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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寺 釋迦塔 基壇 佛像 小考
-金銅立像出土 年代 修正-
진관 (문학박사)
논문요약
본 연구의 목적은 2013년 7월, 불국사 석가탑을 해체 복원하는데 기단 속에서 금동불상이 나왔다고 신문 보도를 하였는데 그 금동불상이 8세기 통일신라시기에 금동불입상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불상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경덕왕 1년에 탑속에 넣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불국사 석가탑에 넣었던 불상은 그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불국사 석가탑이 완성한 해가 경덕왕 1년(경덕왕 742)의 해인데 경덕왕 9년 김대성이는 벼슬을 버리고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 석불사의 창건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재청에서는 최성은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경덕왕 1년에 석가탑 속에 넣었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삼층 석탑을 조성하던 742년(경덕왕 1년)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김대성은 三國史記 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경덕왕景德王 九年 春 一月 시중 대정이 물러나고, 조량을 시중으로 삼다(750년 1월 미상 음력) 9년(750년) 봄 정월 시중 대정大正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조량朝良으로 시중을 삼았다. 김대승은 경덕왕 10년에 전생의 부모와 금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와 석불사를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김대승은 경덕왕 10년에 불국사 석가탑 불사를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고 불국사 석가탑의 완성은 혜공왕대를 지나, 대력大歷 9년 갑인甲寅(774년)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국가가 이를 완성하여 끝마쳤다. 그러므로 경덕왕 1년이 아니라 경덕왕 10년의 불국사 석불사 불사가 시작한 해로 볼 수 있다.
<주제어> 경덕왕 김대승 불국사 석가탑 금동입상.
1. 서론
1. 연구의 목적
Ⅱ. 2경덕왕 시대의 불교
1. 경덕왕 왕위에 오름
1) 경덕왕 민장사의 영험에 감동
2) 경덕왕 5년 신라에서 최초 승려 150명 탄생
3) 경덕왕 10년 불국사 석굴암 불사시작
2. 경덕왕 13년 불교
1) 불국사 의상의 제자 거주
2) 경덕왕 17년 왕자 탄생
3) 경덕왕 19년 월명사 향가 지음
3. 경덕왕 22년 단속사 건립
1) 경덕왕 24년 진표 금산사 미륵장육상 조성
2) 경덕왕 24년 충담 안민가 지음
Ⅲ. 해공왕 시대의 불교
1 혜공왕 왕위 오름
1) 해공왕 4년 황룡사에 별이 떨어짐
2) 해공왕 16년 상대등 김양상 반란
Ⅳ. 結 論
V. 참고문헌
1. 서론
I. 연구의 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 2013년 7월 불국사 석가탑 해체과정에서 기단 속에서 금동불상이 나왔다고 신문에 보도를 하였다. 그 금동불상이 8세기 통일신라시기에 금동불입상이라고 발표하였다. 금동불입상의 발견은 한국불교계는 물론 국가에서도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한국불교계는 불교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 문화재를 소중함을 모르고 사원의 논쟁 속에서 불교승려들에게는 수행의 덕목은 간화선을 주장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선승들에게만 주어진 최고의 이상으로 여기고 수행에 전념했다. 조선시대의 불교계는 유생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자신들이 지켜야 할 불교의 역사성을 지키지 못하고 유생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듯이 한국불교계는 정화 이후에 불교문화에 대하여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한 결과로 인하여 현존하는 佛敎文化財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관리하는 연구자들을 발굴하지 못했다.
이 같은 문제는 불교계에서 운영하고 있는 불교계 대학에서 불교문화재 학과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문화재 학과를 개설하지도 못했다. 중앙승가대학교 대학원에 불교문화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이 있지만 금번에 발굴한 금동불상에 대하여 감정을 할 정도로 연구자들은 아니다. 대한불교조계종문화부에서는 불교문화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한국불교사찰에 있는 문화재에 대한 바른 기록의 연구를 시행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굴한 금동불상이 발견한 곳이 삼층석탑 상층 기단을 해체하기 위해 적심석을 수습하다가 발견되었다고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불상은 破佛인데 파불을 기단 속에 넣을 수 있는지 고찰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文化財廳에서 발표한 불국사 석가탑의 연대가 잘못발표한 점에 대하여 再考해 줄 것을 바라며 경문왕 시대 혜공왕 시대의 불교 연구를 통해 논증하고자 한다.
Ⅱ. 2경덕왕 시대의 불교
1. 경덕왕 왕위 오름
불국사 석불사에 대하여 고찰한다면 김대성 자신은 불사를 시작할 시기에 경덕왕 9년에 사임을 하고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 석불사를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신라경덕왕 때 건립을 시작하였으나 불사가 완성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김대승이었다. 물론 김대승이 벼슬하고 있었을 때 경덕왕(742)이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景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헌영으로 효성왕의 친동생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어 헌영을 태자로 삼았던 까닭에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왕비는 이찬 순정順貞의 딸이다.
경덕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사천왕사전을 감사천왕부로 고쳤다. 이것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할 수 있다.
사천왕사성전은 경덕왕景德王이 감사천왕사부監四天王寺府로 고쳤으나, 혜공왕惠恭王이 옛 이름[사천왕사성전]으로 회복시켰다.
