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들어와 하나회 세력은 더욱 커졌다. 1973년 1월 전두환은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서는 처음으로 별을 달았다. 2월 초 전두환은 손영길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이 베푼 만찬에 초대받아 크라운 4기통 세단 승용차와 금일봉을 하사받았다.
뒤이어 노태우와 정호용도 준장으로 진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에게 '一心'(일심)이라는 글자 가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하였다. 핵심 멤버들이 장군으로 진급함으로써 하나회는 군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선배 장교들도 하나회를 지원하는 측과 견제하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윤필용(尹必鏞) 수경사령관,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서종철(徐鐘喆) 국방장관, 차규헌(車圭憲) 2군사령관, 진종채(陳鍾埰) 보안사령관, 유학성(兪學聖) 3군사령관, 황영시(黃永時) 육군참모총장, 김시진(金詩珍) 헌병감 등이 이들을 지원하였다.
특히 윤필용 장군은 같은 경상도 출신의 하나회 후배들을 적극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하나회의 대부(代父)라고 불렸다. 반면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 정승화(鄭昇和) 장군 등은 하나회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세력다툼의 과정에서 1973년 '윤필용 사건'과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3년 4월의 '윤필용 사건'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李厚洛)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거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권익현, 신재기 등 장교 10명이 구속되었고, 안교덕, 정동철, 배명국, 박정기, 김상구, 정봉화 등 31명이 예편되었으며, 24명이 인사이동 그리고 160여명이 감시대상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민간인으로서 육사 11기와 가깝게 지내던 이원조(李源祚) 제일은행 차장이 해직되고, 윤필용 장군과 가깝게 지내던 김연준(金連俊) 한양대 총장 겸 대한일보 사장이 구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명되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초조한 마음에 '김대중 납치 사건'을 벌였다가 해임되었다.
유신 직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서 윤필용이 박정희에 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은 병력동원과 같은 구체적 거사계획을 잡은 것은 없기 때문에 쿠데타 모의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비영남파 세력이 군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나회를 상대로 집요한 수사를 벌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 표 3-6 ] 출신지역별 하나회 회원 명단
경 상 도 |
경 북 |
노태우 (대구), 정호용 (대구), 김복동 (청송), 안교덕 (울진), 박세직 (칠곡),정동철 (칠곡), 최세창 (대구), 오한구 (봉화), 윤태균 (청송), 황진기 (대구),조명기 (대구), 우경윤 (예천), 권영휘 (의령), 이종구 (대구), 정도영 (문경),박정기 (대구), 신우식 (문경), 김상구 (상주), 이대희 (예천), 권병식 (영일),송응섭 (대구), 김정룡 (문경), 허화평 (포항), 이현우 (대구), 성환옥 (영천),김정헌 (대구), 김재창 (대구), 서완수 (대구), 노석호 (대구), 허청일 (경산) |
경 남 |
전두환 (합천), 권익현 (산청), 최성택 (부산), 손영길 (울산), 박희도 (창녕),황인수 (사천), 정동호 (의령), 신재기 (창녕), 배명국 (진해), 신말업 (울주),정순덕 (충무), 최평욱 (남해), 김진영 (충무), 허삼수 (부산), 이학봉 (부산),구창회 (진주), 조남풍 (부산), 안병호 (진주) |
서 울 |
노정기, 장기오, 최웅, 이우재, 이철희, 민병돈, 정만길,이문석, 장석규 |
충 청 도 |
박준병 (충북 옥천), 안필준 (충북 중원), 최문규 (대전),정진태 (충남 예산), 이춘구 (충북 청원), 이진삼 (충남 부여),나중배 (충남 예산), 김진선 (충북 괴산) |
전 라 도 |
박종남(전남 목포), 고명승(전북 부안), 장세동(전남 고흥) |
강 원 도 |
장홍열(강원 명주) |
이 북 |
안무혁(황해 안악) |
같은 해 8월 이른바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김귀준 참모장, 이진백 군수참모, 김영환 군수과장, 이동주 소령 등이 구속되었다.
또한 하나회 조사담당이었던 김종진 보안처장과 이대호, 박영선 비서실장 등 20여명의 장교가 예편되었다. 박종규 경호실장도 얼마 후 해임되었다. 이 사건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영남파 세력이 강창성에게 가한 일종의 반격작전이었다.
<표 3-6>과 같이 하나회 회원의 70%가량이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하나회에 대한 1단계 수사에 이어 2단계 수사가 시작되려 하자 위협을 느끼고 "강창성이 경상도 출신 장교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진종채 수경사령관은 경상도 장군을 대표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교체를 강력히 건의했다.
