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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안교육학부모연대(KPAAE) 원문보기 글쓴이: (빨간모자)손경덕
민들레 60호에 실린 글입니다.
양극화되는 사회, 양극화되는 교육 속에서 대안교육은 대안이 되고 있는가?
염병훈 주류에서 소외된 청소년들이 즐겁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한다. 성과는 늘 기대에 못 미치지만, 그래도 가진 것의 크기로 배움의 기회가 나누어지는 세상에 꾸준히 딴지를 걸고 있는 10년차 대안학교 교사이다. 도시형 대안학교인 ‘광진도시속작은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hope1963@hanmail.net
공교육에서 밀려난 아이들에게도 학교는 필요하다
“(……)중도탈락 청소년들의 경우 대부분 중하위의 경제적 여건과 그에 따른 부모들의 교육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교육적 혜택이 수혜자 부담의 원칙에 의해 제한된다면 교육을 통한 계층의 재생산은 불가피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소득 계층에 대한 교육적 서비스의 지원은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현실적 지원을 통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도시속작은학교를 시작합니다」, 격월간『 민들레』 8호)
2000년 4월 최초의 전일제 도시형 대안학교인 ‘도시속작은학교’를 시작하면서 필자가 본지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요즘 TV에는 멋있는 외국의 대안학교들이나 선진국의 부러운 교육시스템들이 자주 소개되지만 그 즈음에 대안학교나 새로운 교육으로 소개가 되었던 것은 실험적이었던 간디학교나 ‘바람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원불교 대안학교 정도였다. 당시 학교를 그만두는 청소년들은 한해 7만 정도라 했고 대안학교는 기숙형 학교들을 포함해 전국에 열댓 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시기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은 대부분 비행청소년, 문제아라는 딱지가 붙어있었고 우리가 만났던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에게서도 가난과 버려짐, 음습함의 냄새가 났었다. 그런 사회적인 낙인들 때문일까? 스스로 새로운 교육을 찾아 길을 나섰던 몇 안 되는 아이들조차 그 당시에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많이 꺼려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밀려난(외형적으로 이들은 학교를 때려 친 것이었으나 사실은 학교가 이들을 제도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가정의 지지가 취약하고 스스로 배움을 찾아가기 어려운 상황과 배경을 갖고 있다) 이 아이들에게는 학교와는 아주 다른 개별적인 교육방식과, 무엇보다도 신뢰할만한 어른들의 정서적 지지와 밀착된 돌봄이 필요했다. 가출을 밥 먹 듯하는 이들에게 안정적인 주거도 필요했고, 온전하지 못한 가정이 더 심각한 위기에 도달하지 않도록 보호자들에 대한 지지도 병행되어야 했다. 먹는 것 자체가 부실했던 아이들의 영양상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남녀학생이 주로 야간에 어울려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이 아이들에게 성적인 자기결정권은 고상하기만한 단어였다. 더욱이 오랫동안 학업을 중단했던 이 아이들의 학습수준은 초등학교 수준도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아이들과 썸머힐과 발도로프, 도쿄슈레와 무반덱 같은, 대안학교 교사양성과정이나 관련서적 등에서 들어보았던 대안학교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도시속작은학교’는 이런 혼란스러움 속에서 그 첫발을 내디뎠다.
