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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일 - 2006년 1월 18일(수) 17:50분
터어키의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
(그리스와 터어키는 같은 시간대를 사용 함)
안타트루크 공항<안타 ; 아버지, 트루크 ; 민족 이름>
한식으로 식사 후 호텔로 향하는데 교통 체증이 정말로 장난이 아니다.
끼어들기, 차선 안 지키는 것은 보통이며 경적 소리와 급정거 등등....
(다음날 아침에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1시간 10분을 소비 했다.)
@ 22:30분 별5개인 프린스 호텔에 도착하니 호텔 입구에서도 검문검색을
한다. (가격은 하루에 35만원 이라고 적혀 있는데...)
상당히 불쾌하다.
이유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친미로 돌아서 이슬람권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테러 대비로 ......
호텔은 겉은 좋으나 속은 엉망이다. 문고리가 부서지고, 난방도 안 되고,
전등도 없고, 더운 물이 나왔다가 조금 있으면 찬물이다....
제 3 부 터 어 키
# 제 7 일 2006년 1월 19일 (목)
@ 07:00분 기상 ; 비와 눈이 섞여서 내렸다. 아침 식사 후
09:00분에 관광을 시작 함
우선 터어키에 대해 소개를 하면
수도 ; 앙카라
종교 ; 이슬람교
언어 ; 터어키 어 (우랄 알타이어)
면적 ; 779,452 제곱Km (한반도의 3.5배)
전압 ; 220V
인구 ; 약 8천만명
토산품 ; 카페트, 향료, 양가죽
통화: 통화 단위는 터키 리라(Turkish Lira)이다. -달러가 통한다.
지폐: 5만, 1십만, 2십5만, 5십만, 1백만, 5백만 리라
주화: 1천, 2천5백, 5천, 1만, 2만5천, 5만 리라
환전: 인플레이션이 매우 심하여 달러 당 환율 변동이 크다. 장기간 여행할
경우 한번에 많은 돈을 환전하기보다는 매일 또는 2,3일에 필요한
금액을 환전하는 것이 유리하다.
은행마다 환율이 다르기 때문에 잘 비교해 보고 환전하는 것이 유리.
은행보다는 환전소(도비즈 doviz)의 환율이 더 좋은 편이며 환전
커미션을 받지 않는 곳이 많다.
환전소는 휴일에도 문을 열며 주요 관광지에는 대부분 있다.
환전 영수증은 출국할 때까지 보관하는 것이 좋다.
터키화를 외화로 다시 환전하거나 값비싼 물건을 갖고 출국할 때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
터키에서는 달러보다 유로화나 독일 마르크화를 선호하는 곳도 많다.
은행 영업시간: 월~금요일 08:30~12:00, 13:30~17:00
환율 (2003년 7월 현재): 1 USD = 1,450,000 TL
시차 ;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 이스탄불(Istanbul)
이스탄불(Istanbul)은 터키 최대의 도시로 면적은 535㎢, 인구는 약 761만 6000명(1994)이다.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이며,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Byzatium) 이라고 하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사적이 분포해 있다.
보스포루스해협․골든혼(Golden Horn)․마르마라해(海)에 의하여 베욜루․이스탄불(파티프)․위스퀴다르의 3지구로 대와는 골든혼의 갈라타교와 아타튀르크교로 연결되어 있다.
베욜루 남부의 갈라타 지구는 중세에 제노바나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있었던 곳이며, 부두에는 국내외의 배들이 모이고 아시아쪽의 하이달파샤역(驛)으로 떠나는 페리보트도 이곳을 기점으로 삼았다.
금융․무역의 중심지로서 오스만은행을 비롯하여 국립은행․외국은행이 많다. 베욜루 동부는 택시광장을 중심으로 일류 호텔․레스토랑․극장․대상점 및 각국의 영사관이 늘어서 있다.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옛날의 이스탄불이 자리잡았던 전통 있는 지구로,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둔 아시아쪽의 위스퀴다르는 전형적인 터키 양식의 도시로 많은 이슬람교 사원이 있으나 지금은 신흥주택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유럽 쪽과는 페리보트가 왕래한다.
세리미에 병영(兵營)과 나이팅게일 병원이 있으며 남부에는 바그다드 철도의 시발역인 하이다르파샤역이 있다.
터키 최대의 공업도시이기도 한 이스탄불은 섬유․식품가공․농기구․고무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군수공업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이스탄불항은 전국 수입액의 70%, 수출액의 20%를 취급한다.
