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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蔡濟恭) ...정조시대의 문신, 3년간의 독상(獨相)
호는 번암(樊巖. ) 1720년에 태어나 1799년에 죽었다.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고, 태종에게는 하륜, 世祖에게는 한명회가 있었다면 正祖에게는 채제공이 있었다고 할만큼 뛰어난 명 재상이었고 죽어서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수원화성의 축조에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총괄하였다.
英祖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려 할 때 목숨을 걸고 반대할 만큼 강직하였으며, 이에 영조는 당파를 떠나 원칙에 충실한 신하임을 인정하고, 世子(후일 정조)의 교육을 맡긴다.
1799년(정조 23) 영의정 체제공이 죽자 정조가 내린 뇌문비(雷文碑)이다. 뇌문(雷文)이란..죽은 이의 명복을 신에게 비는 글이란 뜻으로 논어에서 유래한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폐위를 반대하였으며, 수원 화성 축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체제공의 죽음을 기리며 정조가 집접 짓고,친필로 쓴 뇌문을 새긴 비석이다. (正祖御筆)
경기도 용인시 역북동 산 3번지에 있다. 그 모양이 아름답다.
정조는 이 글에서 체제공을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 지른 듯 험준하여라". 그의 문장에 대하여는 " 강개하고 청명하여 장주의 정을 취한듯 열자(列子)의 진액인듯하고 사마천의 골수같고 반고의 힘줄같다." 그의 성품에 대하여는 "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라고 격찬하였다.
또한 끝부분에 ' 조정에 노성(老成)이 없다면 어찌 국가를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 소문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
.......하며 5백마디의 말로써 뇌문을 지었다고 씌어 있다.
조선 최초의 세도정치가라 불리우는 홍국영이 축출될 때 채제공도 그 당파라 하여 탄핵을 받고 8년간의 칩거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1788년 정조는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여 다시 부르는데
채제공은 소위 육조진언(六條眞言)을 올린다. 그 내용은....
1.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도리를 바로 세울 것
2.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3. 당론을 없앨 것.
4. 의리를 밝힐 것.
5. 백성의 어려움을 돌볼 것.
6. 권력 기강을 바로 잡을 것.
正祖는 이를 모두 받아 들이며, 2년 후에는 좌의정으로 임명하는데 이 때에는 영의정,우의정이 모두 공석이었다. 정승은 채제공이 유일..이 3년간을 채제공의 독상(獨相)이라 한다.
체제공의 초상화.....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1756 ~ ?)가 그렸다.
채제공은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되어 왔던 남인(南人)과 북학파들을 대거 기용한다. 南人의 정약용, 이가환 북학파의 박제가, 서얼출신의 유득공, 이덕무 등이 모두 채제공의 밑에서 활약하게 되는데 흔히 말하는 실학이 크게 융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남인들이 많았었는데, 채제공은 이런 연유인지 천주교신자들에 매우 관대하였고, 후일 이 때문에 반대파인 노론 벽파에 의하여 관직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채제공은 당시까지 유지되어 왔던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한다. 즉, 이는 곧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이다. 이는 채제공의 정책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노론(老論)을 견제하는 역할도 겸하였다.
즉 노론세력이 당시 시전상인들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자금줄이었다. 하여튼 인삼 재배의 권장, 은화와 인삼을 통한 공무역의 활성화 노력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난전(亂廛)이란 전안(廛案...시장에서 취급하는 상품의 종류, 상인의 주소와 성명을 등록한 문서)에 등록하지 않은 상인의 상행위를 말한다. 기존 상인들의 기득권 보호 차원에서 또는 정부도 일정 국역 부담을 조건으로 난전을 규제할 수 있는 권리를 시전 상인들에게 부여하였었는데, 채제공이 이를 폐지한 것이다. 중요한 변화이었다.
시작은 초 귀차니즘!
일주일전 일요일날 나는 어릴적부터 쭉보아왔던
체제공선생 묘 가는길 펫말을 생각하고 벼루고 벼루던 끝에 한번가보자하고 가봤다.
사실 그전에 2번 더 갔었는데
한번은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고 비석이 있는 건물이 있는데 그게 다인줄 알고
그냥 왔었다. 사실 무덤은 거기서 좀더 위로 올라가면 있었으나 미처 보디 못했다.
난 다른데 있는줄 알았다. 그리고 한번은 거기 계단까지만 가서 도로 집에 간적이있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러니 무덤은 이번이 처음가보는 것인데
사실 무슨 무용총에 가는것도 아니고 천마총에 가는것도 아니니 뭐 얼마나 볼 거리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곳에 있고 이런걸 좋아하는지라
이렇게 글까지 써보게 된다.
