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 본다.
"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When you look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looks into you. ]
[Friedrich Nietzsche, Jenseits von Gut und Böse,]
<출처 : 교보문고>
우리가 숨쉬는 이시대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1800년대 말 유럽 작은 마을이라는 배경을,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여, 요즘 우리나라의 작은 시골 마을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작고 초라한 여인숙, 어둡고 더러운 방, 때묻은 이부자리, 벽지가 뜯겨나가 군데군데 신문지를 처바른 벽에는 책이 쌓여 있고, 가구라고는 망가지기 직전의 책상 하나뿐. 그 책상 앞에 앉아 한 남자가 뭔가를 쓰고 있다.
아무리 쓰고 또 써 봐야 출판사에서는 그의 작품을 외면한다. 그런 원고를 이 남자는 작은 촛불 하나를 켜놓고 악착같이 쓰고 있는 것. 평생의 병, 싸구려 여인숙에서 여인숙으로 옮겨 다니느라고 다 낡아빠진 원고 가방처럼 갈가리 찢어져 나가는 신경줄, 영양실조와 불면… 그리고 외로움.
복도에서는 방세 안내려면 방빼라는 여인숙 주인 아낙의 고함이 들려오고, 창 밖에서는 자본주의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 서로를 팔고 사기 위해 흥정을 하는 소리가 요란한데, 이 남자는 귀를 틀어막으며 가장 사악한 악마에게 홀린 광신자처럼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 원고 위에 엎어져 고개를 들 줄을 모른다….
바로 이 남자 아직 졸업 논문도 쓰기 전인 24살, 독일 지성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그것도 그 저명한 바젤 대학의교수로 임명되어 전 독일 지성계에 명성을 날리던 니체다. 그 빛나는 성공의 길 위에 서있던 니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바로 그 이유는 그의 <선악을 넘어서>(김훈 옮김, 청하 펴냄),그 가운데서도 이 한 구절에 담겨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철학자는) 스스로를 지혜의 친구라기보다는 위험스러운 물음표, 불쾌한 바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대의 불쾌한 양심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자각해왔다.****그들은 당대의 가장 찬양 받는 도덕들 속에 얼마나 많은 위선과 안일, 나태, 타락, 허위 등이 숨겨져 있는가를, 그리고 당대의 미덕이 얼마나 낡은 것인가를 폭로해왔다. 그들은 항시 다음과 같이 말해왔다.
`우리 둘은 오늘날 그대들이 가창 불편스러워 하는 곳으로, 그러한 길로 가야만 한다.`` 그가 지금 진리로 통용되는 것에 대한 의심, `지금 이곳`에 대한 불신을, 뿐만 아니라 그 탐구를, 영과 육을 마지막 한 자락까지 소모시키며 극단까지 밀어붙여 나아간 지점이 바로 그의 발광, 그리고 그 참혹한 외로움이었다면 그의 삶을, 그리고 그와 불화를 빚은 이 세계를 무어라 해야 할 것인가?더구나 그의 의심과 우려가 타당한 것이었음을 그가 죽은 이후 오늘까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입증하고 있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 자신은 그가 살던 세계, 그 사람들과 얼마나 같은 것, 또는 다른 것일까? 지금 어느 여인숙에선가 또 다른 니체가 발광하여가는 것을 우리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묻는 것은 `우리의 오늘` 역시 `니체의 오늘`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