한편 경덕왕 2년에는 당으로부터 신라에 왕으로 책봉하였다. 또한 전왕의 정책적인 행을 그대로 잇게 하였다. 경덕왕은 당나라로부터 국왕으 지위를 인정받았다. 경덕왕도 신라와 당나라와의 관계는 형제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2년(743년) 봄 3월 이어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전 임금의 관작을 잇게 했다. 조서에 일러 말했다. "죽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鷄林州諸軍事 겸兼 지절영해군사持節寧海軍使 신라왕 김승경金承慶의 아우 헌영에게 [조칙을 내린다]. 대대로 어진 덕을 품고 떳떳한 예의에 마음을 써서, 위대한 현인의 풍교風敎와 조리條理가 더욱 밝아졌고 중국 제도와 의관도 일찍부터 이어 받았다. 바다 동쪽의 보물을 실어 사신을 보냈고 구름을 벗 삼아 조정에 통했으며, 대대로 사심 없는 신하가 되어 여러 번 충성스러운 절의를 나타내었다. 지난날 왕의 형이 나라를 계승했으나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가 받아 그 뒤를 이었으니, 생각컨대 떳떳한 법도로 여겨진다. 이에 빈객의 예절로 우대하여 책명하노니 마땅히 옛 왕업을 지켜 번국 왕의 이름을 계승하라. 형의 관작인 신라왕 개부의동삼사 사지절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鷄林州諸軍事 겸 지절영해군사를 이어 받으라."
또한 경덕왕 2년 왕비를 맞이하였다. 왕비는 서불한 김의충의 딸이었다.
2년(743년) 여름 4월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경덕왕은 왕비를 맞이하여 자신의 후계를 이을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또한 경덕왕은 왕으로서의 사찰을 건립하여 불교의 정치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또한 경덕왕은 민장사敏藏寺를 건립하고, 민장사 부처님의 영험을 체득하기도 했다. 민장사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국왕이 되고자 하였다.
1) 경덕왕 민장사의 영험에 감동
경덕왕은 만장사의 영험을 알리기도 하였고 민장사의 부처님의 위력을 신라 백성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민장사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찰이다. 특히 민장사의 부처님의 영험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민장사敏藏寺 우금리禺金里의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이름이 장춘長春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 이 절은 민장敏藏 각간角干이 [자신의] 집을 내놓아 절로 삼은 것이다.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서 7일 동안 지극히 기도 드렸더니 장춘 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장춘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회오리바람을 만나 선박이 부서져서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저는 널판 쪽을 타고 오吳나라 해변에 가서 닿았습니다. 오 나라 사람들이 저를 데려가서 들에서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하루는]고향마을에서 온 것 같은 이상한 스님이 와서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며 저를 데리고 동행하는데, 앞에 깊은 도랑이 있어서 스님이 겨드랑이에 저를 끼고 뛰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향음과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살펴보니 벌써 여기와 있었습니다. 초저녁 때(哺時) 오 나라를 떠났는데 여기에 이른 것은 겨우 술시戌時 초였습니다.”하였다. [그때는] 즉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4월 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은 이 소식을 듣고서 절에 밭을 주고 또 재물과 폐백을 바쳤다.
민장사의 이야기가 신라의 전국에 알려지고 민장사 부처님의 위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민장사 부처님은 신라 백성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이 되기도 했다. 민장사 부처님의 영험을 신라의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염불사念佛師 남산南山의 동쪽 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마을에 절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이름이 피리사避里寺라고 하였다. 절에 특이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항상 아미타불彌陁을 염송하며,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렸다. 360 방坊 17만호戶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고, 소리의 높고 낮음이 없어 낭랑하게 한결같았다. 이로써 특이하게 여겨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염불念佛스님이라 이름하였다. 죽은 후에 흙인형으로 진영眞儀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안치하고, 그 본래 살던 피리사는 이름을 고쳐서 염불사念佛寺라 하였다. 절 옆에 또한 절이 있었는데, 이름이 양피讓避라 하였는데, 마을로 인하여 이름을 얻었다.
경덕왕은 신라에서 불교정책을 실현하려는 선왕의 뒤를 이어 신라불교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최초로 승려들에게 150여명을 탄생하게 하였다
2) 경덕왕 5년 신라에서 최초 승려 150명 탄생
경덕왕 5년에는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당시 승려가 되었다는 것은 150명이라고 하였다. 불교는 신라에 있어서 정신적인 면에서 귀중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경덕왕은 신라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5년(746년) 여름 4월 15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150명의 승려들이 어는 종파에 승려들인지는 알 수 없다. 승려가 150 명이라고 한다면 밀교의 승려들도 있었을 것이며 아미타불을 염원하는 승려들과 의상을 추종하는 승려들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본다면 경덕왕 시기 신라의 불교는 발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경덕왕은 불교의 힘으로 신라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성사 성전은 경덕왕景德王이 수영봉성사사원修營奉聖寺使院으로 고쳤으나, 후에 옛 이름[봉성사성전]으로 회복되었다.
경덕왕은 봉성사 성전을 수영봉성사원으로 고치고 봉성사 성전으로 회복하였다. 이 같은 시대의 불교를 신앙하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또한 경덕왕은 불교의 힘을 믿었다.
감은사성전은 경덕왕景德王 이 수영감은사사원修營感恩寺使院으로 고쳤으나, 후에 옛 이름[감은사성전]으로 회복되었다.
경덕왕 7년에는 태후를 영명신궁으로 옮겼는데 그 때가지 왕후가 왕자를 탄생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바로 신라를 전승할 수 있는 왕자의 탄생을 바라는 것은 경덕왕의 뜻만은 아니다.
7년(748년) 가을 8월 태후가 영명신궁永明新宮으로 옮겨 거처했다.
경덕왕은 7년이 되어도 태자가 없었다. 경덕왕은 태자를 탄생하려는 욕망이 강했다. 태자를 탄생하려고 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높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경덕왕 9년에는 김대성이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9년(750년) 봄 정월 시중 대정大正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조량朝良으로 시중을 삼았다.
