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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예물로 자기 수송아지를 드려,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하여 속죄하고, 그 새끼 수염소 두 마리를 회중의 성막(聖幕)의 문 입구 주(主) 앞에 두고, 또 아론은 그 두 마리의 염소들 위에 제비를 뽑되, 한 제비는 주님을 위하여 던지고, 다른 제비는 속죄염소를 위하여 할지니라. 아론은 주의 것으로 제비 뽑힌 그 염소를 가져와서, 그것을 속죄제예물로 드리고, 제비뽑아 속죄염소가 된 그 염소는 주 앞에 산채로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그 속죄염소는 광야(廣野)로 보낼지니라.”(레16:6-10) 레위기는 속죄의 교훈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희생예물과 제사의 책이다. 모든 예물들, 모든 희생예물 행위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사장되는 교회 그리스도인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황소, 어린 수소, 수염소, 숫양, 어린양, 산새들, 산비들기, 집비들기 등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모형들이였다. 그리고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와 그밖의 그것들을 드릴 때의 표현인 거제(擧祭-들어올림), 요제(搖祭-흔들다), 관제 혹은 전제(灌祭 or 奠祭 - 쏟아붇는 것)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과 부활 승천까지의 모형인 것이다. 그 안에 모든 구원의 속죄의 진리가 들어있다. 여기서 우리가 고찰해야할 주제는 본문에 나타난 ‘아사셀(azazel)’의 의미를 묵상해보는 것인데 구약 성막에는 바깥 뜰이 있고, 네 겹의 천막으로 덮어져있는 성막이 있는데 그 성막에는 두 방이 있다. 뜰 쪽으로 있는 사방 4.5m의 방은 ‘성소’(the sancutary)라 부르고 서편에 있는 사방 4.5m의 방을 지성소(至聖所-the Most Holist)라고 부른다. 지성소에는 1년 1차 오직 대제사장만이 속죄일에 자신의 속죄를 위한 피와 백성들의 속죄를 위한 피를 가지고 향로를 들고 들어가 피를 일곱 번 뿌림으로 속죄가 이루어지는 의식을 행한다.(히9:1-12) 그때 대제사장 ‘아론’은 자기를 위해 수소의 피를 뿌리고 또 가족을 위해 뿌린 다음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염소의 피를 뿌리는데 그때 드려지는 예물이 두 마리의 수염소(goats)다. 이 수염소를 속죄일의 속죄제 예물로 드릴 때에 제비를 뽑아 우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예물로 먼저 드려 죽이고, 그 피를 지성소의 언약궤 위 속죄소(긍휼의 자리- the mercy seat)에 일곱 번 뿌린다. 다음에는 나머지 살아있는 한 마리 염소의 머리에 두 손으로 안수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의 죄를 고백한 다음 그 염소는 죽이지 않고 광야로 보내 사람이 없는 곳에 보내버리면 그 염소가 보이지 않게되고, 그 집행자들은 몸을 물로 씻고 희생수염소 등을 밖에서 불사르고 몸을 씻고 옷을 빨고난 후 진(陣)에 들어오면 속죄일의 속죄 행위는 끝이 난다.
1. 여호와를 위한 염소(히: 싸이르-수염소) “그 뒤에 그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예물의 염소를 죽이고, 그것의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와서,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행한 그대로, 그것의 피를 긍휼의 자리 위에와, 긍휼의 자리 앞에 뿌려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부정함과 그들의 모든 죄들 가운데 저지른 그들의 죄악들로 인하여 더럽혀진 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함 중에 그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회중의 성막을 위하여 그와 같이 행할지니라.”(레16:15-16) 여기서 먼저 “여호와를 위한 수염소”(레16:8)로 제비뽑힌 염소를 예비하여 두고, 제사장 자신을 위한 수소의 피를 뿌린 다음 백성을 위하여 예비된 염소를 죽여, 염소의 피를 수소와 동일하게 일곱 번 뿌린다. 두 마리의 염소중 제비뽑힌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사역의 먼저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하나님을 위한’ 헌신을 의미한다. 다만 히브리어와 KJVB에도 속죄제(a sin offering)로 표현되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헌신하심으로 “하나님을 위한 염소”인 예수님의 그림자의 실체를 성취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 최우선이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고(히10:9-10) 통곡과 눈물, 그리고 경외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셨다. “주님께서 자신의 육체로 계실 때에,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올리셨고, 주님의 경건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주님께서 한 아들이시면서도 고난 받으신 일로 순종하심을 배우셔서, 완전하게 되심으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히5:7-9)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육신을 입으셨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시고(요12:28)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데” 최우선을 두셨다. 주님의 모든 삶 가운데 오직 보내신 분의 영광 만을 구하셨다. “자기 스스로 전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만 구하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의 속에는 아무 불의도 없느니라.”