두 가지는 목회적인 자질의 존재, 혹은 실재(the esse)에 필수적이고, 마지막 것은 뒤에 드러날 것과 같이, 그것의 선하고 완전한 존재를 위해, 혹은 좋은 실재(bene esse)에 속하는 것이다.
Ⅰ. 은사에 의해, 우리는 한 사람이 그런 소명을 위하여 할 수 있게 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적합성(fitness)으로 이해한다. 비록 그것을 증진시키는 것에 의해 그것이 증가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은 본래 단순하게 요구된 어떤 것이 아니고, 그런 상태 안에서 아마 이익을 취하도록 주어진 재능(a talent)이나 평판(a stock)이고, 그러므로 그것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 어떤 수고, 기술, 혹은 예술에 의해 획득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특별하게 은사와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으로 불린다(엡 4:7-12; 고전 12:14; 딤전 4:14; 딤후 1:6). 사도는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그 단어 διδακτικός 안에 포함한다(딤전 3:2).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들 세 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1. 어떤 뚜렷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분별하고 이해하는 능력.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단계로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고, 이것은 지식의 은사로 불릴 수 있으며(이 은사를 가정하는 지식의 단어가 있듯이, 고전 12:8), 그것에 의해 모든 사람이 취하지 못하는, 복음의 진리를 어떤 사람은 취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 관하여서 뿐만 아니라, 목회자에 관하여, 디모데를 위하여 기도되어진다(딤후 2:7).
2. 사도에 의해 전도(발언, utterance)으로 불린(골 4:3-4), 그들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들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표현하고 제시하는 적합성으로 그것은 받아들이고, 그것은 소유한 자는 διδακτικός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혜 혹은 지식의 말씀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고, 그것에 의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말하기에 적합하게 된다: 그것이 없이 어떤 지식도 충분하지 않다.
3. 사람의 수사와 웅변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다른 방식 안에서 그리고 다른 형식으로 사물을 산출하는 활력이나 효과가, 이 은사에 또한 포함되고 있다. 따라서 복음의 전도(preaching)에 있어 그 말씀과 능력은 구별되는데, 고전 4:19,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내가 알 것이다(두 위대한 신학자 칼빈과 마터가 그 구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목적에 탁월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적인 은사의 주된 차이를 주는 것이고, 앞의 두 가지는 어떤 측면에 있어 모든 직업의 사람들에게 공통되지만, 이것은 아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지식을 소유할 수 있고 그것을 위대한 웅변술에 의해 표현할 수 있지만, 타고난 목회적 은사는, 인간의 우번에 있어 부요한, 고린도에 타락한 교사들과 같이, 그것과 더불어 소유한 그 능력과 생명에서 멀 수 있다: 그것은 (거룩하고 박식한 Mr. Boyd of Trochrague가 말하듯) 은사에 의해서나(ex dono), 오직 은사에 의해서만 시험되지 않아야 하며, 은사의 효과(ex doni efficacia), 혹은 그 은사의 효과에 의해 양심에 그것에 대한 인상 안에서 시험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이것이 영적인 귀에 가장 잘 알려질 수 있고, 혀가 음식을 분별하듯, 그것이 은사들을 시험하고 분별할 수 있을지라도, 성경에서 분명한 것이고, 종종(그것이 많고 적듯이) 자연의 청중들에 의해 승인될 것이고, 적지 않은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청중들이 그러한 자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설교 가운데 이 능력과 효력을 알렸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설교 가운데 그들은 알리지 못했다(마 7:29). 즉, 설교가 내용과 표현의 방식으로 인해 정교할 때, 다른 사람에 의해 단순함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해진 약간의 적은 말보다, 덜 영향을 미치고 덜 무게를 가질 것이다. 이 효능(efficacy)은 자연적인 열정과 외침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저런 많고 적음이 있을 수 있다. 또는 그것은 표현을 (engaging: attractive) 취하는 선택이나 말해진 내용을 분배함에 있어 예술의 단순한 실천으로 이뤄지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그것은 사실이고,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 그들 자신의 용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말의 그런 허세는 사람들을 전달자를 칭송하게 이끌 수 있고, 혹은 그들의 은사를 사랑하게 이끌 수 있지만, 보내시는 분에 대한 평가에 관여하지 못하고, 주로 말해진 것의 내용을, 참된 은사가 분별되고 양해되는, 타고난 법칙인, 양심에 천거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 효능, efficacy) 이것들 안에서 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1. 그것의 단순한(simple) 명백함, 혹은 명백한 단순성, 그것에 의해 하나님의 진리들은 그것들로부터 듣는 자들을 돌아서게 하는 어떤 것도 혼합되게 하지 않는, 그것들 자신과 다름없이 제시되지만, 그것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위하여, 그것들은 그들에게 존재할 수 있는 만큼 적나라하게 된다. 이 단순성(simplicity)은 자주 바울에 의해 말해지고, 고린도에 보내진 서신들에서와 같이, 인간의 웅변에 반대된다.
2. 교리적으로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은 그것으로 그것이 매이는 양심에 그런 것에 대한 인상을 남기는 것에 의해, 사람이 그런 것을 제시하거나 촉구하기에 확신 있게 적합하게 되는 은사, 증거와 실증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성령과 능력의 증거와 나타나심(실증, demonstration)으로 불린다(고전 2:4).
3. 그것의 효과에 관하여, 이것을 수반하는 능력(power)과 효능이 있다. 이것이 위협들을 그처럼 무게 있게 만들어서, 바울은 펠릭스를 떨게 만들 것이고, 그것이 약속들을 달콤하고 설득적으로 만들어서, 아그립바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설득되게 할 것이다(행 24:25; 26:28). 이것이 심지어 이방인 혹은 바보조차도,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 라고 말하게 만들 것이다(고전 14:25). 그리고 그것은 이상적인 이야기 이상이고, 심지어 그런 주제에 대하여, 이와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들의 양심에 그 말씀과 우리 자신을 천거하며, 그의 도우심에 의해 그가 복음으로 모든 곳에서 승리하게 만드시고, 모든 사람에게 그를 위한 달콤한 향기가 되도록 만드시는 때에 그러하다(고후 2:14).
4. 이 목회적 은사는 때, 기회, 청자, 등에 관련하여 말하는 것의 시의적절한 방식을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그것은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는 은사이고(딤후 2:15), 악인들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의인들을 기진하게 하고 슬프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이들 강한 진을 취하고 연단된 죄인들의 상처에 기름을 붓기 위하여, 자연인들의 교만한 상상들에 포대를 설치하는 것이고, 설교자의 잘못에 의해 의인들이 악인들을 위해 계획된 공격으로 상처를 받거나 용인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연약한 자들에게 적절하게 낮아지고 분명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사 50:4), 이것은 실제로 참된 배움이며, 그러한 사람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다(딤후 2:15).
