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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여인 이였던 맹강녀는 남편이 역시 만리장성의 인부로 징용을 나가게 되자 걱정과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중 꿈속에서 남편이 자주 매우 추운 모습으로 나타나 보였다. 여자는 생각하기를 ‘만리장성 쌓는 곳이 매우 추워서 남편이 자주 꿈속에 나타나는 모양인가 보다’라고 생각한 맹강녀는 여러 날을 걸쳐 남편이 입을 솜옷을 만들어 보따리를 안고 몇 달을 걸쳐 만리장성 축성장에 도착한다. 하지만 남편은 어디에도 없고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너무나 원통한 맹강녀는 몇 날 며칠을 통곡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성벽이 무너지자 그곳에서 남편이 시신이 나왔다. 슬픔을 견디지 못한 맹강녀는 남편의 시신을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지금 실제로 중국 하북성 산해관 쪽에 그녀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옆에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멀리 만리장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리장성으로 인해 많은 고통과 슬픔의 나날들을 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찍이 당태종은 '사람이 장성보다 낫다'라는 말을 남겼다. 전쟁은 물리적인 방어보다 사람의 지혜로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지어진 만리장성이지만 전쟁을 치른 것보다 더 큰 고통과 짐을 국민들에게 지어준 결과만 낳은 것이다.
만리장성은 위대한 건축물인 동시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는 역사의 스승인 것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중국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중국요리이다. 그 사용하는 재료만 해도 수 만 가지를 헤아리고, 각 지역마다 특색 있게 발달해 왔다. 중국 사람들은 평생 다 못해 보고 죽는 것이 3가지가 있다.
첫째, 중국 땅을 모두 밟아볼 수 없다. 그 만큼 땅이 넓다는 말이다.
둘째, 한자를 모두 익힐 수 없다. 한자는 우리의 한글과 달라 사물의 모양을 본 따서 만든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수많은 한자가 있고,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비근한 예로 카드카(卡, ka)라는 글자가 있다. 잘 뜯어보시면 윗상(上)과 아래하(下)가 합쳐진 글자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즉 카드를 위에서 아래로 긁는 모습을 보고 만들어진 한자이다. 이처럼 계속 생겨나는 한자를 모두 익힌다는 건 불가능 하다.
마지막 세 번째, 중국에 있는 모든 요리를 다 먹어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역이 넓은 만큼 요리의 종류와 가지 수도 많다. 각 지방마다 특색 있는 기후, 특산물, 생활 방식의 차이 등이 가지고 온 결과이다.
地大物博(지대물박) - 땅이 크고 자원이 많다. 이 말은 곧 중국을 가리킨다.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곳이 중국이다. 그래서 중국음식의 재료와 내용, 모양과 맛도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요리에 대해서 '동쪽은 시고, 서쪽은 맵고, 남쪽은 달고, 북쪽은 짜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요리는 크게 산동요리, 사천요리, 절강요리, 광동 요리의 4가지로 분리되며 '사대 중국요리'로 불린다. 이 유명한 요리는 각 지방의 오랜 역사와 독특한 조리특색이 자연지리, 기후조건, 특산물, 음식습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형성되어 왔다. 이에 따라 각각의 요리는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는데, 절강요리는 수려한 강남의 미녀와 같고, 산동요리는 소박하고 건강한 북방의 남자와 같으며, 광동 요리는 풍요롭고 우아한 도련님 같고, 또한 사천요리는 내실이 풍부하고 재주가 많은 명인과도 같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산동요리는 황하유역과 북경, 천진, 하남 일대의 요리로 해산물을 위주로 한 연해지방의 초동요리와 탕류 위주의 내륙요리인 제남 요리로 나뉜다. 산동요리의 특징은 선명한 색깔과 담백한 맛이며, 가장 대표적인 요리로는 황하의 잉어로 요리한 '탕수황하잉어'가 있다.
둘째, 절강·강소요리는 장강 중하류의 소주, 항주, 상해 일대의 요리를 말하며 특히 굽고 고는 요리가 유명하다. 대표적 요리로는 항주의 '서호초어', 진강의 '준치찜', 남경의 '남경소금오리구이'등이 있다.
셋째, 사천요리의 계통은 장강 상류 사천성 일대를 지칭하며 중국음식 중에서 가장 독특한 요리라 할 수 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맵고, 시고, 얼얼하며 쓰고, 맵고, 향기롭고, 짠 등의 일곱 가지 맛을 다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마파두부', '원앙신선로', '훠궈로', '공즈지딩', '탄탄미엔' 등이 있다.
마지막 광동 요리는 책상만 빼놓고 다리 달린 것들은 뭐든 먹는다는 말이 바로 이 광동 요리에서 나온 것이다. 주강 유역의 강서성 일대의 음식을 말하는 광동 요리는 담백하고 단 맛을 자랑한다. 앞서 말했듯이 쥐, 고양이, 코끼리, 개, 뱀 등 요리의 재료가 풍부하며 대표적인 음식으로 '탕수구라오로', '마늘종 민물생선요리', '새끼돼지바베큐요리' 등이 있다. 또한 차를 마시면서 간식을 먹는 얌차라는 음식문화가 있어 대부분 이지역의 사람들은 얌차를 먹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앞서 서술한 4대 요리 외에도 중국의 각 도시에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음식이 있다. 예를 들어 북경의 '오리구이', 천진의 '구부리만두', '18가 꽈배기', 상해의 '소쿠리만두', '술 취한 게', 서안의 '말린 말고기', 양고기 '파오모', 신장의 '양꼬치구이', '양피' 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중국 광동성에 가서만 먹을 수 있는 광동 4대 요리가 있다.
첫째가 삼 찍찍이 요리이다. 어미 쥐에서 갓 나온 쥐의 새끼(생쥐)를 찍소리를 세 번 낼 때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즉 어미 배에서 태어날 때 한번 찍소리를 내고, 먹기 위해서 생쥐를 잡을 때 찍소리 또 한번내고, 먹는 사람이 산채로 목구멍으로 삼킬 때 찍소리를 낸다고 해서 삼 찍찍이 요리라고 한다. 이 삼 찍찍이 요리를 먹기 위해서는 새끼 낳는 어미 쥐를 미리 준비하였다가 새끼 낳는 순간 손님에게 제공하여야 하므로 타이밍이 맞는 쥐를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어서 가격이 무척 비싸다고 한다. 그러나 넓고 넓은 중국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다고 하니 불가사이한 나라라고나 할까?