(요7:18)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홀로 두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내가 항상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요8:29) 예수님의 출생, 그분의 삶, 그분의 사역,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까지 하나님의 뜻(마26:42)에 순종하시고 마지막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요19:30) 선언하시고 운명하셨던 것이다. 제비뽑힌 염소 중 먼저 “여호와를 위한 염소”에대한 실체로서 완벽하게 이루신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를 위한 염소나 아사셀을 위한 염소나 모두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우선 순위에 있어 백성들의 죄사함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이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존재하고 있다.(골1:16) 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시바의 황금으로부터 초야의 우슬초까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역, 헌신, 희생, 부활 승천의 최우선 목표는 죄인들을 위해서가 아니였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레위기 16:15절에 “백성을 위한 속죄제 희생” 역시 백성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들이 거룩해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이라 고백해야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우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한 것이다. 즉 모든 죄인들이 지옥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것은 죄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죄인들을 위한 대속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으심, 부활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성취,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보시고 만족하셨던 것이다. 그 공의의 성취를 통한 만족에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안 받고 문제나, 지옥을 가느냐, 안 가느냐 문제에 먼저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였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보실 때(출12:13,23)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 장자들이 죽지 않게 되었구나”라고 만족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거룩한 공의가 성취되었구나”라고 만족하셨고 다음으로 이스라엘 장자들의 구원문제를 염두에 두셨다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인들을 위해서 골고다에 순종하셔서 희생하신 것이 최우선이 아니셨고 그것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희생하셨으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죄인들을 대신하여 희생하신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죄사함은 안중에 우선으로 두지 않고, 사실상 그것과 상관이 없다할찌라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여호와를 위한 염소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우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떠나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으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공의로우심의 충족 때문에 만족하셨던 것이다. ‘공의로움의 충족’이란 하나님의 거룩이 성취되어야하고 죄에대한 형벌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기까지 헌신하심 속에서 공의로우신 ‘거룩’은 성취되었고 그분의 피흘리심 속에서 죄에대한 삯(롬6:23) 사망 형벌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위한 제비로 뽑힌 수염소는 백성들의 구원보다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피흘려 죽었던 것이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으셨고, 피흘리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기에, 주님께서 그분을 질고에 두셨도다. 주 당신께서 그분의 혼을 한 속건제예물로 만드실 때에, 그분께서 자신의 씨를 보시리니, 그분께서 자신의 날들을 늘릴 것이요, 주님의 기쁨이 그분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리이다. 그가 자기의 혼의 고통을 보고, 만족하리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니, 이는 그가 그들의 죄악들을 짊어질 것임이라.”(사53:10-11)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판단하노니, 만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면 곧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2. 아사셀(Azazel)을 위한 염소 KJVB에는 속죄염소(scape-goat)로 표기되었는데 ‘scape’는 ‘escape’로 ‘달아나다’ ‘도망하다’ ‘탈출하다’란 뜻인데 이것을 ‘scape goat’로 표기하면 속죄염소라고 표기한다. 