5. 이 은사 안에 παρρησία(분명함, 혹은 말의 자유, 요 6:25), 혹은 거룩한 담대함과 자유가 있고, 그것에 의해 권위 있는 방식으로 주의 말씀은 말해져야 하는 만큼 말해지고, 그러한 것이 마 7:29에서 최고의 목사의 설교(the chief pastor's preaching)에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그것은 골 4:3에서 전도할 문(a door of utterance), 그리고 말해져야하는 말(a speaking as it ought to be spoken)로 불린다. 혹은 그것은 벧전 4:11에서 하나님의 말씀(the oracles of God)으로 불린다. 그래서 적거나 많거나, 이 은사는 그의 말씀이 본래 소유하는 것과 같이, 그 위에 하나님의 위엄의 인장을 소유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이 사역을 경멸하지 못하는, 권위를 가지고 책망하는 이것은, 바울의 실천에 있어 자주 언급되고, 디모데와 디도의 인물들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에 의해 권해진다. 그리고 아마 필라델피아의 이 사자 안에 상당한 모든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능력은 그 사람에게 혹은 그의 설교에, 육체적으로 그리고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된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영에 의해 듣는 자들의 마음과 양심에 특별한 인상을 수반하는, 그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적합성(fitness)과 능숙함(dexterity)이고, 그것에 의해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안다.
Ⅱ. 두 번째, 즉, 학식(learning)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것이 많은 다양한 개념들을 가지기 때문에, 결정하기 더 어려울 것이다. 다음과 같이, 1. 그것은 성경을 잘 아는 것과, 그 안에서 신적이고 하늘의 것들을 잘 아는 것, 혹은 방언, 예술, 과학 등의 지식과 같이, 인간의 문학을 잘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2. 우리는 학식을, 물질적으로 그 자체 안에서 사람이 오류에 대하여 진리를 추론하고,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며, 어려운 구절들을 해설하고, 혹은 보기에 모순되는 구절들을 조화롭게 하고, 반대에 답해야 하는 적합성으로 생각할 수 있거나, 또는 그것을 사람들이 이 자질에 의해 이르는 방식 안에서 생각할 수 있고, 혹은 이 적합성을 방언을 이해하기 위해, 어려움들을 조사하고 살피기 위해 요구하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어떤 매개 수단이나 노고 없이, 사도들이 소유하고, 옛 선지자들이 소유한, 비상한 조명에 의하여 있는, 혹은 그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매개적인 도움들에 의해 이것들에 대한 독서, 공부, 그리고 배움의 일상적이고 매개적인 방식에 의해 존재하는, 주어진 은사를 증진시킬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자극하게 된다.
이제 답변으로, 우리는 말한다: 1. 물질적으로나 그 자체로 고려된 그 학식은, 하나님의 일들을 잘 아는 것을 암시하듯이, 그것은 아주(simply) 필요하다. 이것을 모든 사도들이 소유했고, 즉, 복음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하여, 반론자들에 대항하여 논박할 능력을 소유했다. 이것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요구되고, 그가 가르치길 잘해야 하는 것과, 그것은 그가 설명해야 하는 진리에 관련하여 유용하며, 그것에 대하여 어떤 것들은 어렵고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배우지 못한 자들과 무지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파멸로 빗나갈 준비가 되어 잇다(딤전 3:2; 딛 1:9; 벧후 3:16). 그렇다면 목죄자는 이와 같이 학식이 있게 될 필요가 있고, 그가 확증하는 것에 대하여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딤전 1:7), (자신이 배운 건전한 말씀의 형식을 굳게 붙잡을 수 없을 때, 딤후 1:13) 그는 어리석은 무식한 질문들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딤후 2:23). 그것은 또한 그가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대적들을 그가 다룸에 있어 필요하고, 반대자들을 권고하고 설득하기 위해 (딛 1:9,11) 필요하며, 그들의 입은 그에 의해 멈춰져야 하며, 많은 서신들에서와 같이 우리는 바울이 한 것을 보며, 논쟁의 박식하고 질서 있는 방식 안에서 그것을 본다. 그리고 이것을 스데반에 했고(행 6), 그것은 그 이야기에서 빈번하다. 정말, 특별한 능숙함에 의한 말과 표현들이 부르짖으며 말해져야 하는[선택되어야 하는], 심지어 연약한 자들에 관련하여 요구된 학식이 있다(사 50:4).
2. 이 학식과 능력(ability)을 획득하는 방식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을 일상적인 매개적 방식에 매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종종 그것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시기 때문이고, 그가 선하게 생각하셨다면, 그 방식으로 그의 교회에 그것을 지속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 주님은 이제 하나님의 진리들을 잘 아는 지식과 사유할 능력 등을 직접적으로 주시지 않으므로, 독서에 의한 연구의 방식과 이들에 대한 지식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 이제, 이 가정 위에서, 또한 아주 필요하다. 왜냐하면 만약 복음의 신비를 아는 것이 필요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정하는, 경험으로 분명하다. 사람들은 이제 이상한 방언(tongue)으로 말할 수 없다. 정말로, 가르침과 배움이 없이 그들 자신의 방언을 읽을 수 없다. 그리고 더 큰 은사인, 예언을 위해 그들이 적합할 것이라고 가정될 수 있는가? 게다가, 주께서 우리에 의해 거짓을 말하도록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두지 않으셨고, 그 명령이 표현되듯이, 우리가 그것을 읽도록 남겨두셨다, 읽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등). 정말로 그는 의도적으로 그의 말씀의 많은 부분을 그처럼 가리셨고, 이 동일한 예언에서 여러 번 암시되듯이, 독자는 그것을 탐구하도록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은사의 교통이 있고, 한 사람에게 알려진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고, 알려져야 하므로(바른 방식으로), 그리고 말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서에 의해, 그가 살아있고 현존하는 사람을 활용할 수 있도록, 대화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신비 안에서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금 소유하거나, 그 앞서 다른 사람들이 소유했던 지식을, 신자나 목회자가 증진시킬 수 없거나 없어야 할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독서에 의해 그것을 획득하는 것보다 어떤 다른 방식이 있는가? 이것은 사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부인될 수 없고, 더욱이 목회자에게 부인될 수 없다. 그리고 공부의 소홀로부터 흘러나오는, 무지, 오류와 혼돈의 많은 슬픈 열매들이 이것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주님에 대한 지식과 권면으로 그들의 자녀들을 양육하도록 부모들이 명령을 받는 것은 무익하지 않고, 그것은 디모데의 교육에 있어 추천되고, 지식을 요구하는 것의 이 방식이 불법이라면, 그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도록 가르침을 받은 서기관의 (주님 자신에 의해 주어진) 그 속성에 의해 확증되고, 그는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고(마 13:52), 거기서 그것은 그가 쌓인 곳간이나 저장물을 소유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그 안에 오랜 시가 교회를 위해 유용했던 옛것과, 새것을 소유했고,그 자신의 수고로움에 의해 그리로 부가된 것을 소유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4. 