뒤돌아, 오던 길을 보다
그렇게 학교를 시작한 이후 몇 군데의 대안학교를 옮겨다니며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도시형 대안학교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많은 상처를 갖고 있다. 따돌림, 학습부진, 경증의 장애, 힘겨운 가족사, 대인관계의 절망감, 경제적 열패감에 둘러쌓여 힘겨워한다. 조금씩 욕구가 변화하고는 있으나 이 아이들이 처음 바랐던 것은 새로운 교육, 미래의 직업, 대학, 특기적성의 개발 따위의 것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누군가가 붙잡아주기를 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겠구나, 너도 괜찮은 놈이야, 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 그거 되게 잘하네? 넌 우리학교 학생이야, 우리 이거 한 번 같이 해볼래?" 같은. 사납게 으르렁대거나, 아니면 기죽어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사실 그 아이들이 듣고 싶었던 말이 이런 것이었음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생활 속의 수학, 팝송으로 배우는 영어, 세상바라보기, 우리말․우리글 처럼 대안적인 교육을 한답시고 내밀었던 어설픈 대안들이 이 아이들에겐 또 얼마나 낯설었을까. 과음으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일어난 아침에 버터 바른 토스트를 내민 격이었겠지. 수업시간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늦잠, 결석, 가출, 흡연, 음주. 이들의 생활습관은 좀처럼 고쳐지기 어려웠고 교사들은 학습성취가 아닌 아이들의 출결 등 생활의 문제와 씨름하느라 기운이 거의 소진되고 있었다. 도시형 대안학교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3-4년은 서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이렇게 흘러갔다.
시간을 견뎌낸 힘이었을까? 아이들의 눈빛에서 적개심이 수그러들고 낯빛에서는 경계심이 풀렸다. 사실 나도 정확히 언제쯤부터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도시형 대안학교 교사들이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교사들의 입에서 수업과 학습이라는 단어가 자주 오르내리게 된 시점을 말이다. 교사들과의 원초적 부딪힘을 견뎌온 시간들이 아이들에게는 신뢰를, 무턱대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만들어보았던 혼돈의 세월들이 교사들에게는 노하우를 축적하는 양질전환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뿐.
“제발 사고만 치지 마라, 제발 학교에만 나와 다오, 제발 눈을 보고 이야기 좀 하자." 이 아이들이 이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더러는 취직을 했다. 물론 여전히 양지에 부재중인 아이들도 있기는 하다. 얼마 전 책을 낸 모 대안학교의 졸업생처럼 S대를 가지는 못했지만, TV에 자주 나오는 공연단 아이들처럼 멋지고 신기한 악기를 만들고 두드리며 나라 안팍을 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이 아이들은 해마다 학습발표회가 열리는 날이면 후배들과 선생님들을 찾아와 지난 시절 자신의 무용담(?)과, 한때는 자신들에게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세상에서의 생존경험들을 멋쩍게 풀어놓는 졸업생 선배가 되었다.
도시형 대안학교에는 학습에 우선하는 돌봄이 있다. 배움의 과정을 설계하는 것보다 삶을 지지해주는 것,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기 전에 이제껏 무시하고 천대했던 자기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것, 이런 섞임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천천히, 조금씩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교의 교육시스템 속에서 아이들은 사람을 신뢰하는 체험을 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대안학교의 수도 많이 늘었다. 정확히 조사해보진 못했지만 이 기간 중에 주로 초등 대안학교가 많이 늘어났고, 기숙형 학교들의 수도 눈에 띠게 늘어난 것 같다. 도시형 대안학교도 그 수가 늘고는 있으나 위에 비하면 증가세가 많이 더디게 보인다. 열댓 개였던 대안학교가 이제 줄잡아 100여개가 되었으니 실로 급격한 증가추세이긴 하다. 그러다보니 그 와중에서 학교의 설립목적이나 운영형태 등을 두고 진정성 시비가 간혹 일기도 하였을 것이다. 돌아보면 도시형 대안학교들도 많은 변화들이 있었으나 지향하는 대상이나 운영방식, 수혜자부담 비율 등에서는 지금도 대부분 기존의 철학을 유지하고 있다. 장애아, 새터민, 이주노동자 자녀 등 사회의 약자들에게 새로운 교육의 길을 열어주었고 프로젝트 학습, 개별 맞춤교육, 멘토링 시스템, 학원과는 다른 검정고시 학습 등 대상특성에 맞는 교육적 노하우도 많이 축적하였다. 이렇게 도시형 대안학교는 그 숫자는 비록 적지만 제도권 학교와 기숙형 학교로 지칭되는 일반적 대안학교의 틈새에서 갈 곳이 막막했던 다수의 탈학교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교육적 안전망이 되어주었다. 규모의 영세성과 지속성이 없는 교사진, 사회가 요구하는 학습 성취 수준의 미흡함 등 아직 넘어서지 못한 많은 난제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안교육 안의 양극화 문제에도 이제는 눈을 돌려야 한다
