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星主公(성주공) 仁旦(인단)
一名(일명) 仁朝(인조), 何朝(하조), 고려 말기의 무인
中始祖(중시조) 星主公(성주공) 諱(휘) 末老(말로)의 10世孫(세손)이고 성주공 諱(휘) 福壽(복수)의 큰 아들로서 星主(성주)작을 물려받았으며 성품이 慷慨(강개)하고 문무재략이 뛰어났다.
1276년(忠烈王 : 충열왕 2년, 丙子년)에 元(원)은 다루가치 총관부를 軍民營府(군민영부)로 고치면서 탐라를 按撫(안무)키 위해 (공을) 總管(총관)으로 삼았다.
元(원)은 1274年(元宗(원종) 15년, 甲戌(갑술)년)에 제1차 일본 정벌에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281년(충렬왕 7년, 辛巳(신사)년)에 또 다시 일본을 징벌코자 고려에 전투용 함선 九百(900백)척과 무기 및 군수물자를 준비토록 강요하였다.
고려 忠烈王(충열왕)은 탐라로 하여금 함선 一白(일백)척과 거기에 따르는 물자를 마련하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공이 그 중책을 맡아 처리하였다.
그 해 五月(5월)에 元(원)은 여몽 연합군으로 第二次(제2차) 日本(일본) 征伐(정벌)에 나섰다. 때 마침 심한 季節風(계절풍)인 颱風(태풍)으로 失敗(실패)하고 말았으나 元(원)은 일본의 反擊(반격)에 대비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1284년(忠烈王 : 충열왕 10년, 甲申(갑신)년)에 고려왕은 함선과 군수물자를 마련한 공의 공로를 치하하고, 金牌(금패)를 하사하고 明威將軍按撫使事(명위장군안무사사)를 除授(제수)하였다.
그 후 1292년에 공을 탐라 指揮使(지휘사)로 特命(특명)하였고, 이어서 元(원)의 牧畜場(목축장)을 탐라에 설치하여 總管行署事(총관행서사)로 推戴(추대)하였다.
그 동안 고려는 元(원)에 사신을 보내 여러 차례 탐라를 돌려 줄 것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회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 무렵 성주인 공이 원나라에 명마 四百(400)필을 조공하고 또한 고려 충렬왕이 元帝(원제)에게 탐라의 환속 등 四事(사사)를 청하니, 1284년 5월에 탐라는 몽고군이 철수하고 고려에 還屬(환속)하게 되었다.
그 해 11月에 忠烈王(충열왕)은 탐라가 환속된 것을 기뻐하여 ‘탐라, 이제 우리에게 환속되었기에 이것들을 내리노라. 그러나 말을 元(원)에 진상하는 것을 그치지 말라.’ 하며, 성주인 공과 왕자 文昌祐(문창우)에게 그간의 공로를 치하하고 紅鞓(홍정 : 붉은 가죽 띠), 牙笏(아홀 : 상아 홀), 帽蓋(모개 : 모자 덮개), 靴(화 : 가죽 신발) 등을 하사하였다.
공은 고씨 星主公(성주공)의 派組(파조)가 되어 후손 들이 제주, 서울, 일본 등지에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공은 星主(성주)爵을 아우인 守佐(수좌)에게 전하였으나, 그에게 後繼者(후계자)가 없어 다시 公(공)의 아들 碩(석)에게 물려주었다.
王子爵(왕자작)은 文昌祐(문창우)는 南平(남평) 文氏(문씨) 시조의 23世孫(세손)이고 그의 어머니가 21세 高卓(고탁)의 따님이니, 文昌祐(문창우)는 耽羅高氏(탐라고씨)의 사위이고 外孫(외손)이다. 이로 인하여 고려 원종 11년에(庚午(경오), 1272년)에 星主(성주) 高仁旦(고인단)의 제청으로 王子爵(왕자작)을 文氏(문씨)가 襲爵(습작)하였다.
王子爵(왕자작)은 신라 때 高乙羅(고을나) 15世孫(세손) 高淸(고청)이 신라에 입조하여 받은 爵位(작위)인데 대대로 후손이 계승하여 오다가 高淸(고청)으로부터 38-9세 후손인 高卓(고탁)이 별세하자 無後(무후)함으로 사위 文昌祐(문창우)에게 王子爵(왕자작)을 습작하게 한 것이다.
원종 11년에 문씨가 받은 王子爵(왕자작)을 대대로 계승하여 오다가 李朝(이조) 太祖(태조) 2년(1402년)에 작위를 반환하고 右都知管(우도지관)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