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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에 만나는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1
천 번 읽으면 신의 경지 … 빌 게이츠 “나를 만든 병법서”
손자병법이 21세기에 주는 의미
세상은 싸움과 다툼, 그리고 단순한 경쟁으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벌어지는 전쟁의 집합이자 축적이다. 사소한 다툼이 크게 벌어져 생사를 걸고 벌이는 큰 싸움이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은 한 번 벌어지면 웬만해서는 멈출 수 없는 확장성의 본질도 지닌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다. 그래서 전쟁은 막아야 한다.
그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자체를 잘 아는 데 있다. 전쟁 자체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전쟁을 사전에 막을 수 있고, 싸움의 얼개를 잡아가는 전략의 이해가 있어야 적의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과거의 전쟁을 연구하고 그 속에서 실재화(實在化)했던 싸움의 방법들을 곰곰이 되새기면서 여러 가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동서고금의 전쟁 자체와 전략을 연구하는 것은 평시에도 중요하다.
손자(孫子)는 중국 춘추(春秋)시대 말기까지의 수많은 전쟁 현장에 섰던 사람이다. 그가 집필한 손자병법은 동서양의 다른 어느 병법서보다 현실적이다. 서양 군사전략의 교범이랄 수 있는 클라우제비츠의 전략론은 관념적이어서 실제 적용 때 해석상의 어려움을 보인다. 프랑스 조미니의 전술론은 자로 잰 듯한 기하학적 분석이어서 기준을 채우지 못하면 역시 실제 적용이 힘들다. 영국 리델 하트는 아예 손자의 병법 개념 ‘간접 접근’을 자신의 근간으로 삼은 손자의 철저한 매니어다. 손자는 그런 점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병법가다.
손자병법 하면 우선 “오래된 고전이다” “고리타분하다”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지금부터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손자병법을 확 뒤집어 놓는 얘기를 하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원문의 본뜻과 전혀 동떨어진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에서 가장 중요한 어귀를 골라서 원문의 뜻을 가장 쉽고 명쾌하게 전할 것이다. 그리고 동서고금의 중요한 전쟁과 결부시켜 그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원 뜻을 최대한 응용해서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상황과 연결해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손자병법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잘 모르면 아무리 손자병법을 많이 읽어도 본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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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리더를 겨냥하다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리더, 즉 당시의 왕과 장수를 겨냥한 책이다. 이들이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나라와 군대 조직은 흥하고 망했다. 백성이나 병사들은 그저 왕과 장수의 결정에 따라서 움직일 뿐이다. 왕과 장수가 잘못 결심하고, 잘못 행동하면 필연적으로 하부 조직은 와르르 무너진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리더를 위한 지침서라 말할 수 있다. 시계(始計) 제1편은 왕과 장수가 결심을 할 때 도와주는 여러 지침들을 기록했다. 작전(作戰) 제2편은 이들이 전쟁을 어떤 식으로 벌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모공(謀攻) 제3편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런 형태로 손자병법 전편 13편이 펼쳐진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세상의 리더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적극적·도전적 삶을 위하여
다음 특징은 공격적이고 도전적이라는 것이다. 그저 방어에만 급급한 소극적인 병법이 아니라 ‘도전(挑戰) 지침서’다. 손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 말기는 수많은 제후국들이 몰락한 주(周) 왕실을 대신하기 위해 패권 다툼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제후들은 수동적으로 적을 기다리는 방식이 아니라, 기회가 오면 이웃을 공격하는 이른바 ‘땅 따먹기’에 혈안이었다. 당시에 공자(孔子)를 비롯한 제자백가들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유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후들은 책상에 앉아 생각을 키운 이들에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29세밖에 안 되는 젊은 친구가 ‘짠’ 하고 나타났다. 손무(孫武)라는 이름의 사나이, 즉 손자였다. 그를 누가 알아 봤느냐? 오자서(伍子胥)였다. 초(楚)나라에서 도망해 오(吳)나라 합려(闔閭) 밑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터다. 오자서는 손무를 합려에게 천거했다. 합려는 손무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거절했다.