지겨울 만치 익숙한 단어인 ‘양극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심각하게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사회와 교육이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요즘 대안학교는 이러한 사회의 현실에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10년 동안 늘어난 대안학교들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대안교육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부모의 자녀들과, 좋은 교육내용 만큼의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가정에서나 입학이 가능한 학교인 듯 보인다. 초등대안학교는 주로 조합형으로 시작하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일정 기부금 또는 예탁금을 지불해야 입학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고, 기숙형 학교의 경우에는 기숙사비를 포함하면 월 몇 십 만원의 학비가 들어간다고 들었다. 도시형 대안학교 중에서도 교육과정과 시스템이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학교들의 경우 기숙형과 비슷한 학비부담이 있다. 정확한 통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탈학교 학생들의 유형분포와 대안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유형분포는 불균형상태에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런 학교들에도 장학금 제도가 있어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에게 혜택을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여전히 전체 운영예산에서 수혜자의 부담금(월 교육비, 기부금, 예탁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반해 도시형 학교들이 저마다 약간의 차이점은 있겠으나 수혜자 부담금이 30%를 넘지 않으리라 본다. 우리학교의 경우를 보더라도 전체 예산에서 수혜자 부담금의 비율은 대체로 15∼20%수준이다. 나머지 비용(전체 운영예산의 80%이상)은 지자체 보조금, 외부공모사업, 외부기관 장학금, 일반 후원금 등으로 채워진다. 바꾸어 말하면 탈학교학생들 중 많은 수가 경제적 사회적 취약 계층의 가정이라고 볼 때 도시형 대안학교는 경제적 진입장벽이 현저히 낮다는 이야기다.
결국 대안교육 안에서도 경제적인 능력이나 여건이 되는 가정에서 선호하는 학교와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 선택하게 되는 학교는 점점 더 구획이 나눠지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시설과 재정도 크게 간격이 벌어지고 그에 따른 교육의 질 또한 대안교육 안에서조차 양극화로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대안교육 진영은 추구하는 교육의 본질과 연관하여 이 부분에 대한 전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대안교육, 그 상생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해 철학적으로 긴 설명을 나열할 생각은 없다. 다만 경쟁이 아닌 상생을 지향하는 것이 대안교육의 중심가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잊지 말았으면 한다. 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부분에 속하는 다수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실천하지 못하는 교육은 엄밀히 말해 우리가 꿈꾸는 미래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현재 대안교육 진영의 많은 대안학교들은 피라미드의 하위에 속한 계층에게는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대안교육 진영의 현 상황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전혀 모르는 바 아니고 대안학교가 귀족학교라는 세간의 비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다수의 대안학교들이 자신들의 철학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교육적 배려가 어떻게 녹아있는지, 그리고 그 철학에 기초한 교육과정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어떤 대상을 우선해서 선택하고 있는지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학교는 이를 기준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느 높이의 장벽을 치고 있는지 치열하게 돌아보기를 권한다. 만약 진정으로 상생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면 이 진입장벽을 최대한 낮추려는 시도를 진지하게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경제력이 없어도, 학습력이 낮아도, 부모의 교육의지가 없어도 본인의 수학의지(본인의 의지는 필수요건일 수밖에 없겠다)만 있다면 교육의 기회가 허락되는 학생선발의 구조를 갖고 있다면 진입장벽은 낮아지리라 믿는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경제적인 부분일 것이다. 나 또한 대안학교가 안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진입장벽을 낮출 수 없다, 즉 수혜자에게 고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구조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는 수혜자의 경제적 지불능력을 입학의 조건으로 삼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 문제를 극복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만약 국가나 시민사회가 지원할 필요가 있는 대상을 껴안는다면 그에 따른 재원 확보 방법도 달라 질 수 있다. 