언어, 과학, 역사 등과 같은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간 학습의 지식과 그것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어떤 사람도 그것들이 없이는 목회자가 될 수 없는 만큼 그렇게, 비록 우리가 그것들을 모든 목회자의 존재를 위하여 본질적이고 아주 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에게 매우 유용하게 생각하고, 덕을 세우는 큰 목적을 위한 바른 종속관계로 사용될 때,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록 주께서 많은 방언의 은사들을 주셨을지라도, 성경은 오직 두 가지 원어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에 정통한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지만 주님은 그것들은 여러 언어들로 번역하기 위하여 방언의 어떤 비상적인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셨고, 이들 언어에 있어 연구의 방식으로 그의 축복에 의해 기술을 습득한 사람들을 사용하셨고, 그것은 그런 연구가 교회를 위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불법적이었다면, 이방인들의 많은 나라들이 결코 그 말씀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래서 결코 교회들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를 위한 그런 수단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그것은 그 분을 불쾌하게 할 수 없고, 그 분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다면, 그 분은 달리 정하실 수 있었고, 이 필요성을 남겨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게다가, 모든 과학의 바른 사용은 (심지어 사람들이 그들의 타락에 의해 가장 남용하는 이것들조차도) 새로운 무기를 구비하는 것에 의하지 않고 (성경은 유일한 검이다), 옛 것을 사람들이 잘 다루게 하는 것에 의해, 덕을 세우는 것을 진보시키는 것에 매우 기여한다. 이것들은 그의 안전을 위해 그의 무기를 다루는 법을 그에게 가르칠 힘을 소유한 자에게 기술과 같이, 그들의 여러 용도들로 모든 지체들을 움직이게 하는 몸을 위한 의술과 같이, 그리고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을 막는 귀나 눈에 어떤 것을 뽑아내는 것과 같이, 사람을 위해 있다. 그처럼 학습은 반듯하게 행동하도록, 그리고 거룩해진 판단의 명령과 지시에 적절하게 그리고 부수적으로 뒤따르게 하기 위하여 영혼, 이성, 그리고 앞서 언급된 은사의 자연적 기능들을 적합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달리, 자연적이고 습관적인 싫증은 그들이 소유한 것을 실행하는 것에서조차 사람들을 매우 무력하게 한다. 이것도 이상하게 생각될 수 없는데, 그것이 그들에게 가르쳐지기까지, 사람들은 어떤 통상의 직업에 능숙하게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된 일들에 관하여 능숙하지 못한 것은, 그러므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여러 경우들에 있어 그가 그것들을 인용하는 것이 분명하듯이, 이교들의 글들이 바울에 의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었고, 그것의 독서가 우리를 해롭게 할 수 있는가? 바질이 사용한 것은 좋은 비유인데(Orat. ad adolescentes), 염색공이 보라색을 더 잘 물들이려고 먼저 천에 일반적인 색을 물들이듯이, 인간의 학습도 신학에 대한 더 유익한 연구를 위하여 사람을 적합하게 하는 것에 유용하다. 마치 이교 철학자들의 원리들이 명백한 성경보다 더 확실하고 더 강한 양, 혹은 마치 성경구절과 주장들을 강하게 혐오하는 양, 사람들로 그것으로 날아가게 하지 않고, 이 학습이 오직 덕을 세우는 것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잘 규제되도록 해야 하고, 우리가 이것들로부터 더 박식한 매개체들(mediums)로부터 진리를 확증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뿐이다. 더욱이 우리는 그것들과 일치하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에 그런 의미를 돌리는 것에 의해, 하나님의 성경보다 그들의 권위 안에서 그것들을 혼동시키는 것을 더 싫어하는 것과 같이, 그들의 원리들과 성경을 조화시키려 하지 않아야 하고, 또한 성경의 명백함과 단순성을 손상하기 위해 그들의 구절을 사용하는 것에 의해 그들의 원리들과 성경을 조화시키려 하지 않아야 하고 (종종 비참하게 눈 먼 스콜라학자들이 하듯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목회자가 그것 때문에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그보다 못한 이들을 경멸할 때, 혹은 그가 자신 안에서나 다른 사람들 안에서 자격을 위해 그것을 충분하다고 여길 때, 혹은 그가 그것을 듣는 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거나 고시를 위하여 사용할 때, 그것은 또한 악용된다. 그것은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게 그리고 유용하지 않게 만드는 천한 학식이다. 영적인 신비로운 진리들을 가장 단순한 듣는 자들에게 가장 명백하고 뚜렷하게 만들 수 있는, 그것이 참으로 박식한 목사이고, 루터가 한 번 pueriliter, trivialiter, populariter, & simplicissime docet(그는 어린아이에게 적합하게, 흔하게, 대중적이게,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가르친다) 그가 가장 유능한 설교자라고 말했다(Melc. Adam. In vit. Lutheri). 학식(혹은 학문)은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사람을 용이하게 하는 것에 이바지하고, 무엇이 확실한지 혹은 불확실한지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에 이바지 한다. 반면에 가장 명백한 성경 혹은 실천적인 일을 많은 의문들, 질문들, 다양한 의미들, 반대들, 그리고 많은 거품이 많은 비교육적인 개념들로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원하는 자들로 그 안에서 그들을 뒤따르는) 스콜라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학문의 큰 남용이고, 그것은 결코 그 안에 종사하게 되는 자들을 결코 유익하게 하지 못했으며, 덕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하는, 학문(학식)의 참된 목적에 반한다. 그리고 종종, 이 의미로 가장 박식한 설교자는 가장 무지한 백성을 가진다. 가장 사변적으로 아는, 그가 가장 박식하고 능숙한 변호사, 스콜라학자, 등이 아니고, 그의 소명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과 같이, 그것을 가장 실천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자가 가장 박식하고 능숙한 변호사, 스콜라학자, 등이다. 그처럼 목회자의 학식에 있어서도 그것은 참되며, 가장 능숙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확신시키며, 혹은 덕을 세울 수 있는 자가, 비록, 아마, 조금 아는 사람일지라도, 가장 박식한 목회자 이다.
Ⅲ. 우리는 또한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이와 같이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는 이제 예로부터 그의 기명들을 나른 자들과 같이 거룩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어떤 사람도 구원하는 은혜가 없이 그리고 그가 참으로 중생되지 않았다면, 목회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앞의 두 가지에 관하여 이것을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앞의 서신에서 말해진 것이 이것에 대비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훈의 필요성에 의해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그 동일한 역할에 있어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능력을 가진 자질이기 때문이다(딛 1:8-9). 그리고 또한 동의에 이르는 방식에 의해, 그것은 많은 측면에서 유용하고 필요하다:
1. 그 자신을 위해: 이것이 없다면, 그는 그의 소명에 대한 혹은 그 안에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한 확신을 소유할 수 없다. 비록 그가 부름을 받을 수 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과 같이 행동할 수 없고, 그처럼 그 측면에서 매우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2. 그 사역을 위해: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과 그의 회의에 있어 참석을 요구하는 그 본성으로부터 존재한다(렘 23:18,22).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 자신의 승인이 없이 그의 말씀을 훔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30절). 그리고 비록 이것들이 어떤 소명에 있어 필수적일지라도, 이것의 본성은 그것 안에 필요한 특별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3. 그것이 없다면, 어려움들이 발생하는 곳에서 특히, 메시지에 그 담대함이 있을 수 없다.
4. 진리의 적용과, 지친 자들에게 특히 말하는 것을 위해, 이것은 필수적이다. 그들이 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사례들을 떠맡을 수 있고, 그들에게 치료제를 적용할 수 있으며, 그들 자신들이 위로를 받은, 그 위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함으로, 그들에게 동정할 수 있는 것이고(고후 1:4), 그것이 하나님이 그의 목회자들을 실험적으로 적합하게 하시는 주된 방식이고, 어떤 측면에 있어 머리이신 분조차도 이와 같이 자격을 부여받으셨다.
