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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2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자들, 잘짜여진 성읍 예루살렘, 연합된 열두지파, 예루살렘의 형통과 평안
1. 말씀배경
시편 122편은 표제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와 더불어 “디윗의 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지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부른 것입니다. 다윗시대에 이 노래가 불리어졌다면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지 않은 시대이므로 아마 그가 법궤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장막이 성전의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다윗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감격하며 부른 노래일 것입니다.
다른 순례자들도 오래동안 힘든 순례의 길을 거쳐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감회가 새로워 다윗의 시인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집,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잘 짜여진 성읍과 궁중, 하나님의 집을 보고 평안과 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쳐 올라 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와 여호와의 이스라엘 12지파들이 다 복을 받아 평안하고 형통하게 될 것 같았을 것입니다.
시 122편은 이런 분위기입니다.
2. 시편 122편
1절, 순례자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 가자고 했을 때 그는 “기뻐하였다”고 회상합니다.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사람들끼리 주고 받은 대화를 생각해 보면 이런 대화를 했을 것입니다.
“자네 이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가?” “이번에 같이 가세” 등등
순례자들은 그 먼 거리를 ① 같이 갈 사람이 있음에 기뻐했을 것이고 ②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할 수 있음에 기뻤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기쁨이 없었다면 그 오랜 순례의 길, 험한 길을 극복하며 올라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순례의 길에 동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순례자는 그 때의 기쁨을 안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는데 출발 때의 기쁨이 헛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쁨이 더 충만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믿음 생활 속에서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교회가기 전에 기쁨이 충만했는데 막상 교회 와서 기쁨을 다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영적인 만나를 먹고 영육간의 회복을 통해서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마리아 성이 그러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이 왜, 큰 기쁨이 있었나요?
[행 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크게 소리 지르며 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고쳐지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이러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 전부터 기쁨이 충만하고 와서는 더 기쁨이 충만하지 않을까요?
교회가 우울한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울한 사람들이 와서 기쁨으로 충만해 져야 합니다. 회복이 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교회가 이런 기쁨이 없이 다들 심각하게 되고 있습니다.
2절, 순례자는 예루살렘 성문 안에 들어가자 마자 “섰도다”를 외칩니다. 우리 성경은 “예루살렘아”를 먼저 기록하고 있지만 원어는 “섰도다”를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발이 예루살렘 성 안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운 외침입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성 안에 내발이 도착하여 서있다”는 감격인 것입니다. 분사형으로 서 있는 감격을 계속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치 사람을 부르는 듯 인격이 있는 듯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아”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든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그들이 바라고 소망하던 일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을 감격해 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한번도 성전에 들어오자 마자 이런 모습으로 감동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죽을 병이 걸려 다시는 교회에 오지 못할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 교회의 문을 들어섰다면 오늘 말씀의 순례자와 같이 “내가 교회에 왔구나” 하지 않을까요?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자유롭게 교회를 가는 그날이 온다면 그들은 오늘 순례자가 외치는 외침을 하지 않을까요? “내가 교회에 들어섰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너무 편하게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너무 쉽게 교회를 오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회를 여차하면 떠날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3절, 순례자는 예루살렘 성에 도착한 감격을 가지고 이제는 예루살렘 성을 봅니다. 눈을 들어 성을 보니 그의 눈에는 “잘 짜여진 성읍”이었습니다.
원어를 보면 “서로 하나되어 조밀하게 지어진 성읍”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성읍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12지파들 사람들이 서로 하나되어 연합하며 살고 있는 성읍입니다.
바울이 말한 성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각 지체가 조밀하게 서로 붙어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요 2:21, 엡 2:21)
순례자의 눈에는 이런 예루살렘 성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도시가 영적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또 실제로도 교회를 중심으로 각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각 지파들이 사방에 장막을 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교회가 도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교회 주변에 집을 짓고 살지 않더라도 교회 중심으로 사람들의 삶이 형성되고 문화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 (4절)이 이런 모습으로 성전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시가 이렇게 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잘 짜여진 성읍이 되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높은 건물이 많이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교만으로 높아진 바벨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도시는 언젠가는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 보실 때 잘짜여진 성읍이 아닌 것입니다. 도둑의 소굴로 보일 수 있습니다.
순례자에게는 예루살렘 성의 집들이 서로가 가까이 붙어서 하나된 모습으로 잘 짜여진 모습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오늘날 무형교회도 성도간에 분란이 있고 다툼이 있으면 잘 짜여진 성읍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가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나뉘어져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습니다.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어 연합될 때 잘 짜여진 교회, 성읍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패를 나누어 다투면 잘 짜여진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를 보면 콩가루 집안입니다. 분열의 영이 역사하여 세포분열을 하듯이 분리가 되고 있습니다. 같은 당 내에서도 하나되지 못합니다. 다양함 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발전이 있는데 다양함 만큼 패를 나누어 싸움만 하고 있습니다. 잘 짜여진 정치가 아닌 것입니다.
4절, 순례자는 4절에서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왜, 전례대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는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입니다.