다음으로 두 번째가 메기 지느러미 튀김요리이다
이는 매기의 지느러미만을 잘라서 튀김요리 하는 것으로 이는 보통 누구나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세 번째가 모기 눈알 요리이다.
모기 눈알로 만든 수프는 최고의 진미로 꼽힐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음식은 문자 그대로 모기 눈알로 끓인 수프이다. 그렇다면 직경이 1㎜도 안 되는 모기 눈알을 어떻게 수프로 끓일 만큼 대량 확보할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먹는 사람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식도락에 관한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중국인들이기 때문에 주문만 있으면 얼마든지 모기 눈알을 확보할 방법과 루트를 가지고 있다. 이 요리가 유명한 곳은 사천성의 성도인 중경이다. 일제 때 우리 임시정부가 한 동안 거점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이 지역에는 동굴이 수도 없이 많으며 그 동굴에는 하나같이 박쥐가 서식하고 있다. 박쥐 가운데는 모기를 주식으로 하는 종류가 적지 않고, 박쥐는 먹은 모기의 모든 것을 소화시키지만 모기 눈알만은 소화시키지 못하고 배변 때 그대로 배설한다. 따라서 주방장들은 동굴로 가서 박쥐의 배설물을 모아 물로 걸러내 눈알만 채집한다. 과정은 별로 위생적이지 않지만 완성된 요리는 최상의 진미로 부르는 것이 값이 된다.
네 번째가 원숭이 해골 요리로 먹으면 머리가 좋아 진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요리는 중국인들의 야만성을 그대로 들어낸다. 이 요리는 워낙 고급으로 치고 비싸기 때문에 아주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만 찾아가게 된다. 우선 손님 접대하기 위하여 식당에 가서 자리에 앉는다. 이때 돈 낼 사람의 자리는 일정한 위치에 정해져 있다. 주방장이 돈 낼 손님을 원숭이 사육장으로 안내를 한다. 안내를 받은 손님은 여러 마리의 원숭이 중에서 제일 적당한 원숭이를 지적하면 주방장은 그 원숭이를 잡으려한다. 원래 원숭이는 사람 다음으로 영리한 동물이다. 지적을 받은 원숭이는 자기가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주방장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른 원숭이들이 지적된 원숭이가 잡혀가지 않으면 자기들이 대신 잡힐지 모르므로 원숭이들이 서로 협력하여 그 원숭이를 잡아 주방장에게 준다. 잡힌 원숭이는 자기가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울부짖는다. 주방장은 원숭이를 끌고 손님들이 기다리는 식탁으로 간다. 이 식탁은 가운데에 원숭이 머리가 들어 갈 만큼의 구멍이 나 있다. 주방장은 원숭이 머리가 위로 가게 구멍에 넣고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어 매어 고정 시킨다. 식탁 밑에 있는 원숭이 두 발에다 각각 북채를 묶고 북채가 닿는 곳에 북을 놓아 원숭이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북이 울리게 한다. 이와 같은 준비가 다 되었으면 손님은 먹기 위한 식 도구를 가지고 대기하고 주방장은 톱으로 원숭이 머리를 켠다. 원숭이는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비명을 지른다. 손님은 산 원숭이 머리에서 골(뇌)을 꺼내어 먹기 시작한다. 원숭이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발버둥치고, 이로 인해 북은 둥둥 울리고 식도락가들은 이 북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즐겁게 골을 꺼내 먹는다. 이렇게 시작한 식사의 향연은 원숭이가 숨이 끊어져서 북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끝이 난다. 원숭이가 죽으면 골(뇌)의 맛이 없다고 한다. 보통 식사를 시작하여 원숭이가 숨이 끊어져서 식사를 끝낼 때까지의 기간은 보통 20분이 걸린다고 한다. 이 요리 이야기를 듣고 중국 사람들이 정말 잔인하기가 식인종보다도 더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버스는 점심 식사를 할 식당에 도착하였다.
점심 식사 후 북경의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자금성을 관광했다.
중국의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태초에 우주는 한 개의 알이었다. 이 알이 쪼개져 반은 하늘이, 또 다른 반은 땅이 됐다. 땅에서는 최초의 인간인 반고(盤古)가 태어나 만8천년을 살다 죽었다. 반고의 머리는 쪼개져 해와 달이 됐고, 그의 피는 강과 바다를 채웠으며, 그의 머리칼은 숲과 초원을 이루었다. 또한 그의 땀은 비로, 숨결은 바람으로, 목소리는 천둥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있던 벼룩이 중국인의 조상이 됐다.
이 중국 신화는 조물주가 창조해낸 최고의 걸작은 자연일 뿐, 인간은 실로 미미한 존재로서, 자연과 조화하고 합일하는 일이야말로 인간 최고의 덕목임을 깨닫게 해준다. 중국의 빼어난 건축물과 예술품은 바로 이 같은 조화의식의 표출이다.
자금성의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자금성은 명·청 때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1406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만리장성 이후 중국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자금성 쌓기 시작했다. 14년간 100만 명의 인부가 이 공사에 동원되었고 사용된 건축 자재도 상상을 초월해 벽돌 1억만 개와 기와 2억만 개가 사용됐다. 기둥에 쓰일 나무는 사천지방에서 조달된 것으로 운송에만 4년이 걸렸다. 전각의 받침대와 부조에 쓰인 돌은 50km 떨어진 채석장에서 날랐다. 돌은 하나의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부역자들은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든 뒤 돌들을 날랐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자금성에는 황제 일가를 위해서 9천 명의 시녀와 1천 명의 내시도 함께 살았다. 그 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궁궐 주의의 장벽의 길이는 3km에 이르며 높이는 10m나 되며 성벽 둘레는 한 바퀴를 빙 돌아 도랑을 파고 물로 채워 암살자 및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자금성의 지붕은 대부분 황색 기와로 쌓여있다. 하지만 황실 서가의 지붕만은 검은 기와로 되어 있는데, 검은색은 물을 상징한다고 하여 검은 기와가 화재로 부터 서가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금성은 철통같은 보안으로 황제를 지켰다. 바닥에는 걸을 때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특별한 벽돌이 깔려 있다. 이 벽돌의 효과는 음향만은 아니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다. 성 내에는 후원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자의 거처이지만 어쩌면 금으로 둘러싸인 감옥이었는지도 모른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太和門)·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자금성의 입구, 오문(午門)
천안문 광장에서 금수하의 대리석[전체를 평탄한 돌로 깐 앞뜰을 가로지르는 너비 5m정도의 금수하(金水河)에 대리석 난간이 있는 내금수교(內金水橋)가 있다.] 다리를 건너 천안문을 지나면 자금성으로 가는 길이 곧게 뻗쳐 있고 세계 최대의 성문이라는 오문(午門)이 나온다. 이곳에서 표를 사야한다.