경덕왕 9년에 김대승 이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 석불사 불사를 시작하려고 하였다.
3) 경덕왕 10년 불국사 석굴암 불사 시작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은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 석굴암을 창건하는데 설화를 남겼다. 또한 신림, 표훈스님이 거주한다. 표훈은 경덕왕과의 인연이 있었는데 그는 왕에게 정치적인 진언을 하였던 표훈이다.
이로 인하여 감동된 바가 있어, 자비의 대원(悲願)이 더 두터워졌다. 이에 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창건하고,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스러운 스님을 청하여 각각 머물게 하고, 거대한 불상을 설치하고, 또 양육한 노고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날에도 또한 듣기 드물었다. 착하게 베푼 효과로, 가히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불石佛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하나를 감실의 뚜껑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돌이 갑자기 셋으로 깨졌다. [대성은] 분노하여, 아무렇게나 잠들었다. 밤 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다 만들고는 돌아갔다. 대성 은 잠자다가 일어나서, 남쪽 고개로 쫓아가, 향나무를 불에 태워 천신에게 바쳤다. 까닭에 그 땅의 이름을 향령香嶺이라 하였다. 그 불국사의 사다리(雲梯)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새긴 업적은 경주 의 여러 사찰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경덕왕은 김대승의 효심에 감동하였을 것이며 김대승은 부모를 위하여 사찰을 건립하는데 협력하였다. 그리고 경덕왕은 유가종의 개조인 대현을 통해 미륵사상을 바르게 인식하게 되었다.
현유가해화엄賢瑜珈海華嚴 유가종 의 개조 대현大賢 대덕 은 남산南山 용장사茸長寺에 거하였다. 절에 미륵석조장육상 이 있었는데 대현 이 항상 그 둘레를 돌면 불상 또한 대현 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 은 지혜롭고 분명하고 정밀하고 민첩해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명백했다. 대개 법상종法相宗의 전량銓量은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어서 나누어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중국의 명사 백거이白居易도 일찍이 이것을 궁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이에 말하였다. “유식唯識은 그윽하여 풀이하기 어렵고 인명因明은 나누어도 열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학자들이 이어받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현 은 홀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잠시 그윽한 뜻을 깨우쳐 여유있게 이치를 분석하였다. 동국 의 후학들은 다 그 가르침을 따랐고, 중국의 학사들도 종종 이를 얻어 안목眼目으로 삼았다.
경덕왕 12년에는 신라에 가뭄이 들어 비를 내리게 하려고 대현을 궁궐에 들어오게 하여 금광경을 강논하게 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비가 내렸다. 비를 내리게 하였던 대현에게 있어서의 신라의 백성들은 추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덕왕 천보天寶 12년 계사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조서를 내려대현을 궁궐로 들어오게 하여 ≪금광경金光經≫을 강론하여서 단비가 내리기를 기도하게 하였다. 어느날 재齋를 올리는데 바리를 늘어놓고 잠시 있었으나 정수淨水를 바치는 것이 늦어지자 감리監吏가 그것을 꾸짖었다. 공양하는 사람이 말하였다. “궁궐의 우물이 말라서 먼 곳에서 길어왔기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대현 이 그 말을 듣고 말하였다. “어찌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낮에 강론할 때에 이르러 향로를 들고 말없이 있으니 잠깐 동안 우물의 물이 솟아 나와 그 높이가 7장丈 가량이 되어 찰당刹幢과 더불어 같게 되었는데, 궁 전체가 놀랐고 그로 인하여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이름하였다. 대현 은 일찍이 스스로 청구 사문靑丘沙門이라고 일컬었다.
경덕왕 13년에는 황룡사 분황사 봉덕사의 종을 주조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였는데 경덕왕 시대 종을 완성하였다. 봉덕사의 종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음미해 볼만하다.
2. 경덕왕 13년 불교
경덕왕 13년 황룡사의 종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종을 주조한다고 한다면 철을 생산해야 하고 철을 생산하려면 철에 대한 가공법을 익혀야 했다. 또한 철을 생산한다면 불상을 주조할 때 철 불을 주조했다고 보는 점이 여기에 있다.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신라 제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천보天寶 13년 갑오甲午에 황룡사 종을 주조하였는데 길이는 1장 3촌이요,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 7천 5백 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이왕삼모부인孝貞伊王三毛夫人이요, 장인匠人은 이상택里上宅 하전下典이었다. [고려] 숙종肅宗때 다시 새로운 종을 완성하니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경덕왕은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였다. 이것은 그 무개가 30만 6천 7백 근 이라고 하였다. 당시로서는 신라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듬해 을미乙未에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동상[藥師銅像]을 주조하였는데 무게가 30만 6천 7백 근이요, 장인은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 强古乃末이었다.
경덕왕(14년) 망덕사의 탑이 흔들렸는데 당나라에서 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망덕사는 당나라를 위하여 만든 탑이기에 당나라에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영험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뒤에 경덕왕景德王 14년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 이 있었고 신라인들이 말하기를 “당 황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덕왕 14년에는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는 기근이 들었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자가의 다리 살을 오려 아버지에게 공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경문왕은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하였다.
14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이라는 사람이 가난하여 그 아버지를 봉양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선물을 후히 주고, 동시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경덕왕(14년) 망덕사 두 탑이 서로 부딪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당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다. 망덕사의 의미를 알 수 있다.
14년(755년) 봄 망덕사望德寺 탑이 흔들렸다. 당의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당 을 위해 이 절을 세웠던 까닭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두 탑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고, 높이는 13층이다.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기를 며칠 동안 그러하였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 의 난 ] 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니었을까.”