처음에 보이는건 무슨 한옥이 보이는데 거기ㅣ에 비석이 있다.
언제 여는지도 모른다. 아니 열생각도 없는거 같다 관리인도 본적도 없고....
그것이 계단을 올라가면 위치하고 있는데. 건물이 꽤 낡아보였으나, 썩 문제있어보이는 않았다는게 나의 평이다.
내가 무슨 전문가의 안목이 있는것도 아니고 전문가다운 지식이 있는것도 아닌데다
역사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말뿐! 어디까지나 좋아할뿐 지식의 수준읜 일반인과 다를바가 없다.
건물을 보고서 대체 무엇을 느꼈냐고 물어본다면
할말이 없다. 사실 그렇잔나? 학교숙제에서 감상문이라도 쓰라하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연해서라도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겠으나 내가 스스로 심심해서 써보는글인데 그런걸 쓸리가 없잔나?
그래도 한마디! 꼭 한마디만 써보자면 색이 좀 바레긴 했지만 건물이 깔끔하다고 할까?
스님들이 하는 벽면수련은 저런데서 하는걸까? 아마 1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거보다 약간 큰평수로 보이는 건물은 아담하기 그지 없었다.
조그마한 사치도 자랑도 없이 그저 있는그대로를 보여주는 순수함이랄까?
아니 고결함? 하하하하하 나도 모르는 말이 나온다 저거 뜻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대답못한다
모르니까
비석을 봐봤자 글자도 모르지만 그래도 보고싶은 욕망은 있다. 언젠가 시간날때 보여준마면 달려가지 않고 날라갈텐데 말이다.
올라가는 계단이다. 저위에 왼쪽에 비석이 있는 건물이 있다.
예쁘다
위에 올라가서 아담한 집을 구경하며 주의를 둘러보았다.
그 건물을 자리에 건물에 어울리는 담장을 쌓아올려놓았다. 뒤에 흙을 지탱해 주는 역할로 보이는데
정말 보기 좋았고 어울렸다. 분수에도 맞지 않는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는게 정마 보기 좋았다.
왠지 생각는것이 저기서 애들이 소꿈장난해도 보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도 잘 나오고 했고....
저기에 올라가서 아래를 보면 주위에 빌라와 저멀리 동네와 산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것들 보다는 높은곳이니 기분이 좋다. 지하보다는 높은게 좋은게 사람심리니까
얼핏보기엔 열려있는듯이 보이지만 저것은 잠겨있는거다! 봐라! 자물쇠도 있지 않나?!
저건 분명히 잠겨있는거다 내 눈이 맛이 간게 아니란 말이다!
전문 사진가 흉내를 내보았다. 이왕 디카를 들고 갔으니 어떻게 좋은 사진좀 건질까 하는 마음으로 난 셔터를 마구 눌러뎄다 집에와서 오늘 확인해 보이 정확히 100장을 찍었다.
더도저도 말고 정확히 100장이다 그중에서 쓰레기 사진과 엄격한 심사로 좋은것들만 뽑아서 이렇게 올린다. 하여튼 흉내만 냈을뿐인데 사진이 멋있게 나왔다. 대충 찍어도 멋나는게 저 건물 그러니까 한옥의 특징인가 싶다.하늘로 뻗어지는 저 선을 보라!
근데 문위에 저 창살이 생각나는 틈새들과 저 태극문양은 대체 무엇일까? 원래는 색이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저렇게 보일뿐이다. 태극이 무엇이길레 저기에 장식을 했을까?
심오한 뜻? 아니지 아니지 그건 아니라 생각이 왠지 든다. 아무근거 없이 그냥 그런생각이 든다.
그래도 태극이 뭔지는 모른다. 건물을 지을때 그 시대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널리쓰이는게 흔히 지어지는건물에 나타나는 법일텐데 목공들이 학문을 할리는 없고 그들도 재법알듯한 거라면 아무 무리 없이 만들수 있다면 또 양반들이 그런 무식한 사람들에게 내놓을만한 것이라면 그 뜻은 재법 간단하지 않을까? 어렵게 설명하는거는 태극 본연의 개념의 문제이겠지, 저것을 만들때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넣었을까의 문제와는 다르다고 난 생각한다. 아무튼 저것이 무엇일까하며 계속 난 셔터를 눌렀을테고 주위를 계속 돌아다녔다.
아무튼 이리저리 둘러보고 무덤이 있는 쪽으로 가보았다.