이스탄불은 아주 독특하다. 다른 어느 곳도 역사 속에서 그런 굉장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거대한 대륙이 만나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이스탄불은 군사,종교,상업, 문화적으로 세계 역사의 초점이 되어 왔다.
기원전 600년 명성을 날리던 메가리아인인 비자스에 의해 창건되어, 그의 이름을 딴 비잔티움은 보스포러스 해엽을 관장하는 훌륭한 자연 항이다.
서기 330년에 로마의 유명한 콘스탄틴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틴의 도시'라는 뜻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아마도 콘스탄틴 대제는 이곳에서 편안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처럼 이 도시도 7개의 언덕 위에 건설 되었기 때문이다.
4년 후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고 그자신이 서기 337년에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콘스탄티노플은 융성했고 서기 395년의 로마제국의 분열로 인해 동로마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13세기 십자군 원정 무렵인 1240년경 비잔틴은 많은 보물을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했다. 또한 1453년에는 자랑거리이던 난공불락의 도시 성벽들이 술탄 메멧 2세의 포위군에 의해 파괴 되었다.
서구의 기독교가 흔들릴 때 고대 제국의 수도 시민들은 콘스탄틴의 멸망을 환영했다.
비잔틴 제국의 최후 영도자였던 노타리스 대공은 카톨릭과 그리스정교 간의 수세기에 걸친 반목을 언급하면서 '누가 추기경의 모자보다 터키 터반을 더 좋아하지 않겠는가?' 라고 공공연히 기뻐할 정도 였다.
이 도시는 세워진 후 1000년이 지난을 때 오토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 이 되는 새로운 역활을 맡게 되었다.
메멧은 부의 극치를 이룬 톱카피 궁을 건립하였다.
1465년에 완공된 이 보물로 치장된 복합 구조물에는 하렘까지 있어 약 400년간 오토만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또 하나의 경외감을 일으키는 건축물로는 푸른 모스크라고 불리우는 술탄 아멧 모스크이다. 톱카피궁 근처에 술탄 아멧 1세에 의해 1609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이 모스크는 6개의 웅장한 첨탑을 가지고 있으며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하므로서 이처럼 설명적인 이름을 얻었다.
이국적인 것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는 그 외에도 볼 것이 많이 있다. 대규모 바자르, 향신료 시장, 즐비한 상점들, 2층으로 된 갈라타 다리, 흰 대리석으로 장엄하게 건립한 중세의 탑, 은빛 넘실거리는 보스포러스 해엽을 높다랗게 가로지른 현수교....
어디를 여행하든 마로우의 '영웅과 리앤더'에 나오는 구절 ' 첫 눈에 사랑하지 않은 것을 누가 사랑 하겠는가?' 를. 이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서는 절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1. 09:30분에 성 소피아 사원 관람
성소피아는 비잔틴 건축의 걸작이며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세계의 8번째 불가사의로 여겨진다. 6세기에 지어진 이래로, 성 소피아는 훌륭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꼭 방문해야 할 유적지로 꼽힌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에는 건물의 외부 모습인, 첨탑들과 서로 다른 양식의 건축방법, 후에 추가된 버팀대, 외부 디자인의 조화를 깨는 정원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는 박물관 (월요일 휴관)으로 사용되는 본당 안에 들어가 보고, 건물에 관한 뒷 배경에 대해 듣는다면, 이 건물을 짓고 이렇게 훌륭한 상태로 보존한 사람들을 존경해 마지 않을 수가 없다.
성 소피아에 있는 돔만큼 큰 돔이 만들어 진 것은 거의 일 천년이 지나서였다. 현재도 성 소피아와 견줄 수 있는 건물은 단지 몇 개밖에 되지 않는다.
소아시아의 유명한 두명의 건축가인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는 예수살렘에 있는 솔로몬의 교회보다 훨씬 더 크고 훌륭한 "울리는 벽"을 가진 교회를 짓고 싶어하는 쥬스티니안 황제의 꿈을 알았고 실현시켰다.
성 소피아는 지진과 화재로 인해 여러 번 파괴되었으나 그 때마다 복구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성 소피아는 오스만 터키가 이스탄불을 점령하는 날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이슬람 교에서는 인물화가 철저히 금지되었기 때문에 내부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위에 회칠이 칠해졌다.