오문 앞에서 명, 청 시대의 출정과 개선 행사를 거행하였고 황제를 거역한 대신이나 죄인들에게 채찍 형을 행하던 장소라 한다.
이 오문을 들어서면 고궁의 외조가 시작된다. 고궁의 남쪽 입구인 오문에서 북쪽 입구인 신무문까지의 일직선상에 각종 궁전이 있는데 남쪽에는 황제가 정무를 보며 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외조(外朝)라 하고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차례로 있고 그 북쪽에는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던 내정(內廷)으로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이 있다. 정치와 의식의 중심인 외조(外朝), 태화전(太和殿) 이 있다
태화문(이 문은 고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문으로 청동으로 만든 사자 한 쌍이 문 앞 양쪽에 서 있다. 동쪽의 수사자는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하며 서쪽의 암사자는 왼발로 어린 사자를 쓰다듬고 있는데 자손들의 번성을 상징한다.)을 지나면 고궁의 정전(正殿)인 태화전이 나온다.
그 규모의 크기, 화려함, 정교함으로 여기서부터 계속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다.
정말 하나씩 눈여겨보고 싶은 것들도 많은데 시간상 주마간산 (走馬看山)식으로 지나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3층 기단 위에 지어진 태화전은 전체 높이가 35m에 달하는 중국 최대 목조 건축으로 지붕은 튼튼한 황색 유리 기와로 덮여 있고 외관과 내부가 모두 선명한 극채색으로 칠해져 있다. 태화전이 올라앉은 3층 기단만 해도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1천4백88개의 기둥이 둘러 서 있고 단 아래에는 1천1백42개의 용머리 조각 배수구가 있는데 비가 올 때면 천여 마리나 되는 용의 입에서 일제히 물을 토해내는 광경이 장관이라 한다. 또 의식이 있을 때마다 향을 피우던 향로도 곳곳에 있다.
태화전 앞의 동, 서 양쪽에 선학과 거북을 하나씩 놓아두었는데 등에 뚜껑이 있어 향로의 역할을 하며 학과 거북은 장수를 의미한다. 황제의 즉위식, 원단(元旦)같은 축제일의 제전(祭典), 조서 반포, 황태자의 탄생 축하, 황제의 탄신 축하 등 중요한 국가적 식전은 모두 이 건물에서 거행되었다. 여러 차례의 소실, 재건이 반복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34년(1695년)에 재건된 것이다.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 뒤의 정자식 건물로 황제가 태화전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쉬던 곳으로 의식에 참가하는 중요한 관리가 먼저 황제를 알현하는 곳이며 보통 때는 식전에 쓰이는 제물을 보관하고 매년 천단, 지단의 제사 전날 준비에도 사용되었다. 내부에는 황제가 고궁 안에서 타고 다니던 승여가 진열되어 있다. 중화전 앞뜰 동쪽에는 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태화전의 3층 기단처럼 여러 층의 기단으로 되어있고 계단의 난간들과 기둥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단순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라는 실용적인 면만이 아니라 장식적인 의미가 훨씬 강해서 이 또한 그것 자체로도 예술품으로 느껴진다.
중화전 뒤편의 보화전(保和殿)은 지붕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안에는 단순한 보좌가 있으며 매년 정월과 섣달그믐의 연회가 열리고 과거가 시행되기도 하던 곳이다. 보화전 뒤쪽 계단의 중앙에는 대석주주(大石周住)라고 불리는 조각상이 있다.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노는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그 무게가 250톤이나 나가는 한 덩어리의 돌로 궁내 최대의 석조이다. 이 돌 조각 앞의 광장은 외조와 내정의 경계선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과 바다를 배경으로 꿈틀거리는 모습의 채색 벽화로 유명한 구룡벽(九龍壁)과 각국의 고시계(古時計)를 전시해 놓은 종표관(鐘表館), 황실에서 쓰던 귀한 물건을 전시한 진보관(珍寶館)등이 있는데 우리의 일정 때문에 곧바로 내정으로 들어가서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을 보았다.
황제의 일상생활이 남아있는 내정(內廷)은 왕비와 시녀가 살았던 곳으로 전제 군주가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모은 진품들이 가득한 곳이다. 내정으로 통하는 정문인 건청문(乾淸門)앞 금을 입힌 동(銅)사자는 황족의 화려하고 고귀한 점을 표현하고 있으며, 건청궁(乾淸宮)은 황제의 침실이며 일상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내부의 중앙에는 황제가 앉는 보좌가 있고 그 뒤에는 용을 조각하고 금박장식을 한 병풍이 있으며 칠보학, 향로도 있다. 수미단 계단도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있고 보좌 위쪽에는 순치제가 친필로 쓴 <正大光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 건물도 황제가 거처하던 곳인 만큼 눈부신 채색으로 단장되어 대단히 화려하다.
건청궁은 명대에 처음 지을 때는 황제의 침실, 곤녕궁은 황후의 침실로 지어졌으나 뒷날 그 사이에 교태전이 지어졌다. 이 교태전(交泰殿)은 내관들의 알현을 받는 곳으로 청대에는 황제의 옥새를 보관하였다 한다. 교태전 앞 동쪽에 있는 물 항아리(滴漏)와 구리로 만든 물통(銅壺)은 물시계이고 교태전 뒤의 곤녕궁(坤寧宮)은 명대에 황후가 거쳐 하던 중궁이었지만 청대에는 동난각(東暖閣)이라고 부르고 동 측은 황제의 신혼 침실, 중간과 서 측은 궁중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쓰였다. 이곳에는 17, 18세기 세계 각국의 시계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의 자명종 시계는 크기도 대단히 크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시간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곤녕궁 뒤에는 또 하나의 별천지가 있는데 바로 궁전의 후원인 어화원(御花園)이다.