이것으로부터, 루터는 이들 셋, tentatio, meditatio, 그리고 oratio(시험(trial), 묵상, 그리고 기도)가 목회자에게 필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을 결여한 자들은 확실히 매우 결함이 있다. 게다가, 그가 열매를 맺는다는 측면에서, 그것이 가장 필요하고, 이것들은 많은 것으로 주님으로부터 종종 복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모든 그들의 학식으로 복을 받지만, 적은 것으로, 이들 두 교회들에 있어 나타나듯, 복을 받고, 목회자의 기도들이 그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듣는 자들에게 대한 영향력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더하여, 그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바울의 실천에 있어 분명하듯이, 그들의 번영을 그의 기도의 응답이자, 그의 설교의 열매로 여겨져야 한다. 중생하지 못한 목회자는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가 현관과 성찬대 사이에 있을 수 있는가? 그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춤이 없이 노력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 측면에서 그는 유익하게 하기에 무능력하게 되어야 하는가? 정말로, 목회의 신뢰를 위하여, 그는 외부에 이들에게조차 좋은 평판으로 있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니면, 그의 말은 많은 무게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거룩함 없이 그런 좋은 평판을 무엇이 얻을 것인가? 위선은 종종 설득력이 없고, 지속되지도 않고, 반면에 평범한 종에 있어서조차 거룩함은 복음을 장식할 것이고, 더욱이 산위에 있는 성읍인 목회자에 있어 더 장식될 것이고, 감춰질 수 없을 것이다(마 5:14).
다시 돌아와, 우리는 거룩함의 이 자격이 목회자에 대한 백성의 부름이나 선택에 있어, 그리고 백성을 위한 한 사람에 대한 장로회의 임직에 있어, 크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만약 그들이 모든 다른 자질들을 존중해야 하지만, 결코 이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매우 결점이 있다. 그리고 비록 거룩함이, 마치 그것이 없다면 그가 그처럼 여겨지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목회자에게 단순하게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합법적으로 인정을 받을 때(말해지듯), 백성이나, 장로회가 그들의 선택이나 입회에 있어, 그것에 대해 어떤 물음도 하지 않거나 혹은 그것을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이, 잘 근거된 사랑 가운데 그 사람에 대한 견해에 어떤 사람을 흔들 어떤 것도 없지만, 좀 더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있는 곳에서, 그 자질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사람을 부르도록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집사라면,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행 6:3,5). 그리고 이 지위는 목회자에 대한 그들의 부름에 있어 사람의 관심에 대한 첫 분명한 증거이므로, 그들의 절차를 위한 이 규칙은 또한 힘이 있어야 한다. 다시 돌아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영혼을 맡겨야 하는 그런 큰 신뢰이므로, 그 자신의 양심을 돌보는 것에 양심적이지 않은 자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노력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가? 이것이 사도의 추론이다(딤전 3:2-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그가 이전의 자질들의 준수를 강조하는 그 추론의 반박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것이 질문의 방식에 의해 제시된다. 그리고 확실하게, 이들 둘은 무게감 있는 추론이 없이 함께 놓이지 않는다: 네 자신에 주의하라, 그리고 양떼와 가르침에 주의하라(행 20:28; 딤전 4:16), 그러나 이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전자를 돌보지 않는 자는 결코 본성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후자, 특히 그 말씀을 돌보지 않을 것이고, 이어지는 것이 생각될 때,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그 자신의 행실에 있어 부주의함은 그 자신의 구원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청중의 구원도 가로막는데, 이 서신에서와 같이, 이들 둘이 통상 결합하여 수행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회자들이 그들 사이에 열매를 맺든 못 맺든 돌보지 않을 때, 백성들이 규례들의 형식만을 소유하기 위해, 이것이 없이 지낼 수 있는가? 또는 유익이 너무 많거나 적은 것에 관심이 없을 때, 이것 없이 지낼 수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어느 편으로든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기대될 수 없고(렘 23:22), 그러므로 그들의 죄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서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주께서, 어떤 자비로운 근거에서도 그 자신을 자녀로 여겨지게 할 수 없는, 그가 그분의 집에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분의 자녀들에게 아래쪽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은혜롭다고 평가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답게 종교의 외적 형식을 이행하거나, 믿음에 있어 건전함을 지킬 것이라는 어떤 확신이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신뢰의 가치가 없는, 그들에게 그처럼 많이 위험을 무릎 쓴 자들이 이들 악에 방조자가 되지 않겠는가?
장로회의 의무에 관련되듯이, 이것에 대하여 고려하는 것은 그것을 더욱 확증할 것이다. 그들은 (누가 부르든지, 혹은 사람의 역할들이 무엇이든지) 거룩함의 이 자질에 대한 존중 없이 목회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나의 의미하는 바는 비상한 방식 안에서의 연구가 사람들의 회심을 알기 위해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나, 무오성이 이것에 있어 기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나, 그런 척도나 단계에 있어 어떤 특별한 증거들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없이 어떤 것도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우리가 말하듯, 단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자들조차도 본성적으로 죄악되고, 은사들이 부패함을 억누르지 못하며, 또한 교화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잘 증진되듯이, 그리고 종종 사람들의 신성모독에 의해 좋은 은사들이 교회에서 해를 많이 끼치므로, 그리고 은혜로운 것으로 가정되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은사들의 바른 향상을 기대할 어떤 근거도 있을 수 없으므로, 시험(trial)이 있어야 한다: 1. 그가 신성 모독적이지 않다는 것과, 어떤 것도 그에게 비난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리고 2. 그를 거룩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과, 그에 대하여 그처럼 평가하기 위하여, 자비를 분별함에 있어 근거를 제시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그가 이후에 입증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들은 그들이 행한 것 안에서 평강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적합한 때와 방식이 의도적으로 이것에 대하여 시험하기 위해 취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하다: 1.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서신들에서 이 한 가지에 관련하여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많은 지침들로부터, 거기서 그들은 이것으로 그들의 절차에 있어 명백하게 제한되어 있다, 그가 거룩해야 하는 것(딤전 3:2, 등; 딛 1:8). 그리고 이 거룩함은 소극적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그는 책망할 것이 없으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등(6,7절), 적극적으로, 그는 좋은 평판을 소유하고,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해야 한다, 이는 그것이 단순하게 소극적인 것들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 그것은 또한 집사들조차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험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고(딤전 3:10, 그것은 목회자는 더욱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 다음으로 그가 책망할 것이 없는 것으로 발견되면(즉, 시험 이후에), 그로 그 직분을 사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다른 자질들에 대해서와 같이, 그렇게 이 자질에 대하여 갖춰야 하는 시험이 있다.
3. 아직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서, 혹은 그가 입증할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써, 이 책임으로부터 초신자(novice)를 그가 배제하는 것에 의해 그것이 드러난다, 6절 (즉, 최근에 믿음으로 인도된 사람). 그리고 그때 초신자들과 (그들은 모두 합당한 신자들이므로) 지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 사이에, 어떤 측면에 있어 우리에게 비례성과 유사성이 있으므로, 이 책무에 인정되어야 하는 고정된 신앙고백에 그가 있었을 것으로 그것은 말한다.
