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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와룡산 문화와 정서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세상
안동 하회마을 답사기
안동지방을 내륙의 섬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내륙 깊숙이 자리잡은 원인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보수성이 강하여 한번 문화가 물들면 외부의 다른 문화를 쉽게 받아 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받아들인 전통이나 문화는 고수함으로 좀처럼 바뀌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전통문화나 그 뿌리를 연구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회탈과 병산탈(국보121호)을 들 수가 있는데, 이는 우리 국보 중에서도 유일하게 무형문화재 격인 전통 탈춤에 관련된 문화재 이고, 그 전통 탈춤을 지금까지 훌륭히 잘 계승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안동은 고대 민속문화를 기반으로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고유의 전통문화를 꽃피웠다.
많은 고찰과 석탑 및 전탑은 이 지방의 불교문화를 대변해 주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전탑이 많이 세워져서 '전탑의 고장'으로 불린다.
국보16호 안동 신세동 7층전탑(중)
보물제115호 안동 이천동 석불입상(하;일명 제비원 석불)
또한
문중의 종택을 비롯한 수많은 목조건물은 유교문화의 융성을 입증해주고, 특히 조선시대의 건물과 민속품 등 양반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 음식으로 안동소주, 안동 간 고등어, 안동 헛 제사밥 등이 여전히 남아서 우리 나라 전통문화관광의 거점도시로 인기가 있는 곳이다.
뭐니뭐니 해도 안동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양반의 고장'으로 불린다.
하회마을 농촌 풍광(하)
그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안동이 사림의 고장으로 자리잡았고, 그 전통이 아직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래 안동은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중소 지주층이 이주해 오는 수가 많았는데, 그들을 비롯해서 향리로 자리잡았던 이들이 신흥 사대부로 성장하면서 안동의 중심사족을 형성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물돌이 마을 예천군 회룡포(하)
안동일대의 명문가들은 퇴계 이황에 그 연원을 두고 있지만, 그 다음으로는 퇴계의 제자인 학봉
이제 내륙의 섬 중에서도 섬인 하회 마을로 발길을 돌려 보자.
하회 마을은 영국 ‘엘리자베쓰2세’여왕과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 한국의 전통고장으로 이 마을을 방문함으로써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더욱 유명해 진 곳이다.
낙동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여기서 마을을 감싸 돌고 있어 지명이 하회가 되었다고 한다.
동으로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이 있고, 그 줄기의 끝이 강에 싸인 동네까지 뻗어서 아주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가옥들은 전통적인 배산임수와는 달리 이 구릉을 중심으로 낮은 곳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집의 방향이 일정하지 않고 동서남북을 향한 각각 다른 방향의 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옥배치는 마을 중심부에 “류”씨들의 집인 큰 기와집이 자리잡고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된 초가집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즉 중심가옥인 ‘충효당’과 ‘양진당’은 마을내의 중앙부, 즉 연꽃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나머지 문중의 종속가구는 그 주변에 마치 꽃잎과 같이 펼쳐진 상으로 입지하여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위계가 중심과 주변이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강 건너
하회마을 흙 기와 담장(중)
하회마을 재래식 화장실(하)
부용대 정상에서 하회마을 주위의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산하와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 줄기. 하얀 백사장. 그리고
하회마을 한약방(중)
하회마을 대문의 휘호(하)
마을에서 바라볼 때 강 건너 부용대의 오른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옥연정사와 왼쪽 기슭의 겸암정사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소위 ‘서애 오솔길’은 절벽을 가로지르는 약 300m의 외길로 지층과 지층 사이의 틈새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로 아찔하다.
