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원, 개성, 장연, 안악, 해주, 은율 분들
귀중한 자료입니다.
북한의 국보 1호~41호
문화재청이 최근 발간한 『문화재연감 2000』에 따르면
1999년 말 현재 북한의 지정 문화재는
국보급 50건, 보물급 53건, 사적 73건, 명승지 17건, 천연기념물 445건 등 모두 638건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보급 문화재로는 1호인
평양성(기존의 국보 1호는 대동문이었으나,
최근에 평양성을 국보 1호로 새로이 지정한 것으로
3호 강서 큰 무덤(강서대묘), 18호 동명왕릉,
46호 묘길상 등이 지정돼 있다. 보물급 문화재로는
1호인 평양종을 비롯해 2호 숭인전, 20호 해주 석빙고,
25호 자혜사 5층탑, 50호 회령향교 등이 포함돼 있다.
북한 지역은 지리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대륙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되던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 고려의 도읍인 평양과 개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예컨데 평안남도 상원, 함경북도 선봉(웅기) 등지에서는
원시유적이, 남포시 강서구역과
황해남도 안악군 일대에서는 고구려 고분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는 고려유적이 발굴되었으며,
북한 전역에 성곽, 누각, 사찰 등이 산재해 있다.
북한은 최근에도 잇달아 유적·유물의 발굴사례들을 발표하고 있는데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1993년에 평양 통일거리 건설현장에서 발굴했다는
`방위관측기'와 같은 해에 발굴된 '단군릉' 등이 있다.
북한 학자들은 방위관측기는 2000년 전 천체의 별자리를
통해 방위를 판단하는데 쓰인 것이며,
단군릉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실존을 입증하는
유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호-평양성
삼국통일을 위해 남진정책을 추진해 오던 고구려는 427년 조건이 조금 더 유리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은 평양성을 건설하였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 서, 남 세면을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해자(垓字 : 성
주위에 둘러판 못)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잡았다.
평양성의 바깥성벽은 금수산의 모란봉을 북쪽 끝으로 하고 서남으로 을밀대, 만수대를 타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치는 목에서 동북으로 꺾여 대동강을 거슬러 대동문을 지나 다시 모란봉에 이르렀는데 그 둘레는 약 16km이다.
평양성 안은 성벽들로 가로막아 내성, 중성, 외성, 북성의 4개 부분성으로 나누었다. 부분성들의 성벽까지 합친 성벽의 총 연장 길이는 약 23km이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남산재에 이르는 지대를, 중성은 내성의 남쪽 안산에서 동쪽으로 대동강까지의 지대를, 외성은 중성의 남쪽 대동강까지의 넓은 지대를, 북성은 내성의 북쪽 모란봉과 전금문 일대를 포괄한다. 내성은 궁성이고, 중성은 중앙관청들이 있는 황성이며, 외성은 주민거주지역이었다.
2호-보통문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있는 보통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지금의 성문은 조선시대인 1473년에 개수한 것으로
1644년, 1719년, 1777년 그리고 1994년에 보수를 거듭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보통문은 평양의 천리마거리와 창광거리, 보통문 거리의 중심점에서 민족적 향취를 돋궈 주고 있다.
3호-강서 큰 무덤(강서대묘)
평남 강서군 삼묘리에는 3개의 돌칸 흙무덤이 떼를 짓고 있다. 무덤 떼의 맨 남쪽에 놓여 있는 것이 강서 큰 무덤이다. 이 무덤은 사신도를 그린 외칸 무덤으로서 강서 중 무덤과 함께 고구려 후기의 벽화무덤을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이다.
강서 큰 무덤은 당시로서는 높은 과학기술에 기초해 치밀한 설계와 세련된 시공에 의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석조 예술품으로 벽화는 석벽 위에 그리되 벽면에는 사신, 천장에는 연꽃무늬, 인동넝쿨무늬, 구름무늬, 산수, 기린, 봉황, 비어, 비천, 신선, 천인, 황룡 등을 배치하였다. 7세기의 유적이다.