경덕왕 시대 망덕사 탑이 흔들렸다는 것은 당나라에 변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는데 실지로 당나라에서는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래서 신라의 망덕사의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망덕사였다.
또한 경덕왕景德王이 백율사栢栗寺에 행차하여 산 아래에 다다랐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사람을 시켜서 파보라고 하니 큰 바위가 있는데, 사면에는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절을 창건하고 그 이름을 굴불掘佛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그릇되이 굴석掘石이라고 한다.
경덕왕은 만불산이 완성되자 당에 사신을 보내 당에 헌상하니 당 대종은 이것을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기교에 대하여 찬양한 것인데 경덕왕도 만불산에 대하여 예배를 하고 삼장불공에게 명하여 밀보의 진전을 천번이나 외워서 이를 경축하니 그 기교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완성되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헌상하니 대종은 이것을 보고 감탄하면서 말하길 “신라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이지 사람의 재주가 아니다.”하였다. 곧 구광선九光扇을 바위 산봉우리 사이에 더하여 두고는 그로 인하여 불광佛光이라고 하였다. 4월 8일에는 양가兩街의 승도僧徒에게 명하여 내도량內道場에서 만불산에 예배하게 하고 삼장불공三藏不空에게 명하여 밀부密部의 진전眞詮을 천번이나 외워서 이를 경축하니 보는 자가 모두 그 기교에 감탄하였다.
경덕왕은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 석불사를 창건한 김대성은 의상의 제자인 신림, 표훈, 을 청하여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의상의 제자들이 불국사에 거주하게 됨에 따라서 신라는 의상의 제자들이 국가의 안녕을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불국사에 의상의 제자 거주
의상의 제자들이 불국사와 석불사에 거주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경덕왕의 배려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경덕왕은 의상의 제자들을 존경하였던 같다. 불국사에서 의상의 제자들을 거주하게 하였다.
그의 제자인 오진悟眞·지통智通· 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 ·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대덕은 영수領首가 되었는데, 모두 아성亞聖이라고 하고 각각 전기가 있다. 오진 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鶻嵓寺에 거처하면서 매일 밤에 팔을 펴 부석사 방의 등을 켰다. 지통 ≪추동기錐洞記≫를 저술했는데, 대개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들었으므로 글이 오묘한 듯을 많이 지녔다. 표훈 은 일찍이 불국사佛國寺에 있으면서 항상 천궁天宮을 왕래하였다. 의상 이 황복사에 있을 때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매번 허공을 밝고 올라갔으며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가 설치되지 않았고 그 무리들도 층계에서 세 자나 떨어져 허공을 밝고 돌았다. 의상 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은 못 된다”고 하였다. 나머지는 최후 가 지은 본전과 같다.
경덕왕은 의상의 제자인 표훈 법사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경덕왕은 표훈법사의 설법을 자주 들었던 같다. 특히 경덕왕은 왕비를 만나는데 신라에서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경덕왕이 왕비를 찾아서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왕비는 경덕왕에 대하여 아들을 넣을 수 있는 인연이 있었다. 경덕왕은 옥경이 너무나 크기에 그에 맞는 왕비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경덕왕의 고뇌는 왕자를 탄생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경덕왕과 함께할 왕비가 없었다. 표훈은 또한 경덕왕에게 아들을 원하지 말기를 간절히 간청했다. 왕자가 태어나면 나라가 환란이 일어난다고 말하였던 표훈 법사였다.
왕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8치 나 되었다. 아들이 없으므로 왕비를 폐하여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大德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 께서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표훈 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가능하나 아들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표훈 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 청하니, 상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표훈 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스님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후로는 다시 다니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 이 돌아와 천제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하기를, “나라는 비록 위태로울지라도 아들을 얻어서 뒤를 잇는다면 족하겠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만월왕후 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태자가 8세 때에 왕이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 가 조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을 수가 없었으니, 표훈 스님의 말이 맞았다. 어린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언제나 여자들이 하는 장난을 하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며,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였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있어 마침내 왕은 선덕왕(宣德)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살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덕왕은 표훈의 말을 믿지 않고 경덕왕 17년에 왕자가 태어났다는 것은 경덕왕에게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경덕왕은 매우 기뻐했을 것이며 신라에 경사가 아닐 수 없다.
2) 경덕왕 17년에 왕자 탄생
경덕왕이 고민한 것은 자신이 왕비와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고민을 하였지만 왕비를 새로 만나 왕자를 탄생하게 하였다는 것은 그동안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가을 7월 23일에 왕자가 태어났다. 천둥과 번개가 크게 쳤고, 절 16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경덕왕 시기에 진표는 미륵, 지장에게 간자를 받았는데 진표의 수행으로 인하여 경덕왕은 자신이 알고자 하였던 불교를 알았다. 진표가 말한 경덕왕에게 있어서 아들을 낳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아들을 낳았다.