각종 장학, 복지, 사회공헌 재단에서 소외청소년들을 지원하는 사업들이 있고, 이러한 아동,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국가지원금도 있다. 시민사회의 정기적인 후원도 최대한 유치할 수 있다. 도시형 대안학교들이 수혜자 부담비율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이런 재원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실제 도시형 대안학교의 경우 대체로 전체학생의 50%이상이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청소년들이다.) 일반 대안학교들이 이런 재원의 수혜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선택한 대상이 다르기 때문 아닐까.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경제적 또는 의식적 수준이 있는 부류의 가정들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어쩌면 핑계일 수도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더 깊이 들어가면 단순히 돈 문제에만 국한되는 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내 아이에게 더 좋은 교육을 시키려는 부모의 욕심들 즉, 삶의 여건이 내 아이들과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교육받는 것에 대한 거리낌, 지불한 비용에 대한 효과가 내 아이에게 많이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신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교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과가 뒤쳐지는 아이들에게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쏟아야하는 시간과 노력의 막막함, 가르치는 일 외에 추가로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여기저기 제안서를 내고 부탁을 하고 다니는 힘겨움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혹시 이런 이유들이 내면 깊숙이 자리해서 소외받는 아이들을 껴안지 못하게 발목 잡는 건 아닌지 뼈아프게 살펴봐야한다. 물론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여러 이유들이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제삼자가 하는 이야기들이 섭섭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스스로의 철학과 현실을 관찰하고, 상생을 위한 대안을 함께 찾아보고, 집단의 화두로 다같이 고민해보는 성찰과 다짐의 시간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들은 우리 모두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더불어 대안교육의 진영에서는 냉철한 분석을 통해 지난 10여 년간 누적되어 늘어난 전체 탈학교 아이들의 유형별 분포와 그 기간 동안 늘어난 전체 대안학교 입학생들의 유형별 분포가 어느 정도 일치점을 갖고 있는지를 정확히 관찰하고 파악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디쯤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가늠해보아야 한다. 월간『민들레』역시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안학교의 여러 유형과 사례의 소개에 치우침이 없었는지 되짚어볼만한 일이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대표되는 사례와 유형들이 중요한 이유는 편중된 대상인식이 교육과정 개발이나 예산의 집행 과정 등에서 많은 왜곡을 낳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에서 보자면 양쪽의 학습수준이나 성취목표에서 현저한 차이가 발생하는데, 경제적 복지적 소외계층의 탈학교 청소년들의 경우 학습력이나 선행 지식의 부분이 낮고 자기주도학습의 체험이 거의 전무한 반면, 반대의 경우 선행학습이나 독서, 홈스쿨링 등 자기주도 학습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높다. 후자의 아이들의 경우는 배움의 현장을 스스로 설계해서 찾아가는 학습모델을 제시할 수 있으나 전자의 경우 기초학습 및 학습습관(방법)에 대한 교육이 먼저 선행되는 학습과정이 개발되어야 한다. 또한 국가가 탈학교 학생들에 대한 예산을 편성하는 경우에도 표면적으로 성과나 영향력이 있는 대안학교가 아닌 소외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학교에 더 집중적으로 예산을 배분해야 한다. 출발선의 평등조차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소외된 아동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를 배제한다면 세상을 향해 대안교육이 스스로를 대안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안교육은 궁극적으로 사회운동이다.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여기서 아이들은 내 아이가 아닌 모든 아이들을 지향해야한다.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경쟁하기 때문이고 경쟁하는 이유는 더 가지기 위해서이다. 가진 자가 좋은 것을 다 가져가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아이들은 행복할 수 없다. 때문에 힘겨운 아이들을 껴안는 문제는 대안교육에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이고 자기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