평남 강서군 삼묘리의 3개의 무덤 중 남쪽에 놓여 있는 것이 큰 무덤이고, 그 뒤에 나란히 놓인 두 무덤 가운데 서쪽의 것이 중 무덤이다. 이 무덤은 사신도를 그린 외 칸 무덤으로 강서 큰 무덤과 함께 후기의 고구려 벽화무덤을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다.
벽화는 돌벽 위에 직접 그렸는데 그 화법과 채색 등이 큰 무덤과 같다. 무덤의 네 벽에는 사신을 배치하고 천장에는 인동넝쿨무늬, 연꽃무늬, 구름무늬, 봉황새,
그리고 해와 달을 그렸다. 이 무덤의 백호도와 주작도는 강서 큰 무덤의 현무도, 청룡도와 함께 당시 동양미술의 꽃을 피운 고구려 회화, 특히 사신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들이다. 6세기 말∼7세기의 유적이다.
평남 강서군 삼묘리의 3개의 무덤은 삼각형의 무덤 떼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 동북쪽의 것이 강서 작은 무덤이다. 이 무덤은 외 칸 짜리 돌 칸 흙무덤으로 무덤무지는 방대형으로 생겼다. 이 무덤은 천정이 전체적으로 변화 있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도록 하여 미적 효과를 나타냈다.
이 무덤은 고구려 후기 돌 칸 흙무덤에 흔히 쓴 독특한 평행 삼각 고임 천장의 짜임새와 고구려 사람들의 석조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평남 강서군 태성저수지 서북단 구릉 위에 있는 약수리 벽화무덤은 인물풍속 및 사신을 그린 감(龕 : 무덤칸이나 탑 같은 것의 벽에 오목하게 만든 작은 칸)이 있는 무덤이다.
벽화는 회벽을 한 무덤칸의 벽과 천장에 그렸는데 우선 선으로 물체의 윤곽을 그리고 그 다음에 검은 색, 노란 색, 자주색 등으로 채색하였다.
안칸에는 사신도를 위주로 그리고 앞칸에는 인물풍속도를 그렸는데 감들에는 벽화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감이 있는 무덤 가운데서 인물풍속도를 그린 무덤이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무덤으로 변천하는 과정을 직접 보여 준다.
이처럼 약수리 벽화무덤은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고구려 벽화무덤의 변천과정을 밝히는데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4세기 말∼5세기 초의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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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강서군의 태성리에 있는 연화총은 안길, 앞칸, 4개의 감(무덤칸이나 탑 같은 것의 벽에 오목하게 만든 작은 칸), 사잇길, 안칸으로 이루어진 돌 흙 칸 무덤이다.
벽화는 이미 오래 전에 손상을 입어 그 전체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앞칸의 기둥, 도리, 두공과 서쪽 감의 실내생활, 안칸의 기둥, 두공, 도리, 활개, 봉황, 기린, 해, 연꽃무늬 등 일부 벽화는 남아있다.
그 가운데 천장 막음 돌에 그린 연꽃무늬가 가장 뚜렷하게 보이므로 이 무덤의 이름을 연꽃무덤이라고 하였다. 5세기 초의 유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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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리 1호무덤(안길과 8각기둥)
서쪽 곁칸 벽화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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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강서군 태성리에 있는 무덤으로 인물풍속도를 그린 곁칸이 여러 개 있는 무덤이다. 서쪽 곁칸에는 남자주인공의 정사도를, 동쪽 곁칸에는 부엌, 푸주간, 차고 등 생활용 건물들을 그렸다.
안칸에는 6현금 반주에 춤을 추는 실내가무도가 있으며, 안길에는 밖을 향해 행진하는 기마대열도가 있다. 태성리 1호무덤은 무덤 칸의 구조와 축조방법, 벽화 내용으로 보아 안악 3호무덤과 매우 유사하며 그 축소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4세기 전반의 유적이다.