관동 풍악 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이 기록은 곧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찬술한 것이고 승안承安 4년 기미(1199)에 돌을 세웠다. 진표율사 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사람이다. 나이 12살에 이르러 뜻이 출가에 있으니 아버지가 허락하였다. 법사 는 금산수金山藪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승이 되었다. 순제는 ≪사미계법전교 공양차제비법沙彌戒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주며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지장 두 보살 앞에서 정성을 다해 참회를 구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라고 하였다. 법사 가 가르침을 받들고 이별하여 물러나와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나이가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上元 원년 경자에 20두 의 쌀을 찌고 이에 말려서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保安縣으로 가서 변산邊山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들어가서 5홉 의 쌀을 하루의 소비로 하고 쌀 1홉을 제하여 쥐를 길렀다. 법사가 미륵상 앞에서 계법을 부지런히 구하기를 3년이 지나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였다. 발분하여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두었다. 법사 는 다시 뜻을 발하여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열심히 닦고 돌을 두드리며 참회하였다. 3일이 되자 손과 팔이 꺾여 떨어졌고 7일 밤이 되자 지장보살 이 손에 금석金錫을 흔들고 와서 가지加持 하자 손과 팔이 예전과 같이 되었다. 지장보살은 드디어 가사와 바리를 주었고 진표 는 그 영응에 감동하여 더욱 정진하였다. 21일을 채우자 즉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에 지장·미륵보살이 진표 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였다. “잘하는도다.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를 구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참회를 간절히 구하는도다.” 지장이 ≪계본戒本≫ 을 주고 미륵은 다시 2개의 생栍을 주었는데 하나는 9자者라고 쓰여 있었고 하나는 8자라고 쓰여 있었다. 진표 에게 일러 말하였다.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 뼈인데, 이는 시각始覺·본각本覺 2각을 이른다. 또한 9자는 법 자체이고 8자는 신훈성불종자 이니 이로써 마땅히 과果·보報를 알 것이다. 너는 이 몸을 버려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후생에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고 두 보살은 즉 사라졌다. 이때가 임인壬寅(762년) 4월 27일이다.
경덕왕은 봉덕사 성전을 18년에 수영봉덕사사원으로 고쳤다. 그 이후에는 봉덕사 성전으로 회복하였다.
봉덕사성전은 景德王18년(759)에 수영봉덕사사원修營奉德寺使院으로 고쳤으나, 후에 옛 이름[봉덕사성전]으로 회복되었다.
3)경덕왕 19년에 월명사가 향가를 지음
경덕왕 19년에는 월명사가 향가를 지어 바치니 해가 나타나 10일 동안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향가를 바치니 그 향가가 도솔가라고 하였다. 혹자는 산화가라고 하는데 도솔가라고 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일연이었다.
월명사 도솔가月明師兜率歌 경덕왕 19년 경자 4월 삭에 두 해가 함께 나타나 10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인연이 있는 승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행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깨끗이 만들고 왕의 가마는 청양루靑陽樓에 행차하여 인연이 있는 승을 기다렸다. 이때에 월명사月明師가 밭두둑의 남쪽 길을 가고 있으니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오게 하여 단을 열고 계문啓文을 짓게 하였다. 월명사가 아뢰었다. “신승은 단지 국선의 무리에만 속하여 향가鄕歌만 풀 뿐이고 범성梵聲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왕이 “이미 인연 있는 승으로 뽑혔으니 비록 향가를 쓰더라도 좋다”라고 하였다. 월명사 가 이에 도솔가兜率歌를 지어서 읊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오늘 이에 산화가를 불러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령을 부림이니
미륵좌주를 모셔라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龍樓에서 오른 산화가를 불러
청운靑雲에 한 조각 꽃을 뿌려 보낸다.
은근·정궁한 곧은 마음이 시킴이니
멀리 도솔천의 부처님을 맞이하라
지금 세상에서 이를 산화가散花歌라고 부르는데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라 해야 한다. 따로 산화가가 있으니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이미 마치자 해의 괴변이 곧 사라졌다. 왕이 가상히 여겨 좋은 차 1봉과 수정 염주 108개를 하사하였다. 문득 한 동자가 있어 외양이 곱고 깨끗하였는데 무릎을 꿇고 차와 염주를 받들고 전각의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사 는 내궁內宮의 사자라고 하였고 왕은 월명사 의 시종이라고 하니 곧 서로 알아보니 모두 아니었다. 왕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쫓아가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고 차와 염주는 남쪽 벽 벽화의 미륵보살상 앞에 있었다. 월명사 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지성을 이와 같이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과 민간에서 이 일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왕이 더욱 그를 공경하여 다시 명주 100필을 주어서 정성을 나타내었다.
경덕왕 22년에는 단속사를 창건하였는데 단속사의 창건에 대하여서는 경덕왕 때 이순이라는 제상과의 관련이 있다. 그들은 바로 세속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깊은 산에 들어가 수행하면서 경덕왕에게 정치적인 면을 조언하기도 했다. 경덕왕은 제상들이 정치에서 벗어나면 의래 적으로 사찰을 건립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 같다.
3. 경덕왕 22년에 단속사 건립
경덕왕 22(763)년에는 단속사를 창건하였는데 단속사의 창건은 이순이라는 신하가 퇴직하여 고향에 내려가 단속사를 창건하고 스스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인연으로 단속사는 창건되었는데 단속사의 승려들은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년 8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두 번째 피었다.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 옹이 퇴직하였다. 대내마 이 순은 왕의 충신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갔는데,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깎고 승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그 후 왕이 풍악을 즐긴다는 말을 듣고 그는 즉시 대궐문으로 찾아갔다. 그는 왕에게 “제가 듣건대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황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로 인하여 정치가 문란하고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앞에 가는 수레바퀴가 엎어지면 뒷 수레는 마땅히 이를 경계 하여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허물을 고치고 자신을 새롭게 바꾸어 나라를 영원히 보존 하소서”라고 간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그치게 하고, 그를 큰 방으로 인도하여 도리의 오묘함과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며칠 동안이나 들었다.
경덕왕이 정치를 잘 하도록 충언을 하였던 단속사 승려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단속사의 역사성을 바르게 성찰해야 한다. 단속사의 승려는 왕에게 바른 정치를 시행하도록 조언을 하였다. 경덕왕이 충신의 충언을 귀담아 들었던 것이 신라의 정치적인 사회를 바르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단속사의 승려들은 경덕왕이 신뢰한 승려라고 말할 수 있다.