이곳에는 각지로부터 모아온 자연이 만들어 낸 진기한 형태의 돌들이 가득하고 어화원 문안에 있는 향나무는, 뿌리는 두 나무이지만 윗부분에서 붙어 한 나무가 된 것으로 부부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라 하여 기념촬영 하는 부부들이 많았다. 양성제(養性齊) 앞에는 기기묘묘한 돌을 특이한 형태로 쌓아 올린 가산(假山)이 있고 일명 퇴수산(堆秀山)이라고 부르는 어경정(御景亭)에서는 황후와 황제가 북경 시내를 보며 경치를 즐겼다 한다.
고궁 제일 북쪽의 신무문(神武門)까지 쉬지 않고 일직선으로 지나왔는데도 거의 시간 반은 지났으니 정말 엄청난 규모이다.
흙으로 다져 굳힌 벽돌로 만든 이 궁전은 북경의 중심지에 있는 또 하나의 도시인 셈으로 높은 성벽과 성 밖을 흐르는 해자(해자의 넓이는 52m이며 깊이는 6m이다)에 둘러싸이고 사방에 하나씩 있는 4개의 문만이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니 완전히 격리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14년 동안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지었다는 이 건물은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랐을지 상상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천자(天子)라는 막강한 권력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겠다. 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도 따르는 만리장성과는 달리 오직 황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후에 청제국(淸帝國)의 국고가 바닥나서 1900년에는 궁궐을 유지할 수조차 없게 되었고 1925년에 궁궐 전체가 공식적으로 박물관이 되었다. 수많은 희생과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이 자금성은 그 자체가 위대한 예술품이며 명, 청대의 궁정 생활과 의식 구조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적이고 많은 유품이 지금의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고 하지만 눈가는 곳마다 보관되어 있는 예술품과 공예품들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중국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라고 생각된다.
다음은 천안문을 관광하였다.
천안문은 북경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광장의 남북길이가 880M, 동서의 넓이가 500M,면적이 44만 평방미터이다. 광장 안에는 100만 명의 군사가 들어가 집회 및 행사를 할 수 있는, 세계에서 도시가운데 있는 가장 큰 광장이다
천안문은 원래 명, 청 두 시기 황성의 정문으로 명나라 영락 15년(1417)년에 건조하기 시작, 당시"승천문"이라고 불렀다. 역사상 수차 불에 탔었는데 1651년에 개수한 후 이름을 "천안문"으로 고쳤다. 명나라, 청나라 때 천안문은 황제가 조령을 발포하던 곳이며, 매년 동지에 황제가 천단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지에 지단에 가서 땅에 제사를 지내고 중춘에 선농단에 가서 몸소 밭갈이하며, 황제의 대혼, 출정 등 중요 행사시에 출입하던 문이다. 때문에 천안문의 건축 규제는 매우 높아 성문이 5개, 중루의 둥근 기둥이 9개이며, 중간문 전후에 각각 한 쌍의 한백 옥석으로 만든 화표가 서있는데 꼭대기에 석수가 웅크리고 있고, 기둥에는 빙 둘러가며 구름송이를 조각하고 그사이에 거룡이 서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앞뒤에 두 쌍의 돌사자가 지키고 있다.
공화국 창건 후 천안문 앞 좌우에 관람대를 증설하고 그 앞에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매년 봄가을이면, 이곳은 갖가지 꽃들로 오색찬란하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매우 벅적벅적하다. 관람대 앞은 금수하로서 그 위에 5개의 한백옥석 다리가 가로 놓여 있으며, 다리 난간에는 아름답고 정교한 도안과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천안문 성루 앞이 천안문 광장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天安門廣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다. 天安門 앞에 펼쳐져 있는 중국 최대의 이 광장은 1949년의 건국 식전행사를 위해 정비되었다. 1958년에 인민영웅기념비, 1959년에 인민대회당, 중국혁명 박물관, 중국역사박물관이 낙성되었다. 그리고 1977년에 모주석 기념당이 낙성되어 현재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현재의 천안문 광장은 천안문에서 정양문까지 남북 880미터, 인민대회당에서 박물관까지 동서 500미터, 총면적 40헥타르 조금 넘는 대광장이다. 북쪽에는 180미터 폭을 가진 출입구가 동서장안가로 통하며 광장 남단의 정양문 성루의 양쪽에 각각 200미터 폭의 출입구가 전문외대가(前門外大街)로 통하고 있다.
이곳은 중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 기도 하다. 1919년 5.4운동이 시작되었던 곳도, 문화대혁명이 전개되던 곳도, 1966년 100만 명이 넘는 홍위병이 운집한 곳도, 1976년 4인방과 주은래 양편의 지지 세력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현장도 이 곳이다. 또한 1989년 6월 천안문사태가 발발 한 곳이 기도하다. 천안문광장은 1959년에 건설되었으며, 天安門에서 전문까지는 남북 880m, 인민대회당~박물관까지 동서 500m, 총면적 40만㎡나 되는 세계최대의 광장이다. 북쪽에는 천안문광장, 남쪽에는 전문, 동쪽에는 중국 역사박물관과 중국 혁명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광장에 둘러싸여 있다.
광장은 원래 흰 화강암으로 깔려 있었는데 1999년에 8개월간의 대대적인 보수를 단행했다. 바닥을 교체했는데 연분홍색 천연화강암 28만개를 사용했다. 광장에 설치된 확성기도 1959년에 설치한 것을 첨단장비로 교체했다.
진수이허(金水河) 분수대는 527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광장에서는 40만인이 집회를 할 수가 있는데 동서 장안가를 활용하면 100만 명이 넘는 대 집회도 가능하다. 장안가와 여기에 인접된 대로의 보도의 일각은 포석을 벗겨내면 그대로 화장실로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장막을 주위에 치면 30명 정도가 동시에 변을 볼 수 있는 야외 화장실이 10분 내에 이루어진다. 이 화장실은 하수도와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포석을 다시 끼우면 다시 보도로 환원된다.
[천안문 앞 화표]
고대 중국에서는 화표를 대부분 다리, 궁전, 성벽 앞에 세워 장식과 표징으로 삼았다. 천안문 앞뒤의 화표는 옹근 한백옥석을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 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무늬가 생동하여 화표중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人民 英雄紀念碑(인민영웅기념비)]
이 기념비는 1840년 이래 중화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기념비 높이 37.94m의 오벨리스크로 1958년에 완성되었다. 부지 3000평방미터, 기념비 정면은 천안문을 향하고 위에 모택동이 친필로 쓴 '人民英雄永垂不朽(런민잉슝용추에이뿌시우)' "인민영웅은 길이 빛나라." 또는 "인민의 영운은 영원불멸이다"라는 금을 도금한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은 주은래가 쓴 비문이다.