태성리 2호무덤/벽화(모사선화,1.서쪽감 남벽 인물 2.서벽 구름무늬 3.서벽 인물, 4.북벽기둥)
평남 강서군 태성리에 있는 인물풍속도를 그린 감(龕 : 무덤칸이나 탑 같은 것의 벽에 오목하게 만든 작은 칸)이 있는 무덤이다.
벽화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서쪽 감의 남벽에 남아 있는 여주인공의 화상과 그 밖의 벽면들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벽화의 부분들, 그리고 무덤 칸에서 드러난 벽화 조각들을 통하여
본래 안칸과 감, 벽면 천장 등에 인물풍속도 관계의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으며, 그 내용과 배치상태가 태성리 1호무덤 및 안악 3호무덤과 비슷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이 무덤은 비록 파괴가 심하나 감에 있는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곁칸과 곁감이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4세기 전반의 유적이다. |
평남 룡강군 큰 무덤은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진지동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안성동 부락 뒤 구릉에 있는 무덤이다.
이 무덤은 안길, 앞칸, 안칸, 사잇길 양옆에 벽 구멍이 있는 독특한 짜임새의 돌 흙 칸 무덤으로 대부분의 벽화가 없어졌으나 성곽도 등 귀중한 그림이 남아 있다.
무덤의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독특하여 고구려 벽화무덤의 변천과 특성을 밝히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5세기 중엽의 유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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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동 1호 벽화무덤은 남포시 대안구역 대안동에 있는 것으로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두 칸 무덤이다. 무덤의 방향은 동쪽으로 5도 치우친 남향이며 안길, 앞칸, 사잇길, 안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굴꾼들의 파괴를 입어 벽화의 손상이 심했으나 그 내용과 배치상태는 알 수 있는데 천장 형식의 다양함과 실물 활개들을 통하여 고구려 건축술의 발전상을 보여 준다. 5세기 중엽의 유적이다. |
쌍기둥무덤은 평남 용강군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두 칸 무덤이다. 무덤 칸은 반 지하에 돌로 쌓았는데 안길, 앞칸, 안칸으로 이루어졌다.
앞칸과 안칸 사이에는 2개의 8각기둥을 세웠는데 이 때문에 이 무덤을 쌍기둥무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벽화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인해 매우 우아한 느낌을 주는데 특히 인물들의 그림이 우수하며 고구려 사람들의 남녀 옷차림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무덤은 고구려의 우수한 건축술과 회화술, 그리고 아름다운 옷차림을 비롯한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생생한 화폭으로 실감 있게 보여 준다. 5세기 말의 유적이다.
사냥무덤은 남포시 와우도구역 화도리에 있는 고구려 벽화 무덤으로 5세기 말에 만든 것이다. 이 무덤에는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외칸 무덤으로 무덤 칸은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방향은 남향이다.
안길은 안칸 남벽의 동쪽에 치우쳐 있으며 천장은 궁륭에 평행삼각고임을 배합하였다. 무덤 칸의 벽과 천장에는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동쪽 벽에는 위에 해와 까마귀, 그 밑에 말을 탄 사람과 청룡을 그렸으며 서쪽 벽에는 위에 달과 두꺼비, 그 밑에 사슴을 쫓아가며 활을 쏘는 사냥 장면과 백호를 그렸다.
남쪽 벽에는 두 마리의 주작을 그렸으며 북쪽 벽에는 위로는 북두칠성을, 그 밑으로는 주인공의 실내생활도와 현무를 그렸다. 천장에는 구름무늬와 초롱무늬 등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의 사냥하는 그림 때문에 사냥무덤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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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무덤은 평안남도 온천군 신령리에 있는 인물풍속도를 그린 감(龕 :무덤칸이나 탑 같은 것의 벽에 오목하게 만든 작은 칸)이 있는 무덤으로 무덤 칸은 안길, 앞칸, 앞칸 동서의 감, 사잇길, 안칸으로 이루어졌다.