올라가는 길은 언덕길인데 1분이면 가니 걱정은 말아라. 근데 태풍이 온지 얼마 안되서 간것이라
왠지 태풍의 흔적이 보였다. 보기좋은 숲의 모양을 하기를 원했지만 뭐 별수 없지
태풍이 꽤나 심했던 모양이니...천천이 길이 보이는데로 따라갔다. 사람다니는 흔적은 없으나
돌계단이 이내 보였다. 이제 와서 생각했는데 길을 만들때 정면에 만들지를 않았다는것이다.
지금이야 개발하고 해서 모양이 이렇지만 옛날에는 다 산 이였으니까 마음대로 했어도 될법한데
길은 정면에 세우지 않았구나하고 코난과 김전일 단서 찾은격으로 레이져가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이였다.
올라가는 길 가운데 우뚝서있는 나무가 정말 장관이였다. 얼마나 나이를 드셨는지 짐작이 힘들어지는 이 나무가 나의 앞길을 막아섰다. 사진에는 좀 실감나지 않지만 가서 보면 정말 수려하다라는 말이 저런데다가 쓰는구나를 느낄것이다. 저 나무를 보자마자 중3 역사시간에 선생님이 대원군에 경복궁복원사업이야기를 해주실대 양반무덤에 있는 나무까지써서 대원군을 욕을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저런걸 말하는구나를 느꼈다. 무덤의 위엄을 더 세워준달까? 아니 그겋게 말하기엔 뭔가 맞지도 않는거 같고 으음...어려운 영역이다. 아무튼 멋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나에게 힘이 아닌 무언가 말로 형연키어려운 위엄으로 나를 멈추어 세웠다. 누구나 한번은 멈추어...아니 적어도 발걸음이 느려지며 무덤에 가게끔만들었다 이 나무는...무덤의 주인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일까? 한참을 바라보았따. 아니 어떻게든 찍어서 간직하고 싶었다. 이리찍고 저리찍고 해보았지만 디카를 처음쓰는데다가 사진에 다 잡히지도 않아서 저것이 한계다. 그나마 낳은 사진을 올려놓았다.
오르내리면서 아래를 내다보면서 느낀건데 누가 올라가는 길 옆에 밭을 지어놓았다.
근데 우리세대는 농촌에서 잘지 않는한 저런거 모르는거라 대체 무슨 식물일까 하는 궁금증이생겨 기념으로 찍오올렸다. 아는 사람~ 내가 갔을당시 푸르게 다 잎이 나있어서 풍경을 망치지 않고 오히려 조화가 되었다. 뭐 그냥 그렇다는거다
자 무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시작은 또다시 초 귀차니즘으로!!!
가나다라바사........지금 인터넷인지 컴퓨터인지 몰라도 상황이 심히 않좋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오는구나. 아무튼 저것이 올라가는 게단의 모습이다. 무덤아래쪽에 그러니까 올라가는 도중에 이름모를 무덤이 있지만 초상권침해인듯하고해서 찍지 않았다. 사진을 기준으로 으른쪽에 한개가 있고
왼쪽으로 쭈욱가보면 무덤3개인가가 있따. 이들은 모두 왠지 관리가 허술한듯한 주인없는무덤인듯하며 비석조차 없다. 누구의 무덤이고 이 체제공이라는 사람과 무슨관계인지도 모른다.
만약 저기까지 올라가는 길을 모두 계단으로 일직선으로 만들어놓았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조상들이 너무너무 자랑스러워진다! 잘했어요~ 진짜로~~
만약 그렇게 만들었다면 나는 올라가다 쓰러졋겠지...가뜩이나 검은색에 하얀줄인지 그 반대인지
그런 모기가 자꾸 들러붙어서 혼났는데....거기에 땀이 더 났으면...으악!
아무튼 가뿐이 사뿐이 올라갔다 누구의 명언을 빌리자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도착했다
요것이 바로 나를 부르던 체제공님의 무덤 펫말에는 체제공선생이라고 써있는데 대체 요즘말하는 선생님은 아니겠고 무슨말인지도 몰라서 내 맘대로 님을 붙였으니 이해해라 요즘무덤보다 조금더 크고 주위에 석조물들이 있다는거 외에는 크게 다를바가 없는 무덤의 형태이다 왼쪽언덕에 흙이 씻겨 내려간 흔적이 보인다. 역시 태풍의 힘인가? 아님 키○라의 짓일리는 없고...
그게 좀 보기 않좋다 더욱이 안타까운것은 저무덤 전면을 모두다 찍지 못했다는것이다.
좌우에 있는 석조물들까지 모두 찍을려면 그만큼 거리가 필요한데...아쉽게도 다리 밑에는 돌로만든
벽에 끝이 있는지라....내 말이 이해안간다면 사진을 보시길..
