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서울 정릉 심곡암 관음굴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1번지에 위치한 심곡암은 개창된 지는 100여년 정도가 된 사찰로 추정되나 정확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북한산 형제봉 아래 제1사찰이다. 사찰 경내에는 득남불공 기도처인 관음굴이 있으며 너럭바위와 수백 년 된 굴참나무가 사찰 경내에 있어 각종 문화행사를 이곳에서 펼친다. 관음굴 옆 바위는 ‘물개바위’로 불렸는데 이곳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들이 기도해 소원을 성취하면서 ‘관음바위’로 불린 이야기가 전한다.
일념기도로 관세음보살 친견하고 대를 잇다
정릉 김 참판댁 마님 꿈에 노인 나타나
형제봉 관음굴로 인도…백의관음 친견
기도객 발길이어 격식 갖춘 사찰로 변신
조선시대 말엽의 이야기다. 심곡암이 위치한 형제봉 주변은 오르기조차 힘든 협곡 중의 협곡이요 산중 가운데 산중이었다. 길도 없고 곳곳이 칡덩쿨에 뒤덮혀 자주 맹수가 나타나는 곳이었다.
사찰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은 아들을 점지하기로 영험이 높은 물개바위가 있었다. 모양이 물개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어 득남을 원하는 사람들이 헤매서라도 찾아가 기도하는 곳이었다.
물개바위가 이름난 계기는 정릉에 사는 ‘김 참판댁’이 대를 잇고 부터다. 이 집안은 대대로 큰 부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가문의 이름을 나라에 올리면서 곤궁하지 않은 삶을 살아 왔다. 하지만 이 집안에는 언제나 근심거리가 있었다.
“나라에 나가 벼슬을 하지 못한 불운은 없었다. 가문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이 있어 종을 부리고 먹고사는 문제도 없다. 그런데 왜 우리 집안에는 아들이 귀한 걸까. 6대동안 독자로 내려왔으니 반드시 대를 이어야 하는데 어이할꼬.”
자신 역시 독자였던 김 참판은 신세를 한탄했다. 이미 첫째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보았는데 딸이 셋이나 됐다. 집안에서는 후처라도 두어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자 했으나 허사였다. 둘째부인 역시 아들을 낳고자 하였으나 딸 셋을 낳고 친정으로 쫓겨 나고 말았다. 하다못해 김 참판의 부모는 씨받이라도 들여서 후사를 잇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마음씨 착한 부인은 매일 우물에 가서 정한수를 떠다 별당에 모셔놓은 부처님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부처님. 부디 저희 나으리에게서 후사가 생겨 대를 잇게 해 주세요. 제가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반드시 이 집안에 아들을 점지해 주십시오.”
그날 밤 김 참판 부인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얀 백발을 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을 깨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보시오, 부인. 나는 당신이 무엇 때문에 그리 고민하고 있는 지 알고 있소. 내가 그 고충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내가 시키는대로 하시오.”
노인은 부인에게 다가오는 초파일을 보낸 지 한달 되던 날 북한산 형제봉 능선을 올라가라고 말했다.
“우거진 산 계곡을 가다보면 칡넝쿨이 많을 것이오. 번거롭더라도 그 숲을 헤치고 올라오시오. 그러면 형제봉 아래에 이르고 그곳에는 널따란 바위와 상수리나무가 있을 것이오. 다시 조금 더 올라오면 물개 모양을 한 바위가 있을 것이오. 그곳에 등잔불을 켜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일념으로 기도하시오. 그러면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오.”
잠에서 깬 김 참판 첫째부인은 “참 신기한 일도 있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꼭 한달 되던 날 하인 연지와 머슴 한명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특별히 다녀올 곳이 있으니 나와 길을 나서야겠네. 연지는 향(香), 등(燈), 꽃(花), 과일(果), 차(茶), 쌀(米)과 송진 등잔을 준비해라. 그리고 돌쇠아범은 산길을 헤치고 가야 할 것이니 자루가 긴 낫을 준비하게.”
음력 5월초는 초여름이라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등에는 삽시간에 땀으로 가득찼다.
“아이쿠. 이 더운 날씨에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남.”