부용대로 가는 나룻배와 절벽위 중간으로 소위 서애오솔길(상)
하회마을에서 본 부용대 전경(중)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전경(하)
하회마을과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안동하회마을(安東河回마을)
마을이 사방으로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으로 인해 한 번도 외침을 받지 않아, 전형적인 양반 집부터 시작해서 서민적인 초가 토담집에 이르기까지 전통 고가와 민속이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하회마을 초가집(중)
하회마을 골목길(하)
풍산 유씨의 씨족마을로 유운룡·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또 우리의 민속신앙(民俗信仰)이 잘 보존된 곳으로 성황당(上堂), 국신당(中堂), 큰고개, 작은고개당(골매기신) 등 5곳이 있는데, 삼신당(下堂)은 풍수지리상으로 마을의 혈(穴)에 해당하는 곳으로, 행주형(行舟形)인 하회마을의 돗대 역할을 이 나무(삼신당)가 한다고 믿었다.
하당(下堂)으로도 불리는 느티나무를 잘못 건드리면 동티(재앙)를 입는다는 토속신앙이 마을에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가 여기에서 이루어지며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하여 졌다고 한다.
하회마을 삼신당목 (상)
하회마을 남근석(하)
나무의 수령은 약 600여년으로 추정되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풍산류씨 입향시조인 공조전서 류종혜공이 하회마을에 들어올 때 심었다고 한다.
유명한 하회별신굿은 한 마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일구어나가기 위해 함께 마음을 모아 벌였던 축제로 고려 이래로 전해 내려온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 밖에도 홍건적을 막는 것을 놀이화한 차전놀이와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가 물을 건너지 못하자 부녀자들이 엎드려 건네주었다는 데서 유래한 놋다리밟기 등이 민속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민속놀이는 역사적으로 필요할 때 발휘되었던 이 지방의 단결력을 엿볼 수 있는데, 매년 10월중에 '안동민속축제'가 펼쳐지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는 97년부터 시작된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이 안동시 전역과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성대히 개최되기도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 별신굿 탈놀이(河回別神굿탈놀이)
하회마을의 2가지 놀이 중 하회 선유 불꽃놀이가 선비들 놀이였다면,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서민들 놀이였다.
탈놀이 중에는 탈을 쓴 광대가 양반을 향하여 평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나무랄 수 있었으며, 양반에게 수작을 할 수도 있었다.
하회별신굿 놀이(하)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고,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이나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만송정…. 만송정(萬松亭)은 마을의 북편 화천 가를 따라 나있는 소나무 숲을 말한다. 원래는 유운룡이 이곳에 정자를 지어 그것을 만송정(萬松亭)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소나무 숲만 남아 있다.
1983년 4월 우천(友川) 유단하(柳端夏)의 기문이 적힌 만송정비(萬松亭碑)가 유상붕(柳相鵬)씨 명의로 세워져 소나무 숲 사이에 있다.
하회마을 서낭당…. 화산의 중턱에 위치해 있는 서낭당은 매우 초라해 보이는 1칸 짜리 오두막이다. 무진생(戊辰生) 김씨 서낭신 깃들어 있다는 이 서낭당은 하회의 터주로서, 하회 별신굿의 신앙적 본향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회마을국사당… 화산 기슭의 서낭당에 오르는 길 오른편에 위치한 국사당(國師堂)은, 국시당 또는 국신당(國神堂)으로 불린다. 서낭당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모양으로, 원뿔 모양의 지붕을 갖고 있는 정방형의 1칸 짜리 오두막이다.
삼신당목…. 삼신당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수명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를 말하는데, 풍산(豊山) 유씨(柳氏) 입향(入鄕) 시조(始祖)인
매번 정월과 대보름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가 여기서 이루어 졌고, 하회 별신굿 탈놀이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해지는 곳이다.(사진은 앞에 있었던 삼신당목과 남근석)
*국보121호 하회탈과 병산탈
하회마을과 그 이웃 병산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의 태생지다.
하회탈로는 11개가 전해지는데 주지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탈이 있다. 이밖에 총각, 별채, 떡 다리 탈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병산 탈로는 2개만 남아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 탈놀이가 끝나면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하회탈과 병산탈은 드물게 보이는 목조탈이며 격식과 세련됨을 갖춘
유물이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거행되는 “별신굿”에 쓰이던 것이며, 마을마다 따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탈에 대한 금기나 제약이 매우 엄격했다.