그러다 손자의 병법이 적힌 죽간(竹簡)을 본 뒤에 그만 눈이 ‘팍’ 하고 커졌다. 그 안의 내용이 지금까지 전래된 수많은 병서와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공격적이었다. 도전적이었다.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당시 도포 자락을 질질 끌며 이 땅 저 땅을 배회하면서 ‘사람다움’을 강조했던 공자와 너무도 다르다. 솔직히 합려의 머릿속은 ‘사람다움’보다는 어떻게 하면 옆 나라의 땅을 빼앗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당시 제후들의 속셈이었다.
합려가 드디어 그 병법을 찾은 것이다. 그는 수십 년간 질질 끌었던 초나라와의 전쟁을 한 방에 끝내버리고 만다. 바로 이것이 손자병법의 위력이다. 이렇게 손자병법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태도가 아닌, 아주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사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신중하고 현명하게 경쟁하라
손자병법은 다른 한편으로 매우 신중한 처세를 논하는 병법이다. 자칫 전쟁을 잘못해서 힘을 소진하면 곧바로 옆에 있는 제후들이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결정적인 적을 상대하되 언제나 새로운 적들이 공격해 올 수 있음을 염두에 둔, 복잡한 경쟁구도를 조절해 나가는 절묘한 병법이다. 이런 손자병법을 잘 연구하면 험한 경쟁구도 속에서 성공을 거둬야 하는 리더나 가장들은 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경쟁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싸움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피할 수 없다면 해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긴 후의 상황이다. 후환이 없어야 한다. 더 큰 피해가 뒤따르지 않아야 한다. 이겨놓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손자병법은 매우 현명하게 싸우고, 매우 현명하게 경쟁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정말 이런 것을 제대로 배울 수만 있다면 이 땅의 리더들은 이제 안심해도 좋다. 더 이상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공자는 문성, 손자는 무성으로 추앙
왜 오늘날에도 손자병법인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선상에 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는 부단히 선택을 강요받는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작게는 자신이나 가정, 크게는 몸 담고 있는 조직이나 나라를 망칠 수 있다. 그만큼 선택이 중요하다. 손자는 바로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명백하게 그 기준을 제공해준다.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만 정확하다면 다음 수순은 자연스럽게 풀려나간다. 문제는 선택인 것이다.
중국에서 공자는 문성(文聖), 손자는 무성(武聖)으로 추앙 받는다.
모두 13편으로 구성된 손자병법은 전쟁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무한경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선택하고, 경제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를 날카롭게 가르쳐 준다. 그래서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2500여 년 전의 해묵은 고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펄펄 뛰는 생명체인 것이다. 그래서 조조(曹操)가 손자병법을 줄줄 외고 다녔던 것처럼, 상승장군 나폴레옹이 좌우(座右)의 서(書)로 여겼던 것처럼,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을 때까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읽었던 것처럼, 빌 게이츠가 “오늘날 나를 만든 것은 손자의 병법”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이 손자병법을 늘 곁에 두고 읽으며 상고(詳考)할 필요가 있다. “손자천독달통신(孫子千讀達通神)”이라고 했다. 손자를 1000번 읽으면 신의 경지와 통한다는 말이다. 본격적인 얘기는 다음 회부터 깊이 나누기로 하자.
▶ 손자의 고향인 산둥성 빈저우에 세워진 손자의 거대한 석상이다. 최고의 병법가로 추앙받고 있는 손자를 기리기 위해 중국은 이속에 대규모 공원을 만들었다.
#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2>
세상은 전쟁터, 어떻게 싸울 것인가(상)
'피로스의 승리' 피하라, 상처뿐인 영광은 필요 없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빈민가에서 4회전 복서로 근근이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다. 그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암울했다. 삶을 지탱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그가 짝사랑하는 애완동물 가게의 점원 아가씨 애드리언이다. 어느 날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독립기념일의 이벤트로서 무명의 복서에게 도전권을 준 것이다. 챔피언의 핵주먹에 15회를 버텨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고 청년은 방심한 챔피언을 먼저 다운시키는 등 선전을 하면서 결국에는 15회를 견딘다.
