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둘레(경계) 걷기 7구간(동산령에서 임하호까지)
반변천(멀리 지촌교가 보인다)
날짜: 2012.04.28.토(맑음)
경로: 동산령-가랫재-고산-모시골-임하호(지리)
거리 및 소요 시간: 17.6km, 약7시간 30분(휴식및 점심 시간 포함)
들머리 동산령에도 장갈재와 마찬가지로 서낭당이 있다.
동산령의 서낭당
장갈재의 서낭당과 동산령의 서낭당, 그리고 수비의 구슬령에 있는 옥녀당을 영양의 세 형제 서낭당이라 한단다. 모두 애처롭게 죽은(한 많은)처녀 귀신을 모신 당집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산신령도 아니고 단군할아버지도 아니고 관운장도 아니고 멋진 총각도 아닌 하필이면 처녀 귀신일까?
몇 주 전에 괴산의 ‘옥녀봉’을 다녀왔다. 전국의 산 이름 중에 ‘옥녀봉’이 가장 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옥녀’ 참으로 친근하고 흔한 이름이면서 한 많게 살다가 간 우리 여인네의 대표적 이름이 아닌가 한다.
그것도 아리따운 청춘에 생을 마감한 것이라면 얼마나 억울할 것이며 한인들 오죽 많았겠는가?
이 세 형제 서낭당의 여인들도 모두 이 ‘옥녀’가 아닐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넘어가는 재와 같은 곳에 작은 집(당)을 짓고 이 불쌍하고 애처로운 혼을 위로했다. 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돌무더기에 작은 돌을 하나 더하면서 함께 아파했다.
‘서낭’을 언제부터인가 ‘성황’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아마 해방전후) 우리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부르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그로 인해 서낭당을 성황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많이, 정겨운 우리네 마을 이름들이 생소한 한자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밭’이 ‘대전’으로 ‘한내’가 ‘대천’으로 바뀐 것처럼 우리 동네도 ‘말바우’인데 ‘마암리’로 바뀌어 쓰인다.
‘골짜기’를 줄여서 ‘골’이라 하는데 우리네 마을 이름은 ‘골’이라고 붙여진 곳이 참 많다.
‘골’과 마을(말,마)은 ‘谷’(곡)으로, 혹은 ‘實’(실), ‘村’(촌), ‘里’(리), 등으로 바뀌었다.
텃골(基谷-기곡), 절골(寺里-사리), 무실(水谷-수곡), 닭실(猶谷-유곡), 달실(月谷-월곡), 새마(新村-신촌) 아랫마(下里-하리) 웃마(上里-상리) 등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고 ‘재’나 ‘고개’마루는 ‘嶺’(령)이나 ‘峙’(치)로 바뀌었다. ‘빼재’가 ‘신풍령’으로 바뀐 것처럼....
산을 다니다 보면 ‘한치’혹은 ‘한티’라는 지명을 많이 만나는데 순 우리말처럼 보이는데, ‘큰재’가 순 우리말이다. ‘한’이 크다는 뜻이니 ‘한재’도 순 우리말이다. 그런데 ‘한치’라는 말에는 어딘가 한자 냄새가 조금 난다.
‘신달골’부터 동산령(등사티)까지 지도상 우리네 마을 이름을 잠시 보자.
‘구티미’ ‘갈매기’ ‘고사리골’ ‘평지말’ ‘불미골’ ‘속골’ ‘마실골’ ‘갈마골’ ‘한실’ ‘돌무덤골’ ‘새들’ ‘돌매기’ 등 참으로 정다운 이름이 아닌가?
반면 ‘대곡리(한실)’ ‘상촌(윗마)’ ‘간촌(샛마)’ ‘사리(절마 혹은 절골)’ ‘도촌(길마 혹은 길골)’ 등은 한자말로 얼핏 들어도 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다운 이름 ‘옥녀’가 사라지고 ‘티파니’ ‘제시카’등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요즈음은 모든 문화 전반에서 중국 것보다 오히려 서양 것(특히 미국 것)으로 물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이 동산령에서 500m정도 오르면 450봉, 삼군경계봉이다. 안동과 영양 그리고 청송의 경계다. 여기서 부터는 청송의 산악회에서 군경계산행을 다녀간 지가 몇 년 되지 않은 듯, 표지리본이 선명하다. 노란색과 빨간색 두가지다. 이 표지기가 많은 도움이 된다.
오늘 구간은 약간 어설픈 곳이 있다. 그리고 바른 경계를 찾아 가기에 까다로운 곳이 두어 곳이 있다. 가랫재까지는 전번 구간과 비슷한 고도의 능선을 타며 길이 양호한 편이다. 역시 영등지맥이다.