결국 이 두 사건을 통해 영남파의 보스(boss)였던 윤필용과 이들을 견제하려 했던 비영남파의 강창성이 모두 타격을 입고 예편함으로써 양자의 싸움은 승자 없는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3년의 두 사건은 박정희와 전두환 모두에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안겨 주었다.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장기집권을 꾀하던 박정희는 군부 내 실력자인 윤필용과 강창성을 동시에 제거함으로써 쿠데타 가능성을 없애고 권력기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을 제거함으로써 중간보스들의 전횡을 막고 친정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두환도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의 주도권을 확고히 잡고 권력의 정점을 향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하나회 회장이면서도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수사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던 것은 윤필용의 약점과 비리에 관해 박정희에게 직접 중요한 제보를 했고, 또한 박종규 경호실장의 특별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라이벌인 손영길이 구속됨으로써 전두환은 하나회와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보스로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중간보스들이 제거된 권력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피라미드 조직의 정상을 향해 바짝 다가갈 수 있었다. 많은 수의 하나회 회원들이 구속 또는 예편당하는 위기를 겪었지만, 핵심멤버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하나회는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회는 이미 윤필용 장군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립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
|
|
|
|
윤필용 大權 넘보다 다쳤다?
군부 장악, 거칠 것 없던 ‘막후의 일인자’ … 이후락 대통령 만들고 훗날 도모하다 ‘추락’ 1973년 4월, 한국에서는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라는 것이 터진다.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이 육군 보통군법회의에서 8개 죄목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벌금 2000만원에 추징금 590만원도 추가되었다. 별 두 개의 장성이자 수도경비사령관이라는 직책의 장군이 지은 죄는 국가 기밀 누설도 군 비밀 관련 죄도 아닌 업무상 횡령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이었다.
여기까지가 겉에 드러난 윤필용 사건의 전모다. 그나마 이 사건은 4월28일 군법회의가 열리고 수도경비사령관이 잡혀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반에 알려졌을 뿐, 구체적인 배경이나 사태의 전모는 그저 소문으로만 떠돌 뿐이었다. 소문이 알려주는 것은 두 가지였다. 군 실세인 윤필용 소장이 박정희 정권을 넘봤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윤소장이 알력을 빚다가 윤소장이 당했다는 것이다.
최고권력자 박정희의 대통령 자리를 넘봤다는 소문 하나만으로도 윤필용 사건은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떠들썩했던 것에 비해 이 사건만큼 일반에 그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없다. 사건 당사자와 관련자들이 생존해 있는 이 사건은 지금도 한국 현대사에서는 그저 ‘윤필용 사건’으로만 기술되고 있고 드라마 등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극화되기만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나 기록은 좀체 찾아보기가 힘들다.
미 국무부 비밀문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육군 보통군법회의가 열리기 두 주일 전인 4월14일, 주한 미 대사가 국무부 장관 앞으로 타전한 3급 비밀(Confidential) 전문은 윤필용 사건을 이렇게 기술해놓고 있다. 제목 역시 ‘윤필용 사건’(Yun Pil Yong Affair)이다.
‘윤필용 사건이 계속 진전되면서 새로운 정보가 접수되었음. 윤필용이 군을 동원해 대통령의 위치를 강화하고 이후락을 포함한 최고 참모들을 제거하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징후가 계속 포착되고 있음. 윤필용 사건은 군 장교단을 동요시켰으며, 장성들 사이에서도 의문이 제기되었음. 정부가 계속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이런 반응을 일으킨 원인임.
윤필용이 체포되기 전이나 그 후에도 윤필용 및 여타 군부 주류 세력 모두에게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이외의 다른 징후는 발견된 것이 없음. 대통령은 윤필용 사례를 차후 같은 종류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으려는 의도가 분명함.
청와대의 믿을 만한 소식통이 대사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윤필용 외 9명이 지체없이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이며, 4월말 안으로 사건이 종결될 것이고, 여파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음. 관련자 체포와 수사는 계속 진행중임.’
윤필용 사령관은 당시 군부 내 최고 실세였다. 육군 내 영관급 정치 장교들이 참모총장이나 3성 4성 장군들에게는 세배를 안 가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에게는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세배를 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후락과 김종필을 두고 누가 2인자인지를 가눌 때, 뒤에서 코웃음을 치며 군을 한 손아귀에 넣고 있는 막후의 일인자 소리를 듣는 사람이 윤필용 사령관이라고도 했다. 기세가 하늘을 찔렀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조차도 머리를 숙인다는 말이 돌았다. 한마디로 이후락 정도의 인물은 윤사령관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이 군부의 윤사령관에 대한 평이었다.
하기야 윤필용 사령관은 하나회의 대부였고,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권익현 등이 주축이 된 육사 11기생 정치 장교들이 모두 그의 수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와 신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었다.