비록 판정패를 했지만, 인간승리의 주인공인 그에게 마이크가 집중되고 그는 “애드리언!”을 외친다. 아마도 50, 60대 장년들은 이 영화를 잘 기억할 것이다.
무슨 영화일까? 1976년에 개봉된 ‘록키(Rocky)’다. 암울했던 70년대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빗대 이 영화를 보면서 열광했다.
‘록키’는 손자의 눈으로 보면 한심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도 어쩌면 록키의 극적인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와!”하고 박수를 쳤을 것이다. 손자가 영화를 봤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어이구,
한심한 친구….” 아마 이랬을 것이다. 왜냐고? 록키는 손자가 가장 싫어하는 형태의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여섯 편의 록키 영화를 보면 하나 같은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장면이다. 록키가 경기에서 이기든 지든 관계없이 링에 선 그의 눈은 시퍼렇게 멍들고 입은 퉁퉁 부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다. 손자가 대단히 싫어하는 싸움이다. 이러한 싸움은 가장 피해야 할 싸움이다.
영화 록키의 실제 주인공, 즉 ‘리얼 록키’(Real Rocky)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그가 바로 미국의 복싱선수였던 척 웨프너(Charles Wepner·1939년 출생)라고 한다. 60~70년대 헤비급 선수로 활약했던 선수로서 실제로 당시 헤비급 세계 챔피언 알리와 경기를 했었는데, 15회까지 버티다가 마지막 19초를 남기고 TKO패를 당했다. 이때 그의 코뼈는 부러져 있었고,
두 눈에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이 장면을 감명 깊게 본 무명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이 3일 만에 후다닥 시나리오를 썼고 이로써 그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어쨌든 이렇게 피가 터지는 싸움이 영화나 스포츠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 가운데도 엇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치르는 것부터 전쟁이다.
교정 안팎에서 부는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얼마나 거센가. 저 멀리 섬마을의 이장선거로부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판까지 모두 전쟁 일색이다.
학력 위조니, 위장전입이니 하는 등등의 흑색선전도 난무한다.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는 공룡처럼 거대한 대형마트와 전쟁을 벌인다. 대기업일지라도 국내외의 특허전쟁, 판매전쟁을 해야 한다. 불법다단계로 청년들이 무너진다. 불법대출, 부실운영으로 졸지에 은행이 도산한다.
그러고 보니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날지,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른다. 눈을 뜨면 뉴스에 뭔가 뻥뻥 터져 있다. 과연 세상은 전쟁터다. 우리는 이 전쟁터를 피할 수 있는가? 심산유곡에 파묻혀 살지 않는 한 전쟁에서 자유롭기란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면 달리 도리가 없다. 경쟁과 다툼의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그저 소극적으로 싸움을 피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싸움을 할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적극적인 관점에서 싸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 여기서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이긴 후에도 후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록키의 승리처럼 상처뿐인 영광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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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게 있다.
비록 이겼지만 승리 그 자체가 오히려 재앙인 경우다. 피로스(Pyrrhos)는 기원전(BC) 3세기께 북부 그리스 지방에 있는 에페이로스의 왕이었다.
역사가들은 그를 알렉산더 대왕에 비교할 만한 인물로 다룬다. 기원전 279년 피로스는 2만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해 헤라클레아와 아스쿨룸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군대의 3분의 1 이상을 잃었다. 그는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슬프다. 이런 승리를 한 번 더 거두었다간 우리는 망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피로스의 승리다. 상처뿐인 승리라는 뜻으로, 1885년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처음 사용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피로스의 군대는 비록 이겼으나 그 피해가 너무 커서 예전의 상태로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로마인들은 그런 허점을 노리고 즉시 후속 군대를 파병했다. 계속 이어지는 전쟁으로 피로에 지친 피로스의 군대는 하나씩 무너져 갔다. 결국 피로스는 기원전 272년 스파르타를 점령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아르고스 시(市)에서 전사했다.