4. 딤전 5:22에 있는 것은,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 등은, 이것을 또한 확증하고, 즉, 그가 자질이 없지 않도록 뿐만 아니라, 그가 무자비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질을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부수된 이유와 같이, 당신이 유죄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반대에 대응하기 위해, 말하자면, 그것은 경솔하게 행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그의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의 죄들은 처음에 모호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가 말하길) 후에 뒤따를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들이 드러나게 되기 전에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딕슨 목사가 그 구절을 해설하는 것과 같이, 그것들을 드러낼 시험과 신중함의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명백한 때 준수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처럼 모호하지 않은 것을 탐구하기 위해, 바울이 그처럼 자주 주장하는, 목회자들의 절차에 있어 이것이 경시되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그것이 집사를 위해서조차 그처럼 필요하다면, 그의 지위가 가장 중요한 관계의 일들에 더 직접적으로 그를 인도하는 목회자를 위하여 그것은 무엇일 것인가? 그리고 사도들이 명했듯이, 그들은 그렇게 실천했다(행 6:3). “너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찾으라, 그들을 우리가 임직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을 임직하지 않을 것임을 다른 사람들에 관련하여 암시한다. 비록 유다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혜안에서 고용되었을지라도, 사도들에 관하여 제안된 자질은 그러하다(행 1); 하지만 그가 그분 자신에게 취하는 것보다 행하도록 그들에게 주어진 다른 규칙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정직함의 가장 좋은 증거를 준 이들 중에 한 사람을 취해야 한다(딤전 1:21-22). 그리고 모든 서신들을 통해 바울이 목회자들을 추천하고 있을 때, 주어진 그들의 성화의 어떤 증거가 항상 있고, 그것에 의해 그는 목회를 위하여 사람들을 추천함에 그 자격 안에 참으로 어떤 무게가 있는지 우리로 알게 하려고 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라 추천해야하는지 우리로 알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목회자들을 이것에 있어 매우 주의하게 만들기 위하여, 또한 말해진 것으로부터 모아질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그 거룩함이 그가 여기서 하듯, 주님에 의해 그들에게 놓인 열린 문을 그들이 기대했을 것 같은, 도구들 안에서 잘 살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해야 한다면, 첫째로, 이것은 교회의 지체들에 대하여 엄격한 시험을 하는 방식과 같아 보이고, 그 자만심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답. 1. 나는 절차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고, 사실에 대하여 말하며 어떤 방식이든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있어 어떤 재판관이나 인물들은 세부적인 사항들에 있어 자신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취할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어떤 확실한 지침에 의해 규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사례에 적합할 것이고 다른 사례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비록 여기서 요청된 입증하는 것과 시험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비슷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모든 지체들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그것은 판결하지 않는다; 아니, 이것에 있는 것처럼, 지체들에 대한 시험을 위한 그런 교훈들이나 실천들은 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처럼 지체들에게 분명하다면, 그것을 바꾸기가 어려울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3. 이것은 교회 지체들에 관한 그 엄격함과 꼼꼼함을 뒤집지만 그것은 그것을 강하게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특별하게 목회자에게 요구된 무언가가 있다면, 그리고 이미 교회의 지체인 사람이 아직 입증되어야 한다면, 만약 그가 목회자가 되기 전에 거룩하다면(그래서 한 사람이 그의 거룩함으로 인해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고, 하지만 목회자, 정말로 집사가 되는 이 자질에 있어 부족한 그의 존재의 측면에서 부적합하다면, 그렇다면 모든 교회 지체에 있어 적극적인 증거를 위해 만들어져야 하는 그런 엄격하고 정확한 탐구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 그것에 어떤 부가가 있을 수 없고, 혹은 더 연장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교회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보다 더, 목회에 입문하는 시험에 있어 어떤 것이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직 이 측면에서 목회자가 되기에 부적합할 수 있는 한 사람이 교회에 보증할 수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차별적으로 모든 지체들에게 이 결론을 확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그들에 대한 이 새로운 시험은 전자를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 모든 심사는 안에 있는 그런 자들에 대하여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은 불가능한 것에 근거한다고 더 이의를 제기한다면.
답변. 의도된 어떤 그러한 것도 없다. 그러나 1. 그것은 모든 교회 지체들에게 필요한 것 이상이다. 2. 그것은 증거와 시험이 필요한 어떤 것이며, 신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시험의 방법을 우리는 남겨둔다. 3. 그런 인물의 상태에 관하여 무오하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임직에 있어 신중하고 잘 근거된 동의함에 있어 사람의 자신의 행동에 관한, 그 양심을 보증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그래서 이후에 도전에 대한 어떤 근거도 없고, 그것은 갑작스럽다고 말하게 될 때, 그의 죄들에 대한 부속물과 죄책으로서 자신을 비난하게 될 때, 이후에 그가 실패하면, 딤전 5:22 등에 그 교훈에 의해 그것이 의도된다.
만약 그것이 더 반대를 받는다면, 입회된 적은 목회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많은 회중들이 황폐했을 것이다. 학식과 경건의 위대한 전형이자 후원자인, Trochrague는, 그가 자신에게 이 반대를 제기할 때, (이 의무에 반대하여 논쟁하는 것은 모든 시대에 일상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존경받아야 하거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회에 있는가, quot, 보다는 오히려 quales & qui, 즉, 그들이 누구인가, 혹은 어떤 자질로 있는가, 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길) 그 지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받아들여졌어야 한다기 보다는, 그들이 항상 더 적었었다는 것이 목회의 이점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길)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쓸모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무능하게 만들고, 그들의 태도에 의해 모든 사람 앞에서 목회를 경멸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회중들이 그들과 같이 심겨지기 보다는 그들을 위해 어떤 섭리가 명령될 수 있도록 여전히 기다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것이 종종 그렇게 발견된다. 많은 탁월한 것들을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소유한다.
우리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거룩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도랑에 빠지는 것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눈먼 인도자나, 그들의 상처를 약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이나(마 14:14; 렘 6:14), 기껏해야 그들에게 길을 지적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과 조금씩 합류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복음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영혼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시는지, 그리고 비록 그들이 그들 자신의 구원을 마음에 두지 있을지라도, 이 목회에 있어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어떤 어려움인지, 그리고 목회자와 그의 양떼 사이에 어떤 타고나고 본성적인 동정심이 요구되는지, 잘 아는, 그리고 (불경건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목회에 의해 영혼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가진) 마귀의 계략들을 잘 아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를 마음에 두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의 양들이 친구에게 맡겨지는 원수에게 맡겨지든, 그분을 사랑한 사람을 위해, 그들이 목회자들을 공급하기 위해 접근하듯 그런 회중들의 영혼을 위해, 그래서 양들을 양육할 것이고(요 21:15), 혹은 그 자신의 것들을 사랑했고 구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본성으로 하듯), 그래서 자신을 양육할 것이고-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극악하게 모욕하는 것이나, 그들을 도랑에 빠트릴 수 있는, 무지하거나 불신적인 인도자에게 그들을 맡기는 것에 있어 가난한 영혼들에 대한 그런 잔혹한 배신에 방조자가 되는 것을 그러한 자들은 무서워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보와, 백성들의 영혼의 교화를 위한, 주된 관심사로 있으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백성을 양육하도록 목회자들을 소유하는 것, 그리고 땅에 대한 그분의 결혼에 부속된 특별한 약속(렘 3:14), 백성과 함께 그분의 거하심의 증거, 그러므로, 백성이든 목회자들이든, 이것에 손을 가진 모든 그런 자들로 주님에 대한 두려움 안에서 부름을 받도록 하자, 그리고 그의 양들의 목자장이신(벧전 5:4), 우리 주 예수님의 오심과 나타나심에 의해, 그들은 이 가장 관련이 있는 일들에 있어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며, 많은 영혼들의 피에 대하여 그 날에 죄책이 없을 것이듯, 그 거룩하지 못한 목회자들은 죄책만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모든 그들의 죄에 있어 그들과 더불어 참여자들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문도 없이, 다른 명령들 사이에서 이 명령은 딤전 6:13,14,21에서 디모데를 위한 그 책임에 내포된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까지 순종되어야 하는, 모든 목회자들의 이름 안에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가 지침을 주는 동안, 이들 서신들 안에서 그것을 살펴볼 만하고, 그는 종종 다른 서신에서보다 더 비난하는데, 이들 명령들은 불공평 없이 행해져야 하고, 그것에 대한 그들의 준수를 위하여 특별하게 목회자들이 인식해야 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정말로, 그 권고는 이 의무에 관련하여 특히 주어진다(딤전 5:21-22), 내가 엄히 명하노니, ,,, 불공평하게 하지 말라: 또한 덧붙여,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 그것은 (칼빈이 지적하듯) 받아들여짐에 있어 사람들이 종종 불공평하게 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이 근거 위에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말하길,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너희는 그들과 더불어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
비록 그 존경하는 앞서 인용된 저자 Mr. Boyd가 모든 면에서 가장 온건할지라도, 목회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있어 너무 자비로운, 몇몇 선한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온건함을 그는 비난하고, 직접적으로 그런 목적을 위하여 영들에 대한 시험에 있어, 교리는, sed & animorum motus, consilia, conatus, 또한 입증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뒷받침할 만한 만족시키는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비록 그것이 수년이 걸렸을지라도, 그것은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는 비록 교회의 덕을 세움에 가장 온화하고, 추수가 매우 큰 때에, 그리고 노동자들은 적을지라도, 겉보기에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자신들을 바친 두 사람을 거절하고, 다른 둘과 같이 겉으로 행하지 않는 한 사람을 권하시는, 우리 주님의 실천을 인용한다(눅 9:57). 그 모든 일에서, 그리고 더욱 더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탁월하게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에 가장 중대한 관심사의 일에 있어서와 같이 자신을 확대한다. 그의 유명한 선생도, 신학자 Mr. Rollock, 이것을 가장 애처롭게 강조하고, 특히 주님의 마지막 설교와 엄숙한 기도에 대한 그의 강의들에서 강조한다(요 17; 강의 23).
