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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다. 왜, 무엇을 위해? 묻지 말자. 오늘은 물처럼 흐르기로 한다. 닿는 그곳이 오늘의 목적지다. 거기에 한 바가지 물로 고여서 물방개나 송사리 몇 마리로 살아도 좋겠다.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안고 바람에 흔들리거나, 몇 줄기 햇살이 나의 입가에 맴도는 미소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하루 나를 잊자. 의미를 버리자.
기억의 저편에 통영이 있었던가? 충무김밥과 토지의 작가 박경리 기념관. 그곳에 가고 싶다. 오늘은 마음의 물길이 그쪽으로 흐른다.
전주에서 통영까지 곧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 진주를 경유해야 한다. 진주까지 2시간 남짓.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달린다. 잠깐씩 지나가는 야트막한 평야에는 마늘밭 새순이 봄바람에 알싸한 냄새를 풍길 듯 나풀거리고, 봄눈이 듬성듬성한 보리밭의 새순도 우우 고개를 흔들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능선이 가지런하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손으로 그 이마를 쓰다듬으면 이내 잠들 것 같은 적막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하여 나도 그 곁에 나란히 눕는다. 깜박 졸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남강의 물길이 자취를 감추면서 진주에 도착했다.
촉석루 논개의 강인한 인상처럼 경상도 사람들의 억센 사투리가 터미널에 가득하다. 가방을 끌며 아이를 안고 힘겹게 움직이는 아낙네. 시간을 쫓아 바삐 뛰는 젊은 발걸음들과 여기저기 터지는 웃음소리. 그 모습들을 바라보는 나는 한가롭다. 떠나가는 통영 행 버스를 눈앞에 두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허둥대지 않는다. 붙잡지 않는다. 매달리지 않는다. 애원하지 않는다.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했다. 떠나가는 버스 앞에서 나는 갑자기 저항하고 싶어진다. 갈 테면 가 보라지. 나에게는 나만의 방식이 있어. 이 바보야!
통영에 도착한 시각은 생각보다 많이 늦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풍경도 없고 기억에 남는 사연도 없었지만, 무거워진 발걸음과 나른한 몸이 시간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오래된 서책의 귀퉁이처럼 통영여객선터미널의 지붕 한쪽이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통영은 섬으로 둘러싸인 항구라고 했다. 수십 개의 섬 중 매물도라는 이름이 애잔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왠지 버려진 느낌. 중고차 시장에 '매물'로 나온 몰락한 귀족 가문의 캐딜락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쓸쓸한 바닷바람을 가득 몰고왔다.
소매물도에 볼 만한 등대가 하나 있다고 했다. 버려진 소매물도의 마지막 자존심처럼, 마치 지팡이에 중절모를 쓴 꼿꼿한 영국 신사를 연상하게 하는 그 등대를 꼭 보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배는 이미 끊겼다. 시간을 보니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항구는 파도가 밀려오는 쓸쓸함의 폐허 위에 붉은 노을을 꽃잎처럼 흩뿌리고 있었다. 이제 갈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 제승당만 남았다. 나의 선택은 하염없이 선착장의 갯바람에 몸을 기대고 보이지 않는 소매물도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보며 먼 바다를 넘어오는 칼칼한 기침소리를 무염하게 듣고 서 있거나, 그나마 마지막 갈 수 있는 그곳, 제승당으로 떠나는 것이다.
제승당에 가기로 한다. 여객선의 매표원이 뜻하지 않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보잘것없는 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증명할 어떤 신분증도 갖고 있지 않았다. 카드 한 장과 몇 장의 지폐와 동전이 있을 뿐. 카드를 내밀며 안 되겠냐고. 여기 이름이 있지 않느냐고. 안 된다고,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가로젓는 40대 여성의 목덜미에도 떨어진 꽃잎이거나 마른 낙엽 같은 노을이 바래고 있다.