이 무덤의 벽화들은 비록 일부가 파괴됐으나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특히 벽화 중에 시중 드는 여자들이 둥근 깃이 달린 옷에 행주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 그림은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같은 갈래인 고구려와 예족의 사람들은 모두 둥근 깃의 옷을 입는다'는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4세기 전반의 유적이다.
평안남도 온천군 신령리 소재지 동북쪽 약 1km 지점에 화상 부락이 있는데, 이 부락 동쪽 산 능선에는 고구려 돌 흙 칸 무덤들이 떼를 지어있다. 그 중 별무덤은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외칸의 큰 무덤이다.
무덤 칸에는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는데 네 벽 모서리에 기둥, 두공을 그려 집안처럼 꾸민 다음 북벽에는 현무와 인물, 남벽에 주작과 연꽃무늬, 인동무늬, 서벽에 백호와 연꽃무늬, 동벽에 청룡과 연꽃무늬, 천장에 별, 연꽃무늬, 넝쿨무늬 등을 그렸다.
이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 당하여 유물들이 없어지고 벽화 역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것마저도 지난 6·25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무덤 칸의 짜임새와 남아있는 일부 벽화들은 고구려시기의 문화와 풍습의 일단을 보여 주고 있다. 5세기 중엽의 유적이다.
점제현신사비는 달리 점선현신사비, 염제현신사비라고도 불린다. 예서로 각자한 이 비의 내용 중 현재 읽을 수 있는 글자는 59자인데 그 내용은 산신을 제사한 기록으로 AD 85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은 1913년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에 의해 처음 연구되었는데, 그는 이 비가 중국 한사군의 하나인 낙낭군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북의 사학자들은 이마니시 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는 첫째 비문의 내용이 이마니시 류에 의해 일부 조작됐으며, 둘째 이마니시 류가 한반도에 존재했던 낙랑국과 중국 한사군의 낙랑군을 혼동했다는 것이다.
북한 사학자들의 입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손영종, 박진욱 교수) 다음과 같다. "평양에는 낙랑군이 아닌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낙랑국이 있었다.
일본은 낙랑군이 평양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의 부속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점제비를 분석한 결과, 중국 랴오닝성 근방 화강석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낙랑군은 조선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17호 - 진파리 1호 고분 떼 (진파리고구려고분군) |
평양 동남쪽에 있는 제령산의 서쪽 줄기들에는 고구려 돌 흙 칸 무덤들이 여러 곳에 떼를 짓고 있다. 이곳의 무덤 떼들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이 진파리 무덤 떼인데 그것은 동명왕릉이 자리잡은 구릉의 뒤쪽에 있다.
그 중 1호 무덤은 동쪽에서부터 첫 번째 것으로 사신도를 그린 외칸 무덤이다. 이 무덤 안칸의 네 벽에는 채색구름과 꽃 보라 속에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 사신을 그렸고, 천장에는 해, 달, 구름무늬, 연꽃무늬와 여러가지 넝쿨무늬를 그렸다.
4호 무덤은 무덤떼의 동쪽에서부터 네 번째의 것으로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외칸무덤으로 평원왕의 공주와 그의 남편인 온달장군의 합장묘로 추정되고 있다. |
18호-동명왕릉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에 위치하고 있는 동명왕릉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무덤으로 5세기 초의 것을 1993년에 재건하였다. 동명왕릉에서 기본은 왕릉과 그 주변에 있는 유적들인데 구역 내에는 동명왕릉을 중심으로
30여 점의 돌 조각상과 15기의 고구려 무덤들, 능문과 제당이 있다. 능문 앞에 세워진 기념비는 북한의 국화인 목란이 받들고 있으며 비 머리와 옆면도 목란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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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지신무덤은 대동강 강변에서 멀지 않은 북창벌에 있는 인물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두 칸 무덤이다. 무덤무지는 방대형이며, 무덤 칸은 앞칸 남벽 중앙에 달린 안길, 앞칸, 사잇길, 안칸으로 이루어졌다.