1935년 성 소피아가 현대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인 아타튜르크의 명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수리 복구되어 일반에게 개방되면서 비잔틴시대 때 만들어진 인물화 및 장식은 빛을 보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하고 이 곳에 거하기로 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도시의 큰 사원'으로 325년 창건했던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에 따라 532년-537년에 다시 크게 개축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성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 곳은 회교사원, 즉 모스크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미나레트가 세워지고, 성당안에는 회칠로 덮여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회칠속으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는 모두 사라졌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면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지만 현재 그 복원작업도 중단된 상태이다.
성소피아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본당의 넓이 75m X 70m 로 7,570 평방 미터에 달하고 천장높이는 55.6m, 돔의 지름은 33m에 달하여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드는 높이이며 40개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구조이다.)
2. 10:10분에 에레바탄 사라이(지하 저수지 ;
Yerebatan Sarayi)
532년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지하 대 저수지로 소피아 교회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이스탄불은 많은 공격을 당했었기 때문에 언제나 충분한 물의 공급이 필요했던 도시였다. 따라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지하 저수저를 많이 건축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저수저가 성 소피아 성당 맞은 편에 위치한 지하저수지(Yerebatan Sarayi)이다.
yere(땅에) batan(빠지다) 라는 의미이며 세로 140m, 가로 70m, 높이 8m, 336개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떠받혀진 대형 저장고로서, 20km 정도 떨어진 수원지로부터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았다.
저장고의 구석에는 기둥의 받침 부분에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뱀의 신 메두사의 두상을 옆으로 뉘여 놓아 조명까지 받은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면 곧 돌로 변할 듯한 을씨년한 느낌이다.
1985년에서 1988년 사이, 이스탄불 시는 이 저수지를 개축하여 새로 단장하였다. 기둥들 사이에는 나무를 재료로 도보 길을 만들고 조명과 음향효과를 써서 관광객을 위한 장소로 만들었다.
석고위의 수심 측정기의 눈금이 기둥머리에 까지 다다른 것을 보면 당시 이 저수지에 물이 얼마나 가득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지하 궁전의 입구는 그냥 지나칠 정도로 단층의 조그마한 건물이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면 특이한 음향효과와 조명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이다. 바닥에는 아직도 흥건이 물이 괴어 있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도 분위기에 한목 한다고 할 수 있다.
여름에 더위에 지쳤을 때 꼭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 속의 잉어 조각은 장식적 효과를 주는 것인데 이는 오염으로부터 물을 보존한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 어떤 이들은 비잔틴 인들이 실제 이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길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 당시에는 독약의 여부를 점검하는데도 이용하였다고 한다.
3. 10:40분에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
한마디로 아주 큰 궁전이다.
보스포라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위치한 70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멧이 이스탄불을 차지하게 되면서 처음 건설되어 그후 4세기 동안 꾸준히 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 결과 오늘날 이 곳은 15세기-19세기 초까지의 오투만 건축양식의 변화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톱카프 궁전은 원래 오투만 제국 대대로 술탄 군왕들이 거처했던 성으로 한때 이 곳에는 술탄과 그 가족 외에도 5만명이 넘는 시중들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은 6세기가 넘도록 3개의 대륙을 통치했던 오토만 왕조의 행정 궁전이다.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개장하는 이궁전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품들은 대단히 볼 만하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골든홀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하고 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Mehmet이 콘스탄틴노플을 정복한 후 세운 오스만 제국술탄의 첫 번째 궁전으로 15C~20C 초반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대제국을 다스렸던 곳이다.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양식을 가진 궁전으로 중국 북경의 자금성의 구조와 유사하다. 즉 천안문을 통과하고 그 다음 궁전 본체로 들어가는 오문을 지나면 공식 행사용 건물이 나오며, 황제의 공간인 내정에 들어가기 위해 건청문을 통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안문에 해당하는 후마윤문을 지나 셀람문에 이르는 제 1정원에서 제 2정원을 지나 삼각 지붕인 정의의 답을 보게된다.