경덕왕景德王은 효성왕의 동생이다. 22년 계묘癸卯에, 신충 은 두 벗과 서로 약속하여 벼슬에서 사퇴하고 남악 에 들어가, 다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머리를 깍고 스님(沙門)이 되었다. 왕을 위해 단속사斷俗寺를 세워 살면서, 죽을 때까지 은거하길 원하였으며, 대왕이 복을 받기를 빌어, 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왕의] 진영을 금당 뒷벽에 두었으니 이것이다. 남쪽에 속휴俗休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 잘못되어 소화리 小花里라 이른다. ≪삼화상전三和尙傳≫을 보면,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 가 있어 이것과 서로 혼란스러우나, 계산해보면신문왕대神文之世 여서, 경덕왕대(景德)와 이미 백여 년 떨어져 있다. 하물며 신문왕과신충은 이전 세상의 일로, 즉 이신충이 아님이 명백하다. 마땅히 상세히 살펴야 한다. 또 다른 기록은 다음과 같다. 경덕왕 대에 직장直長 이준李俊 ≪고승전高僧)≫ 에서는 이순李純이라 한다. 이 일찍이 발원하기를, 나이가 50세(知命)에 이르면 모름지기 출가하여 불사佛寺를 창건하라 하였다. 천보天寶 7년 무자戊子, 748)에 나이 50세가 되니, 다시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 큰 절로 하고, 이름을 단속사斷俗寺라 하였다. 그 자신도 또한 머리를 깍고, 법명을 공굉장로孔宏長老라 하고, 절에서 20년간 머무르다 죽었다. 앞의 ≪삼국사三國史≫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양쪽을 살펴 의심을 덜었다.
경덕왕은 단속사의 승려들이 진언하는 소리를 들었던 같다. 그만큼 단속사는 신라의 경덕왕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덕왕과 신하의 역할을 들을 수 있는 것을 마련하였던 경덕왕이다.
1) 경덕왕 24년 진표 금산사 미륵장육상 조성
경덕왕은 진표와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진표는 미륵을 숭상하는 미륵도였다고 볼 수 있으며 당시 미륵의 존재는 실존 인물처럼 여기었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경덕왕은 진표의 미륵사상을 실천하려고 하였던 같아 진표가 금산사에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였던 것은 미륵보살의 존재를 바르게 전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본다. 금산사에 미륵도량을 이룩한 것은 진표는 백제의 존재를 믿었던 것이며 진표의 미륵사상을 실천하려는 의도적이었다.
진표는 교법을 받기를 마치자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고자 산에서 내려왔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자 갑자기 용왕이 나타나 옥으로 된 가사를 바치고 8만 권속을 이끌고 시위하며 금산수金山藪로 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와서 며칠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다시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감응하여 구름을 타고 내려와 진표 에게 계법을 주었는데 하여 구시주에게 권하여 미륵장육상을 조성하게 하였다. 또 금당의 남쪽 벽에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위의威儀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갑진년甲辰年 6월 9일에 조성되어 병오년丙午年(766년) 5월 1일에 금당에 안치되었으니 이해는 대력大曆 원년이다.
경덕왕 24년에는 당나라에서 신라에 도덕경을 보내왔는데 도덕경을 경문왕이 받은 것은 경문왕이 된 24년이 되는 해였다. 또한 경문왕은 거리에서 위위가 있는 스님을 청해 오라고 하였을 때 어떤 승려가 왕앞에 나타났다. 경덕왕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승려를 오라고 하였을 때 그는 바로 충담이었다.
2) 경덕왕 24년 충담 안민가 지음
왕은 충담을 보고 논하였을 때 충담은 차를 미륵에게 전하고 있는 승려라고 말하자 경덕왕도 자신에게 차를 주면서 백성을 위한 시를 지어달라고 하였을 때 충담은 안민가를 지어 경문왕에게 받쳤다.
[당나라에서보낸] ≪도덕경(德經)≫ 등을 대왕[경덕왕] 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로는 혹 대궐 뜰에 나타나 [왕을] 모셨다. 3월 3일(765년)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 분 이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측근들이 그를 보고 데려다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서 또는 삼태기를 졌다고도 한다. 남쪽에서 왔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누 위로 맞아서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 충담忠談 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3월 3일(重三)과 9월 9일(重九)에는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다려 공양하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소?”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는 특이한 향이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듣기로는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주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즉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안민가
안민가安民歌는 이렇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찬기파랑가
기파랑 을 찬미한 노래는 이렇다.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쫒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 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 이 지니신
마음가를 쫓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
경문왕은 자신이 백성을 위한 충담의 안민가를 받고는 죽었는데 안민가는 백성을 위하는 노래였다. 경문왕이 안민가를 부르는 시대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경덕왕 시대 불교를 위하여 많은 불사를 하게 되는데 경덕왕은 신라불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24년(765년) 6월 이달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봉우리 에 장사지냈다.
경덕왕이 죽음에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 아들에게 있어서의 편안한 정치를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경덕왕이다. 그래서 의상의 제자인 표훈의 설법을 듣고 불교와의 인연을 맺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경덕왕은 신라불교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
Ⅲ. 해공왕시대의 불교
1. 혜공왕이 왕위에 오름
경문왕은 아들을 낳은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경문왕은 자신의 존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나이가 너무나 어리여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경문왕은 왕비를 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경덕왕은 아들을 낳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6월 혜공왕惠恭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건운乾運으로 경덕왕 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만월부인滿月夫人인데, 서불한舒弗邯 [김] 의충義忠의 딸이다.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여덟 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섭정했다.
혜공왕 4년에 황룡사 남쪽에 별이 떨어졌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지만 당시에 신라에서는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4년(768년) 6월에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는데,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았다.