대좌의 둘레에는 아편전쟁(1840-1842), 태평천국의 난(1851-1864) 등을 비롯하여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여러 역사적 사실을 부조로 묘사해 놓았다.
1976년 4월 5일 청명절에는 수만의 시민들이 그해 1월 사망한 周恩來를 추모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런데 시민들이 기념비 앞에 바친 꽃다발을 철거하려는 당국과 시민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사태가 험악해 지자 군대가 동원되었다. 천안문사건이 일어난 현장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훗날 鄧小平(1903, 별명 '不倒翁-부도옹,뿌따오윙-오뚝이)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毛主席紀念館(모주석기념관)]
1976년9월에 서거한 모주석(모택동)을 기념하기위해 서거1주년인 77년에 인민영웅기념비 남쪽에 건립하였으며 내부는 모주석의 좌상에 있는 북쪽방, 모주석의 시신이 중국공산당 기에 덮여 안치되어 있는 남쪽 방으로 나누어있으며 "사진촬영불가"함으로 카메라와 핸드백은 아예 기념관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못한다.
짐은 기념당 입구 옆의 수하물 보관소에 맡기고 입장한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멈추어 설 수 없으며, 경비인 해방군 용사들의 감시가 엄격하다. 모택동을 비롯하여 주은래, 朱德(1886-1976) 등 대장정의 주역들과 劉小奇(1898-1969) 등의 생전의 활동을 돌아볼 수 있다.
[中國歷史博物館(중국역사박물관) 과 中國革命博物館(중국혁명박물관)]
인민대회당과 서로 대칭되는 건축물로서 총면적 6만 9000평방미터이다. 박물관 내에는 170만 년 전의 원인유적부터 1840년 전까지의 문화재 30만점이 수장, 진열되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1949년 후의 고고 발굴 품으로서 매우 높은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人民 大會堂(인민대회당)(런민따후이땅)]
전국인민대표대회 청사로서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만인대회당, 5,000명이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는 대규모 연희홀, 전인대 상무위 오피스 3개 부분으로 구성, 대회의장 이외에도 27성(省)과 자치구의 이름을 붙인 넓은 방들이 있다. 총면적 17만여 평방미터이다. 정문 처마 부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장이 상감되어 있다. 건축이 웅장하고 장엄하다.
천안문 광장의 서쪽에 있는 全國人民大表大會(전국인민대표대회 )줄여서 전인대(全人代 )또는 인대(人代)가 열리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에 해당된다. 1958년 10월부터 1959년 8월까지 10개월 동안에 준공하였다. 남쪽 336m, 동서 206m의 부지에 세운 중국최대의 건물로 천안문광장의 서쪽에 있다. 건축이 웅장하고 화려하며 민족적 품격을 느낄 수 있으며 이곳은 전국 인민 대표 회의의 회의장이며 당이나 정당 각 기관이 개최하는 대 집회의 회의장으로도 쓰인다. 중국 정부의 공식 연희 장소로 이용될 뿐 아니라 돈을 받고 연회장소로 빌려 주기도 한다. 일반인에게도 공개한다.
이상으로 자금성 및 천안문을 관광하고 나니 과연 중국은 대국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건물의 웅장한 규모가 관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짓게 만든다. 14년간 100만 명의 인부가 이 공사에 동원되고, 사용된 건축 자재의 양도 벽돌 1억만 개와 기와 2억만 개가 사용됐고, 기둥에 쓰일 나무는 사천지방에서 조달된 것으로 운송에만 4년이 걸렸고, 전각의 받침대와 부조에 쓰인 돌은 50km 떨어진 채석장에서 날랐으며 돌은 하나의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 것도 있어서 당시 부역자들은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든 뒤 돌들을 날랐다고 하니 그 당시 이성을 쌓기 위하여 동원된 인력과 자재의 어마어마한 양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고 200톤이나 넘는 돌을 운반키 위한 기지가 또한 경탄하게 한다. 이렇게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자금성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옛날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화려했던 궁궐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수천수만 명의 관광객만이 이곳에서 옛 모습을 엿보려 하고 있나! 그 옛날의 영웅호걸이나 위엄이 깃든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고 있으리라! 어제 관광했던 이화원보다도 훨씬 많은 관광객이 이곳저곳에서 갈 길을 막고 바쁜 일정을 늦추고 있다. 이곳의 중국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수효가 어마어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인구가 발에 체일 정도로 많기에 우리나라의 6.25사변 때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인한 1.4후퇴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중공군(중국의 군인)부대 약 100만 명 정도가 전쟁선포도 없이 압록강을 건너 인해전술로 유엔군을 공격하여(유엔군이 공격하는 중공군을 죽여도 죽은 시체를 넘어 자꾸만 몰려오는 적을 어쩌지 못하고 후퇴하여)중공군에게 서울을 빼앗긴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더라도 이럴 수가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중국 사람은 엄청난 수효 때문인지 사람을 경시하는 것은 6.25 당시와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생각 했기에 남의 나라의 전쟁에 까지 참여하여 자기의 동족을 무참히 죽이지 않았을까?
자금성을 관광하고 나니 오후 7시 가까이 되었다. 저녁 먹고 쉬기 위하여 호텔에 갔다. 내일은 백두산 관광을 위하여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여야 한다고 한다. 내일을 위하여 일직 자야 하겠다.
8월 17일 오전 6시 백두산 등정을 위하여 장춘으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다. 교통수단은 북경에서 출발하는 장춘행 고속 전철이다. 북경서 장춘까지의 거리는 1,320㎞로 시속 250㎞로 달려서 6시간 30분이 걸린다. 7시 10분에 열차에 승차하였다. 열차 안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여자 공안원이 열차 안 선반 위에 있는 손님 짐 가방을 하나하나 선반에서 떨어지지 않게 정리한다. 열차 진행 방향 앞에서부터 무질서하게 널려있는 짐을 정리하는데 몇 십이 걸리는 것 같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열차가 출발하여 장춘을 향하여 달리다 첫 번째 정차 역에 정차한다. 내리고 오르는 사람이 조금 있다. 다시 열차가 출발한다. 창밖을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펼쳐있다. 이곳은 역사시간에 배웠던 만주 벌판이다. 우리 조상 고구려의 옛 영토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의 김제 만경들만을 보아온 나에게는 지평선만이 펼치진 만주 벌판이 경이롭기 까지 하다. 옛날 삼국이 신라에 의하여 통일되지 않고 고구려에 의하여 통일되었다면 지금 달리고 있는 이곳이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였으리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많다, 이것 또한 국운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의 토지는 비옥하지 못한 까닭인지 군데군데 옥수수만 심겨져 있고 벼를 비롯한 다른 곡식이 심어지지 않고 또 불모지가 많이 보인다.