20여 명의 터키 술탄(세속적인 지도자)들이 거주하였으며, 제상회의가 열리던 곳이기도 하다. 단순한 궁전이라기보다는 온갖 화려한 보물로 치장된 복합구조물로 정원, 집, 도서관, 술탄의 후궁과 내시들이 거처하던 할렘까지 갖춘400년간의 권력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궁내부는 각 나라에서 술탄에게 보내온 보물, 도자기, 식기, 옷, 장신구, 무기 등이 저닛되어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에메랄드,86캐럿의 다이아몬드,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멧의 치아와 수염, 그리고 그가 입던 망토, 메카의 신전 열쇠, 사도 요한의 두개골과 손, 다윗의 칼, 요셉의 모자와 모세의 지팡이 등이 전시되어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특히 훌륭한 도자기들이 너무 많아 '톱카프 궁전에 간다'는 말을 바로 '도자기를 보러 간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오히려 '보석전시관'이 인기가 있다. 수많은 에머런드가 박혀 있는 단검이 현란하다.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은 톱카프 궁전 내 첫 번째 정원, 즉 궁전 입구 맞은 편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성이레네성당, 오리엔트박물관, 도자기전시관 등 모두가 같은 위치에 있다.
옛날 요리를 만들었던 곳은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이 되었고 보물고에는 술탄 군왕들이 사용했던 옥좌, 면류관, 무기, 생활용구, 왕비나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으며 터어키 각지에서 미녀를 모집했던 할무, 신관(후궁의 시중을 드는 남자)의 방도 보존되어 있어 그 흥미를 더한다.
또한 이즈니시(여자의 할레를 하는 방)의 타일 방은 다소 끔직하다.
4. 12:30분에 쿨카프(생선 요리 전문 식당가)에서 점심
비가 계속적으로 내린다. 터어키의 비는 10분 정도 내리다 30분정도 그치고, 또 내리곤 한다. 해안가라서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부니 체감 온도는 상당히 낮고 춥다.
생선 요리는 우리나라 고등어이다. 맛은 먹을 만 하다. 터어키의 거의 모든 생선은 흑해에서 잡아 온다고 한다.
고기는 크나 우리나라에 비해서 맛이 없다. 계절이 뚜렷하고 한류와 난류가 마주치는 곳의 고기가 최고여~~~(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스프는 참 맛이 있다. 터어키의 검은 빵은 딱딱하기는 하나 씹을수록 고소하다.
쿨카프 건너편에는 각종 해물을 파는 어시장과 건어물 시장이 있다.
5. 13:40분에 내추럴(양가죽 전문 매장) 방문
양가죽 제품은 부드럽고, 세련되고, 실용적으로 만들었으나....
마지막 마무리의 부분이 좀..... (남자 혁대 같은 것에서 고리가 녹이 쓸고... 한국인에게는 굵고바느질 마무리가 흠이다.)
한국인의 체형에 안 맞다.
중국의 흉내를 내어서 모텔들이 옷을 입고 자랑을 한다.
여자에서는 처제가 뽑히고, 남자는 내가 뽑혔는데....
터어키 가죽점 코디가 내가 모자를 벗으니.....
(대머리라 한창 망설이더니 가발을 쓰라고 한다. ----아~~~충격! --나도 이참에 가발을 구입 해 ???? - 이건 국제적으로 인정된 셈.)
가죽옷을 입고 무대를 돌고서 춤을 추라고 한다. 여기서는 막춤이 최고이다. 얼~~~쑤 나름대로 기분 좋게 막춤으로 돌렸다!!!!
6. 14:10분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S) 크루즈
보스포러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길이가 약 30km, 넓은 곳의 폭이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연간 38,000여척의 배가 통과한다고 하며, 물살이 거세어서 내연기관의 배라야 되겠다.
해협의 시작에 분수대가 인상적이고, 수심보다 1m정도 높은 곳에 집들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파도가 치지 않는지.....
골드 런(강)과 해협은 연결되어 있는 데 다리 밑에 있는 가게들이 퍽이나 보기 좋았다.
배 속에서 억센 터어키 선원이 타주는 커피를 한잔 씩 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갈매기가 많으나 우리나라 보다 작고 날래다.
준설선이 해협 양 옆을 준설하고 있다. 최근에 생활용수로 ....
흙탕물이 나오는 것 같다.
고대, 중세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협을 장악해야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은 오늘날도 유사하다
7. 15:00분에 블루 모스크 (술탄 아흐멧
모스크 SULTAN AHMET MOSQUE)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술탄아흐멧 모스크는 규모면에서 터키 최대의 것으로,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그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술탄 아흐멧의 사원"으로 알려진 이 사원은 고대 히포드럼 옆에, 그리고 성 소피아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시원은 17세기 초에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였던 메흐멧 아아에 의해 지어졌다.
