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은 분명 왕인데... 좀 심하더라도 억지로 옆에 데려다 놓을 수도 있는데 어째서 한 숨만 내쉴까요?
그건 그 때 고구려의 귀족세력이 막강했고 중앙집권채제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유리왕에게는 아내가 두 명 있었는데 (왕 치고는 아내가 적죠 ^^;)
첫째 아내는 정략결혼으로 맞은 귀족집안 여자였고 둘째 첩은 한족인데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였습니다.
당연히 정략결혼으로 맞은 여자보다는 눈맞은(?) 여자에게 끌리기 마련이고 첫째 아내는 한족 첩을 보기만 하면 못잡아먹어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둘이 싸움이 났는데 첫째 여인이
'네년은 한족 오랑캐라 예의도 모르는구나!'
라고 호통치자 한족 첩이 상처받아서 본국으로 짐싸들고 가버립니다.
여기서 알아낼 수 있는 것 한가지 더
분명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민족이 세운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죠. 요즘 뗏놈들이 고구려가 지들 역사라지만 중국의 어느 지방민족 중 한족을 오랑캐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한족 첩이 이에 대꾸도 못하고 돌아간 것을 보면 분명 고구려에서 한족을 오랑캐취급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것 같습니다.
즉, 혈통 자체가 틀리다는 것이지요.
좌우간 유리왕은 애첩이 본가로 가버렸는데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붙잡으려면 첫째 아내를 내쳐야 할텐데 처가의 세력이 만만치 않으니 그냥 한숨이나 쉬고 그리움을 달래려 '황조가'나 지어 불렀던 것이지요...
고구려가 중앙집권체제가 완벽히 갖춰졌던 장수왕 때나 광개토대왕 때라면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유리왕 때는 건국 초기였고 그만큼 귀족들의 힘이 막강했던 것 같습니다.
첫댓글 翩 翩 黃 鳥 펄펄 나는 꾀꼬리는 雌 雄 相 依 암수 서로 정다운데 念 我 之 獨 외로운 이 내 몸은 誰 其 與 歸 그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그사람이바로치희입니다.화희와치희의싸움끝에치희가궁을나온거죠...
화희하고 치희가 사이좋게 지냈다면은 황조가라는 것이 존재 하지 않았을테고.. 이런 아픈 사연도 좋은 노래나 시를 만들어 내는 ^^;;
화희는 집안이 빵빵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