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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천 사
이 책은 우리 사회에『논어』・『맹자』・『대학』・『중용』의『사서』 읽기를 권하기 위해 출간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물질화・세속화되어가면서 동요하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 우리들의 오랜 문명적 전통 정념을 되살리고, 보다 뜻 깊은 삶을 모색하고자 어느 계층의 누구라도 쉽게 경전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교 경전을 편안하고 바르게 읽어 우리 삶의 전 국면에서 바로 이 정신이 자연스레 일상에서 되살아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독자들이 우리 동아시아 최고의 고전을 친숙하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글의 문맥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던『한글로 읽는 사서』를 간행한 지 두 해가 지났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읽으면서 느꼈던『한글로 읽는 사서』에 대한 바람을 수렴하여『사서』 원문을 한 면에 싣고 한글 역문과 주석을 전면적으로 개편 보완하여 전연 새 책으로 다시 발간한다.
특히『사서』 원문의 의미 흐름을 최대한 우리말 한글 맥락으로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우리 일상의 문맥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사서삼경』 등 고전에 엄연히 내포된 한국적 뿌리를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효(孝)와 친(親:가족주의) 등 경전의 핵심 정신은 동서이족(東西夷族)을 포함한 구이(九夷)의 오랜 사상이었다. 자연스런 우리의 어감으로 읽을 수 있을 때에만 그 경전의 원 뿌리와 잘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담한 전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본서의 이러한 야심에 찬 목표를 현재 우리 연구진들이 충분히 구현하였다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지만 희망을 바라보는 그 새로운 노력의 시도는 의미 깊을 것이다. 앞으로 끊임없이 다듬어 나아가며 개선할 것이다.
최근 동아시아 정신과 문명 본래의 순수한 영채(英彩)와 정체성을 그 오래 묻혔던 어둠 속에서 되찾아내야 하는 우리의 중대한 역사적 과제는 커다란 장애를 만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일본의 역사왜곡 그리고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으로서 무정견하고 모방적인 서구화의 지속과 서세동점・제국주의・식민체제・근대화체제로부터 유래하여 굳게 구조화된 천박한 공・사 권위주의의 잔재 및 각종의 무분별한 개혁운동이 그것이다. 동아시아 문명과 정신의 최후의 보루로서 한국의 내외의 현실은 우리들의 삶에 창조적 탄성과 안정과 여유를 고갈시키고 우리 문명권 전체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생명이어야만 할 정체성의 일대 위기가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하면서 주장하듯이 문・사・철(文史哲)이라는 중국적 어휘를 구사한다고 해서 동아시아 정신이 부활하는 것은 아니며 공적 시스템에서 인문학자들이 더 고고한 위상과 자본과 권력을 얻음으로써 우리 정신과 문명을 되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학문은 동아시아의 원래의 의리학적 시원으로 올라가야 하며 중국의 텍스트주의 즉 고대제국의 방대한 기념적 구조물에 애착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 시원의 의미, 그 원래의 모습을 찾아 올라가야 한다. 우리의 고대적 정신인 고조선-동이-북방시대의 정념과 이념으로 회귀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경전 읽기의 최종 목표도 역시 그러하다.
유대계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근대 문명을 “인간의 사사로운 영역만을 확대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 내재적 폭력성을 고발한 것이다. 우리 경전은 바로 공적 심성(公的心性)의 보고이다. 그러므로 현 문명의 대안일 수 있고 정의롭고 영원한 길이 된다. 경전이 오늘의 지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명백히 탈계급적인 대중적 공감이 또한 필요하다. 역사와 문명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로 숨 쉴 때만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주체로서 가지는 개개의 삶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엄성이 구현된 위에 넓은 개방적 심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인위적・이기적・집단적・계층적・분절적 질서를 고수하는 경직된 사회에서 문명화된 정념을 유지하기는 어려우며 창조적 사유와 행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인・지도자・학자들이 앞장서서 견지해온 이 불행한 경직체제는 해소되어야 한다. 오늘의 반문명적・비역사적 사사로움은 시급히 해소되어야 한다.