히브리어의 ‘아사셀’이란 뜻은 ‘미치’(Mitch)의 글(레위기의 3대절기-생명의 서신 출판)에는 ‘에즈’(ez)라는 글로 ‘양’이란 뜻과 ‘떠나다’ ‘내쫓다’라는 뜻의 ‘아젤’(Azal)의 결합어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 고대 성경들중 셉투긴트(Septuagint) 성경과 벌게이트(Vulgate) 성경 등은 ‘아사셀’을 문자 그대로 ‘떠나는 양’으로 표기를 하였다. 또 다른 학자들 브라운(Brown)이나 드라이버(Driver), 브릭스(Briggs)등은 아람어의 ‘추방하다’ ‘제거하다’의 ‘아젤라’(Azala)와 아사셀(Azazel)을 연계시킨다. 그러므로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곧 ‘내어보내는 염소’ ‘제거하는 염소’라는 뜻이 된다. 여기에 KJVB에 속죄 염소(scape goat)로 표기되었으나 정확히는 Escape goat 즉 ‘도망시키는’ ‘쫓아내는’ 즉 ‘제거하는 염소’, ‘내어보내는 염소’ 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제 ‘아사셀’(제거하다) 염소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흘린 후에 행할 규례였는데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히9:22)는 법칙에 따라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한 마리의 흠 없는 염소가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둘째는 “죄의 형벌을 위해” 즉 “공의로움의 성취”를 위해 피흘려 죽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전 인류가 저지른 죄값의 형벌로 “공의로움의 성취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희생하셨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온 인류는 함께 정죄받아 함께 죽어 장사됨으로 죄에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형벌은 완전하고 만족하게 성취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 모든 죄의 사망을 끝내셨다.(고전15:45) 하나님의 형벌을 모두 담당하셔서 세상의 죄(요1:29)에 대한 형벌이 종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이제 두 번째 ‘아사셀’ 즉 백성들의 죄를 제거해버리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를 위한 염소”에게는 죄를 넘기는 안수나 죄를 고백(confess)하다는 명령이 직접적으로는 주어지지 않았다. 반면 ‘아사셀’ 염소에게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죄들을 아론이 살아있는 ‘염소’ 머리 위에 두 손으로 안수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불의(the iniquities)와 허물들(transgressions)을 고백한 후 미리 정해놓은 사람에게 맡겨 광야 (시나이 사막) 무인지경에 풀어놓아버린다. 그러므로 두 번째 ‘아사셀’ 염소는 결코 죽어서는 아니된다. 왜냐면 이미 여호와를 위한 염소가 죽었기 때문이다. 죄의 삯으로 죽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백성들은 같이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죄의 삯인 사망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죄값으로 두 번 죽을 수는 없다. 우리의 죄들이 시내산 같이 많고 높이 쌓여있을지라도 그 값의 몫은 목숨이 한 번 죽음으로 갚아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인류의 죄값을 충분이 짊어지고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때문에 두 번째 아사셀 염소는 죄를 넘기되 피흘림은 없기 때문에 멀리 내어보내어 죄를 제거(아사셀)하게 되는 것이다.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 위에 안수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범죄들과, 그들의 모든 죄들 가운데 저지른 그들의 죄악들을 그 염소에게 고백하고, 그 죄들을 그 염소의 머리 위에 얹어서, 한 적합한 사람에게 맡겨서, 그 염소를 광야로 보낼지니, 그 염소가 그들의 모든 죄악들을 짊어지고서,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풀어줄지니라.”(레16:21-22) 아사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는 ‘제거되었다’는 그림자이며 교훈이였다. 아사셀로 제비뽑힌 염소는 다른 염소가 비명을 지르고 죽을 때도 살아있다. 그 다음 피를 뿌린 후에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대제사장 아론이 두 손으로 ‘안수’한다. 안수는 피안수자(염소)와 백성의 대표자인 아론과 동일성(Identity)을 의미한다. 즉 하나가 된 것이다. 세례 요한은 레위지파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였다.(눅1:5) 요한의 나이 30세에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고, 예수님께서 30세 시작 때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눅3:3-23) 침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육개월 먼저 출생하였다. 마지막 율법으로 또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신 예수님에게 안수하여 세상 죄를 고하기 위함이였다. 그리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 때 세상의 모든 죄는 예수님께 넘겨졌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져가신 하나님의 그 어린양이시로다.”(요1:29) 그 죄 때문에 희생하셨던 예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 선언하시기 위해 부활하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류의 죄는 찾을 수 없게된 것이다. 왜냐면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 아사셀 염소가 무인(無人) 지경으로 사라졌기(아사셀-제거되었기에) 때문이다. 