대한민국은 참 친절하고 편리한 나라다. 나는 민원서류 자동발매기에서 주민등록초본을 한 통 떼서 내 신분을 확인해 주고 제승당으로 가는 여객선을 탈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해 승선 인원은 단 세 명뿐. 뱃사공이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은 말쑥한 차림의 선원 몇 명을 합해도 예닐곱이 넘지 않는다. 한적한 배 안에는 바람만 가득 붐볐다. 날씨가 흐린데다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해서 시야에 특별이 들어오는 풍경은 없다. 몇 개의 이름 모를 섬들을 지나치면서 양식장의 부표가 하얗게 열병식을 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선미 쪽의 바람은 더욱 거세다.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헝클며 거칠게 뺨을 때리는 바닷바람의 느낌이 좋았다. 30여 분 남짓. 나를 버린 채로 내버려두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제승당에 닿았다.
제승당은 부두에서 1키로미터 남짓. 가는 길목에 한산대첩기념비가 있다. 비문의 글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짓고 글씨는 우석 김봉근 선생이 썼다고 한다. 1592년 7월 8일과 10일에 있었던 한산대첩을 서사시로 묘사했다. 7월 8일에 한산도 앞바다로 왜적선 73척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펴고 포와 활을 쏘아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포획했으며, 7월 10일에는 안골포에 머물고 있던 왜적선 42척을 불태웠다는 설명과 함께 탑의 높이가 20미터라고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먼 바다를 바라보니 거북등대가 보인다. 이충무공이 세계 최초로 만든 거북선을 기념하고 한산만으로 들어오는 배들의 항로를 안내하기 위해 자연 암초 위에 거북등대를 세웠단다.
왜적과 맞서 싸우던 역사의 앞바다는 생각보다 비좁고 초라하다. 그날의 치열한 전투가 상상으로나마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애국심이 부족한 탓일까? 독재정권이 애국심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한데 묶어 우리를 오랫동안 길들여 온 탓이라는 무거운 생각이 가슴을 짓누른다. 머리에 뿔이 난 공산당, 국기 게양식과 강하식에 부동 자세로 서서 어린 심장에 손을 얹고 바라보고 들었던 태극기와 애국가, 학예회 시간에 연기했던 이승복의 섬뜩한 외침이 애국심에 대한 거부감을 강화해 왔다. 독재정권의 그늘을 벗어난 뒤에도 애국심은 대를 이어받은 보수정권의 핵심 통치수단이었다. 그들은 안보와 경제 위기를 핑계로 애국심을 조작하고 끈질기게 이용했다. 최근 3.1절에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극기가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나온 친박 보수단체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이다. 이처럼 애국심의 상징물인 태극기마저 반공과 보수라는 특정이념으로 훼손되고 왜곡된 현실 앞에서, 큰칼 옆에 차고 수루에 홀로 앉아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고통을 걱정했던 충무공의 정신과 수많은 민초들의 죽음이 순수성을 잃지 않고, 그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오롯이 남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흔들었다. 삼도수군 통제영, 제승당은 조용했다. 오늘이 평일이려니와, 늦은 시간인 탓에 발길은 모두 떠났다. 누각 몇 채와 해송이 거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먼 옛날의 저문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다시 통영항으로 돌아온 시각은 8시 무렵, 출출한 배를 이끌고 주변을 배회하다, 충무00김밥집으로 들어갔다. 충무김밥은 난생 처음이기도 했지만, 인터넷에서 적극 추천한 식당이라서 기대가 컸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벽돌 한 장보다도 더 쉽게 무너졌다. 너무 소박한 상차림에 한 번 무너졌고, 검지손가락만 한 길이의 김 한 조각에 흰 쌀밥만 넣은 질리도록 투박한 김말이의 풍모에 두 번 무너졌다. 맛을 말해서 무엇하랴! 맛 없는 맛에 세 번 무너졌다. 굳이 특별하다면 반쯤 말린 오징어 무침이었는데, 그것마저 그 질긴 맛에 질리고 말았으니. 소주 한 병을 시켜 거푸 몇 잔(여기는 소주잔도 없다. 그냥 물컵으로 대용하란다.)을 들이켜는 것으로 화풀이하다가는 국물이 모자라 좀 더 줄 수 없느냐 했더니, 샐쭉한 여 종업원, 한가한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셀프'란다. 하하하......