역사상 동아시아는 겉보기와는 달리 전제문명이라기 보다는 이념상 절대자유와 상상력으로 발양된 문명이었다. 우리는 동아시아적 창조와 자유의 중심을 인의(仁義)라는 절대정신에서 명백히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막연하고 모호하며 탈민족사적인 그리고 사적인 낭만적 자유주의는 배격해야 한다. 전통사상과 인맥이 철저히 단절되고 궤멸된 위에 출발했던 45년 건국체제는 이제 서서히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 재편성되어야 한다. 아직 남아 있는 탈 군사혁명체제와 서구적 가치로 구현된 87년 체제도 넘어서야 한다. 외환위기로 촉발된 일반적 개혁의 요구를 바르게 수렴하지 못했던 근 10여년의 I・M・F 개혁체제도 넘어서야 한다. 순수한 전통이념 질서의 전면적 복권 노력을 시작할 것이 엄중히 요구된다. 어떤 형태로든 전통문명의 질적 부활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현재 기존의 체제 내에서 특히 지성인 학자들은 무소불위의 사절(私竊)한 권한을 과시하여 왔었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위기가 계속되는 것은 인문학자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지금의 인문학이 온전히 우리의 학문인가? 근대적 계몽의 역할은 충분히 하였지만 그것은 분명 서양의 철학이고 예술이며 미학이었다. 그 가운데로 우리가 ‘절어들’ 수는 없다. 지적 DNA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화・물질화・기술화・종교화된 현 문명의 격류를 스스로의 맨몸으로 수용하고 체험하며 전통지성의 힘으로 그 의미와 방향을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경전은 그런 류의 인문학을 넘어선다. 경전은 다만 우리의 오랜 학문이며 사상이며 삶 자체다. 경전은 역사학이며 정치학이며 삶의 철학이며 사회학이며 예술이고 물리학이며 과학이다. 그 모든 예술과 학문은 오랜 역사와 문명의 성과였다. 우리들 삶의 밀과(密果)이며 용기(容器)이며 그 힘이었다. 이제 그 역량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를 생각해야 한다.『사서』는 그 요약된 핵심이며 동아시아 지성의 오랜 초민족적 뿌리를 매우 잘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숙명적 환경으로서 극복해야만 할 남북 분단체제는 45년 체제의 강요된 비극이지만 이를 이겨내는 지적 역량도 전통적 지성을 배제한 채 추구되어 왔다. 전통지성은 모든 부면에서 새로이 융통되면서 당당하게 기능할 수 있어야 하겠다. 유교는 민족의 뿌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며 보편성을 완비한 모든 정당함의 근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는 불가공파(不可攻破)의 당당한 논리적인 힘으로 축조된 유일한 삶의 양식(the only One Style of Human Life)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연륜에 따라 할 일이 달라지듯이 한 국가와 문명은 그 유구함에 걸맞게 스스로에게 높은 책임과 역할이 부여되기 마련이고 드높은 자긍심과 확신에 찬 창조적 탐구와 행위가 요구된다. 어떤 한 외래 문명이 거의 3천여 년에 걸친 우리 이 위대한 문명의 연륜을 압도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늘 스스로 문명적 굴종(屈從)과 무책임한 편의주의와 자의(恣意) 그리고 아집과 정체혼돈(正體混沌)의 길을 가고 있는 현재 인문학적 방침만으로는 우리 문명정신을 일으킬 수는 없다. 북방시대이래 한국유교의 전성시대까지 보여주었던 위위(魏魏)한 확신과 패기와 힘과 개성과 창조력이 철저히 이완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이『사서』 읽기를 새삼 권하는 주요 이유이다.
