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언론, 사법, 감찰의 역할을 하던 국립기관으로, 사헌부(憲府), 대성(臺省), 상대(霜臺), 오대(烏臺),
백부(柏府)라고도 하였다. 사간원과 함께 대간(臺諫) 또는 양사(兩司)라고 하였고, 형조, 한성부(漢城府)와 함께
삼법사(三法司)로 일컬어졌다.
『경국대전』에서는 종2품 대사헌 1명 아래, 종3품 집의 1명, 정4품 장령 2명, 정5품 지평 2명, 정6품 감찰 24명으로
규정하였다. 『속대전』에서는 감찰의 수를 13명으로 줄여 문관 3명, 무관 5명, 음관 5명으로 충당하였다.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와 감찰은 업무상 명백히 구별되어, 전자는 정치나 관원들의 잘못을 밝혀 탄핵할 수 있었
지만, 감찰은 중앙과 지방의 일의 진행이나 처리에 잘못이 있는지를 감찰하는 기능만을 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원칙적으로 사헌부의 업무는 정치의 옳고 그름을 살피고, 백관의 잘못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며,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헌부는
사간원과 함께 왕에 대한 간쟁을 하였고, 의정부, 육조 등의 핵심기관과 함께 입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연이나 서연, 각종 행차에 왕과 세자를 수행하였고, 5품 이하 관원들을 임명할 때 적임자 여부를 심사하여
동의하는 서경(署經)을 하였다.사법기관으로서 각종의 금령(禁令)을 집행하고, 백관을 규찰하여 기강을 확립하며,
중대 범죄자에 대한 국문을 하였다. 사헌부의 관원을 풍헌관(風憲官)이라 불렀던 것은, 지방에서는 관찰사,
중앙에서는 사헌부가 관원들의 잘못을 규찰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홍문관 |
|
조선시대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와 각종 문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던 국가 기관으로, 옥당(玉堂), 옥서(玉署), 영각(瀛閣)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기관이었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으로서 일단 홍문관원이 되면 출세가 기약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승 · 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1463년(세조 9)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장서각(藏書閣)을 홍문관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학술 · 언론기관으로서의 홍문관은 1478년 3월에 세조에 의해 집현전이 혁파된 뒤, 집현전의 기능은 부분적으로 예문관에 의해 계속되다가 당시 홍문관에 이양됨으로써 성립되었다. 홍문관의 직제는 집현전의 직제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제학 이상은 겸관(兼官)이고, 부제학 이하는 전임관이며, 부제학이 전임관의 수석관(首席官)이다. 홍문관은 청요직으로서 그 관원은 지제교(知製敎)가 될 만한 문장과 경연관(經筵官)이 될 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하였으며 우선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야 하였다. 홍문관의 실제적인 기능은 집현전에서와 같이 학술적인 성격과 왕의 자문에 응하는 정치적인 성격을 아울러 가졌다. 특히, 언론삼사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 큰 비중을 가졌고, 학문적 · 문화적 사업에도 주도적인 구실을 한 기관이었다.
| |
이황[李滉] |
|
1. 생몰 1501-1570(연산군7-선조4) 2. 급제 - 27세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 - 28세 1528년(중종 23)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 사마시에 급제 - 33세 1534년(중종 29)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3. 암행어사 연보 - 41세 1542년(중종 37) 충청도 어사로 제수하다 4. 관련 기록 ≪중종 097 37/03/19(기해). 임열ㆍ이황ㆍ민전ㆍ김저 등을 어사로 제수하다≫ 종이 쪽지에 임열(任說)ㆍ이황(李滉)ㆍ민전(閔殺)ㆍ김저(金率) 등의 이름을 적어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전에 농사가 더욱 흉작인 각 도에 어사를 보내어 적간(摘奸)하였는데 너무 일렀던 것 같다. 올해는 근고에 없던 흉년이다. 3월 보름 이후부터 5월 보름 이전까지가 흉년 구제 시책이 가장 긴요한 때인만큼 적절한 조치를 못하면 그 피해가 크다. 안사언은 흉년 구제 시책을 태만히 한 까닭에 파직하였지만 그 밖에도 구제 시책을 부지런하게 펴지 않은 수령은 한둘이 아니다. 4개 도가 더욱 심한데 시종(侍從)중에서 가려 보낼 것이니, 암행 어사처럼 분주하게 돌아다니지 말 것이며 도종(徒從)이나 음식은 되도록 간략하게 하라. 험하고 외딴 마을까지 샅샅이 방문하여, 떠도는 자는 몇 명이고 굶어 죽은 자는 몇 명이며, 진휼해서 목숨을 살린 자는 몇 명이고 굶주려서 죽게 된 자는 몇 명이며, 어느 수령은 성심껏 구휼하고 어느 수령은 진휼을 게을리 하는가 따위의 일을 탐문해서 온다면 내가 친히 본 것이나 다름없으며, 백성들 또한 나의 진념이 깊은 줄을 알 것이다. 이 사람들을 명초하여 말하라.” | |
규장각[奎章閣] |
|
조선후기에 왕실도서 보관 및 출판과 정치자문 등을 담당하던 국가 기관으로, 조선 초기인 세조 때 잠깐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었으며, 1694년(숙종 20) 역대 국왕의 글씨와 작품을 보관하기 위한 규장각의 설치를 다시 시도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다가 1776년(정조 1) 비로소 대궐 안에 설치하고,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우선 영조의 어필(御筆), 어제(御製)를 봉모당(奉謨堂)을 세워 봉안하고,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였으며 출판 등을 담당하던 교서관을 합쳐서 외각으로 삼았다. 1781년(정조 5)에 청사들 중 가장 넓은 옛 도총부 자리로 옮기고, 강화사고 자리에 강도외각(江都外閣)을 신축하였다. 또 내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국내 문서를 보관하는 서고(西庫)와 중국 문서를 보관하는 열고관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총 3만여 권에 달하는 현재 규장각도서의 기원이다.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나자 다시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였으며 1781년에는 서호수(徐浩修)에 의해 ≪규장총목≫이라는 도서목록이 작성되었다. 