기차는 계속해서 장춘을 향해 달리고 있다. 옛 후금(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옛 이조 인조 임금 때 일어난 병자호란과 3학사의 생각이 떠오른다. 병자호란은 1636년(조선 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이다.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국(君臣之國)으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2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2월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2월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2월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2월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져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 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 태종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册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끌고 간 이유는 돈을 받고 여자들을 되돌려 주기 위함이었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거나 쫓겨나는 등 문제가 심각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순결을 지키지 못한 여자를 지칭하는 말로 환향녀라는 하는 말이 생겨났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척화의 주모자인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가 2월 15일 청나라에 끌려 삼각산(현재의 북한산)을 지나가면서 슬프고 국가를 생각하는 일념에 지은 시조가 생각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고속열차는 심양을 출발하였다. 드디어 북경에서부터 6시간 30분의 긴 여정 끝에 장춘에 도착하였다. 장춘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30분경이었다. 이곳에서 다시 안내원과 만나기 위해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oz연합’이라고 쓴 피켓을 든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안내원의 말이 내일 백두산에 등정을 하려면 다시 버스를 타고 백두산 밑에 있는 이도 백하라는 곳까지 가야하고, 이곳 장춘에서 이도 백하 까지는 5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백두산 밑 이도 백하 까지 가야만 했다.
장춘을 2시경에 출발했다. 장춘시내를 10여분 후에 벗어나자 들판이 나타난다. 이곳이 말로만 들어온 만주 벌판이다. 보이는 것은 옥수수 밭뿐이다. 논은 볼 수가 없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은 옥수수 밭과 옥수수 밭을 중심으로 군데군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농촌 마을뿐이다. 지평선위에 펼쳐진 작은 고개를 넘으면 먼저와 같은 옥수수 밭이 나타나고, 이곳을 지나면 다시 펼쳐지는 옥수수 밭, 밭 가운데 모여 있는 시골 마을, 이것이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만주 지방의 시골 풍경이다.
백두산 가는 도중 휴게실 앞에서
이윽고 7시를 지나자 이곳 만주 벌판에도 어둠의 정적에 쌓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의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70년대 이후 부터는 농촌에도 전기가 들어가고 도둑 예방 및 주민 생활환경 개선으로 밤이 오면 어느 동네 할 것 없이 외등 (가로등)불빛으로 골목길까지 밝게 비추고 있지만 이곳은 고요한 적막감만이 흐른다. 어둠이 찾아와도 외등(가로등)은 아예 없고 어느 누구의 집에서도 새어 나오는 불빛하나 없다. 전주와 전선은 시설되어 있으나, 전기가 없어서 송전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절전하느라고 그런지 모르겠다.
버스로 몇 십 분을 달려도 불이 켜진 집이 없다. 이곳 마을은 비어 있는 집이 아닐진대 이곳 사람들은 저녁에 무엇으로 생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녁을 먹은 다음 내일을 위하여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만에 겨우 마을 어떤 집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이 하나 보인다. 반가움에 여럿이 이구동성으로 저 집은 아마도 리 장 집인가 보다라고 농담을 하였다.
버스는 계속해서 어둠을 뚫고 백두산 밑 우리가 숙박할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어언 시간은 8시가 되었다. 우리가 저녁 식사 할 곳이 안도라는 자그마한 도시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읍’정도 되리라. 안도 시내로 들어서니 우리나라의 사물놀이 농악 소리가 들린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이 저녁을 먹고 난후 소화를 시키고 여가를 즐기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농악을 치고 나머지 사람들은 흥겹게 춤을 추며 초저녁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조선족인가? 아니면 한족인가?를 안내원한테 물어 보았다, 안내원이 대답하기를 모두가 한족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우리나라에서 60-70년대 시골에서 자랄 때 풍장(사물놀이) 치는 것을 목격하는 것 같다. 그 당시 농촌에서는 마땅한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동리 사람들이 저녁을 먹으면 마을 가운데 집합장소로 지정된 곳에 모여 동네 어른들이 풍장이라고 하는 사물놀이를 하며 흥겹게 밤늦도록 놀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지금은 이런 풍습은 시대의 사조에 밀려 사라졌고, 현재는 월등히 우월한 문명의 이기의 덕택으로 훌륭한 여가를 즐기고 있지 않는가?
그렇지만 이곳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60-70년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 안도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니 8시가 훨씬 넘어 9시 가까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도 백하 까지는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도 백하까지 가는 길은 산골길로 구불구불하고 노폭도 좁다. 피곤해서인지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 보니 이도백하에 도착하였다.
정해진 호텔로 들어가 짐을 풀고 누웠다. 오늘은 하루 종일 차만 탔다.