사실 그들이 일년에 세 차례 지키는 무교절, 맥추절, 장막절은 모두 감사절기입니다. 무교절은 애굽의 종되었던 곳에서 나오게 하신 구원에 대한 감사요, 맥추절은 첫 추수를 하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요, 장막절은 추수 후 창고에 곡식을 저장할 수 있어서 하는 감사인 것입니다.
당시에는 적들이 추수할 때가 되면 침략해 와서 모든 곡식을 빼앗아 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추수를 한다는 것, 곡식을 저장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최고의 감사 제목인 것입니다. 적들로부터 구원에 대한 감사요,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 예물을 가지고 그 먼거리를 이동하여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우리들에게 열매맺게 하심에 감사하고, 마침내 저 천국에 들어감에 감사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감사가 없는 자는 아직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일 것입니다.
모든 여호와의 지파들이 감사하려고 올라온 것입니다.
모든 지파들은 오늘날 남녀노소 인종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전례대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전례는 하나님께서 일 년에 세 번 절기를 지켜 여호와께 보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성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출 23:14,17). 원어는 “에두트” (증거)로 “증거대로, 말씀대로”가 더 적합한 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지킨다고 성전에 올라 갔을 때, 네 땅이 비어 있어도 이방나라들이 탐내지 못하게 하신다고 약속까지 하시며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자칫 번역대로 전례대로 관습대로 성전에 올라가다가 마음에 없는 예배를 드리고 올 수도 있으니 “말씀”에 따라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순례자와 같은 마음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5절, 예루살렘 성에는 다윗 왕가가 다스리는 심판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원어에는 제일 앞에 이유를 나타내는 단어인 “키”가 있습니다. 전례대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심판의 보좌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매년 세 차례 성전에 올라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심판의 이미지는 다윗의 집의 보좌인 것입니다. 다윗 왕가가 다스리는 왕에 의한 심판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예루살렘 성까지 잘 왔는데 갑자기 순례자는 분위기 맞지 않게 심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는 것이 기쁨이 있어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심판을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억지로라도 올라와야 함도 함께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성전에 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다고 오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전례대로, 말씀대로 올라가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감정대로 한다면 기분이 좋으면 교회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안가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에는 율법이라는 법을 따라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갈 4:1-3)
심판의 보좌가 있어 성전에 올라가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올라가라고 했기에 올라가야 하고, 그리고 더 더욱 중요한 것은 그곳에 왕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판 때문에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뵈러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심판을 베푸시기도 하지만 부족한 우리들에게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공의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6절, 이제 순례자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노래하며,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라 노래합니다.
“구하라“는 명령형입니다.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여야 하고 자주 계속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 자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더 나아가 성전이 있는 성읍이므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도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를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미완료이므로 계속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헤브“로서 남녀간의 사랑과 자식 부모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므로 이러한 사랑으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루살렘이 항상 분쟁에 휩싸일 때에는 죄로 인하여 거룩함을 잃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열방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도를 한다면, 이름과 같이 ”살롬“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에게도 형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누가 뭐래도 세상 중앙입니다. 그 중앙의 중심이 예루살렘 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금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침공을 당할 때가 세계의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곡과 마곡의 전쟁시 침략 세력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을 둘러 쌀 것입니다. 이 성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 세력을 다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사탄은 유황 불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 교회공동체가 있는 곳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있는 성이 평안해야 합니다. 그 성의 평안을 구해야 교회가 또한 평안해 집니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 자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그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7절, 순례자는 6절과 같이 예루살렘 성 안의 평안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궁중의 형통을 노래합니다.
궁중에는 왕이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 지도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궁중이 형통하지 않으면 온 나라가 형통하지 못합니다.
예루살렘 성의 평안과 궁중의 형통함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권세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대체로 높은 자들은 교만에 빠지는 죄를 범하기 쉽습니다.
초대왕 사울도 그랬습니다. 남 유다의 많은 왕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들이 잘해야 합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그들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궁중의 형통함을 간구하지 않는 자가 백성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8절, ”네 가운데“를 어떻게 해석하는냐에 따라서 내용이 조금 달라집니다.
다수는 4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지파들로 봅니다. 그러면 순례자는 오늘날 교회인 여호와의 지파를 위하여 평안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네 가운데“를 예루살렘 성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면 곧 그것이 내 형제와 친구인 이스라엘 지파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지파들은 오늘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내 형제와 친구도 오늘날 교회이므로 교회를 위하여 평안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하는 자도 형통할 뿐 아니라 교회도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9절, 8절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예루살렘 성전이지만 오늘날 교회입니다.
여기서도 ”너를“을 하나님의 집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예루살렘 성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래나 저래나 모두 하나님의 집 곧 교회를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7-8절에 “있을지어다”라고 명령을 하는 것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원어적으로는 “네 성안에 평안이, 네 궁중에 형통함이,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말하노니 예루살렘에 복이”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루살렘 성을 위하여 형통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 안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있는 도시를 향해 형통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 안에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순례자가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하나님 계시는 성전을 사모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들을 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기도의 영역도 사랑함의 영역도 순례자와 같이 넒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해야 하듯이 교회가 있는 도시를 위하여 평안을 구하고,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평안을 구하는 우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