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에 있어서 역대 왕들의 원년을 기산(起算)하는 방법을 칭원법(稱元法) 혹은 기년법(紀年法)이라 한다. 여기에는 '즉위칭원법(卽位稱元法)'과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이 있다. 즉, 왕이 죽고 다음 임금이 이어받을 때 한 해가 다 간 12월 31일이면 문제가 전혀 생길 이유가 없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렇지 못하니 골치아픈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즉위하는 임금의 해로 보느냐(즉위칭원법), 아니면 전 왕의 해로 보느냐(유년칭원법) 하는 문제인 것이다.
전 왕의 해로 인정할 경우, 승계하는 임금은 이듬해 1월부터 원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즉위하는 임금의 해로 볼 경우, 즉위하는 그 해를 바로 원년으로 표기해야 한다. 이러한 연대표기 방법을 기년법이라 하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이 동원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조에 보면, "임금이 즉위하여 해를 넘겨서 원년이라 칭하는 것은 그 법이 「춘추(春秋)」에 상세한 것으로, 이는 선왕(先王)이 고치지 못할 법전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유년칭원법이 동양 역사에 있어서 전형적인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삼국사기」의 연표는 즉위 초년을 원년으로 하여 죽은 해까지를 재위기간으로 하고 있다. 이를 '훙년칭원법(薨年稱元法)'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즉위년 초년을 원년으로 하여 죽은 해 전년까지를 재위기간으로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훙년칭원법은 전 왕의 말년과 신 왕의 원년이 중복되는 불편이 있어, 일자를 정하여 전 왕이 죽은 달 내에 신 왕의 원년을 칭하는 '훙월칭원법'과 달로 구분하여 전 왕의 죽은 다음 달부터 신 왕의 원년으로 치는 '유월칭원법'으로 나누기도 한다. 삼국시대에는 보통 죽은 다음 달부터 신 왕의 원년으로 하는 유월칭원법을 했다. 하지만 훙월칭원이나 유월칭원이나 모두 크게 보면 즉위칭원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실제로 사용하던 기년법은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표기하는 즉위칭원법이었다. 이는 현존하는 고려시대 금석문(金石文)이나 기타 기록물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 「고려사(高麗史)」가 편찬되면서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하는 유년칭월법으로 표기됐다. 또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이나 후기에 편찬된 「동사강목(東史綱目)」 등도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여 연대를 계산했던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앞세워 전 왕의 해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朝鮮史)」를 편찬하면서 고려시대 부분을 당시 사용하던 즉위칭원법으로 환원하여 기술했다. 이리하여 고려시대 연대를 계산할 때는 자칫 1년의 착오가 자주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착오가 없도록 학계에서나 연구단체에서 통일하자는 논의가 없었음인지, 각 연구자의 편의에 따라 연대표기를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오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유년칭원법이 조선시대에 적극적으로 애용된 것은 성리학적 명분론 때문이라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다. 임금이 죽고 난 후 바로 다음 임금의 원년으로 하는 것이 명분에 어긋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도 고려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건국한 태조,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 반정에 의해 옹립된 중종과 인조 등은 즉위년을 원년으로 하는 즉위칭원법을 적용시켰다. 이는 전 왕의 치세를 인정하지 않아야 새로 등극한 임금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인정받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사회가 아니어서 매우 관심이 높은 편이다. 직접적으로 문중(門中)이나 자신과 선이 닿는 조상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또 다른 시대에 비해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이 당시 문서나 금석문 등에 남아 있는 연대표기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꽤 많다. 즉, 당시 연대표기는 중국 연호(年號)에다 그 해의 간지(干支)를 쓰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는데, 특히 명나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세조 때 사육신 사건이 일어난 지 240년이나 지난 숙종 임금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들의 묘역이 서울 노량진에 새로 조성되고, 또 그후 정조 때에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진 것이었다. 사육신 묘역은 지금도 노량진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육신 신도비에는 건립할 당시의 연도 표시가 '숭정삼임인(崇禎三壬寅)'으로 새겨져 있는데, 숭정은 1628년부터 1644년까지의 명나라 연호이니, 숭정 3년은 임인년이 아니라 경오년(庚午年, 1630년)이므로 '숭정삼경오(崇禎三庚午)'로 수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민원을 한 시민이 묘역 관리 책임이 있는 동작구청에다 제기한 적이 있다.
숭정이란 명나라 17대 임금인 의종의 연호이다. 의종 다음으로 왕위를 계승한 임금도 있었으나, 이는 청나라의 간섭으로 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따라서 명나라가 실질적으로 망한 것은 의종 때였다. 조선도 호란(胡亂)으로 청나라의 속국이 된 상황이어서 당연히 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외교 혹은 관문서에는 어쩔 수 없이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으나, 민간에서는 오랑캐 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 연호를 계속하여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숭정삼임인'이란 숭정 3년이란 뜻이 아니라 숭정의 연호를 쓴 때부터 계산하여 임인년이 3번째로 돌아온 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숭정 연호를 시작하여 첫번째 임인년을 찾아 60년 후에 돌아온 두번째 임인년, 또 60년 후인 세번째 임인년을 찾아야 맞는 것이다. 이렇게 찾아가면, 서기로 1782년 정조 6년에 세워진 비석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변을 받았던 민원인은 한사코 비석이 잘못되었다고 우겼다고 한다. 그러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문서로 회담을 바란다는 구청의 협조 요청이 있어서 부득이 행정낭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아직도 씁쓸한 생각이 든다. 자기의 생각이 무조건 옳고 남이 하는 이야기를 곧이 듣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 어디에서 시작된 우리의 병폐인지 알 수 는 없지만, 역사 문제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류의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