가랫재를 지나서 임도를 한동안 타다가 고산(고산은 경계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헬기장과 깨진 삼각점이 있다)
고산의 깨진 삼각점
을 향해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상당히 주의를 해야 한다. 고산의 정상까지 올라서 능선을 따르면 영등지맥길이 된다. 정상을 약 200m정도 덜 가서 우측으로 꺾어서 능선같지 않은 비탈을 내려와야 바른 경계가 된다. 만약 고산의 정상에 올랐다면 200m정도를 되돌아온다는 느낌으로 꺾어서 내려와야 경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된다.(그림 참조)
그리고 얕은 능선을 거의 끝까지(1/25000구지도에는 모시골 도로까가 내려와서 경계선이 그려져 있다.) 내려와서(도로에서 약 200m 떨어진 능선 끝자락) 좌측 계곡을 건너는 것이 지도상 바른 경계다. 물론 길이 없고 경사도 상당히 심하다. 계곡 냇물을 건너서면 좁은 포장도로(모시골에서 텃골로 가는)이며 이 도로를 건너서 길없는 맞은 편 산자락으로 붙어 오르면 된다. 여기도 물론 길은 없고......(그림 참조)
능선에 올라서 잠시 가면 고만고만한 봉우리 360봉 370봉, 384봉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도 약간 주의해야 한다. 고산을 지난 영등지맥이 텃골과 모싯골 사이로 내려와서 이 384봉에서 경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자칫하면 이 영등지맥으로 거꾸로 가게 된다. 잔솔밭을 기면서 우측비탈을 타듯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한동안 어설픈 야산의 잡초와 잔솔밭, 잡목 밭을 헤치면서 나아간다.
후평리 430봉우리에서 영등지맥과 헤어져서 좌측으로 홱 틀어서 잔솔밭을 지나면 임도(농로)와 넓은 개간지가 나온다. 이 임도 우측의 능선이 경계다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 가다가 임도가 좌측으로 굽는 부분에서 우측 산으로 들면 임하호 쪽으로 가게 된다. 임도를 너무 즐기면 여기서도 낭패를 볼 수 있다.
여기서 30분 남짓 평범한 능선을 타면 396봉인데 이봉우리 바로 앞 100m지점에 삼각점(372.4)이 있다. 396봉에서 삼각점 쪽으로 가지 말고 좌측으로 잠시 진행하다가 임하호가 거의 보이는 능선 끝자락에서 다시 비탈과 같은 좌측 능선으로 내려서야 바른 경계인 임하호다. 상당히 주의해야 한다. 직진하면 지리 양수장 뒤로 바로 내려서게 된다.
임하호에 내려서면서도 상당한 걱정을 했다. 내려서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고 어설프다. 만약 호수(반변천)의 물이 많아서 강변을 따라 걸을 수가 없다면 다시 능선으로 되돌아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천만 다행이다. 강물이 많이 줄어서 강변에 차가 들어 올 정도로 대로, 그것도 산그늘이 지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오는 산책로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거리도 만만찮은데다 날씨마저 한여름처럼 더워서 모두들 지쳐 있는데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1km가량 치고 오르지 않고 평탄한 호숫가를 산책하듯 걸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날머리 지촌교에 내려서니 가장 먹고 싶은 게 얼음에 재원 둔 시원한 수박이다.
지리(지촌): 갓골․가지골․지동(枝洞)․원지(元枝)
반변천이 두 곳에서 합류하여 가지처럼 보이는 지형 때문에 가지골로 불렀다. 또 산의 형세가 갓 모양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갓골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옛날 오승(吳昇)이라는 장수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인근에서 제일 큰 나무가지가 있다고 하여 원지라고도 불렀다. 또 지동의 본동이라는 뜻이라고 하여 원지라고도 한다는 설도 있다.(안동의 지명유래)
경로점
실경로 위성사진
주요 지점의 고도 및 거리
7구간 이모저모
사진 몇 장
고산의 깨진 삼각점(고산은 경계에서 약간 벗어 나 있으나 오늘 경로의 가장 높은 봉우리이라 다녀 왔다. 지맥산행기에서도 고산의 삼각점은 못찾았다고 적어 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기에 오늘 작정하고 열심히 찾은 결과 다 깨졌지만 삼각점을 찾게 되었다.아마 헬기장을 닦으면서 파손된 듯하다. 삼각점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하지만 산을 타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지도에 분명히 삼각점이 있는데 현장에는 없다면 이 건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잘 못 온 게 아닌가. 여기가 고산이 아니고 다른 산에 오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임하호에 내려서니 강태공이 낚싯대를 펴 놓고 앉아있다.
오늘의 날머리 지촌교이다. 안동의 임동면과 청송의 파천면을 잇는 다리다.
지리(지촌): 갓골․가지골․지동(枝洞)․원지(元枝)
반변천이 두 곳에서 합류하여 가지처럼 보이는 지형 때문에 가지골로 불렀다. 또 산의 형세가 갓 모양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갓골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옛날 오승(吳昇)이라는 장수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인근에서 제일 큰 나무가지가 있다고 하여 원지라고도 불렀다. 또 지동의 본동이라는 뜻이라고 하여 원지라고도 한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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