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 科田法)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나라 안의 모든 토지를 나라의 소유로 하여 관리들에게 등급에 따라 나누어 주던 토지 제도. 고려공양왕 3년(1391년)에 이성계, 조준, 정도전 등의 힘으로, 당시까지 문란했던 토지 소유 관계에 대하여 개혁을 단행하여 마련한 제도이다. 곧 나라의 공무를 맡아 보는 모든 사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그 토지에서 나는 생산물의 일부를 차지함으로써 생활 기반으로 삼게 하자는 데 목적을 둔 제도이다. 그리고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군사비 등을 마련할 목적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다만 과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나누어 주었고, 경기도 이외는 공전으로 하여 군전으로 삼았다. 조선도 개국 초에 나라의 어려운 재정과 국방비 마련, 그리고 새 왕조의 중심 세력에 대한 물질적인 보장을 위하여 과전법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과전은 본인이 죽은 뒤 그 처자가 상속할 수 있었고, 남에게 넘겨 줄 수도 있었다.
토지제도 (과전법 체제)
공양왕 3년 도평의사사에서 글을 올려 과전 지급의 법을 정할 것을 청하자 이를 듣고 받아들였다. 문종 때 정한대로 경기도를 크게 둘로 나누어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전·현직 관리들을 18등급으로 나누어 토지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경기도와 다른 도의 토지를 모두 새로 조사한 다음 경기 13만 여 결과 지방 49만 여 결의 실제 경작 토지와 경기 8천 여, 지방 16만 여 결의 경작되지 않은 토지를 확인하였다. 모든 토지 5결을 묶어서 이름을 지정해 준 다음 토지 대장에 기재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토지 대장을 재조사한 다음 토지를 전면적으로 다시 지급하였다.
경기는 나라의 근본임으로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들을 우대하여야 한다. 무릇 경기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사람들은 전·현직을 묻지 않고 각기 등급에 따라 경기의 토지를 지급 받도록 한다.…지방은 왕실의 울타리이니 마땅히 군전을 설치하여 순사를 양성할 것이며, 양계의 과거처럼 군수에 충당시킬 것이다. 6도의 한량 관리는 자품의 높낮이를 고려하지 말고, 각기 가진 토지의 많고 적음을 감안하여 각 군전 5, 10결을 지급하도록 한다. <고려사 식화지>
과전법 특징
1. 고려 말 권문 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2. 토지의 소유권을 지급한 것이 아니라 수조권을 지급한 것이며, 원칙적으로 사망 후 반납하게 하였다.
3. 모든 토지는 국가가 수조권을 가지는 공전과 개인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준 사전으로 구분된다.
4.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에 한하여 지급되었는데, 이는 지방 세력의 성장을 막기 윈한 조치였다.
5.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지 않는 대신 농민의 경작권을 보장하였다. (전주가 전객의 소경전(경작지)을 빼앗으면 태와 장에 처한다)
6. 공·사전을 막론하고 수조지 1결당 논은 쌀 30말, 밭은 잡곡 30말을 걷을 수 있다.
전제 개혁을 주장한 조준 등의 세차례에 걸친 상소와 이에 맞서는 구세력의 축출, 남부 6도의 양전 사업과 토지 대장 소각이라는 극적인 과정을 거쳐 1391년 5월 과전법이 반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몰수된 상당수의 사전이 공전으로 귀속됨으로써 국가 수조지의 확대 뿐 아니라, 농장에 예속되어 있던 농민들이 국가의 부역 부담자로 환원됨으로써 국가 재정 확보에도 유리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경기에는 관리들의 과전이, 그외 지방에는 한량관의 군전이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교주도와 양광도, 서해도에서 각각 6, 13, 9개 현을 떼어내 13현에 불과하던 경기도를 44개현으로 확대 개편하게 되었다. 과전법의 발표로 인해, 지배층 사대부에 대한 수조지의 분급과 수조권에 근거한 토지 점유 및 농민 지배는 전시과의 원리와 크게 다를 바는 없지만, 수조지의 획득이나 전수를 국가 기관이 담당한다거나 수조 과정의 관리에 대한 국가의 감시가 강화되었다. <역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