이순신은 완승·전승의 유일한 사례
다시 주목하자. 이겼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현명하게 싸우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가 오늘날 무한 경쟁의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싸움인가?
손자병법 전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금부터 다룬다. 이것을 놓치면 앞으로의 손자병법 공부가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 손자병법 13편을 필자가 하나하나
그 자수를 세보니 정확히 6109자로 이뤄져 있다.
물론 판본에 따라 조금씩 글자 수는 차이가 있다.
6109자 글자에서 딱 한 글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지워버리라고 한다면 그 한 글자는 바로 ‘전(全)’이다.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자보이전승(自保而全勝)’이다. 군형(軍形) 제4편에 나오는 이 말은
‘나를 보존하고 온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의미다.
여기 나오는 전승(全勝)에서 전(全)의 의미를 정확히 새길 필요가 있는데, 이때 전의 의미는 ‘완전(完全)’이라기보다는 ‘온전(穩全)’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완전’이라는 의미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이지만, ‘온전’이라는 의미는 그 형태가 처음과 같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완전’과 ‘온전’의 미세한 차이다.
그래서 ‘자보이전승’은 ‘나를 보존하고 온전한 승리를 거둔다’고 풀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모든 리더는 ‘자보이전승’을 지상목표로 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론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는 쉽지 않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을 보여준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7년간의 전쟁을 통해 23번 혹은 26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했다. 그런데 전부 다 이겼다. 이것은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 빠짐없이 모두 이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단 한 척의 전선도 적에게 분멸되지 않았다고 하는 ‘온전’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계사년(1593년) 4월 6일자 이순신의 장계에 보면, 웅포해전에서 개펄을 빠져 나오다가 부딪쳐 통선 한 척이 전복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본 이순신은 “거적을 깔고 엎드려 벌을 기다립니다”고 적었다.
배 한 척이 전복된 것조차 죄스럽다고 하는 말이다. 이순신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어쨌든 이것이 7년 전쟁 전체를 통해 이순신 장군 휘하의 배가 손상당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이 ‘온전한 승리’,
즉 ‘전승’이다. 심지어 13척으로 133척을 상대했던 명량대첩에서조차 단 한 척의 전선도 적에 의해 격침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이순신은 완전한 승리, 온전한 승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이다.
이순신은 손자병법에 정통했고 그의 ‘완전’과 ‘온전’의 승리전법은 손자병법의 원리에서 나왔으며, 때에 따라서는 그 수준과 경지를 넘어섰다.
이런 장군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찾기 어렵다. 칭기즈칸은 20번의 싸움에서 2번을 패했고,
나폴레옹은 23번의 싸움에서 4번을 패했으며,
한니발은 5번의 싸움 중 자마전투에서 한 번을 패해 전멸했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리더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순신과 같이 ‘완승’과 ‘전승’을 동시에 이루지는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모두가 이순신보다 한 수 아래다.
러일전쟁 당시 발틱함대를 깨뜨려 일본 사람으로부터 성장(聖將)으로 추앙받고 있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이런 이순신을 평(評)하면서 “넬슨은 군신(軍神)이 될 수 없다. 군신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고 했다. 제대로 본 것이다.
‘전(全)’의 사상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계속 얘기를 나누기로 하자.
■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3>
세상은 전쟁터, 어떻게 싸울 것인가(중)
부전승은 공짜 아니다...그 뒤엔 보이지 않는 '힘'있다.
