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9코스 (방광∼원촌)
▣ 일시: 2025.5.10 (토)
▣ 코스: 방광∼대전리석불∼남악사지∼난동∼구리재∼탑동 보호수∼원효교∼원촌
▣ 도상거리: 16.44km(약 4km는 버스로 이동), ▣ 소요 시간: 4시간 16분
방광에서 산동까지, 5월의 빗길을 따라
이원근
오늘은 소원바위가 있는 참새미골 방광마을에서 시작해 구례군 산동면 원촌리까지 이어지는 지리산둘레길 19구간 13km 남짓 되는 길이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기상청 강우 레이더 영상을 보니 지리산 삼도 경계 부근에서 강우대가 멈추어 있다. 아무래도 종일 비가 오락가락할 것 같다.
그래서 비 맞는 거리를 줄이기 위해 지리산스카이런에서 지초봉으로 모노레일을 타기로 했다. 그러나 편도 표는 팔지도 않고 왕복 표를 끊던지, 아니면 집라인 표까지 끊어야 한단다. 하는 수 없이 거기서부터 걷기로 했다. 모두 4km를 손해 봤다고 농담하면서 걷기에 나셨다.
때문에, 비로자나불 수인을 한 대전리 석불입상을 보지 못해 아쉽게 되었으나 지리산국립공원을 이웃하며 이어지는 임도와 옛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는 이 길은, 초록이 한창 짙어지는 5월 초순, 신록의 물결 속을 걷는 축복과도 같은 길이었다.
버스로 방광마을을 출발해 찻길 따라 스카이런 매표소로 이어지는 도로 양옆의 감밭은 수천 그루는 되어 보였다. 초록 잎이 뻗어 나오는 감나무 가지 사이로 햇빛이 반짝인다. 5월의 감밭은 수확의 풍요로움보다 성장의 의지로 가득한 공간이다. 감밭의 감나무에도 감꽃이 어렴풋이 맺히기 시작한다. 계절은 분명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리산스카이런 모노레일을 포기하고 당동마을 남악사 갈림길에서 갈등하다가 지초봉 오를 욕심으로 난약사 들리기를 포기했다. 당동은 고려 태조 왕건의 건국을 기념하며 세워진 남악사가 있던 곳. 남악사의 제례는 조선시대 내내 지리산의 영험한 기운을 빌어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던 큰 의식이었다고 한다. 특히 가뭄이나 전염병 같은 재앙 앞에서 지리산 신에게 제사를 올려 백성의 안녕을 빌었다니, 산이 단순한 자연을 넘어 살아 있는 존재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이 길을 걷는 나 역시, 발 아래 땅과 마주하며 기도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
난동마을의 난약사는 난초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당산이 있다. 마을 입구의 할배당산나무는 외부의 액운을 막고, 마을 안쪽의 할매당산나무는 마을의 복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는다. 액과 복의 흐름을 가늠하며 나무를 신처럼 여긴 이들의 마음이 고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을을 지키는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이렇게 자리를 지킨 나무와 바람과 기억이 아닐까?
이윽고 길은 구불구불 구링이(구렁이, 뱀)처럼 휘감기며 구리재로 향한다. 숨이 차오르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땀을 훔치며 길을 오르면 어느새 고갯마루에 닿는다. 능선 너머로 탁 트인 구례 분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5월 초순, 논마다 물이 찬 들판은 하늘빛을 담아 거울처럼 반짝이고, 곳곳에 피어나는 들꽃은 바람 따라 몸을 흔든다. 이 장면을 마주한 순간, 가슴속에서‘살아 있다’는 감각이 맑게 솟구쳤다.
구리재 바로 위 지초봉이 지척이다. 지초봉은 예전에는 할미성이라 불렸단다. 서복(혹 서불)이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으러 왔다던 전설이 전해지는 봉우리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지초봉에 올라섰지만, 반야봉과 노고단에서 뻗은 능선, 종석대의 간미봉, 만복대에서 내려온 견두산 줄기들이 사방으로 펼쳐저야 하는 데 운무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능선들 사이로 사람 살고, 논 갈고, 삶이 이어지는 구례의 들판은 어렴풋이 보인다. 수많은 사람의 세월이 저 능선과 들판 사이에 깃들어 있을 게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그 시간의 일부일 테고.
구리재에서 임도를 따라 또 구불구불 내려서니 구례수목원이다. 수목원을 한 바퀴 돌아 계곡 옆 오솔길로 이어진다. 물소리를 벗 삼아 굽이도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서시천을 건너 효동마을 왼편, 산동면 사무소 앞에 이르렀다. 오늘 하루가 길었던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너무도 짧은 여정이었다.
오늘의 길은 단지 13km가 아니었다. 지나온 마을, 만난 사람들의 기억, 산과 물과 바람의 이야기까지 더해진, 한 편의 깊은 서사였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 위에서 나는 또 한 걸음, 나 자신에게 다가선다. 5월 초순, 지리산은 그런 시간과 공간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첫댓글 ㅡ 박낙원
"5월 감나무 밭은 성장...."
지팡이는 없어도 우산을 던 둘레길 글을 나는 누워서 읽었네.
5월 6일 늦게 고향 와서 고구마 심어로 갔지만 하늘이 이런저런 이유로 내린 비로, 해남에서 여기까지 시집온 고구마 순들은 잔칫날 기다리다 어떻여석은 고개를 푹 숙였고, 비가 잠시 대통령 후보 연설 동원 간틈을 봐서 겨우 양력 열나흘부터 강행해서 보름에 시집보냈소. ㅎ ㅎ
어제 고향집에서 울산 왔어 늦게까지 이불 안고 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