8월 11일, 오늘은 백두산 등정의 날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뜨고 밖을 보니 비가 오기 시작한다. 이곳 만주는 가물어서 비를 가다린지 무척 오래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평생에 한번 마음먹고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보러 왔는데 비가 오다니 하늘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안내원의 말은 백두산의 날씨는 변화무쌍하고 예측불허하다고 한다. 이곳은 평지에서 비가 오더라도 천지에는 활짝 개일 수가 있으니 조급한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면서 모택동은 백두산 천지를 두 번 와서 두 번 다 보았으나, 강택민은 두 번 와서 두 번 모두 천지를 못 보았다고 한다. 특히 강택민은 천지를 보기 위하여 천지 정상이 맑은 것을 확인한 후 헬리콥터로 백두산을 등정하였으나 역시 천지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백두산 천지는 보여주는 사람에게만 보여준다는 것이고, 이곳에 와서 천지를 보면 모택동 파요, 보지 못하면 강택민 파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어찌 되었건 백두산 등정을 위하여 아침 식사를 마치고 구내 버스를 타러 지정된 장소로 출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의 수효는 궂은 날씨인데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를 가도 중국 땅에서는 13억 중국인이 관광하는 곳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디를 가도 질서가 무시되고 새치기 하는 중국 사람들로 인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한다. 백두산 등정하는 찦차의 운임이 1인당 20위안(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화폐로 환산하면 약 2만원이다. 옆에 있는 한국 사람이 한마디 한다. 북한이 백두산을 관광 개발하여 세계인들에게 개방하여 관광객을 받아들인다면 엄청난 관광 수입으로 북한 경제에 크나큰 보탬이 될 수 있으련만 중국만이 개방하여 관광 수입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백두산 천지를 왕복하는 짚차에 승차하여 천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찦차를 운전하는 기사는 꼬불꼬불한 길을 겁 없이 잘도 운전한다. 옆을 보면 낭떠러지고 낭떠러지를 벗어났다 싶으면 급경사에 90도 급 커브길이다. 타고 있는 우리는 공포에 질려있는데 운전기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희희낙락 운전한다. 이윽고 정상이라는 곳에 당도하였다. 차에서 내려 보니 산 아래에서 보다 빗발이 더 세다. 해발 2,670m의 천문봉이 눈앞에 나타난다. 2,670m의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를 날려 보내려고 한다. 험한 비바람 속에서 몸을 겨우 겨우 지탱하며 정상을 향해 약 50m의 거리를 올라간다. 사방은 가랑비와 물안개에 10m앞을 분간하기 힘들다. 그러나 백두산 정상에 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앞으로 전진하여갔다. 겨우겨우 정상이라는 곳에 도착해 보니 천지라는 표시판은 선명하게 나타난다. 아! 이곳이 66년 만에 처음 와 본 민족의 영산이며 민족의 정기가 어린 백두산 정상이란 말인가? 비록 천지는 보지 못했지만 백두산 정산만이라도 올라와서 보았다는 것에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산 정상에서 이곳저곳을 보고 있노라니 괴암 괴석이 웅장한 자태를 태고 때 모습 그대로 몇 겁의 세월동안 이곳을 지키며 지금까지 뽐내고 있다. 천문봉은 주로 회백색과 황색의 화산 부석으로 구성되었는데 부석은 석질이 가볍고 구멍이 많다. 나무하나 풀하나 없는 모래와 자갈 돌 만이 서로 엉키어 태고의 형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조그마한 자갈 하나라도 기념으로 가져가다 중국 공안원에게 들킨다면 많은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다음은 백두산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자. 백두산의 높이는 2,744m이고 북한의 양강도(량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성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최고봉인 장군봉(2,744m) 외에 향도봉(2,712m), 천문봉(2,670m), 쌍무지개봉(2,626m), 청석봉(2,662m), 백운봉(2,691m), 차일봉(2,596m)등 2,500m이상 되는 봉우리가 16개나 된다. 백두산 천지 물의 양은 19억 5천5백만 톤(t)이며 백두산은 불함산, 개마대산, 태산, 도태산, 태백산, 장백산으로도 불리 운다.
백두산은 화산활동으로 인해 분화구가 패인 후 그곳에 물이 고여서 넓은 호수가 생겨났다 이 호수를 백두산의 천지라고 한다. 그리고 화산활동에 의하여 데워진 지하수가 올라와서 온천이 되었다. 여름철에는 사슴 ·곰 등의 짐승이 물을 마시기 위해 백두산 천지로 모여든다. 호수의 수온은 10℃ 정도 이고 식물성 부유생물 ·작은 곤충류 ·물속 이끼류가 살고 있다. 하지만 1960년 이래에 4차례에 걸쳐서 모두 5종의 어류 500여 마리를 방류하였다. 지금 붕어, 산천어 등이 살고 있다.
백두산은 대대로 우리민족이 정신적 근거로 삼았던 민족의 영산이다. 단군조선을 비롯하여 부여, 고구려, 발해가 백두산을 배경으로 삼아 일어났다. 또한 우리민족 외에도 금(金), 청(淸)등 여진족이 세운 나라도 이 백두산을 배경으로 일어난 나라들이다.
백두산은 휴화산으로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여러 시대의 지층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생대와 신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단열구조, 파열구조 단층이 발달하였다. 화산분출은 쥐라기(약 6억 년 전)에서 신생대 제4기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신생대 제3기부터 활발히 진행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질 용암이 대량 유출되어 약 5,350㎢의 넓은 백두용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약 20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약화되어 지금의 산세를 형성하였다. 화산활동 후기에는 대연지봉, 소연지봉, 대각봉, 무두봉, 베개봉, 청봉 등 부속화산들이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적갈색 다공질현무암용암의 분출로 생겼다.
최근의 분출은 1597년·1668년·1702년에 있었다고 문헌에 전하고 현재는 백두산 주변 50km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 시 용암이 잘게 부서져 쌓인 부석층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천지 부근의 부석층은 두께가 20m 가량 된다. 화산재, 화산탄, 화산모래 등의 층도 남아 있다.
토양은 여러 해 동안 동결층의 영향과 한랭한 기후에서 형성된 토양, 평탄한 현무암대지 파습조건에서 형성된 토양과 수평대성을 띤 포드졸성 갈색산림토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백두산의 괴암괴석
백두산의 괴암괴석
백두산의 괴암괴석
백두산의 괴암괴석
백두산의 괴암괴석
기후는 전형적인 고산기후이며, 한국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한 곳이다. 연평균 기온은 6∼8℃, 최고기온 18∼20℃, 1월 평균기온 -23℃(최저 -47℃), 1월의 평균 일교차는 7.5℃, 7월의 평균 일교차는 4.8℃이다. 연평균 상대습도는 74%이며 여름에 가장 높고 겨울에 낮다. 북서풍과 남서풍이 강하게 불고 최대 풍속은 40m/s,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며, 천지 부근은 강한 돌개바람인 용권이 자주 일어난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지방에서 오는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안개가 많이 끼는데 7~8월에 안개가 끼는 날수는 33일 가량 되며, 구름이 많고 천둥현상이 잦으며 주로 눈·비를 동반한다. 벼락회수는 연간 48회이고 그중 60∼70%는 6∼7월에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이며,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된다.