이 세상의 모든 리더는 손자가 말하고 있는 ‘전(全)’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상대방은 물론 나도 깨어짐 없이 목적을 달성하는 ‘전’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 수준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모공(謀攻) 제3편의 첫머리는 이렇다. ‘용병지법 전국위상 파국차지 전군위상 파군차지(用兵之法 全國爲上 破國次之 全軍爲上 破軍次之)’. ‘용병의 법은, 나라를 온전하게 함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나라를 파괴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여기며, 군(1만2500명 규모)을 온전하게 함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고, 군을 파괴하는 것을 그 다음으로 여긴다’. 여기서 잘 보면 ‘전(全)’과 ‘파(破)’가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온전한 상태로 목적을 이루면 가장 좋은 것이고, 깨어진 상태로 목적을 이루면 좋지 않다는 말이다. 비록 이겼다 하더라도 깨진 상태로 이기면 소용없다. 말 그대로 하책(下策)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어귀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우리가 외우고 있을 정도다. ‘시고백전백승 비선지선자야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그러므로 백번 싸워서 백번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백번 싸워서 비록 백번 다 이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좋지 않다는 얘기다. 백번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방도 깨어지지만 나도 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전(全)’의 파괴다. 그래서 좋지 않다. 여기서 그 유명한 ‘부전승’(不戰勝)이란 말이 나왔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원래 부전승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정확하게 부전승이라고 연결된 말은 없고 단지 위 어귀 뒷부분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에서의 ‘부전’(不戰)과 앞 어귀 ‘백전백승’(百戰百勝)에서의 ‘승’(勝)을 조합해 신조어인 ‘부전승’(不戰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부전승은 오늘날 중국어 사전에는 ‘부전이승’(不戰而勝)이라고 명시돼 있다. 영어로는 ‘walkover’라고 표현된다. 우리말 백과사전에는 ‘추첨이나 상대편의 기권 따위로 경기를 치르지 아니하고 이기는 일’로 설명하고 있다. 단편적으로 표현된 사전적인 이 의미로는 부전승의 의미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 ‘부전승 달인’ 고선지 회유·설득으로 정복
역사상 부전승을 잘했던 사람이 적지 않다.
우선 한나라의 유방을 도와 천하를 도모했던 한신(韓信) 장군이다. 한신은 초나라와 위나라를 차례로 격파한 후 20만 대군의 조나라와 맞붙었는데, 이때 불과 1만 명으로 그 유명한 배수진(背水陣) 전략을 구사해 이들마저 격파했다. 그리고 다음 목표로 연나라와 제나라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때 한신은 조나라의 패장(敗將)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를 극진히 대우하면서 그에게 다음 전쟁에 대해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좌거는 “패장은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敗軍之將不語兵)이라고 말하며 사양했다.
거듭된 간청을 못 이긴 이좌거는 한신에게 한마디 했다. “옛말에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의 생각에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千慮一失),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의 생각에서 하나는 얻을 수 있다고 했다(愚者千慮必有一得)’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치광이 말일지라도 성인은 가려서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이좌거가 한 말의 핵심은 이렇다. 전쟁을 즉시 중단하는 대신 조나라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배불리 먹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신의 은덕이 사방에 소문이 날 것인데, 바로 그즈음에 말 잘하는 사람을 뽑아 연과 제에 보내 군대의 무용을 자랑해 겁을 먹게 하라는 것이다. 한신은 이좌거의 말대로 행했는데 과연 연나라가 지레 겁을 먹고 손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싸우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한 부전승이다.
다음 목표는 제(齊)나라였다. 그런데 제나라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병법의 시조라 일컫는 강태공이 봉읍을 받아 세운 나라였고, 자연조건이 좋은 굉장히 부유한 나라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원소의 근거지였고, 칭기즈칸이 호라즘을 공략하기 위해 가장 중요시할 만큼 군사적 요충지이자 식량 창고였다. 무엇보다도 제나라는 70개의 강력한 성을 갖추고 있었다. 무력으로 공격하면 많은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한 제나라를 공략하는 대목에선 한신이 아니라 유방(劉邦)이 한발 더 앞서갔다. 말 잘하는 사신 한 명을 보내 세 치의 혀로 싸움 없이 고스란히 70개의 성을 접수해 버린 것이다. 어찌 된 일인가? 이미 한신의 소문은 제나라에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한신보다도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유방은 이것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사신을 보내어 공갈을 치고 엄포를 놓았다.
“내 부하 한신이 곧 당신의 제나라를 정복하러 올 것이니 미리 항복하라. 그러면 당신의 나라는 그대로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고, 항복이요!” 바로 부전승이다. 한신을 잘 이용한 유방의 한 차원 높은 부전승이다.