그의 선생님을 능가하기 위한 노력으로 메흐멧 아아는 아직까지도 야성이 자자한 걸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사원 옆에는 복합 부속 건물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부엌, 병원, 국민 학교, 신학교, 그리고 술탄 아흐멧의 무덤등이다.
여섯 개의 첨탑과 돔의 배열, 그리고 반원형 돔들은 독특한 와부 모습을 창조한다.
내부와 외부의 타일 장식들은 꼭 볼 만하다. 매일 밤 사원 밖에서 소리와 빛의 쏘가 열린다.
8. 15:30분에 히포드롬 (마차경기장
HIPPODROME) 관람
비가 와서 차 속에서 구경을 했다. 지금은 관중석을 헐고 서민들의 문화 광장의 거리로 만들었다.
본래 이곳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히포드롬은 술탄 아흐메트 사원 정문 앞의 기다란 광장으로 로마시대에는 경마 경주, 야수의 경기 등을 하던 다목적 경기장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남쪽 구석에 경기장 벽의 만곡한 부분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3개의 고대 기념물 즉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사 한 사원에 세워졌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 있다.
또한 빌헬름 샘이(Kaiser Wilhelm Fountain) 있는데 샘의 아름다운 정자는 독일 황제 빌헴름 2세(Kaiser Wilhelm II) 가 1901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 와 그의 국민에게 우정의 증표로 선물한 것으로 석조물은 하미드 2세와 빌헬름 2세의 결합문자로 꾸며졌고 이 샘은 1898-99 AD 에 건설됐다.
샘의 남쪽에 화감암에 상형문자가 새겨진 인상적인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이는 1500 BC 이집트에서 제작한 것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가 390 AD에 이곳으로 가져와서 테오도시우스 기둥이라고 불린다.
나선형의 세 마리의 뱀이 감싸는 모양을 한 기둥은 330 AD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그리스 델피(delphi) 아풀론 신전 앞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 이전엔 세 마리 뱀의 머리가 있었으나 18세기에 손상되어 현재는 일부분만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맨끝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Constantinus 7세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원래는 청동이 겉에 입혀져 있었으나 유럽인 침공 시 용해되었다. 현재의 히포드롬은 술탄하멧을 관광하다보면 몇 번씩 지나치게 되는데도 잘 인식되지 않는 장소이다. 하지만 라마단 기간엔 그 멋과 맛을 만끽할 수 있다.
9. 16:00분에 슐레이마니예 사원
성 소피아 사원보다 더 아름답다고 꼽는 사람이 많을 정도인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 술래이만 술탄 당시 세워졌던 회교사원. 소피아성당을 모방하여 1550~1557년에 시난이라는 당시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하였다.
특히 사원 남쪽에 있는 우아한 기둥과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볼 만하다.
모스크에 사용된 기둥 중에는 알렉산드리아나 옛 궁전에서 가져온 것도 있으며, 묘소의 차양 위에도 하기아 소피아의 조각이나 비잔틴 시대 콤네우스의 척령을 새긴 돌이 포함되어 있다.
사원의 테라스에 서면 이스탄불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며, 근처에 슐레이만 술탄과 그의 부인 록살레나의 묘가 있는데 사원보다 화려하다. 시난의 묘도 있다. 옆에 시난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레마니에 모스크가 있다.
10. 16:30분에 그랜드 바쟈르(GRAND BAZAR)
(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 같은 곳)
주의사항 ;
1. 소지품 조심 - 날치기 및 폭행.
2. 3명이상 모여서 구경할 것.
3. 계산 시 카드 사용은 금물 - 카드를 여러 번 긁는다.
4. 물건의 값은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 - (59불을 9불을 주고 구매)
바가지라고 생각 말고 자신이 소신껏 한다.
5. 돈은 반드시 가게 안에서 제시 함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 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 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 19:30분 세븐힐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밸리 댄스 시작하려면 시간이 남아서, 이스탐블의 야경이 보이는 카페에 들러서 커피와 사과 차를 마셨다.
11. 21:00분에 밸리 댄스 관람
밸리댄스는 우리에게 배꼽춤으로 알려져 있는 터키고유의 춤입니다.
지금의 터키라는 나라의 형태는 1929년 케마파샤(일명 아타튀르크 즉 터키 근국의 아버지란 뜻)때 생긴 것이고 그 이전에는 오스만 투르크라는 대제국이었고 또 그 이전에는 셀주크제국이었고...