뭐 요즘엔 보기힘든 저 제사할때 쓰일듯한 내모난 돌맹이와 주의에 석조무들 빼고는 크게 다르게 없다. 오히려 친숙하다가 아니라, 동네 어떤 이름모를 사람의 두덤을 온 기분이랄까?
그래도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안들었는지도 내가 모르는건 아마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라서 그런게 아닌까 싶다. 뭐 그냥 당시 양반무덤은 이렇구나. 높은자리까지 올랐으니 더 호화스러울법도 한데하고 약간의 아쉬움만은 남을뿐...위에 쓴 그냥 평범한 무덤이라는 생각은 내가 썻지만 와닿지는 않는다. 그냥 가는사람은 환상은 버리고 가라는 취지에서 쓴거니 아무말 마라.
무덤이 지저분해보이지 않는다는것은 누군과 관리를 한다는 반증이 된다고 해도 될까?
풀이 자라다 말리는 없을테니까. 그럼 그 관리인은 누굴까? 진실은 수수께끼로 남는다....
주위에 석조물들을 찍어보았다.
정체모를 탑이 서있다. 뭔지는 모른다 그냥 기념으로 찍어온것이다. 저것이 무덤 좌우에 하나씩 서있다 그것도 맨 끝에 말이다. 등은 아닐테고 이제 보니 체스의 병사가 생각나기도 하고...
사진은 좀 깨끗하게 나왔는데 요즘에 만드는것들은 너무 새거티가 난다랄까? 역사유물하고 확실히 차이가 나니 요즘만든것은 아니다. 음 그래야 내가 글쓰는데 명분이 생기지 뭔지는 모르지만 생긴다
비석이다. 오호호호호호! 한번 해독을 도전해 보았으나 나의 한자실력은 형편이 없어서 처음의 조선국과 마지막의 체제공밖에 해석하지 못하였다. 이거 나 참...까막눈이라..나의 친구들이여 한번 해석해 봐라. 비석이 상당히 크다. 사진에 비교할만게 없어서 그렇지만 좀 크다.
저거 양 맞지? 조선의 저런 생물체가 있었던가? 산양인가? 으음 인터넷에 쳐보니 천연기념물이렌다. 있긴 있는모양이다. 정확히 무슨 동물인지는 모르나 양은 뿔이 없으니 산양으로 단정짓겠다.
이것은 오른쪽에 있는것으로 역시 양쪽에 1새씩 서있다. 다리 아프겠다.
확대사진
옆에서 찍은 모습. 음....비석의 크기가 대강 이해가 가나? 보다시피 무덤의 형태는 사진과 같다.
모두를 포함한 사진은 찍지 못해서 말이지...
여기 곡대기에서 찍은 풍경사진은 저기 도중에 밭사진과 함께 있다 어쩌다 보니 그족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을 더 올리려 했으니 인터넷이 미쳐버려서 지금은 이걸로 후퇴를 해야겠다.
나중에 시간나면 버전 2.0으로 패치하겠다.
체제공이라는 인물을 한번 인터넷에 쳐봤으나 썩 기대할만한게 나오진 않았다.
그래도 그럴싸한걸 2개 찾았으니 생각해봐서 올려보도록하겠다.
이렇게 위인전에 만들어지지 않은 인물은 우리같이 평번함 사람들은 알길이 없다.
내가 조선왕족실록을 해독할 수도 없고 후손을 만나볼수도 없는 노릇이라 더욱 답답할 노릇이다.
아무튼 저기 무덤이 있는 꼭대기는 재법높아서 경치가 잘 보이는데
옛날엔 모두 산이였음을 감안하면 과연 풍경이 어떠하엿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풍경사진 오른쪽에는 보이지 않지만 음터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대학교수업시간 중 '골'이 들어가는 마을이름은 옛 고구려땅이였을거라하니 적어도 이사람은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 무덤을 지은건 아는거다. 사람이 사는곳에 멀리 떨어지지 않는곳에서 무덤을 지은것으로 추측한다. 뭐 사진에 보이는 곳도 엣날에 마을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무덤옆에 그러니까 저기 옆사진에서 내가 찍었던 위치 바로뒤에 훌륭한 소나무가 뒤틀린모습으로 서있는데 그 모습을 올리지 못하였다. 왠지 나이좀 먹어보인게 직선으로 솟은 그 나무보다는 못하지만은 꽤 멋있었다. 아무튼 사진을 찍느냐 모기한테 물려가면서 별 생쇼를 한것이 썩 아깝지가 않았다. 하하하하 재미도 있었고 말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초상권을 허락해 준것을 감사히 여기며...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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