부전승을 멋지게 보여준 또 한 사람의 장군이 있다.
바로 당나라에서 활약했던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다. 그는 727년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吐蕃)을 정복할 때 회유와 설득을 통해 72개의 크고 작은 소국들을 싸움 없이 접수했다. 부전승의 극치다.
* 적의 꾀 베는 게 싸움의 첫 단계
여기서 분명히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 많은 사람이 부전승을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어서다. 부전승이라고 해서 ‘싸움’을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부전승의 진정한 의미를 몰라서 빚는 오해다. 부전승도 역시 ‘싸움의 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부지런히 부전승을 시도하되 부전승에 실패할 때는 곧바로 싸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제부터 논하는 싸움의 네 단계를 주의 깊게 읽기 바란다. 부전승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 싸움의 네 단계를 잘 이해해야만 한다.
모공(謀攻) 제3편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상병벌모 기차벌교 기차벌병 기하공성(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其下攻城)’. ‘가장 좋은 병법은 적의 꾀를 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적의 동맹관계를 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적의 병력을 치는 것이며, 가장 하책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벌모(伐謀), 벌교(伐交), 벌병(伐兵), 공성(攻城)이 차례로 나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싸움의 네 단계다.
여기서 가장 좋은 것은 벌모(伐謀)를 달성하는 것이다. 벌모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풀면 ‘적의 꾀를 베어버린다’는 것이다. 상대로 하여금 내 말에 절대 순종해 나를 거역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먹음직한 떡을 손에 든 친구 녀석이 있다고 하자. 배고픈 차에 잘됐다. “떡 내놔!” 이 한마디에 녀석이 순순히 떡을 내놓는다면? 바로 벌모를 달성한 것이다. 싸우지 않고 깨짐이 없이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벌모가 가능할 것인가?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힘(power)에 의한 벌모다. 힘은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상대에게 겁을 주는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권력(權力)이나 금력(金力)도 힘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런 힘 앞에 약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둘째는 이익(profit)에 의한 벌모다. 사람은 결국 ‘이익’을 좇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기 전에 진(秦)나라 왕이었을 때 “이 사람과 교유(交遊)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법가 철학의 대부인 한비자(韓非子)다.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동인(動因)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이익(利益), 권위(權威)와 이상(理想),
즉 비전(vision)이다. 여기서 한비자는 ‘이익’에 무게중심을 더 두었고 ‘이익’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라고 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결국 ‘이익’으로 엮인 관계라고 말할 정도다.
셋째는 ‘감동’(感動)에 의한 벌모다.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을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데 감동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출중한 인격에 의한 감동, 훌륭한 서비스에 의한 감동 등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다. 그런데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속성으로 인해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벌모(伐謀)는 가장 바람직한 단계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란 참 어렵다.
조직을 이끄는 세상의 모든 리더는 ‘무엇이 사람을 저절로 움직이게 만드느냐’ 하는 벌모 차원에서
‘힘’ ‘이익’ ‘감동’에 대해 깊이 사유(思惟)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 회에는 나머지 세 단계인 벌교(伐交), 벌병(伐兵), 공성(攻城)을 살펴보면서 부전승의 진정한 의미를 깨쳐 보기로 하자.
😆 손자병법으로 푸는 세상만사 <4>
-노병천 한국전략리더쉽연구원장
세상은 전쟁터, 어떻게 싸울 것인가(하)
비스마르크 통독 비결, 원대하고 치밀한 벌교전략
공성전(攻城戰)은 승리를 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다. 사진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공성전 장면이다. “휘이잉∼” 무지막지(無知莫知)하게 큰 돌들이 하늘을 난다. “꽝! 꽝!” 순식간에 와르르 성벽이 무너진다. 커다란 방패들을 위와 옆으로 맞댄 병사들이 마치 거북 등과 같은 모양을 하고 성벽을 향해 전진한다. 용감한 병사들은 쐐기 모양의 커다란 나무를 들고 성문을 향해 돌진한다. 긴 사다리를 성벽에 기대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들을 향해 성 안의 병사들은 뜨거운 물과 기름을 쏟아붓는다.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를 걷어찬다.