그러니까 그 일대의 전통춤이라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집트 등지에서도 이춤이 행해집니다.
벨리댄스는 다리나 발보다는 신체의 중심부로부터 퍼져나오는 동작으로, 여성의 뼈와 근육 구조에 적합하다.
신체의 각 부분을 분리시키는 동작이 자주 사용되는데, 각 부분을 감각적인 모양으로 독립시켜 움직이거나 여성적인 동작으로 엮는다.
주로 맨발로 공연하는데, 이는 댄서, 댄서의 표현 그리고 모체인 대지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벨리댄스 의상은 주로 색상이 다채롭고 하늘거리며, 하늘하늘한 스카프와 베일로 강조된다. 핑거 심벌(Finger cymbal, 놋쇠 재질이고 Zill 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은 기원전 2세기 전부터 보편화되었으며, 가족의 부를 의미하여 긴급하게 대피하거나 이동할 수 있도록 동전을 달아 복잡하게 만든 벨트 역시 주요 장신구이다.
세기가 바뀐 이래로, 벨리댄스 인구는 전 세계적으로 급증해 왔다.
벨리댄스 축제, 워크샵과 세미나가 계속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많은 남성과 여성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많은 댄서들은 현재 중동 지역 및 벨리댄스가 유래된 다른 지역들을 방문하면서 예술적인 동작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 4명씩 나오는 중간 중간의 춤은, 춤의 형태는 경쾌하나 동양과 서양이 어우러진 기분이고 단순한 동작을 변화무쌍하게 움직인다. 목축과 풍요를 나타내고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춤이다.
휫! 휫! 하는 휫 바람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짝짝이 비슷한 것을 친다.
사회자의 코미디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말을 모르니....
끝으로 80%가량이 한국 사람이니 서울의 밤을 부르며 마쳤다
@ 23:15분에 끝. 23:45분에 호텔 도착.
# 제 8 일 2006년 1월 20일 (금)
@ 07:00에 기상하여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모두들 휴식을 했다.
많이들 피로한 모양이다.
밤사이에 많은 눈이 왔다. 오늘은 다시 이집트 카이로를 간다.
그 기에서 관광을 하고 대한항공 편으로 집으로 갈 예정이다.
@ 08:20분 이스탐블 공항에 도착했다. 09:25분 카이로 발이다.
@ 터어키에 대한 느낌을 잠시 소감을 소개하면
①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동양과 서양이 어우러져서 그런지 먼가를 짋을 수는 없으나 획일적인 것이 없다.
고대 유물 속에 있는 가게들.... 고대와 중세 및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
복잡하면서도 어수선한 인상이다.
② 바가지가 심하다.
국민성이 칼칼하고 급하다. 그리고 순간적을 성격의 변화가 심하다.
공항에서부터 택시 요금의 바가지, 술값의 바가지는 말 못한다.
(심하면 1천배 정도의 바가지이다) 소주 ; 2만원.
③ 약탈과 침략의 문화이다.
유물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것이 드물고 대부분 전쟁의 결과물이다.
지금의 도로들로 성벽과 성곽 사이의 좁은 도로이다.- 증개축 금지.
침략을 하고 침략을 당한 흔적들이 많다.
돌길에 철로가 놓이고 성벽 사이로 좁은 도로. 운전 솜씨가 정말 좋아야 한다. 신호는 안 지킨다.
④ 외형을 중시한다.
겉만을 중시하고 속은 아직도 모자라는 문화. 아직도 우리를 따라 오려면 20년 이상 모자라는 것 같다.
술건을 고르 때도 꼼꼼히 보아야 한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⑤ 빈부격차가 심하다.
자본주의 국가의 어디에서도 존재하지만 후진국일수록 빈부의 격차는 심하고, 단일 종교를 고집하는 국가 일수록 더욱 그렇다.
왜냐면 배타적인 문화의 한계 때문에.....
부자들의 별장과 요트 및 풀장 옆에, 절벽에 붙어 있는 허름한 움막....
첫댓글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는 법 ... 먼저 여행기를 복사하여 한글에 따로 저장하여 글에 나오는 유적지를 개인사진에서 펼쳐보면서 읽어시면 더욱더 실감이..... 총무님! 여정중에 짬짬이 쓰신글이 모두에게 기쁨을 주네요... 정말 체력이 대단하십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