천왕지신무덤은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회화술과 풍부한 신앙세계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건축술을 실감 있게 보여 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4세기 말∼5세기의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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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동성무덤은 평안남도 순천시 용봉리 대동강가에 있는 것으로 인물풍속 및 사신을 그린 곁칸이 있는 무덤이다.
벽화는 앞칸 남벽의 성곽도, 서쪽 곁칸의 장방생활도와 사신도, 동쪽 곁칸의 방앗간 그림, 제1관실(제일 서쪽의 것) 동서벽의 인물도, 천장 고임부의 구름무늬 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이 무덤의 벽화들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이 성곽도 인데 이 벽화 속의 성이 바로 고구려 서변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요동성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4세기 말∼5세기 초의 유적이다.
평안북도 박천읍에서 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심원산(봉린산)의 제일 봉우리를 배경으로 하고, 그 동서 양쪽에 발양산과 부흥산이 둘러선 아늑한 곳에 박천 심원사가 자리잡고 있다.
심원사에는 중심건물인 보광전과 전등루, 향로각 등이 관리, 보존되고 있는데 보광전은 막돌로 면을 맞추어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간(10.85m), 측면 2간(7.2m)으로 세운 합각집으로 9세기에 처음 지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368년에 고쳐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귀중한 건물로서 우리 나라 중세건축술 발전의 한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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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보현사
묘향산 보현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조선 후기의 사찰로 1042년에 창건한 것을 재건한 것이다.
보현사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절의 첫 문인 조계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해탈문, 천왕문, 9층탑, 만세루, 그리고 그 뒤로 12층탑과 대웅전을 전개하고, 그 좌우로 크고 작은 건물들을 배치하여 큰 건축 군을 이루고 있다. 1216년, 1634년, 1761년의 세 차례의 큰 화재로 여러 차례 보수, 중건되었다.
묘향산 보현사에는 국보급 유물인 8만대장경과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한 보존고도 있어 불교도서관의 기능도 겸하여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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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보현사 8각13층탑은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보현사 대웅전에 앞에 있는 석탑으로 높이는 10.03m이다.
이 탑은 3단으로 된 대돌, 연꽃 대좌형 기단, 13층의 탑 몸 그리고 탑 머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탑에 있는 무늬의 형태로 보아 고려말의 탑으로 추정된다. 고려시기 대표적인 탑의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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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해주 5층탑
해주 5층탑은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석탑이다. 이 탑은 대돌과 기단, 5층의 몸 그리고 탑 머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4.63m이다.
해주 다라니석당은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돌 구조물로 높이는 5.3m이다. 6각으로 된 두 겹 바닥 돌 위에 역시 6각의 받침대가 놓여 있으며 6각 몸돌에는 '대불정다라니당'이라는 당명과 함께 범어로 된 다라니경문이 새겨져 있다.
지붕 돌은 2층으로 되었다. 지붕돌의 모서리에는 귀꽃이 돋쳐 있으며 아래 지붕 돌 밑면에는 2단의 받침과 한 면에 5개씩 모두 30개의 겹잎 연꽃을 새겨놓았다.
지붕 돌 위에 복박과 보개가 있다. 이 다라니석당은 굳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서 풍화를 입었으나 원래의 아름다움이 비교적 간직되어 있다. |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산지마을 뒤 언덕에는 고구려 벽화 무덤 2기가 있는데 그 중 앞에 있는 것이 안악 1호무덤이다. 이 무덤은 인물풍속도를 그린 외칸 무덤으로 무덤무지는 방대형이며, 무덤칸은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졌다.
인물풍속도가 있는 고구려 벽화 무덤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안칸 북벽에 주인공의 실내생활도를 그렸는데 여기에서는 전각을 그렸다.
천장에는 이상한 짐승 그림이 있는데 봉황, 기린, 사람의 머리를 가진 네 발 짐승과 사람의 머리를 가진 새, 날개 돋친 물고기인 비어와 날개 돋친 네 발 짐승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신앙생활의 한 부분을 반영하고 있다.