비록 이것이 사실이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기를 우리는 바랄지라도, 그것이 극단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아마도 더 구체적으로 말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성급하게 안수하지 말라”, 그 교훈의 힘에 의해, 목회자의 성화에 대한 이 시험에 있어 얼마나 오래 걸릴 수 있으며, 혹은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둘째로, 사적인 지체들에 대한 시험에서 추구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이 이 경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떠나기 전에, 이것들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첫 번째 것에 대해, 우리는 말한다: 1. 그 교훈의 힘에 의해, 기대되거나 가장되는 어떤 무오성도 없는데, 가능한 그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은혜로운 상태에 대한 그런 판단이나 결정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증상과 증거들을 주님은 그의 말씀에서 주시지 않는다: 또는 마치 사람의 임직의 유효성이 동일한 것에 의존하는 양, 그것이 요구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임직은 어떤 성화가 없는 곳에, 앞서 말했듯이, 유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난 그것은 성급함과 조급함에 반대되는 그런 시험과 시험기간이고, 비록 그 사람이 이후에 합당하게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이 일에 관하여 행하려는 이들에게 평온함의 근거를 줄 수 있다. 그들의 평안의 근거가 일의 실제성이나 진리가 아니고, 비록 혹시 그들이 성실하지 않을지라도, 시험 후에 실제로 그렇다고 발견되는, 그런 것과 그런 증거들의 실제성이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소극적인 증거들 혹은 소극적인 지식, 즉, 우리 자신들이 그 사람의 어떤 악도 알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유사한 그러한 것이, 이 교훈에 따라 임직으로 나아감에 있어 우리를 책임에서 면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 맡겨져야 하는 자 안에서 요구된 자질들인, 좋은 평판, 거룩하고, 신실한, 등으로 그가 여겨지게 되도록 근거를 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성경은 이 경우에 요구되어야 하는 적극적인 그런 자질들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소극적인 것들이 충분하다면 쓸모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개인적인 지체 안에서 적어도 요구된 소극적인 거룩함이 있다; 하지만 직분자 안에서 요구되어야 하는 것은 더 분명하다; 정말로, 심지어 집사조차 일상적인 지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특별한 자질들이 없이는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다른 말들 중에, 암브로스는 이 입장에 대해 말한다, non enim sufficit si sine crimine sit, quia merita eius debent praeire bonorum operum ut dignus sit ad ordinationem(그가 단순히 범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의 선행의 공로들이 특출해야 하고 그래서 그가 임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인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고, 요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비록 그것이 사람의 상태를 틀림없이 확신시키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그 문제에 성급하고 갑작스런 진행에 대한 도전들에 대하여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것에 있어 이들 세 가지로 이끌릴 수 있을 것이다: (1) 말씀 안에서 주어진 외적인 소극적인 것들에 대한 탐구가 있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지식이 탐구에 의해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2) 사람의 길과 행로에 대한 얼마간의 관찰이 있을 수 있고, 그 어떤 발견으로부터 그런 의무들에 있어 사람의 차분함, 단일함, 그리고 영성이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3) 다양한 경우와 상황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 그런 양자의 사람들이 더 부드러운 사람과 다른 사람들에 관련하여 그의 태도를 살피는 것에 의해, 이들 의무들에 있어 그처럼 자질이 구비된 사람의 보편성으로부터 획득된 어떤 발견이 있을 수 있다. 적어도 앞서 말한 취지에 필요한 만큼, 이것들이 달성 가능하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그리고 확실하게, 가능하게 달성될 수 있는 한 (달리 사람은 그의 의무에서 충분하게 면제되었다고 생각될 수 없다), 부언된 이유가 확증하듯이, 특히 어떤 사람들의 선행이나 악이 미리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 있어, 그 교훈은 이것에 있어 근거와 시험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해지듯, 이것들이 달성 가능할 때, 그것들이 조사되어야 한다는 것이 뒤따른다. 신중하고 박식한 Mr. Wood는 Mr. Lockier에 반대하여 그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판단할 역량이 있는 한) 소극적으로 은혜롭다고 보증할 수 있게 판단될 수 있는, 신앙에 있어 어느 정도 더 탁월한 외적 행위들과 행동들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이것이 어떻게 이들 말에서 획득외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사람의 고백(profession)에 있어 영적인 성실함의 필수적인 어떤 겉모습이 있고, 즉, 그는 영적인 원리로부터, 영적인 동기들에 의해, 그리고 영적인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더 이상의 것이 없는 단순하고, 냉정하고, 조소하지 않으며, 진지한 고백은 영적인 초자연적인 성실함의 적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경험도 이것을 입증한다.
4. 우리는 이 교훈에 있어, 이들 적극적인 증거들이 곧 신뢰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진지하게 그리고 부지런하게 그것들에 대한 실제성을 조사해야 하는데, 그가 그렇고 그런 자질을 구비하게 되었다고 결론을 지음에 있어 자신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이 그 교훈의 큰 취지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것, 내가 제안하는, 목회자는 경건에 관련하여 탁월하게 자질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부인되지 않을 것이다. 실책은 보통 적용에 있으며, 그것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목회자가 되도록 의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가 없이 사람을 거룩하게 여기고, 그것에 근거하여 갑작스럽게 진행하는 것이다. 사도의 취지는, 그러므로, 주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사람의 적합성에 대한 그런 생각이 갑자기 그리고 시험이 없이 받아들여지고 고려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개별적인 증거들이 주장되지 않을지라도, 일반적인 시험이, 진지하게 그리고 행해진 신중함을 가지고, 그 자체의 행동에 관련하여 마음을 평온하게 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험하고 또 시험하는 명령을 암시하듯이, 크리소스톰, Theophylact,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이해된다.