이 탈의 재료는 오리나무이며 그 위에 옷칠을 두겹 세겹으로 칠해 정교한 색을 내고 있다.
턱은 따로 조각하여 만들고, 그 턱을 노끈으로 달아 놀이 할 때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주도록 되여 있다.
하회탈 중에서도 특히 양반탈과 백정탈은 세련된 입체감과 표현상의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이 탈의 제작자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고, 대체로 고려 중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여진다.
*국보132 징비록(사진위)
현재 저자
징비록은 조선중기의 문신인 서애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정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물제306호 양진당
매우 오래된 풍산 유씨의 종가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입암
앞면4칸 옆면3칸의 팔작지붕으로 왼쪽 한칸은 온돌방인데 ?E마루와 난간을 둘러 마치 누각처럼 인상을 주고 천정은 지붕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일반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의 별당건축물중의 하나이다.
현재 집주인이 거주하고 있어 외부인이 출입할 수는 없다.
*보물제414호 충효당
서애
이 건물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묵(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충효당(忠孝堂)은 원래는 작은 규모로 지어진 집인데,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랑채가 독립되어 있는 점과 사랑채가 안채의 앞쪽에 위치해 있는 점. 거리 마당이 좁은 대신 바깥 마당이 넓은 것도 특이하다.
현재 집주인이 살고 있어 안채로의 출입은 통제되고 있다.
보물제414호 충효당
보물제160호 류성룡 종손가 문적
보물제460호 류성룡 종손가 유물
*보물제160-1호~11호 류성룡종손가 문적
이 문서들은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 총괄하던
보물제160-1호 진사록(辰巳錄)
보물제160-2호 난후잡록(亂後雜錄)
보물제160-3호 근폭집(芹曝集)
보물제160-4호 중흥헌근(中興獻芹)
보물제160-5호 군문등록(軍門謄錄)
보물제160-6호 정원전교(政院傳敎)
보물제160-7호 정조어제당장서화첩제문부채제공발(正組御製唐將書畵帖題文附蔡薺恭跋)
보물제160-8호 당장시화첩(唐將詩畵帖)
보물제160-9호 당장서첩(唐將書帖)
보물제160-10호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
보물제160-11호 호성공신록훈교서(扈聖功臣錄勳敎書)
이 서적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로, 당초 ‘안동류씨문서’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충효당 옆에 세워진 영묘각에는 서애의 유물을 전시한 건물로 징비록(국보132호), 류성룡종손가 문적(보물제160호=진사록과 난후잡록),
유물 가운데 선생이 쓰던 것으로는 갑주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인 혁화, 상아로 만든 홀(笏:신하가 임금을 뵐 때나 종묘사직에 제사 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에 모아쥐던 패), 갓끈, 관자, 그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보던 「동국지도」 등 총 7종이며, “서애선생 모부인 곰문기”는 자식들에게 재산과 노비를 분배한 기록인 분재기로 매우 희귀한 예이다.
조정에서 내린 고문서는 녹권과 교지 및 교서, 제문 등 총 14종이다.
이 유물들은
*중요민속자료 제84호 하회북촌택(河回北村宅)
북촌택은 양진당(보물 제306호)과 함께 하회 북촌을 대표하는 규모가 큰 집으로 북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경상도 도사를 지낸 유도성이 철종 13년(1862)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다.
사당은 별당채를 지나 안쪽에 별도로 담장을 둘러 지어 놓았다.
기단이 매우 높게 건축되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원래 99칸 집으로 전해지지만, 현재는 54칸이 남아 있다.
하회마을 북촌의 큰 집 중 하나이며 양반집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본보기로서 귀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85호 하회 원지정사(河回遠志精舍)
이 건물은 서애
이 정자는 1573년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대청이 1칸이고 방이 2칸인 것이 특이하다. 전면 반 칸은 툇마루를 냈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의 정자 건축물로 주목된다.
하회 원지정사
하회빈연정사
하회 옥연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6호 하회 빈연정사(河回賓淵精舍)
이 건물은 퇴?선생의 제자로 원주목사를 지낸 겸암 유운룡 선생(1539∼1601)이 서재로 사용하던 집이다.