혜공왕 4년에 황룡사 남쪽에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리고 그 땅이 진동하였다고 한다. 땅이 진동했다는 것은 지진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비유하여 신라 사회를 불안하게 하려고 하였다는 말 이기고 하다.
1) 혜공왕 4년에 황룡사에 별이 떨어짐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신라왕을 비유한 말이라고 하는 점을 연상할 수 있는데 그러한 모습을 본 신라의 백성들에게는 불안함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보아야 한다.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초년에 강주康州 관서官署 대당大堂의 동쪽 땅이 점점 가라앉아 못을 이루니 어떤 책에는 대사大寺 동쪽의 작은 연못이라 하였다 , 세로는 13자이고 가로는 7자였다. 홀연히 잉어 대여섯 마리가 서로 계속하여 점점 커지더니 못도 따라서 커졌다. 2년 정미(767)에 이르러서는 또한 천구성天狗星 이 동루東樓의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 같았고 꼬리는 3자 가량이었으며 색은 뜨겁게 타는 불과 같았는데 천지가 또한 진동하였다. 또 같은 해에 김포현金浦縣의 5경頃 정도 되는 논의 모든 쌀 낟알이 모두 이삭이 되었으며 7월에는 북궁北宮의 정원 가운데 먼저 두개의 별이 떨어지고 또 한 개의 별이 떨어져, 세 개의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대궐의 북쪽 측간 속에서 두 줄기의 연蓮이 나고 봉성사奉聖寺의 밭 가운데에서도 연이 났다. 호랑이가 궁성 안에 들어와 추격하여 찾았으나 놓쳤다. 각간角干 대공大恭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셀 수 없이 많이 모였다. 안국병법安國兵法 하권에 이르기를 “[이러한 변괴가 있으면] 천하에 커다란 병란이 일어난다.” 하였는데, 이에 왕은 죄수를 사면하고 [정사를] 살피고 반성하였다. 7월 3일에 각간 대공 이 적도賊盜가 되어서 일어나고, 왕도王都와 5도 주군州郡의 96각간이 서로 싸워 대란이 일어났다. 대공 각간의 집안이 망하였고 그의 재산과 보물 비단 등은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므로 사량沙梁·모량牟梁 등의 마을 안에 있던 역당들의 재물과 곡식들을 역시 왕궁으로 운반해 들였다. 난리는 석 달 만에 그쳤는데, 상 받은 사람도 자못 많고 목 베어 죽은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표훈의 말대로 나라가 위태롭다는 것이 이것이었다.
혜공왕은 황룡사에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던 신라에 백성들은 신라에 변고가 일어날 것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신라는 각 현 각 지역에서 서로 반란이 일어나고 그해 가을에는 대아찬 김융이 반란을 이르켜 실패하고 그를 목 베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혜공왕 10년에는 불국사 불사가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김대승은 불국사 석불사의 불사를 지켜보지 못하고 죽어 국가에서 불사를 시행한 사찰이다.
옛 ≪향전鄕傳≫에 기록된 바는 이와 같으니, 절의 기록에 이르길, “경덕왕景德王대에 대상大相 대성大城이 천보天寶 10년 신묘辛卯에 불국사를 처음 창건하였다. 혜공왕대를 지나, 대력大歷 9년 갑인甲寅(774년) 12월 2일에 대성 이 죽자, 국가가 이를 완성하여 끝마쳤다. 처음에는 유가대덕瑜伽大德 항마降魔를 청하여 이 절에 머물게 하였고, 그것을 이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고전古傳과 같지 않으니,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찬讚하여 말하니, “ 모량牟梁의 봄이 지나 세 묘畝를 보시하니, 향령 에 가을이 들자 만금을 얻었네. 어머니는 오랜 세월 가난과 부귀를 누렸으니, 괴정槐庭은 한 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일세.”
황룡사 분황사 봉덕사의 종이 완성이 되었는데 이것은 혜공왕이 신라의 백성들에게 정치적인 힘을 부여하고자 했다. 당시 신라 사회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회였다. 혜공왕은 성덕왕이 주조하려고 하였던 종을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특히 성덕왕을 위하여 주조하려고 하였던 종이였다
(왕은) 황동黃銅 12만근을 희사하여 부왕이신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인들을 모아 능히 그것을 완성하여 봉덕사 에 안치하였다.[이] 절은 곧 효성왕孝成王 개원開元 26년 무인戊寅(738년)에 부왕인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명鍾銘에는'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라 하였다. 성덕대왕은 곧 경덕의 아버지로 전광대왕典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아버지를 위하여 시주한 금이었으므로 성덕종聖德鍾이라 한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郞 한림랑翰林郞 김필월金弼粤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번다하므로 수록하지 않는다.
혜공왕 12년에 감은사에 거동을 하였고 바다에 망제를 거행하였다고 하는 것은 신라의 역사를 바르게 고찰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신라의 존재를 말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2년(776년) 봄 정월에 [왕이] 감은사感恩寺에 거둥하여 바다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해공왕 15년에는 백좌법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기록이 없다. 어느 절에서 거행하였는지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다.
15년(779년) 봄 3월에 백좌법회百座法會를 열었다.
혜공왕 16년에는 이찬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하였는데 혜공왕이 반란 세력들을 진압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2월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했다.
혜공왕 16년에는 이찬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에 대하여 진압하였으나 이찬의 반란군에 의해서 왕과 왕비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2) 혜공왕 16년에 상대등 김양상이 반란
혜공왕은 반란군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표훈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문왕이 아들을 낳으면 이러한 사건이발생한다고예언을 하였다.