수많은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다가 개미처럼 떨어진다. 온몸에 불이 붙어 이리저리 뒹굴며 비명을 지른다. 검붉은 화염(火焰)과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따로 없다.
자, 이러한 장면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그렇다. 공성전(攻城戰)에서 볼 수 있다.
2005년 제작된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는 공성전 장면이 아주 잘 묘사돼 있다. 영화는 1187년 제2차 십자군전쟁 당시 무슬림 세계의 맹주 살라딘(Saladin)의 공격을 받아 끝까지 저항하는 예루살렘 성의 숨 막히는 공방전을 그렸다.
2011년에 나온 한국 영화 ‘평양성’은 나당(羅唐)연합군이 고구려를 삼키기 위해 마지막 남은 보루 평양성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았다. 제목이 평양성인 만큼 그럴듯한 공성 장면을 많이 넣었다.
‘킹덤 오브 헤븐’이나 ‘평양성’에서 느끼게 되는 건 공성전은 참 어렵고 승패와 관계없이 피아가 많은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서희 ‘강동 6주’ 담판, 伐交 성공사례
싸움의 네 단계는 벌모(伐謀), 벌교(伐交), 벌병(伐兵) 그리고 공성(攻城)이다. 벌모는 지난 호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이제 나머지 단계를 살펴봐야 한다.
서두에서 살펴본 최악의 싸움인 공성은 마지막 단계다. 가장 나쁜 선택인 공성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그 앞 단계인 벌교와 벌병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벌교(伐交)는 상대방의 교우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상대방을 감싸고 있는 동맹관계를 끊어버려 고립시키는 것이다. 떡을 들고 있는 녀석에게 “떡 내놔!”라고 점잖게 말을 했는데도 녀석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순순히 말을 들을 태도가 아니다. 뭔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친구들을 믿고 있는 것이다. 비록 녀석은 약할지라도 녀석의 친구들 중에 힘깨나 쓰는 동네 애들이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주변 친구들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벌교다. 벌교에는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위협(威脅)’이다.
주변 친구들에게 위협을 주어 그 녀석과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 녀석과 같이 놀면 나중에 엄청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위협과 공갈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방법으로 떨어져 나간다.
두 번째는 ‘회유(懷柔)’와 ‘설득(說得)’이다.
이 방법을 시도하려면 어쩌면 떡 한 조각보다도 더 많은 돈이 들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비용 면에서 볼 때 공성보다는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보다 현명한 방법이 있다면 주변 애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는 동시에 가능하다면 그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진(秦)의 전국 통일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합종연횡(合從連橫)이나 세 치의 혀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상대했던 서희(徐熙)의 담판(談判)은 벌교의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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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도 손잡은 철혈재상
여기서 우리는 눈을 서방으로 돌려 철혈재상(鐵血宰相)이라 불린 비스마르크(Bismarck)의 외교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스마르크는 오늘날 독일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이른바 ‘외교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연방만이 유일하게 독일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되면 아무리 정적(政敵)일지라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사회주의자를 혐오하면서도 1863년 독일 최초의 사회당인 독일노동자연맹을 창설한 페르디난트 라살과도 친분을 쌓았다.
독일 통일을 이루기 위해 프로이센이 상대해야만 하는 주변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였다.
그는 먼저 오스트리아를 겨냥했다. 당시 헝가리를 통치하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항거하는 헝가리 혁명주의자들과도 깊숙이 접촉해 오스트리아에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러시아와는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술을 발휘했는데,
1863년 1월 폴란드에서 항거가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재빨리 러시아 편을 들어 지지했다. 훗날 독일 통일의 든든한 후원자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프랑스 역시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술을 발휘했다. 1865년 프랑스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함으로써 우의를 다졌고, 나폴레옹 3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강력한 이웃인 러시아와 프랑스에게서 내정불간섭을 보장받자 드디어 비스마르크는 1866년 6월 17일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보오전쟁(普墺戰爭)이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했다.