그래도 나쁠 건 없다. 얼큰했으니. 얼큰한 타관 사내에게 통영항의 바람은 살갑고 너그러웠다. 남루한 옷차림에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독한 담배연기를 훌훌 날리며 누구든 붙잡고 거친 남도 사투리를 내뱉고 싶다. 산능선 후미진 골목을 타고 올라, 와사등 불빛 꺼질 듯 졸음에 겨운 낮은 처마 밑에 깃들어, 동백꽃 벙근 발그레한 새악시가 차린 반주상을 끼고 새도록 육자배기 장단에 놀고 싶다. 아직 일러 동백꽃은 피지 않았지만, 문득 생각난 시 한 수에 통영항의 밤이 시리도록 눈물겹다.
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오랜만에 걱정 없는 깊은 잠을 잤다.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침대에 분에 넘치는 잠옷까지. 홀로 하는 여행은 자유롭기도 하지만 생략하는 쾌감이 있다. 샤워, 샤워기를 들었다가 그만두었다. 면도, 면도기를 들었다가 그만두었다. 이빨은 닦아야 한다. 싱그러운 밥맛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 양말, 구태여 갈아신어야 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다. 갯바람 냄새가 아직 견딜 수 있을 만큼 향기(?)롭다. 그밖의 모든 것들의 검토와 생략의 연속이 나의 아침을 신나게 한다. 그래도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쾌남이다. 해장국의 뜨겁고 진한 맛이 늦잠 자는 자율신경계를 화들짝 흔들어 깨운다. 그나저나 세수를 하기는 했던가? 눈 비빈 손 끝에 노랗게 묻어 난 수상한 그것? 말아라. 이제 가자. 박경리 선생을 만날 차례가 아니던가.
아시다시피 박경리 선생은 【토지】라는 대하소설로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 현대문학의 중심에 있는 위대한 소설가이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그의 전기적 사실을 되새김할 필요는 없겠다. 그럼에도 그가 통영 출신이고 이곳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완성된 까닭이 있기에 통영과 관련된 이야기 몇 토막을 그의 문학 속에서 더듬어 보고자 하는 욕심은 어쩔 수 없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다른 문학관이 다 그렇듯 선생의 연대기가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중간 중간 관람자의 지루한 눈길을 배려한 듯 기념이 될 만한 옷이나 장신구, 각종 상패들이 조화롭게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하나 있다. 선생의 서재를 다소 축소하기는 했으나 예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정갈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오히려 적막한 느낌마저 들어 쓸쓸하고 고독한 선생의 뒷모습이 눈앞에 잡힐 듯 선하다. 방구석에는 투박한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다. 항아리 위에 뚜껑을 대신하여 씌워진 밀짚모자가 제법 멋스럽다. 밀짚모자와 항아리 사이에 걸린 호미와 손가락 세 개를 살짝 내밀고 있는 면장갑의 풍모는 앙증스럽기까지 하다. 때때로 선생은 잡았던 펜을 놓고 낱말과 문장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저 면장갑에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나가 배추나 고추 등속을 심고 가꾸며 적적하고 외로운 시간을 채웠으리라. 또 한쪽에 고즈넉하게 놓여 있는 재봉틀도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바느질」이라는 선생의 시가 눈에 띈다.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배개에 머리를 얹고 곰곰히 생각하니
그것이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기념관을 빠져나오면 이웃한 작은 공원이 나온다. 그야말로 조촐하다고 표현할밖에 없다. 해송인 듯한 기념식수 그늘 아래 큰 너럭바위 모양의 시비 하나가 차분하게 놓여 있고, 시선의 정면에도 나란히 어깨동무한 두 개의 비가 더 있다. 오늘쪽에서는 책을 손에 든 선생의 전신 동상이 무연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들이 공원을 채우고 있는 전부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였던 선생의 단정하고 소박한 인품을 그대로 반영한 공원이라는 생각에 남의 집 안에 들듯 발길이 조심스럽다. 너럭바위의 시를 읽는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 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까지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그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휭덩그레한 빈 집에 홀로 남겨진 채, 대문 밖에서 으르렁거리는 짐승 떼들에게 영혼을 할퀴어 가며 살아 낸 선생의 삶은 모질었다. 적막뿐인 큰 집에서 펜과 원고지만으로 견딘 세월이 15년. 그동안 한국의 문학사가 새로 써졌다. 문학은 늘, 이렇게 한 생애의 고독과 결핍과 고통을 거름 삼아 성장하는 나무이며 숲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선생의 영혼에 잠시 고개를 숙인다.