백두산에 서식하는 동물은 검은담비, 수달, 표범, 호랑이, 사향노루, 사슴, 백두산사슴, 산양, 큰곰 등 희귀동물이 많고, 조류로는 204종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등이 있으며, 특별보호대상 조류로 메닭, 세가락메추리, 북올빼미, 긴꼬리올빼미, 흰두루미, 재두루미, 원앙, 청둥오리, 붉은허리제비, 숲새 등이 있다. 북살모사와 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다. 300과 2,7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데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종비나무, 잎갈나무, 좀잎갈나무, 백두산자작나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교적 분포속도가 빠른 식물종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받기 전의 식물종들이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 자란다. 이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구름꽃다지·백리향·만삼·왜당귀 등이 자란다. 빙하기 이후 고산조건에 적응한 담자리꽃나무, 시로미, 물싸리, 두메김의털, 장군풀, 산할미꽃, 두메아편꽃, 큰산싱아, 각씨투구꽃, 끈끈이주걱, 두루미꽃, 눈사버들, 구름국화, 바위구절초, 만병초 등 한대성 식물들이 자란다. 또 매저지나무·들쭉나무·백산차 등의 냉대성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금방망이·삼잎방망이·자주꽃방망이·무수해·황기·부채붓꽃·손바닥란·동의나물·분홍노루발풀·왕바꽃·메바꽃·구름범의귀풀·물매화 등 냉대성 초본식물들이 있다. 산 정상에는 천지(天池)가 있는데 면적 9,165㎢, 평균수심 213m, 최대수심 384m이다. 천지의 물은 높이 67m의 장백폭포(長白瀑布)가 되어 얼다오바이강[二道白河]으로 떨어져 쑹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천지에 시원을 둔 폭포는 백두폭포·사기문폭포·형제폭포·백두밀영폭포 등이며 압록강 상류, 두만강 상류, 산다오바이강[三道白河]으로 흘러들어간다. 천지에는 백암온천과 새로 개발된 백두온천이 있으며, 주변에 장백온천과 제운온천이 있다. 허항령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지연(三池淵)은 대소 4개의 얕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위 길이가 4.5km, 수심 3m인 천연호수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난 휴양지이다. 문화재로는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있다.
장백폭포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지정된 시간이 경과되었으므로 짚차에 승차하여 다시 하산하였다.
다음으로 간 곳은 長白瀑布였다. 관광지를 운행하는 구내 버스 종점에서 하차하여 장백폭포까지 거리는 1,200m이다. 걸어서 왕복 1시간 30분이 걸린다. 오르막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등산로를 따라 장백폭포를 향하여 올라갔다. 오르는 등산로 주변에는 갖가지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신기한 이름 모를 풀도 많았다. 등산로 주변에 우리가 흔히 뜯어 먹는 산나물 같이 생긴 풀이 많은데 안내원이 절대로 뜯지 말라고 한다. 독초라고 한다. 오르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취나물 같이 생긴 식물이 토란잎만큼 크게 여기저기 자라고 있으나 이것이 모두 독초라고 한다. 50분 정도 걸려서 장백폭포 밑에 도착했다.
장백폭포는 일명 비룡폭포로도 불리 운다. 백두산 16개의 산봉우리가 천지 기슭을 따라 병풍 모양으로 천지의 삼면을 둘러싸고, 이 천지의 물은 북쪽의 트여진 곳인 달문을 통하여 흘러나온 후 승차하(천하)라고 불리 우는 내가 되어 구불구불 외돌며 약 1,000m를 흐르다가 절벽에 임하여 아래로 쏟아져 내리며 높이 68m에 달하는 장백폭포를 이룬다. 물의 양은 많지 않으나 가파른 지형의 영향으로 물살이 빨라서 먼 곳에서 보면 하늘을 오르는 다리를 연상하게 하여 사람들은 이를 '승사하'라고도 부른다.
꼭대기에서 36m 아래까지는 곧게 쏟아져 내리며, 그 아래에서는 비탈진 벼랑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킨다. 떨어진 물은 송화강으로 유입된다. 200m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폭포 옆에는 천지를 향하는 계단이 있는데, 전에는 이곳을 통해 천지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지금은 낙석이 많아 이 등산로는 폐쇄되었다. 백두산에는 비룡폭포 이외에 백하폭포, 동천폭포 등이 있다. 북방의 모든 폭포는 봄에서 가을까지 물이 있어 장관을 이루지만 겨울이면 물이 언다. 비룡폭포만은 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 흘러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 기념 촬영을 한 후 하산하였다.
소천지
다음에 들른 곳은 소천지이다.
해발 1,780m에 달하는 이도백하의 서안에 위치한 소천지는 장백폭포에서 북쪽으로 3㎞떨어져 있다. 2개로 나뉜 소천지는 약200m의 간격을 두고 있으나, 크기와 양상이 비슷하다. 그중 사스래나무 숲속에 묻혀 있는 것의 호면은 타원형을 이루고 면적은 5,380㎡, 수심은 10여m이며 호수의 물은 맑고 푸르다. 다른 하나는 그보다 수심이 조금 얕은 편이어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하나는 청록색을 띠고 다른 하나는 적황색을 띠어 마치 임해 속에 박힌 한 쌍의 이색 보석 같아 흥미를 자아낸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두 작은 호수를 대환호. 은환호라고 부른다. 천지의 물은 들어오는 물은 없어도 나가는 물이 있는 반면 소천지의 물은 들어가기는 하지만 나가는 곳은 없다.
이곳을 20여분 관광한 다음 지하삼림으로 향했다.
지하 삼림
지하삼림의 입구엔 작은 휴식 터와 함께 매점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왜 지하삼림이란 이름표가 붙었을까?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산림이 울창해서일까? 아니면 정말 땅속에 숲이 자라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크기는 얼마나 될까? 그 궁금증은 1350미터를 걸어내려 간 뒤에 펼쳐진 장관을 보고서야 제대로 알아챌 수 있었다.
지하삼림은 입구에서부터 1350미터의 나무판자로 된 내리막길이 조성되어 있다. 빽빽한 나무들이 스스로 개체수를 줄이려는 때문인지 쓰러진 큰 나무들이 많다. 푸른 이끼가 마치 융단을 펼쳐놓은 것 같다. 지하삼림은 중국, 한국, 일본 지역만의 고유한 식물이 자라는 보고라고 쓰여 있는 팻말과 함께 생태계 보호를 위해 지정된 통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팻말이 군데군데 보인다. 드문드문 고유 식물의 명패가 있는 것으로 보아 특이한 식물이 많은 것 같았다. 지하삼림이라 불리는 수림의 바다는 땅이 꺼지면서 생겨난 대협곡에 펼쳐지는 장관이었다.
이곳 지하삼림의 관광을 끝내고 나니 어느덧 오후 4시가 넘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백두산 관광은 이것으로 끝내고 잠시 휴식한 후 내일 귀국을 위하여 장춘을 향하는 전용버스에 승차하여 오후 10시 넘어서야 호텔에 도착하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