피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지성소에 일곱 번 뿌려졌고(레16:14-16)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를 짊어지고 사라져버린 아사셀이 되신 것이다. 무인지경으로 사라진 염소는 어떤 사람의 눈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골고다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셨고(마27:54) 정녕 의인이셨다.(눅23:47) 그러나 부활하신 이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에(벧전1:3) 우리는 정녕 의인이 되었다.(롬3:25, 28, 3:24, 5:1-9) 우리의 죄가 사해진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였다. 그러나 우리가 의인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두 염소, ‘여호와를 위한 염소’와 ‘아사셀’(죄를 제거한 염소)을 위한 염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서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이제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죄를 짊어지고 사라졌기 때문에 죄가 보이지 않아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위한 염소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아사셀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셔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들이 제거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여호와를 위한 염소가 속죄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아사셀’ - 실제냐? 관념이냐? 아론과 대제사장, 번제로부터 속건제 그 외 제사들, 예물들 그리고 ‘아사셀’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즉 실체없는 그림자도 없다. 그림자는 희미하나 실체는 분명하다. 그림자는 거울로 보는 것 같으나 실체는 얼굴과 얼굴로 보는 것이다.(고전3:18) ‘아사셀’ 속죄의 규례는 광야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즉시 성전의 휘장이 찢겨지기까지(마27:51) 실제였고 관념이 아닌 사실이였다. 제사장들은 매년 칠월 속죄일(욤키프르- kopher-속죄) 열흘에 먼저 모든 백성들이 성회(Holy Convocation)로 모이느라 정결케하고 모든 백성들이 일을 끝내고 성막 앞으로 모였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하는(레23:27) 의식을 치루는데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돌아봄으로 죄를 기억하고(히10:2) 괴로워한다. 다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위해서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고 아무도 일하지 않게된다. 이 모든 것은 실제이다. 대제사장은 제비뽑는 그릇을 준비하고 그릇 안에 ‘여호와를 위함’, ‘아사셀을 위함’이라고 적힌 두 개의 가죽 판을 넣어두고 두 마리 흠없는 염소를 예비하였다가 가져와서 초롱초롱한 염소중 먼저 뽑힌 염소를 안수하고 다음으로 칼을 뽑아 목을 찌르고 피를 받아낸다. 염소는 괴성을 지르고 부들부들 떨다가 조용히 죽어 늘어진다. 대제사장은 비린내나는 피를 담은 양푼을 들고 앞서 수소의 피를 뿌렸듯이 지성소 언약궤 앞과 긍휼의 자리 위에 손가락으로 찍어 일곱 번 뿌린다. 조심스럽게 뿌려도 그의 소매 옷등에는 피방울이 튀어있을 것이다. 그는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그 모든 행위를 실제로 기억한다. 다음 다시 아사셀 염소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 허물들을 구체적으로 고백한 후 대기시켰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대제사장 종들에게 붙들리셨고, 아리마대 요셉에의해 무덤에 묻히셨다.) 광야로 보내 사람이 없는 시나이 사막에 쫓아내어 버린다. 그 염소가 따라 오려고 했을 지라도 쫓아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에 생생히 기억하고 이제 1년간은 마음 편이 지내겠구나 안도할 것이다. 다시 성막으로 돌아와서 제사장에 보고했을 것이다. 아사셀(깨끗이 제거했다) 해 버렸다고!!! 그리고 다음 15일부터 장막절 준비를 한다.(레23:33-34) 이 모든 것이 실제였다. 그들은 죽은 염소의 시체를 보았고 죄를 넘긴 아사셀 염소는 다시는 찾을 길이 없었다. 또 찾을 이유도 없다. 그 모든 것이 관념이 아닌 실제 사실이였다. 즉 그들의 죄가 제거된 것이다. 단 육신의 죄였고, 단 1년간 뿐이였을 지라도!(히9:1-10) 예수님 안에서 “아사셀”(죄가 제거되었다)은 실제적 사실이다! 그림자도 이렇게 실제인데 실체는 더욱 실제이며 사실이 아니겠는가? 세계 지도를 펴보면 ‘이스라엘’ 이라는 지도와 국가가 보인다. 사람은 갔어도 그 땅은 그대로 있다. 이스라엘을 가보면 ‘예루살렘’이란 도시가 실제로 있고, 이름도 옛 그대로 이다.(창14:18) 시온성, 시온산, 헐몬산, 티베리우스 호수(갈릴리 호수), 베드로의 욥바, 가이샤라 빌립보, 고넬료의 가이샤랴, 모든 지명이 그대로 있고 땅도 그대로 있다. 모든 것이 실제이다. 예수님의 출생지 베들레헴(미5:2)도 그대로 있고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눅2:39)시도, 유대인, 팔레스틴 원주민, 관광객들과 버스로 초만원을 이루며 북적대면서 실제이며 사실이다. 예수님의 빌라도 법정도, 겟세마네 동산도 그대로 실제이며 사실이다! 그리고 최후에 승천하신 감람산 정상도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며 그대로 실제이며 사실로 있다!(행1:11) 이와같이 예수님은 그림자의 여호와를 위한 염소 같이 분명한 실체로 여호와를 위해 피흘리셨고 “아사셀”을 위해 부활승천하셨다. 부활하신 그분에게서는 죄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마호멧 무덤은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에 있다. 