나란히 어깨동무한 또 다른 비에 선생의 작품인 【김약국의 딸들】의 일부 내용을 옮겨 놓았다. 통영을 이렇게 다정하고 유려하게 묘사한 예는 드물다.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처럼 통영 전체의 모습이 눈앞에 육박해 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산재해 있다. 북쪽에 두루미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가에 얼마쯤 포전이 있고 언덕배기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자세는 빈약하다." 그곳의 젊은이들이 어째서 통영을 "조선의 나폴리"로 부르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공원을 벗어나 5분여를 걸으면 선생의 묘역이 나온다. 묘역으로 가는 길 중턱의 경사면에 선생이 생전에 했던 말이나 작품 속 명 문장이 새겨진 석물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국문학의 거봉답지 않게 묘역은 초라함을 탓해야 할 만큼 아담하다. 작은 봉분 앞에 작고 네모난 평비석 하나가 전부이니.
1시간 남짓 머물렀던 기념관을 나왔다. 하늘은 맑았으나 공기는 후텁지근해 겨드랑이 밑으로 땀이 흘렀다. 친절한 안내원 덕에 택시를 타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어찌된 일인지 나는 자리에 앉지 못했다. 무언가 어설프기도 하고, 마뜩잖은 마음. 후줄근하고 초라한 나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언짢게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때 문득 마음을 때리는 선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창조란 순수한 감정이 바탕입니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업입니다. 작은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슬픔을 사랑하세요. 슬픔을 사랑해야 합니다. 있는 대로 견디어야 합니다."
박경리 기념관 벽면에 '박경리의 문학 이야기"라는 아기자기한 액자에 담긴 글인데, 뼈 아프게 와 닿는다. 나는 글을 업으로 생각할 만큼 치열하게 글을 쓰고 있는가? 작은 성취에 매몰되어 기쁨을 찾아 날뛰는 승냥이는 아닌가? 진정 슬픔을 사랑하고 견딜 수 있는가? 나는 나에게 답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마음 저편에서 들려오는 대답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엉터리!"
이제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몸이 많이 지친 탓이기도 하겠지만, 떠날 때 조금은 들떴던 마음도 모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나를 위해 스스로 마련한 짤막하고 소박한 이벤트에 만족한다. 나를 잊고 의미를 버린 시간들에 감사한다. 벽과 못 사이에서 나는 망치로 살았다. 나는 세상의 벽에 무수히 삶을 못질했으나 남긴 것은 상처뿐이었다. 이제 망치를 버려야 한다. 삶의 무게를 저울 위에서 내려놓고 가벼운 날개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비상해야 한다. 그곳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하는 누추하고 비굴한 세계가 아니다. 잉여와 여유의 세계이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헛것들의, 헛것들을 위한 세계이다. 물질보다 상상이, 정신이 충만한 세계이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가야만 한다. 신이 내게 내린 마지막 정언명령이다.
늦지 않은 시간. 창밖의 햇살이 따갑다. 나는 창밖의 풍경과 밖에서 사 온 시원한 캔 커피의 달콤함을 사양하고 헛것들의 유희가 기다리는 깊은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첫댓글 긴 여행기 대단해요~🍀
감사해요 패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