끝으로 새롭고 바른 번역 문안을 정립하기 위해 애써주신 본 연구소 석동신 책임연구원과 한글문맥을 심도 있게 모색해주신 김송자 연구원, 그리고 다년간 이 연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하기의 전문 연구원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2007년 월 일
유교연구소장
유 덕 조
번역 연구진
연 구 소 장 유덕조: 문학박사・유학자
책임 연구원 석동신: 고전 번역가・민족 및 사회운동가
수석 연구원 김송자: 어문・ 환경운동가
전문 연구원 정병희: 도법연구가・한의사
전문 연구원 유병조: 법학사・사회철학 이념론자
전문 연구원 노일호: 문학석사・기철학 수행가
전문 연구원 유현숙: 문학석사・교육자(중등교사)
전문 연구원 이성배: 문학박사・서예학자(대학강사)
전문 연구원 박진숙: 문학박사・국사학자(대학강사)
전문 연구원 이진교: 문학박사원・인류학자(대학강사)
전문 연구원 강문영: 교육자・산악인・서예가
전문 연구원 홍성동: 교육자・종교인・성직봉사자
『새천년 표준사서』 발간에 부쳐
『한글로 읽는 사서』를 발간한 지 2년여 만에 대역본『새천년 표준사서-대학・논어・맹자・중용』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표준사서』는『한글사서』에서 잘못 번역된 부분을 바로잡고, 우리말로 읽었을 때 어색한 부분을 최대한 우리말의 어감과 정서를 살려 옮겼으며, 아울러『사서』의 원문을 직접 보기를 원하는 많은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한문 원본을 실었다. 또 본서에서는 원문에 종종 사용된 계급 차별적, 성 차별적, 민족 차별적 표현들은 가급적 순화시켜 옮겼다. 예를 들면 ‘일을 시키다, 부리다’(使)와 같은 말은 ‘일을 맡기다’로, ‘부자’(父子)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으로, ‘이적’(夷狄)은 ‘오랑캐’가 아니라 ‘이민족’으로 옮긴 것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 면에서 직접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본 역서를 대역본으로 꾸며『사서』를 이해하는 데 효율을 높인 것은 본서의 특징이라 하겠다. 또한 어렵거나 해석에 논란이 되는 원문의 한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본문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원문을 이해하는 데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더욱이 세계 최초로 원문에 절을 구분하여『사서』 원문의 각 구절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한 것은『사서』 독해의 정확성과 능률을 한층 높인 것으로 본서만의 큰 장점이라 하겠다. 앞으로는『사서』를 인용하는 분들은 편명만 언급하지 말고 장과 절까지 언급하여 어느 구절이 어느 편 몇 장 몇 절에서 인용되었는지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 좋으리라고 본다. 이에 있어 본서가 선구적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해 본다.
옮긴이가『사서』를 우리말로 옮기게 된 저간의 동기에 대해서는『한글로 읽는 사서』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는데, 본 대역본『새천년 표준사서』는 이에서 진일보하여『사서』의 표준 번역본을 마련코자 하는 야심찬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을 꼭 밝히고 싶다. 혹자는 한학(漢學)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유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옮긴이가 터무니없는 과욕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새천년 표준사서』를 기획하게 된 것은 오로지 그 동안 번역된 유교 경전들을 바라보는 옮긴이의 안타까운 심정의 발로라는 것을 깊이 고려해 주기 바란다. 즉 기독교에서는 구교이든 신교이든 각각 통일된 공인『성서』본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비해 유교의 실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서점에는 수십 내지 수백 본의 유교 경전들이 전공자나 비전공자의 손을 통해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이 중 똑같은 번역본은 하나도 없다.
물론 유교 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이해가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유교의 장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옮긴이는 그처럼 다양한 해석에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게 되었으니, 즉 당혹스러울 만큼 너무 혼란스럽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한 마디로 유교계는 그들의 경전에 대해 일종의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이다. 일정한 통일된 표준적인 해석이 부재함으로써 제각각 중구난방으로 다른 해석들만 잔뜩 토해 냈을 뿐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유교 경전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혼란스럽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유교 2천여 년 경학사(經學史)는 곧 해석사라 할 만큼 동일한 구절에 대한 여러 해석이 난무했고, 시대에 따라 동일한 구절이 다르게 해석된 것 또한 많으며, 단장취의(斷章取義)가 전통으로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사서』의 우리말 번역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직역 위주로 된 딱딱하고 생경한 번역이 많아 우리말만 읽어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어느 나라 말이든 다른 나라 말로 옮겨질 때에는 그 두 언어 사이의 표현상의 차이로 인해 절대로 직역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그 나라 말의 표현과 어감을 최대한 고려하여 옮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던 그간의 사정은 역자의 역량과 함께 경서 원문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그 한 원인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제 어느 정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표준적인 번역본이 나와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본서에서는 이러한 점을 십분 고려하여 어디까지나 현대인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표준이 될 만한 해석을 채택하여 교과서적인 번역을 목표로 하였음을 밝혀 둔다. 물론 지나치게 독특한 해석은 가급적 피했고, 현대인에게 의미 있는 동일 구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두루 포용하려고 애썼으며,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최대한 노력하였다.