조선 선조 16년(1583)경에 지었다고 하며 하회마을 북촌의 서북편 경암정과
집 이름은
*중요민속자료 제87호 하회 유시주가옥(河回柳時柱家屋)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작천(鵲泉) 고택(古宅)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유시주(柳時柱) 가옥으로 부른다.
지금은 일(一)자형 안채만 남아 있는데, 원래는 2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934년 홍수로 소실되어 현재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 지붕 집으로 사랑방으로 쓰는 우측 방과 안쪽의 방으로 연결되는 앞마당에 내외 벽을 두어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들이 서로 볼 수 없게 배려한 특징을 갖고 있다.
현재 이 집에는 주인이 살고 있으며, 민박과 음식점도 겸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88호 하회 옥연정사(河回玉淵精舍)
옥연(玉淵) 정사(精舍)는 1587년
이 옥연 정사의 창건에 관하여는
옥연 정사의 건물 배치는 제법 복잡하게 되어 있다.
일(一)자형의 문간채가 있기는 하지만, 바깥채 뒷문이 실제 출입문이다.
바깥채는 정방형의 4칸 짜리 대청과 좌우에 방을 갖는 구조의 건물인데, 이 건물이 정자이다.
더 안쪽으로는 안채와 별당채, 정원까지 갖추고 있어 제법 규모가 크다.
*중요민속자료 제89호 하회 겸암정사(河回謙菴精舍)
겸암(謙菴) 정사(精舍)는 1567년 겸암 유운룡이 학문 연구에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하였다.
부용대의 서쪽 절벽 위에 위치해 있는 겸암(謙菴) 정사(精舍)는 사실 유운룡의 사설 교육장, 즉 서당의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건물의 배치도 정자 건축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채는 ㄱ자형을, 바깥채는 일(一)형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회 주일재
하회 하동고택
화천서원
*중요민속자료 제90호 하회 남촌택(河回南村宅)
남촌댁(南村宅)은 1796년 지은 건물로서, 1954년 화재로 인해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남촌댁에는 많은 도서와 진귀한 골동품들이 많았는데, 이때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주인이 거처하지 않아 지정 문화재임에도 폐허가 되었다.
남촌댁은 북촌댁(北村宅)과 함께 하회의 아래 윗 마을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문간채는 솟을대문이며, 안채와 사랑채의 굴뚝을 연결해서 한 곳으로 통하게 한 점이 특이하다. 사당채 부근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데, 하회 마을에서 유일하게 대나무가 무성한 집이다.
*중요민속자료 제91호 하회 주일재(河回主一齋)
주일재(主一齋)는 본래
현재는
이 집은 하회에서 특이하게 정남향을 하고 있고, 일(一)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중문을 통해 이어져 있으며, 주요 건물이 일렬로 늘어선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가옥 형태를 하고 있고, 문간채와 사당을 갖추고 있다.
초가를 올린 화장실과 내외담의 존재가 매우 특이하다.
*중요민속자료 제177호 하회동 하동고택(河回洞河東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77- 1호 안채
중요민속자료 제177-2호 사랑채
중요민속자료 제177-3호 대문채
중요민속자료 제177-4호 방앗간
중요민속자료 제177-5호 화장실
하동(河東) 고택(古宅)은 1836년 용궁(龍宮) 현감(縣監)을 지낸 유교목(柳敎睦)이 처음 지었다.
전체적으로 24칸의 궁(弓)자 모양을 하고 있고, 안채와 사랑채를 한 채로 연결한 민도리 집이다.
하회 마을 동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하동 고택이라고 불린다.
현재 집주인은 우천(友川) 유단하(柳端夏)로 이 곳에 살고 있으며, 음식점을 하고 있다.
최근에 하회 마을 선비의 집으로 지정되었다.
*화천서원
하회 북안(北岸)
정조 10년(1786)에 건립하여 9월에 겸암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자인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1560~1620)공과 종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공을 배향시켜 100여년 이상 춘추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후손들이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건물을 짓고 1996년 복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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