돌쇠아범은 그래도 안방마님이 길을 안내하는 대로 묵묵히 숲을 헤치고 올라갔다. 산 중턱을 올라 너럭바위에 이르자 김 참판 부인은 “잠시 여기에서 쉬었다 가세”라고 말했다. 주변은 온통 칡넝쿨 향기가 가득찼다. 부인은 “필시 이 근처에 물개바위가 있을 것인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하인들한테 일렀다. “자네들은 여기에 앉아 있게. 나는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오겠네.”
부인은 마치 자신이 언젠가 이곳에 와 본 것 같았다. “아, 그 노인이 일러준 장소야. 그러면 바위가 있을 텐데.” 순간 부인의 머리 위 칡넝쿨 사이로 물개모양을 한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었다. 부인은 소리를 쳤다.
“연지야. 돌쇠아범 여기로 오게!”
돌쇠아범은 주변의 풀을 걷어내고 연지가 가지고 온 여섯가지 공양물로 상을 차리고 자리를 물러났다.
“자네들은 너럭바위에 가서 쉬고 있게. 내가 여기서 기도를 하고 내려갈테니. 조금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으니 기다리게.”
김 참판 부인은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 한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주변이 어둑어둑해 지더니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마른 하늘이었는데 무슨 조화인가?”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부인은 관세음보살을 염송했다. 얼마나 그 기도가 간절했던지 부인은 이내 삼매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삼매에 들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부인의 눈 앞에는 커다란 새가 나타났다.
“이 무슨 마장(魔障)이 나를 가로막는가? 안되겠다. 더욱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해야겠어.” 다시 일념에 든 부인이 관세음보살 명호를 외우자 큰 새가 나래를 펴고 하늘로 훼를 치며 올랐다. “아! 관세음보살님.”
검은 새는 하얀 빛을 뿜어대며 하늘로 오르는 순간 온 몸은 백옥같이 변했고 날갯죽지가 천수천안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간절한 기도는 분명 성취될 것이오.”
마치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이 경외스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연지와 돌쇠아범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너럭바위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김 참판 부인의 얼굴은 그때부터 온화한 자비미소가 그칠 줄 몰랐다. 산을 내려와서도 부인은 매일 부처님께 기도를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 드디어 경사가 났다. 태기가 생긴 것이다.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할 것으로 믿었던 부인의 임신소식에 김 참판은 뛸 듯이 기뻐했다. 부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본 백의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을 입은 게 틀림없어.”
열달이 지나자 부인은 아들을 얻었다. 세월이 흘러 아들과 부인이 함께 형제봉을 찾았다.
“어머니, 저기 굴 위에 부처님이 있어요.”
참판부인은 아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관세음보살이 굴입구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한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의 간절한 기도에 관세음보살님이 소원을 이루게 해준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물개바위’로 불렸던 이 바위를 ‘관음바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위 안으로 차츰차츰 굴을 파기 시작했고 제법 공간이 넓어지면서 굴바위 안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누가 모셔다 놓았는지 부처님도 등장했고 세월이 흐르자 요사채도 들어서 사찰의 모습이 갖춰지며 ‘깊은 계곡에 위치한 암자’라는 뜻으로 ‘심곡암’이라 불렀다.
현재 심곡암은 조계종 스님이 머물면서 봄이면 산꽃축제, 가을이면 단풍축제를 열었고, 사찰은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래서 양희은 장사익씨 같은 예인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면서 ‘암자예찬’을 많이 했다. 또 조각가 오채현씨가 천진불과 석탑을 조각해 사찰에 전시해 마치 야외 전시장을 연상시킨다. 현재도 득남을 원하는 사람들이 매일 기도하는 심곡암은 최근 굴법당을 더 확장해 옥부처님을 모셔놓았고, 산신도 모셔놓았다.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tdyeo@ibulgyo.com
◎ 찾아가는 길
서울 내부 순환도로를 통해 올 때는 정릉에서 내려와 국민대 입구를 지나 북한산 입구로 찾아 오면 된다. 정릉길에서는 북악터널을 지나기 전 우측 주차장에 차를 세워 북한산으로 들어오면 심곡암을 찾을 수 있다. 평창동에서 올 때는 북악터널을 지나 국민대 앞에서 유턴을 하면 된다. 북한산 입구에서는 등산길을 20~30여분 걸어 올라와야 한다.
[불교신문 2412호/ 3월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