번역의 원칙은 축자적 번역이나 형식적인 일치를 피하고, 내용의 동등성을 취하여 원문을 읽는 사람과 같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본서가 번역의 저본으로 삼은 책은 다음과 같다.
『사서집주』(주희, 강동서국, 타이완, 1913)
『십삼경주소』(정현 외, 국제문화출판공사, 타이완, 1996)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이다. 유교는 오늘날 한갓 봉건 구시대의 유물로서 오로지 청산되어야 할 그 무엇인가, 아니면 한국인의 예절 생활이나 제사 의례 등에 그나마 잔존시켜야 할 전통 문화유산인가, 그도 아니면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서구 문물이 지배적인 현대 한국사회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새롭게 회복시켜야 할 그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국 전통사회에 끼친 유교문화는 오늘날 한번쯤은 곱씹어봐야 할 많은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귀중한 전통유산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사회는 지난 100년 동안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 내지 정보화 사회로, 사대부 중심의 귀족문화에서 민중 중심의 대중문화로, 공동체적 촌락문화에서 개인주의적 도시문화로,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직업의 귀천이 없는 평등사회로,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남 평등사회로의 혁명적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유교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구시대의 낡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 유교가 처한 오늘날의 냉정한 자화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기에 태어난 공자와 맹자는 그 시대의 도전에 응전하여 유가(儒家)라는 인문주의(人文主義) 운동을 전개하였으니, 인의(仁義) 및 예악문화(禮樂文化)에 기초한 이상과 신념으로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귀감이라 할 것이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 본다. 만약 공자와 맹자가 오늘날에 태어났더라면?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보다 민주주의와 남녀평등과 계급평등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들이 그들이 말한 오늘날의 인의의 실질이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주저하지 말고『사서』를 깊이 연구해야 하리라고 본다. 특히 공자의 모호하지만 다양한 말 가운데는 우리의 실존적 삶에 커다란 의미를 던져줄 수 있는 보배와 같은 말들이 많다. 또 그의 중용(中庸) 또는 시중(時中)의 철학은 유교가 현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새롭게 거듭나야 할 시대적 사명과 책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즉 박제된 봉건주의의 굴레에서 공자를 해방시켜 현대 민주사회의 충실한 지지자로 공자를 재탄생시키는 것이야말로 현대 유교인들의 막중한 책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현대유교의 4대 이념을 새롭게 제시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인애(仁愛)・정의(正義)・자유(自由)・평등(平等)인데 인애와 정의는 공맹의 영원한 기본사상이고 자유와 평등은 서양에서 수입한 근대 시민사회의 절대이념으로, 현대유교가 이 둘을 결합할 수 있다면 유교는 21세기에도 찬란히 부활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함께 유가 철학의 기본관념도 ‘자기를 수양하여 남을 다스림’(修己治人)에서 ‘자기를 수양하여 남을 섬김’(修己事人)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야만 유교를 그 봉건성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또 근대 시민사회를 배경으로 한 신삼강오륜(新三綱五倫)을 구상해 본 것도 전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한편 봉건제의 절대군주도 고아・과부・홀아비 등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들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어진 정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유교였으니, 만약 군주가 이러한 덕이 없이 자기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위해 백성을 착취하고 학대했을 때는 즉각 혁명을 통하여 군주를 교체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오늘날 이런 유교의 기본이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근대 시민사회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이나 정의롭지 못한 정권에 대한 항거 등 현대에도 가치 있는 귀중한 가르침을 많이 배울 수 있으리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현대 민주사회에 맞는 보다 현대적이고 간소화된 의례 제정의 문제를 제기해 본다. 전통적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례는 그 형식과 제도 면에서 이미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삼년상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장례도 지위를 불문하고 삼일장으로 간소화된 지 오래이다. 차제에 제사도 대폭 간소화하여 여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깊이 생각해 볼 만할 것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돌아가신 부모의 제사를 돌아가신 지 3년 동안 3번만 지내고 설날과 추석 때 차례만 지낸다고 한다. 한번 참고해 볼 만하다.
모쪼록 본 역서가 “공자 르네상스”에 기폭제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단 그것은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맹목적 추종보다는 건설적 비판과 합리적 대안을 토대로 공자의 가르침을 현시대에 맞게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단기 4340(2007). 5. 1.
한밭 지족동에서
옮긴이 석동신(昔東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