관원으로는 내각에 종1품∼종2품의 제학 2명, 종2품∼정3품 당상관의 직제학 2명, 정3품∼종6품의 직각 1명, 정7품∼정9품의 대교 1명이 있었고, 외각에는 당상관으로 겸하는 제조 2명 아래, 정3품 판교, 종5품 교리, 겸교리, 별좌, 정, 종6품 별제, 정7품 박사, 정8품 저작, 정9품 정자, 종9품 부정자 등이 있었다. 내각에는 정식관원 외에 서얼출신의 명망있는 학자로 충원하던 검서관이 있었다. 각신들은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승지 이상으로 국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젊은 당하관 중에서 선발된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시험하였고, 국왕의 언동을 일일히 기록하였다. 또한 왕과 정사를 토론하였고, 교서를 대신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그 밖의 각종 정책결정이나 편찬, 간행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정조 사후에도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규장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궁내부에 소속되었고, 이듬해 규장원으로 변경되었다가 1897년에 규장각으로 환원되었다. 현재는 1989년에 이르러 서울대학교 안에 독립건물을 마련하여 보관하고 있다.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도 출세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내각의 관원인 각신(閣臣)은 삼사의 관원보다 더 청요직으로 여겨졌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순한 왕실도서관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었고, 정조대 다른 어느 기구보다도 넓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정치적, 문화적 기구였다.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즉위 직후 외척과 환관 등의 세력을 억누르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혁신 정치를 수행하는 중추 기관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달성된 후 정세 안정과 더불어 규장각은 정치 연구, 자문기관이 되었다. 밖으로는 청나라의 건륭(乾隆)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내외 서적의 수집, 편찬 및 간행에 중심적 구실을 하여 우리 문화재 정리와 보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
자격루[自擊漏] |
|
세종 15년(1433년) 장영실은 이천, 김조 등과 더불어 ‘자동 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를 제작하는데 성공하였다. 자격루의 작동원리는 세종16년 7월 1일자 <세종실록>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격루는 4개의 파수호(播水壺), 2개의 수수호(受水壺), 12개의 살대, 동력전달장치 및 시보장치로 되어 있다. 파수호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띄워올리는 것은 경루와 다를 바가 없다. 살대가 떠오름에 따라 이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달되어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을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게 한다. 시보장치 상단에는 시, 경, 점을 담당하는 3 개의 나무로 된 시보인형[목인(木人)]이 각각 종, 북, 징을 칠 수 있는 기구(채)를 들고있다. 시간이 되어 시보장치 속 인형들의 팔뚝과 연결된 제어기구가 작동되면 인형의 팔뚝이 움직여 종, 북, 징이 울리게 되어있다. 이러한 동작은 시보장치 안의 동력공급, 논리, 연산 장치들에 의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인형 가운데 하나가 종을 울려 십이시를 알려 주면, 곧 이어 시보장치 안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 인형 가운데 그 시에 해당되는 동물인형이 시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나온다. 곧, 자시(子時)에는 쥐가 ‘자(子)’자가 적힌 팻말을 들고 나온다. 나머지 북과 종을 울려주는 2개의 인형은 밤 시간에만 경점의 숫자대로 북과 징을 울려 주는데, 1경 1점에서 북과 징을 울리기 시작하여 5경 5점까지만 작동된다.(경점법,更點法; 하룻밤을 5경으로 나누고 매 경을 다시 5점으로 나누던 고대의 시법) 예를 들어 3경 1점이 되면 북을 3회, 징을 1회 울려 준다. 이와 같은 자격루의 탄생으로 조선조 고유의 치안유지 제도인 인정,파루(人定罷漏)가 비로소 제대로 시행될 수 있었다. 장영실이 만든 또 하나의 자동 천문시계인 흠경각루(欽敬閣漏, 일명 玉漏)는 경북궁 천추천의 서쪽두었는데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놓고, 그 속에 풀을 먹인 종이로 높이 7척의 산을 만들어 산 속에는 옥루와 기계바퀴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이것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금으로 크기가 탄환만한 게 태양을 만들어서 밤에는 산속에, 낮에는 산밖에 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돌 게 하였는데, 태양의 고도와 출몰시각이 계절과 일치하였다. 자격루의 제작기술은 흠경각루를 비롯하여 1669년에 송이영이 만든 자명종(自鳴鐘)등에도 전승되었다. 자격루는 15세기 초 제어계측기술의 백미이다. 경점을 제어하는 5진법 연산장치는 복잡하고 정교하여 15세기 기술로 보기에는 믿기 어려운 당시 최첨단의 기술이다. 자격루는 단종 3년(1455) 2월 자동 시보 장치의 사용이 중지되었고, 예종 1년(1469) 10월에 다시 가동 되었다. 자격루는 연산군 11년(1505) 11월에 창덕궁으로 이전 되었다. 그리고 성종대에 자격장치에 의한 시보와 시간이 서로 맞지 않게 되면서 자격루가 창설된 지 백년 만인 중종 29년(1534) 9월에 마침내 보루각 자격루의 개조와 새 자격루의 제작이 착수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자격루는 중종 31년(1536) 6월에 완성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자격루의 구조는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와 같은 것이었고 경점을 자격할 뿐만 아니라 인정(人定),파루(罷漏)도 자격할 수 있게 개량된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