안악 1호무덤은 독특하고 풍부한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건축, 회화, 신앙 등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4세기 말의 유적이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산지 마을 뒤 언덕 중턱에는 고구려 벽화무덤 2기가 있는데 그 중 뒤에 있는 것이 안악 2호무덤이다. 함박뫼라고도 불리는 이 무덤에는 인물풍속도를 그린 감이 있다.
무덤 벽화 중에서 가장 잘 그린 것은 동벽의 비천이다. 이 비천은 웃음 지은 얼굴, 따뜻한 살결, 균형 잡힌 몸매, 부드러운 율동, 어느 모로 보나 아름다운 고구려 여인을 높은 예술적 착상과 기량으로 형상한 미인도로서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걸작이다.
이 그림은 섬세하고 우아한 고구려 화풍의 특성을 훌륭하게 살려 고구려 회화사의 한 장을 빛나게 장식하고 있다. 5세기 말-6세기 초의 유적이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오국리의 벌판에 있는 안악 3호무덤(하무덤)은 왕릉으로서 지금까지 알려 진 고구려 벽화 무덤들 가운데서 그 규모에서나 벽화 내용에 있어서 단연 으뜸가는 우리의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이다.
이 무덤은 인물풍속도를 그린 곁칸이 있는 무덤으로 무덤무지는 방대형이며, 그 크기는 남북 약 33m, 동서 약 30m, 높이 약 6m 이다.
무덤무지 자체도 크지만 산 위에 자리잡았고 무덤과 산이 한 덩어리처럼 되어서 그 모습이 실로 산악처럼 웅장하다. 지하궁전을 방불케 하는 무덤 칸의 복잡한 구조는 고구려 왕 공 귀족들의 웅장하고 화려한 주택을 그대로 옮겨다 놓으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
관산리 고인돌은 황해남도 은률군 관산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오덕형 고인돌이다. 무덤 칸의 길이는 3.3m, 너비는 1.4m, 높이는 무덤 칸 바닥으로부터 2.15m이다.
뚜껑돌은 장방형으로 길이 8.75m, 너비 5.4m, 두께 0.31m에 달한다. 이같은 규모로 보아 관산리 고인돌은 당시 권력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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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사 5층탑은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에서 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송월산 기슭 학림사 터에 있는 높이 6.62m의 석탑이다.
거친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이 탑은 연꽃 대좌형 기단과 5층의 탑 몸, 높이 2m 되는 탑 머리로 되어 있는데, 5층 몸 돌과 탑 머리는 조선시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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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사는 황해북도 봉산군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그리고 5층탑이 보존되어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극락전은 898년에 지어진 것으로 6.25전쟁 때 폭격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것을 1955년 복구했다.
응진전은 898년 처음 지은이래 여러 차례 고쳐 내려오기는 하였으나 그 구조에서 배부른 기둥, 안팎을 허식 없이 3포로 짜 올린 두공, 도리를 맞추기 위하여
윗면을 둥글게 판 장여, 화반대공 좌우에 뻗쳐 세운 ㅅ형의 활개 등 고려 건물의 특징이 뚜렷하다. 지금의 건물은 1327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
성불사 5층탑은 황해북도 봉산군 정방리 성불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대돌과 기단, 5층의 몸 그리고 탑 머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4.36m이다. |
연탄 심원사는 정방산 줄기에서도 제일 높은 천녀봉 벼랑 바위들을 등지고, 주위에 백운봉, 청학대, 청룡봉, 관음봉 등 높고 낮은 여러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심원사에는 보광전과 청풍루, 응진전, 향로각, 칠성각이 보존 관리되고 있는데 중심 건물인 보광전은 1374년 고려 말기에 재건된 것으로 고려 건축술의 수준과 특징을 보여 준다. |
개성 남대문은 개성시 북안동 네거리 한복판에 있는 개성성 내성의 정 남문이다. 이 문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세워졌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고 축대도 적지않게 파괴되었으나 1955년에 복원되었다.