목회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사람에게 정당하게 요구될 수 있는 이들 적극적인 증거들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답. 비록 비례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롭게 되는 것을 무엇이 증거할 수 있는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이 필수적인 한) 그것이 여기 있을지라도, 비록 기록된 어떤 일반적인 것들이 있을지라도-거룩한 것, 성령으로 충만한 것과 같이 많은 개별적인 것들을 포함하는(행 6), 행 1:21,22와 그런 유사한 구절에서 신앙에 있어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신실함과 확고함에 대한 좋은 근거를 제시했다-하지만 이것들 외에, 성경은 이것에 대한 발견을 위해 몇 가지 특별한 특징들을 제시한다.
첫째, 그는 그 자신의 집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하고(딤전 3:4,5), 이는 사람이 이전에 어떤 사적인 지위에 있었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실함과 유익함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가 부모에게 아들의 의무, 그의 공부에 있어 학생의 의무, 다른 사람들과 그의 사적인 행실에 있어 사적인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어떻게 행했는지, 또는 그 자신이 가정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혹은 덕을 세우는 일에 있어 그가 더 가까운 접근을 했던 다른 장소들에 있어, 그리고 그런 유사한 곳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살펴져야 한다. 이 하나의 특징이 시험을 받게 된다: 1. 그의 지위에 따라 교화를 노력함에 있어 사람의 열정과 성실함에 대하여. 2. 그가 접할 수 있는 것을 다루는 것과 질서있게 하는 것에 있어 그의 분별력에 대하여. 3. 하나님의 집안에서 가르치기 위한 그의 적합성에 대하여서 뿐만 아니라 통치하기 위한 그의 적합성에 대하여 말하는, 그 구절에 대한 특별한 준수가 나아갈, 그리스도의 규례들에 백성들을 친절한 복종 가운데 얼마나 가능하게 유지할 수 있는지, 그의 권위에 대하여. 교회가 비록 항상 젊고 가족이 없는 사람을 부르는 것에 제한되지 않아야 할지라도, 그가 사적인 공부를 마친 후 어느 때 사람의 생활에 의해, 그가 목회에 임하기 전에, 혹은 통치할 가족을 가졌을 때, 이 자질의 측면에서 부름을 받은 목회자를 확신 있게 분별하기 위한 더 많은 접근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가 추론하듯,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
둘째, 그는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받을 수 있는 이 표지들에 따라 시험을 받아야 하는데, 조심성이 있고, 신중하며 (그의 전체 태도에 있어 절도(sobriety)를 기대하는), 책망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그네를 대접하여 선행 가운데 있는, 탐욕스럽지 않고, 인내하는, 등이 그러한 것이다(딤전 3:3; 딛 1:7-8). 그 자질들 안에서, 사람들의 실천이 어떠한지 시험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질병이나 연약함들이 무엇인지; 그들의 본성적인 성향과 기질들,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이 무엇인지 시험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이것들이 완고하다면, 반대의 은혜들의 증거들에 의해 그들이 복종하게 될 소망이 없다면, 나아갈 어떤 확신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온유하고, 온순하며, 어떤 다투는 사람도 아니어야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하는 사람이고(딤전 3:7), 그것은 그의 행실의 빛나는 탁월함을 내포하며, 악한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있고, 그로부터 진지함과 성실함은 가벼움과 미지근함이 그들에 의해서조차 혐오를 받을 때 증거를 얻을 것이다.
넷째, 그는 선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이어야 한다(딛 1:8).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신자의 표지이고, 여기서 목회로 부름을 받을 사람이 시험을 받아야 하는 특징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 그들의 평가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되고 증명되는 그들을 위한 그런 사랑이고, 그러한 자들을 위한 그들의 본성적 유대가 더욱 있을 수 있을 지라도, 그 측면에서 그들이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하여 있다. 이 특징은 먼저 다른 사람들 외에 선한 사람들을 분별하는 그들 속에 능력을 가정한다. 그리고 둘째로, 그들을 그러한 자들에 대하여 사랑하고 평가하게 만드는, 내적인 원리가, 그들이 실제로 있는, 자신들 안에서 양자를 칭찬할만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떤 방식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정당하게 관찰될 수 있고, 무게가 주어질 수 있고, 그것들이 결여되어 있을 때, 진행하는 것은 더 큰 저항과 비참여로 있을 수 있고, 정말로, 있어야 한다.
다섯 번째 증거는 그가 어떤 초심자(새로 입교한 자)도 아니라는 것이고(딤전 3:6), 그것은 그가 경건의 고백 가운데 어떤 안정된 입지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적어도 그를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그의 교육에 있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었고, 혹시 목회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떤 공정한 외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면, 하지만, 신앙의 실천에 관하여, 그가 단지 초심자일 수 있을 때,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서 은혜의 역사의 번성함이나, 그의 손에서 목회의 사역의 번성함을 기대하는 것에 대한 이성적인 사랑을 발견할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할 때, 그것은 좋게 있을 수 없다.
외적인 증거들이 발견될 때, 그때 목회자들은 앞서 인용된 이들 두 탁월한 신학자들의 말에 의해 드러나듯, 그들의 목적의 성실함, 그들의 행실의 영적임, 그리고 유사한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 어떤 것이 모아질 수 있다면 알기 위해 모든 것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행위나 두 행위로, 혹은 한두 달 안에 분별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그에 관하여 자신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의 그런 길의 차분함(equableness)을 시간을 들여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비록 각 목회자가 그 자신의 개인적 친분에 의해, 각 사람의 받아들임에 관련하여 잘 근거된 지식에 이를 수 있는 것 같지 않을지라도, 그런 경우에 분별할 수 있고, 철저하게 굳건한 근거에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 때, 앞선 특징들에 따라, 확신 있게 그런 사람의 선한 행동들과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그러한 자들의 증거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는, 주어졌을 때, 무게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친분 가운데 있는 그러한 자들을 추천하곤 했다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런 천거들은 결코 무게를 결여하지 않았다.