석가의 무덤도, 맹자의 무덤, 소크라테스의 무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빌려왔으나 비어있었고 예수님의 무덤은 없다.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없다. 부활이 실제이다. “아사셀”(Azazel)은 ‘제거하였다’란 뜻이다. 왜 제거해야만 했을까? 죄는 제거해야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보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죄를 넘기지 않았다면, 그 염소는 내버릴 필요(아사셀)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백성의 죄를 넘겼고 때문에 그 죄덩이 염소를 ‘제거했다.’ 예수님 안에서 온 인류의 죄들, 불법들, 허물들은 실제로 사실로 제거되었다. 희생, 부활이 실제이고 사실이기에 죄를 제거하신 것도 사실이며 실제였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져가신 하나님의 그 어린양이시로다.”(요1:29)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주님과 함께 살리셨고, 너희의 모든 허물들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슬리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규례들을 지워버리시고, 또한 그것들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박아 제거해버리셨으며,”(골2:13-14)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光彩)시요, 하나님의 본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들을 붙드시며, 그분 스스로 우리의 죄들을 정결(淨潔)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히1:3) 죄를 제거하신 것은 현재 우리들의 죄성(罪性)까지 즉 생리적으로 본성까지 제거하셨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성에서 죄성을 제거해버리시면 되었지 굳이 아무것도 모르는 염소에 넘겨 찌들고 황량한 사막으로 쫓아내어야만 하셨겠는가? 성경에서 강조되고 있는 두 단어는 “대신”(代身) 이란 단어와 “믿음”이라는 단어이다. 광야로 버림받은 아사셀 염소는 정작 버림받아야할 이스라엘 백성 “대신” 버림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분’(마3:17)이셨으나 우리들 ‘대신’ 버림받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마27:46) 실제로 버림받으셨고 죽으셨는데 다만 “대신”하셨다.(고후5:14-16, 21)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운 것은 실제이며 사실이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아니한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속에서 세상죄는 “아사셀”(제거되었다) 되었고, 결과적으로 세상 죄인들은 의인들이 되었으며 이 내용이 “복음”이고 이 소식을 전해주는 사역이 ‘전도’인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속죄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성취가 되었는가? 그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매개체로 가능해졌다. 그것은 내가 어제 입었던 흰 와이셔츠를 오늘 세탁해보니 눈같이 깨끗해진 것이 실제인 것보다 더 실제로 거룩해졌고 의로워졌다. 왜냐면 나의 죄는 예수님 안에서 ‘아사셀’(제거되었다)되었기 때문이다. 팔당댐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넘치고 있다. 그 물은 실재이며 사실이다. 팔당댐 근처 청평호로 차를 몰고 가면 넓은 호수의 찬바람이 시원케한다. 그것은 실재이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내가 어떻게 그 맑은 팔당댐의 물을 마실까? 그것은 팔당댐에서 서울까지 묻혀있는 송수관을 통해서다. 즉 팔당댐에 있는 생명수 실제를 송수관이라는 매개체로 서울에 있는 내가 실재로 생수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팔당댐의 생수나 서울에서 내가 마시는 생수나 같은 생수이며 실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하심 아사셀은 실체이며 성경 복음을 듣고 “믿음”(갈3:23-29)이라는 매개체로 우리의 죄가 실재적으로 제거(아사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성령님이 안주해 인치시고 계시며 당당한 의인으로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님으로 더 이상 속죄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성령님께서도 우리에게 증언하시나니, 그분께서 미리 말씀하시기를, 그날 이후에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어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 이제는 이것들을 사면하셨은즉, 죄를 위하여 더 이상 예물을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히10:15-18) 오늘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양심상 옳은 행실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 죄들을 잊으려해도 양심이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살셀’ 한 의인으로 보신다. 그것은 실재이다. 결코 관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록된 약속의 말씀 뿐인 것이다. 아멘 “위에 계신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희생물과 예물과 번제예물과 속죄제예물은 주님께서 원하지도 아니하시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으니 그것들은 율법대로 드려지는 것들이니라.“(히10:8) “또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0:17)
- 옮긴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