남대문은 곱게 다듬은 화강석 축대위에 앞면 3간(13.63m), 옆면 2간(7.96m)인 합각집을 세웠다. 축대는 무지개형 문을 냈으며 크고 듬직하게 쌓아 장중한 감을 준다.
건물은 모를 죽인 4각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웠으며 두공은 안팎 3포이고 천장은 통천정이며 이 문은 축대로 이룬 무지개형 성문루 구조가 잘 조화되어 장중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운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문은 고려시대의 우수한 건축술과 기교를 계승하여 지은 특색있는 문루건물로서 장식이 소박하면서도 짜임이 견실하여 문루로서의 위용을 잘 갖추고 있는 귀중한 건축유산이다. |
35호-불일사 5층탑
불일사 5층탑은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 불일사에 세웠던 돌탑으로 고려 시대(951년)에 창건된 불일사는 현재 터만 남아있다.
이 탑은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는데 높이는 탑 머리 없이 7.94m이며 탑 몸, 탑 머리로 이루어져 있다. |
36호-선죽교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한 고려 후기의 길이 8.35m, 너비 3.36m인 석조 다리로 『고려사』에 의하면 1216년 이전에 건설되었으며 당시의 이름은 선지교였다.
그 후 고려말 유학자인 정몽주가 이 다리에서 피살된 그 때로부터 이 다리 이름을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난간을 둘러 세운 다리와 다른 다리가 하나 더 있는데 난간을 세운 것이 선죽교이다.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설치한 것이고
난간이 없는 다리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그 곁에 새로 놓은 것이다. 다리의 옆에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는데 이 비의 글씨는 명필 한석봉의 것으로 전한다. |
령통사 5층탑은 개성시 룡흥동 오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령통사 터에 위치한 고려 초기의 탑으로 높이는 6.48m이다. 5층탑을 가운데에 두르고 3층 탑 2기가 동서에 나란히 서있다.
그 중 5층탑의 기단은 한 단으로 되어 있으며 모서리 기둥은 돋아 새겼고 돌과 평평하게 넓은 갑돌(한 변의 길이 3.24m)을 사용했다. 이 탑은 그 구조와 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시 룡흥동 오관산 남쪽 기슭에 있는 영통사에는 5층탑을 가운데에 두고 3층 탑 2기가 동, 서에 나란히 서있는데 이 중 서쪽의 것이 령통사 서 3층탑이다. 이 탑은 그 구조와 형식으로 보아 선행한 돌탑 형식을 이어받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39호-공민왕릉
공민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서기 1365년∼1374년 사이의 고려시대 왕릉이다. 2기의 무덤을 동서로 나란히 세워 쌍릉 형식으로 만든 이 무덤은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 현릉(서쪽의 것)과 왕비(노국 공주)의 무덤 정릉(동쪽의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 무덤 건축에서는 고려 사람들이 해당 건축물을 웅장하게 돋보이기 위해 궁전, 무덤, 기타 건축에서 건축 구획을 여러 개의 층단으로 배치하던 수법을 그대로 도입하여
제일 윗단에 무덤무지를 두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층단을 구성하면서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무덤구역에 배치되어 있는 돌조각들, 특히 문인상과 무인상은 선 새김을 위주로 하면서도 야외기념물로서의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으며,
대상에 맞게 문인과 무인으로서의 직업적 특징은 물론, 젊은이와 늙은이의 성격상 특징까지도 잘 드러내었다. 이 조각상들은 고려 조각가들이 개척한 높은 경지를 실물로 보여 주는 대표작일 뿐 아니라 동양식 조각의 특성과 고유한 맛을 잘 살린 걸작품들이다.
현화사비는 개성직할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던 현화사의 창건연기 등을 기록한 고려시대의 사적비로 현종 12년(1021)에 건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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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 7층 탑은 개성직할시 장풍군 월고리의 현화사 터에 있는 고려시대의 7층탑이다. 이 석탑은 대돌과 기단, 5층의 몸
그리고 탑 머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8.64m이다.
가학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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