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게(無常偈) /보현스님
종합편성 방송인 조선TV의 ‘대찬 인생’ 프로그램에서 보현스님이라는
한 비구니(여자 스님)에 대한 인생 스토리를 보게 되었다.
그의 법명(法名:중의 이름)이 보현스님이었다.
보현스님은 젊은 한 때(80년대 초반) 연예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여인이라고 한다.
보현스님은 어려서부터 노래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미모가 출중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고등학교 때 길을 가다가 한 남자로부터
“모델에 참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승낙해
여러 가지 광고모델로 참여해 화장품이나 음료모델 등 상당한 인기를 누려 많은 돈도 벌게 되었다고 했다.
그 당시 모델 한 번 출연에 1백만 원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의 돈으로 따지면 엄청난 모델료라는 것이다.
그의 집은 가난했었다. 거기다가 그는 큰 딸로 자연스럽게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예능방면에 만능 재주를 갖추었던지 에어로빅을 능란하게 하여
에어로빅 강소로도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다가 그의 노래솜씨가 이봉조 씨의 눈에 띄어 노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연예계에 나서게 되면서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이경미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경미의 노래는 히트를 쳐 KBS 드라마 <사모곡>의 주제가를 불렀고
다른 노래도 여러 곡을 내놓아 인기의 절정에 도달해 KBS의 신인가수 대상 후보에도 올랐다고 한다.
이때 그의 나이 18세 전후였다.
이런 상황을 ‘대찬 인생’에 초대된 현미, 송도순, 조영기씨 등 여러 사람이 사실임을 이야기 했다.
이렇게 인가가 상승하자 여러 곳의 밤업소에서 초청을 받아
정신없이 뛰게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되어 돈을 뿌리다시피 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그는 밤업소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총수들의 초청도 받아 그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심지어 대통령의 부름을 받기도 해 출연했는데 청와대를 들어갈 때에는
두 번의 대통령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교육을 받은 후에 대통령을 뵙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는 과정 중에 이경미는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가는 곳 마다 단지 예술적으로 노래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경미의 감추어진 깊은 곳을 동경(憧憬: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하는
검은 추파가 던져 지드라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 이경미는 환멸(幻滅: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을 느꼈고
종래(從來:끝내)에는 자기가 동경했던 불교로의 귀의(歸依:돌아가 몸을 의지함)를 결심하고
부모도 몰래 절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멀지 않아 어머니는 그를 찾아 다시 환속(還俗:일반 세상으로 돌아옴)했고
이어서 다시 연예생활을 계속하게 되었으며, 이런 과정이 다시 반복되었지만,
하지만 그는 결코 이런 연예생활을 지속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한다.
이러는 중에도 이봉조 씨가 현미 씨와 이혼을 한 상태에서 고혈압, 당뇨 등 많은 병을 앓고 있어서
그를 아버지라 칭하며 모든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이봉씨와의 무언가 있다는 흉을 보는 과정까지 갔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현미 씨의 증언은 그런 일은 없었으며 진정한 부모처럼 이봉조를 묘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현미 씨는 “나는 그 당시 미국에 있었는데 경미가 자기 전남편을 성심껏 보살펴 준 것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를 느꼈었다”고 했다.
이경미는 이런 저런 세상사에 대한 환멸을 이기지 못하고 종국(終局:맨 나중)에는
방송국과 약속한 생방송을 펑크 내면서 까지 속세를 떠나고 말았다고 했다.
그는 가족에게 미국에 간다고 하며 가족들을 공항으로 전송을 나오도록 했다고 했다.
그래서 전송을 받으며 출국하는 척하다가 식구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서울의 고속버스 터미널로 달려와 버스를 타고 지리산으로 스며들어 불교에 귀의해 숨어 살았다고 했다.
이러는 중에 우연히 지체장애아를 알게 되여 그들을 돕기로 작정하고
폐교된 학교를 빌려 그들(3명)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기회에 버려진 영아(?兒:젖먹이 아이)를 만나게 되어 그도 돌봤는데
지체장애자들을 전문으로 돌보지 않고 영아를 돌본다고 지적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순조롭지 않았다고 했다. 빌려 쓴 학교를 비어주게 되어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이용해 돈을 벌어서 그들을 돕는데
사용할 목적으로 노래를 다시 부르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처음 부르게 된 노래가 <무생화>라고 했다.
그는 출연한 프로에서 직접 나서 너무도 간절한 모습으로 ‘무생화’를 가냘프게 불렀다.
그의 계획은 금년 가을부터 콘서트(concert:음악회)를 열려고 하니 많은 성원을 바란다고 했다.
보현스님은 지금도 아주 단아하고 해맑은 아름다움이 조금도 시들지 않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 가냘퍼 보이고 의지할 곳 없는 그이지만,
병든 소년들을 돕기 위해 그리도 환멸 했던 속세 속으로 다시 뛰어드는 모습이
시청자인 나의 눈에 물기를 돌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는 가냘퍼 보일뿐 마음 가운데 철주(鐵柱:쇠기둥)가 선 대찬 여인이었다.
그분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축복하고 싶다.
글출처/http://cafe.daum.net/crcb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