16년(780년) 여름 4월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이 이찬 경신敬信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金志貞 등을 죽였으나,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양상 등이 왕의 시호를 혜공왕惠恭王이라 했다. 첫째 왕비 신보왕후新寶王后는 이찬 유성有誠의 딸이다. 둘째 왕비는 이찬 김장金璋의 딸이다. 사서史書에는 궁중에 들어온 날짜가 빠져 있다.
혜공왕 16년에는 반란의 무리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이것은 아들을 잘못 얻어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였던 표훈 스님의 예언이 맞았다.
Ⅴ. 結論
본 연구는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한 금동불상에 대한 정밀한 감정을 통해 금동불입상에 대하여 문화재의 가치가 있는지 그 진의를 바르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불국사 석불사의 창건의 연대를 바르게 기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경덕왕 10년(542)에 불사를 시작하였다고 하고 그의 아들인 혜공왕 10년에 불사가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역사적인 기록을 바르게 고찰하지 않고서는 불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정확한 역사를 전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불국사 석가탑 기단에서 발굴하여 발표한 불교사의 연대를 정확하게 발표하여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고대 불교사 역사를 탐구하는데 있어 불교계가 나서 불교역사를 기술할 +것을 대한불교조계종 종단에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V. 參考文獻
三國史記 ---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一年夏五月 경덕왕이 즉위 하다(742년 5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第三十八 雜志 第七 職官(上) 사천왕사성전 第九 景德王 一年夏五月 경덕왕이 즉위하다(742년 5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二年春三月 당에서 경덕왕을 책봉하고 전왕의 관작을 잇게 하다(743년 3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第九 新羅本紀 第九 경덕왕景德王 二年夏四月 김의충을 딸을 왕비로 삼다(743년 4월 미상 음력) .
三國遺事----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敏藏寺 경덕왕대 민장사 관음보살 앞에서 기도를 올리자 소식이 없던 장춘이 돌아오다
(745년 4월 8일 음력).
三國遺事---卷 第五 제8 피은(避隐第八) 念佛師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스님.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五年夏四月 150명에게 승려가 되도록 허락하다(746년 4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第三十八 雜志 第七 職官(上) 봉성사성전
三國史記---卷 第三十八 雜志 第七 職官(上) 감은사성전.
三國史記---卷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七年秋八月, 태후가 영명신 궁으로 거처를 옮기다.(748년 8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九年春一月 시중 대정이 물 러나고, 조량을 시중으로 삼다(750년 1월 미상 음력).
三國遺事---卷 第五 제9 효선(孝善第九)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불국사와 석불사의 창건.
三國遺事---卷 第四 제5 의해(義解第五) 賢瑜珈海華嚴 대현이 유가종의 개조가 되다.
三國遺事---卷 第四 제5 의해(義解第五) 賢瑜珈海華嚴 대현이 ≪금광경≫을 강론하여 가뭄을 구제하다.
三國遺事---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경덕왕이 황룡사종을 주조하다(754년 미상 음력).
三國遺事---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皇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경덕왕이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다(755년 미상음력).
三國遺事---景德王 十四年 망덕사탑이 흔들리다(755년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 第十 新羅本紀 第十, 원성왕.
三國遺事---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경덕왕대 굴불사를 창건하다.
三國遺事---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경덕왕이 당 대종에게 만불산을 헌상하니 그 기교에 매우 감탄하다.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十七年秋七月 왕자가 태어나다(758년 7월 미상 음력).
三國遺事---卷 第四 제5 의해(義解第五) 關東楓岳鉢淵藪石記 진표가 지장· 미륵보살에게서 계와 간자를 받다.
三國史記---卷 第三十八 雜志 第七 職官(上) 봉덕사성전(759년 미상 음력).
三國遺事---卷 第五 제7 감통(感通第七) 月明師兜率歌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일변을 물리치다(760년 4월 1일 음력).
三國史記---新羅本紀 제 9 경덕왕, 이순이라는 신하가 왕의 총애를 받다가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산으로 단속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단속사를 창건하였다.
三國遺事---卷 第五 제8 피은(避隐第八) 信忠掛冠 경덕왕대, 신충이 벼슬을 버리다(763년 미상 음력) .
三國遺事---卷 第四 제5 의해(義解第五) 關東楓岳鉢淵藪石記 금산사를 창건 하고 미륵장육상을 조성하다(764년 6월 9일 음력).
三國遺事---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景徳王·忠談師·表訓 경덕왕이 충담 을 만나다(765년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一年夏六月 경덕왕이 죽다 (765년 6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第九 新羅本紀 第九 惠恭王 一年夏六月 혜공왕이 왕위에 오르다(765년 6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第九 新羅本紀 第九 惠恭王 4年夏六月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지다(767년 6월 미상 음력).
三國遺事---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惠恭王 표훈의 염려대로 혜공왕 재위 초반 천재지변과 반란이 자주 일어나다(766년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惠恭王 六年秋八月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다(770년 8월 미상 음력).
三國遺事---卷 第五 제9 효선(孝善第九)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향전≫에 기록된 불국사 창건(751년 미상 음력)
三國遺事---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皇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경 덕왕이 주조하고자 한 성덕대왕신종을 혜공왕대 완성하다 (770년 12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惠恭王 十二年春一月 감은사에 행차 하여 망제를 지내다(776년 1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惠恭王 十五年春三月 백좌 법회를 열다(779년 3월 미상 음력).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惠恭王 十六年春二月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다(780년 2월 미상 음력) .
三國史記---卷 第九 新羅本紀 第九 惠恭王 一年夏四月 왕과 왕비가
반란군에게 살해되다(780년 4월 미상 음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