오직 이것에 관하여, 우리는 추천과 증거들이 교회의 선이나 악에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이것이 과도하게 착수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경고는 반드시 준수되었다: 1. 사람들이 어떤 사람 안에 있는 이런저런 자질들을 적극적으로 입증할 때, 그들은 그러한 것들이 참되고 그들의 지식에 일치한다는 것을 그들 자신의 양심 안에서 만족의 근거로 삼았을 것이라는 점. 2. 이 증거가 지식에 근거되었듯이, 입증된 내용은 무게가 있었을 것이고, 참된 그러한 자들은 은혜의 역사의 어떤 선한 시작이나 모습을 증거한다. 바울의 서신들을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주어진 많은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들 두 가지를 소유하는 그들을 발견할 것이다: 1. 입증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영혼의 덕을 세우는 것에 대한, 그리고 유사한 그런 것들에 대한 사랑을 소유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제로 그들을 칭찬하는 중요한 일이다. 2. 그것은 지식에 근거한다; 정말, 종종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증거들로부터,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 성도들에게 분배하는 것, 그들이 고용된 것에 수고로움과 부지런함과 같은 그러한 것들로부터 근거한다. 반면에, 증거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 그것의 가슴속에 충분하게 이들 특징들을 낳은, 증거가 충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누가 입증하는 자가 되든지, 그들에 대한 어떤 근거일 수 없고, 아마도 그것은 사도의 말 안에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무례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존경은 증거하는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3. 그들이 그것을 제시하는 근거에 대해, 즉, 그것이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입증하는 그들 자신의 확실한 지식으로 있는지, 혹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알림에 근거하는지, 그리고 그런 유사한 생각에 근거하는지. 그 점에서 신실한 장로회들은 자신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열정과 분별력을 활용할 것이고, 그래서 그것들을 상세하게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이제 두 번째에 관하여, 지체들에 관련해서보다, 목회자들에 관련하여 이와 같이 더 요구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묻는다면, 그리고 후자가 전자를 추론하기 위해 제시된 근거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답한다. 목회자들에 관련하여 이 조사는 명령되고, 전자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반대자가, 내가 가정하길, 목회자들에 관하여 이 시험을 위해 제시되어왔던 것과 같이, 교회의 지체들의 시험을 위해 그런 교훈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정확한 시험이 없이 교회의 지체들을 받아들임에 관하여 이 진리의 그 위대한 옹호자가 이 반대에 답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Mr. Lockyer’s 작은 돌에 대한 그의 심사와 논박에서 박식한 Mr. Wood를 나는 의미한다. Mr. Lockyer는 동일한 반대를 했고, 그는 이와 같이 답한다.
Mr. Lockyer가 여기서 교회에 직분들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련하여 가져오는 모든 것은 가까이 있는 그 요점에 엉성하고 무례하게 진술된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모든 방식의 경건한 행동의 증거들을 제시하는 그런 사람들 외에 그런 직분에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 딤전 3을 위한 명확하고 완전한 규칙을 가졌다. 그리고 손들은 이것들에 대한 앞서는 시험과 증거 없이 어떤 사람에게 안수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 안에서 그런 자질들을 요구하는 그런 규칙을, 그리고 앞서 그들에 대한 그런 시험을, 그리고 보이는 교회의 교제로, 그리고 목사의 돌봄과 말씀의 사역 아래 있도록 그들을 받아들임에 관련하여 모든 성경에서 하나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어디서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까? 만일 그가 교훈이나 승인된 실천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곧 복종하고 이 논쟁을 끝내야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는 할 수 없고, 또는 결코 보여줄 수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을 직분의 자리들에 받아들이는 것, 보이는 교회의 단체로 사람들을 받아들임에 관련하여 교회에 이미 있는, 사람들을 시험함에 있어 사용되곤 하는 주의와 면밀함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지금까지, 그는 설득력 있게 당면한 요점에 대해 말했다. 노바티안과 도나티스트에 대항하여 말했고 행동했던, 옛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은, 이것에 있어 가장 긴박하고 단호했다는 것, 즉, 어떤 흠을 가진 사람도, 키프리안과 어거스틴의 저작들에서 분명하듯, 거룩한 일들에 있어 목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더 나은 만족을 위해, 우리가 말하길, 이 차이에 대한 명백한 이유들을 결여하지 않는다.
1. 지체가 받아들여질 때, 그는 그리스도의 집이나 학교에서 훈련을 받도록 받아들여지며, 그러므로 그가 그 자신이 가르치기 쉽고 규례들에 자신을 복종시킨다고 고백하면, 그가 배우기 전에 그가 정확하게 되거나 정확할 수 있다고 기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고유하게 기독교가 가르쳐지는 것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되는 것은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와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교사가 되기 위하여 들어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그에 대하여 요구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규례들 아래 어떤 고려할 만한 시간 동안,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학자가 되었어야 하고, 더욱 정당하게 그로부터 기대되고 요구될 수 있다.
2. 신앙고백자가 교회나 세례에 들어가길 진지하게 바라는 때, 그는 그리스도의 보증에 따라 그리로 호칭이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의해 그것을 행하고, 그 점에서 교회 법원(judicatory)은 정의 가운데, 그리고 합법적으로 그의 호칭과 권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런 권리를 소유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들은, 어떤 고려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그를 거절할 수 없다. 그러나 목회를 위하여 사람을 시험함에 있어, 주장될 수 있는 어떤 그런 호칭과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1. 이것은 성도나 신앙고백자로서, 그가 성례를 행할 수 있듯이, 그가 언약의 힘이나 그리스도의 제정에 의해 주장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의 개별적인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위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이것들에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2. 비록 그가 정직할지라도, 개별적인 사람은 목회에 제한될 수 있고, 해를 입지 않을 것인데, 그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있어 교회 직분자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반적인 근거에 따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닐 때, 사람은 금지되고 이런저런 특별한 책무로, 적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고, 그에게 속한 어떤 정당한 호칭에 대하여 해를 끼치는 것이 없이, 그런 경우에 요청되는 것과 같이 적절히 그 사람이 자질을 구비하게 된다면, 세례에 있어 그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지체를 받아들이는 것에 반하여 결정함에 있어, 그가 회원자격에 호칭을 주는 것을 소유했는지, 질문이 이어진다. 그러나 개별적인 목회로 사람의 받아들임에 관한 결정을 함에 있어, 교회 지체로서 그에게 속한 자질 외에, 그런 사람이 안내자가 되도록 받아들여지는 교회를 위해 덕을 세우는 것, 교회를 위해 적당한지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권리가 자리를 갖는, 다른 곳보다, 이것을 결정함에 있어 그리스도인의 분별과 숙고에 대하여 더 요구된다.
3. 마지막으로, 이 차이점이 관찰될 수 있는데, 첫 번째 것, 즉, 사람의 권리를 결정함에 있어, 교회 직분자들은 재판에 의해 진지한 신앙고백자처럼 보이는, 그의 호칭 안에서 제시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결정해야 하고, 사람들이 비록 오직 그의 성실함에 대한 소극적인 지식을 소유할지라도, 그는 거절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목회자에게 인정될 수 없고, 명확성과 적극적인 만족의 결여는 사람을 목회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위한 적극적인 결정을 막기에 충분하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어떤 법인이나 성읍에서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하여 그들의 충분한 직함과 권리의 힘에 의해 그것의 시민들이 되기를 주장한다고 가정하면. 이 경우에 판사들은 그들이 이들 호칭을 입증하거나 못하는 대로, 엄격하게 법에 따라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동일한 것에 권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알려진다면, 그들에게 그 특권을 거절하는 것은 불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법인이나 성읍이 모든 시민들중에서 어떤 사람은 통치하도록, 어떤 사람은 재무관이 되도록, 혹은 유사한 것들로 선택해야 한다면, 그 경우는 매우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사람들이 여기서 어떤 사람의 개별적인 특권이 무엇인지 결정하지 않고, 전체 몸을 위하여 무엇이 선하고 편리한지를 결정하기 때문이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어떤 선입견 없이 간과될 수 있고, 그것은 첫 번째에 있을 수 없다. 이 마지막 선택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사법상 무엇이 어떤 사람의 적합성으로 만들어지는가 보다는, 그들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그들의 태도에 대한 사적인 과정에 있어 그들과의 친분에 의해, 그들의 자질과 적합성에 관하여 그들은 만족하게 되고, 양자는 지체들의 받아들임과 그것이 다르듯, 목회자들의 받아들임의 경우에 잘 일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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