이때 프로이센의 군부는 오스트리아를 계속 공격해 전멸시킬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 경우 다른 나라의 개입이 있을 것을 우려한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제 비스마르크의 유일한 걸림돌은 프랑스였다.
1870년 공석 중인 스페인 왕위 계승문제가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의도적으로 프랑스가 꺼리는 인물을 지지하고, 7월 14일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한다. 보불전쟁(普佛戰爭)이다.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수완으로 프로이센의 우군이 된 남부독일국가들이 즉각 전쟁에 가담했고 결국 프랑스는 무릎을 꿇었다.
1871년 1월 18일 포성이 아직도 그치지 않은 가운데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한 독일 통일이 선포되었다. 독일의 통일은 외교의 달인 비스마르크에 의한 치밀하고도 원대한 벌교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아니!” 주변의 친구들을 모조리 제거했는데도 녀석이 버티고 있다. 이제 말로 하는 단계는 지난 것 같다.
그래서 이어지는 수순이 세 번째 단계인 벌병(伐兵)이다. ‘병력을 베어버린다’는 의미다.
군사를 보내 한판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개인적으로는 싸움(duel)이 되겠지만 국가적으로는 전쟁(war)이 된다.
이때부터는 눈에 보이는 직접 피해가 따른다.
녀석이 움켜쥐고 있는 떡에도 피가 묻는다.
내가 빼앗더라도 피가 묻고 흙이 묻은 떡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
현명한 리더, 굴복보다 심복 모색
이렇게 벌병을 했는데도 피멍이 들고 코피가 터진 녀석이 끝까지 버티고 있다. 그것도 잘 준비된 곳에 들어가서 마지막까지 항전하기 위해 버티고 있다. 지독한 녀석이다. 뭔가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게다.
그래서 이제 어쩔 수 없이 최악의 단계로 가게 된다.
바로 마지막 단계인 공성(攻城)이다. 공성까지 갈 경우 대부분 자존심 싸움이 많다. 이쯤 되면 돈이 문제가 아니다. 돈이 더 들어가더라도 끝까지 법정소송까지 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 공성의 단계에 갔을 때다.
갈 데까지 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 맞붙어 싸운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요행히 이겼다 하더라도 이런 승리는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와 같다. 상처뿐인 승리, 상처뿐인 영광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이것만은 피하는 게 현명한 싸움의 방식이다. 손자도 모공(謀攻) 제3편에서 말하기를 공성은 최후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을 때 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은 공성까지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두 번째 단계인 벌교까지만 잘해도 ‘깨어짐’ 즉 ‘파(破)’를 피할 수 있는 ‘전(全)’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인 벌모와 벌교까지가 진정한 의미에서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부전승(不戰勝)’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전략가는 벌모·벌교 단계에서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략가라 할 수 있다. 전략가도 급이 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벌모·벌교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벌병 그리고 최후의 선택인 공성까지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전승도 싸움의 연속선에 있는 것이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현명하게 싸우는 방법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이 있다.
굴복(屈服)과 심복(心服)에 대한 것이다.
현명한 리더는 굴복보다는 심복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굴복은 힘이 약할 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특히 회사나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입이 포도청이라 대체로 굴복의 자세로 살아가기 쉽다. 따라서 힘이 강해지거나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다시 고개를 쳐들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항복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심복은 다르다. 심복은 심열성복(心悅誠服)의 준말로서 충심(衷心)으로 기뻐하며 성심(誠心)을 다하여 순종(順從)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항복을 거둘 때 진정한 승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가 보오전쟁에서 이기고도 오스트리아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심복의 의미를 잘 알았던 비스마르크다운 행동이다. 나라의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위정자들이나,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기업가들이나,
사회를 이끌고 있는 각계각층의 리더들은 이런 심복의 승리를 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리더들이 항상 떨치지 못하는 고민일 것이다.
손자가 말한다. 싸우지 마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이겨라. 이기면 해적도 영웅이 되고 해적선도 전설이 된다. 굴복보다는 심복을 얻어라. 그러나 명심하라. 때에 따라서는 지는 것이, 아니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역설적(逆說的)인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