‘업무상 횡령’ 육군소장 군법회의 회부
그가 왜 업무상 횡령죄로 군법회의에 섰는가. 박정희 자리를 정말 넘봤는가. 국무부의 4월21일자 비밀 전문은 윤필용 구상 및 그와 이후락의 관계를 이렇게 적고 있다. 미 대사관이 얻은 정보의 출처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위이자 측근인 한병기씨였고, 한병기씨는 미 대사관 정치 고문과의 술자리에서 윤필용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1. 4월19일 한병기는 ‘극비의 극비’(Top Top Secret) 정보라면서, 윤필용이 의도했던 것은 윤의 지지를 업고 이후락이 잠정 기간 대통령이 된 다음 윤이 박정희 대통령의 자리를 계승하는 것이었다고 우리에게 말했음.
한병기는 말하기를, 윤필용이 심문 과정에서 계승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후락과 두 차례에 걸쳐 별도의 자리를 가졌다고 ‘자백’했다는 것임. 한병기에 따르면, 윤필용은 이후락에게 군부에서 인기가 없는 이후락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차지할 수 없으니 윤필용이 필수적인 군부의 지지를 제공해 주겠다고 이후락에게 말했다는 것임.
한은 또, 그러나 윤필용이 의도한 것은 한 달이나 두 달 후에 이후락을 밀어내고 자신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했음.
2. 한병기는 이것은 윤필용이 몇몇이 모인 자리에서 여흥 삼아 논의를 해본 아이디어에 불과한 것이며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고 강조했음. 한이 말한 내용을 볼 때, 자연스럽게 계승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 윤필용이 반드시 쿠데타나 탈취를 생각했다는 암시는 받을 수 없었음.
3. 한은, 윤필용이 심문관에게 말했다는 두 차례의 회동에 대해 이후락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음. (대사관 주석: 하지만 실제로 회동이 있었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이후락은 이 회동에 대해 알고 있을 것임) 윤필용 사건이 살아 있고 일반인 사이에서 은밀히 이 얘기가 퍼져나가는 동안에는 대통령이 물론 이후락을 구제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한의 얘기임.
국무총리 비서와 한병기는 4월19일에 가졌던 별도의 대화 자리에서 군법회의는 다음 주에 개정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음. 두 사람 모두 재판이 이미 열렸고 윤필용이 이미 선고를 받았다는 소문은 틀린 것이라고 말했음.’
미 대사관은 한병기씨가 미 대사관 정치 고문에게 들려준 이 말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을까. 이 비밀전문의 끄트머리에는 윤필용의 심문 및 자백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준 한병기씨의 전언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따로 붙여놓고 있다.
‘4. 평가 A. 한의 이야기는 한과 2년 이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정치 고문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것임. 한이 정확하게 전체적으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인지(그는 대통령과 가깝고 또 가까울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음), 그리고 윤필용이 심문관에게 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윤필용이 이후락을 끌어내리기 위해 꾸며낸 말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됨.
B. 한이 말한 바에 따르면, 이후락이 윤필용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거나 윤과 함께 계승 문제를 계획적으로 구상하는 데에 관련이 되었다는 점은 발견할 수 없었음.
4월19일의 대화 상황은 한과 며칠 내로 다른 일을 추진할 계획이 있긴 했지만 이 문제를 놓고 한을 종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음.
C. 한의 정보는, 틀림없는 것이라면, 박정희 자신이나 권부가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임. 다만, 이전의 정보를 통해 우리가 알았던 것보다는 윤필용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음.’
윤필용 사건을 기록해놓은 또 하나의 미 국무부 문서는 4월23일자 비밀 전문이다. 역시 주한 미 대사가 국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것이다.
‘1. 4월21일 대통령 사위인 한병기는 말하기를 (1)윤필용과 얘기를 해보니 이후락은 윤필용의 아이디어에 관심이 있는지에 대해 별 반응 없이 그저 듣기만 했으며 (2)윤필용은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과 관련해 계승 문제를 생각했다는 것임. 우리가 윤필용이 이후락을 끌어내리기 위해 그런 논의를 했다고 이야기를 조작해냈을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고 띄워보자, 한병기는 그건 불가능하며 윤필용은 이후락을 지지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라고 했음.
2. 4월23일, 이후락의 측근이자 중앙정보부의 대사관(미 대사관: 역주) 파견관인 ‘스티브’ 김(‘Steve’ Kim)은, 윤필용은 이후락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편을 드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음.
3. 한병기와 스티브 김은, 이후락이 지금 머리를 숙이고 있으며, 윤필용 사건이 터진 이후 중앙정보부가 정보계통 외곽에서 벌였던 활동의 범위를 실질적으로 축소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음.’
윤필용 사건을 기록해 놓은 국무부의 위 두 가지 문건은 육군보통군법회의가 열리기 9일 전인 4월19일부터 이틀 간격으로 타전된 것이다. 한국 내 정치 정보가 어떤 경로를 통해 미 대사관에 접수 되는지와, 대사관이 워싱턴에 한국 정치 기상도를 보고하는 방식에 대해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