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와 "멜랑콜리아" 사이에서
다른 잡지에서 계간 비평을 1년 이상 해보니 시보다 해설이 더 튀어서는 안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말이 많은 필자는
과잉의욕으로 시를 빌미 삼아 이런 저런 사설을 늘어놓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시는 묻히고 필자의 지루한 사유만(독자들의
째려보는 눈초리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전개된다. 언급된 시인들이야 자신의 시에 관심을 보여주었으니 꼼꼼하게 읽어보겠지만 바쁜
독자들은 시만 읽어보고 지나간다(많은 잡지들을 읽다보니 나도 그렇다). 이번 호는 제한된 지면에 시 한편이라도 더 소개하고 내
글을 짧게 하는 전략을 써 보기로 한다.
옥수수 곁으로
옥수수 알갱이는 종알거림을 참느라 앙다문 이빨 같다
젖비린내가 난다
아빠 빨리 집에 와 말해놓고 일 년 넘게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한 딸아이의 어린 슬픔처럼
나는 옥수수처럼 그리움에 서걱거렸으나
옥수수에서 연한 살내만 떠올렸을 뿐
울컥울컥 돋는 설움이 도톨도톨 알맹이로 뭉쳐 굳어지도록
(이대흠, 애지 2007.겨울호)
생선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물기가 다 말라 딱딱한데도
지금은 불에 구어지고 있는데도
물고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눈꺼풀 업는 눈.
절대로 눈을 감울 수 없도록
눈꺼풀을 없애버린 눈.
광활한 바닷물이
모두 눈꺼풀이었던 눈.
졸리면 눈뜬장님처럼
저절로 안식眼識이 멀어
잠잘 때도 눈감을 필요가 없던 눈.
이젠 아무 것도 볼 필요가 없는데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눈을 뜨고 있다.
이글이글 익는 눈으로
눈을 태우는 불을 보고 있다.
(김기택, 애지 2007.겨울호)
짧은 시로 시작하는 내 글의 버릇 때문에 많은 시중에서 이대흠과 김기택은 유리한 선택을 당했다. 짧은 시에 많은 메시지를
집어넣는 시의 기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용래와 김소월의 시가 많이 읽히는 이유는 단순히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읽어보면 행간의 메시지가 많다. 현대시들은 메시지의 홍수와 과잉 때문에 독자들의 눈이 떠내려갈 지경이다. 이런 관점에서 위시는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이대흠은 옥수수를 통해 가족이산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김기택은 생선구이의 눈을 통해 삶과 죽음의 시간을
유전하는 존재의 아픔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독자의 시선은 옥수수와 생선구이를 관통해서 작자가 의도하는
메시지의 풍경에 닿아야 한다. 옥수수와 생선구이만 보이면 卽物시가 되겠지만 그런 독자들이 있나?
겨울 숲
모든
유채색들은
나무 결이나 바위틈이나 땅속으로
가서 잠을 잔다.
영원 같은 꿈을 꾸며
장엄한 만다라를 빚는다.
모든 소리들도
나무 결이나 바위틈이나 땅속으로
가서 얼어붙는다.
견고한 정적으로
향기로운 음계를 짓는다.
겨울 숲은
모든 것들을 거두어 가서
저 혼자 은밀히
반역의 역사를 쓴다.
(김종안, 정신과표현 2008.1.2)
차이 Difference
- 들뢰즈를 읽고
1
남과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르게 변하는 것
나와 다른 것을 만나서 내가 다른 것이 되는 것
진정 긍정이란 제 자신 안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
2
'아~'하고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꽃의 만발을 상상하며 수소燧巢를 살고 있다는 매화를 찾아 백양사에 들렀습니다 밤마다
고라니, 대륙사슴, 반달곰, 사향노루에게 경전을 읽어준다는 뜰 앞의 매화나무는 천년을 저녁밥 짓는 속도로 걸어왔는지 온몸이 굴뚝
같습니다 덕지덕지 이끼 낀 묵은 연기를 전지하여 여백을 만들지만 여전히 입정 든 스님처럼 말씀이 없습니다 상춘賞春하는 무성한
사람들은 유채색 그대 위해 노래하지만 나는 가까이 있어도 자꾸 어긋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버리고 새로 만난 종려나무, 먼 나무,
영춘화, 쇠별꽃, 보라보라 제비 꽃, 망촛대, 뚝새풀, 하얗게 웃음 짓는 냉이꽃들과 함께 저무는 이 저녁을 노래합니다 간절하고
지극하게 시 짓고 창하며 소매 떨쳐 춤추는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은 않은 신묘한 밤 인간의 몸과 마음 기억조차 없는 몽중 어느새
나도 무하향無何鄕 그림 속에 들었습니다.
(윤항기, 시로여는 세상 2007.겨울호)
사유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들을 나는 좋아한다. 문제는 상상력으로 끝나는가 '사유의 경험'(다른 사람이 쓴 표현을
가져왔는데 이런 표현이 가능한가? 쓰면서도 자신이 없다)이 보이는가의 차이에 있다. 김종안의 '"겨울 숲"은 '사유의 경험'에
의한 시일까? 윤향기의 "차이 differnece" 앞 부분 三行도 '사유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뒤 부분은 구체적
표현 때문에 '사유의 경험'이라는 매력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수소燧巢와 무하향無何鄕이라는 어려운 말 때문에 讀解에
고전했다, 無何鄕은 알겠는데 봉화燧와 새집巢로 이루어진 고급단어 때문에 사전을 한참 찾아보아야 했다는 사실. 작품을 選하고
후회했다는 사실(농담이다). 김종안의 "겨울 숲"은 간결한 시행에 메시지의 함축을 이루었으나 구체적인 사물의 풍경이 들어와야
하고 윤향기는 "차이"로 들뢰즈의 어려운 생각을 표현했으나 들뢰즈가 숨고 독자가 들뢰즈를 찾아내도록 트릭을 써야 했지 않았을까? 내
생각이다.
남자의 일생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을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이재훈, 시사사 2008.1.2)
바이킹을 타고
귓속에 물소리만 가득했지요
바이-킹을 타면
어둠은 최초의 입, 입 속에서 반짝거리는 별
혜성은 발 아래서 바삭바삭 부서지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풍선 같은 행성을 손에 쥐고
발밑의 지구에게 안녕!
중력을 떠나는 발꿈치에게 안녕!
캄캄했고요
텅 빈 구멍 속으로 물결 이는 듯 몸이 붕 뜨고 있었죠
그러나 눈을 뜨면 어느새
바이킹은 제자리로 돌아와
나를 토해 놓았죠
(박연숙, 시와 정신 2007.겨울호)
어려운 시들만 감상하지 말고 쉬운 시들도 감상해보자. 쉬운 시이면서도 좋은 시가 얼마나 많은가. 이재훈은 "남자의 일생"을
타자인 풀잎의 몸에서 떨어진 애벌레의 생으로 은유했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라는 진술처럼 인생은
'그늘'이라는 유토피아를 찾아 뱃가죽이 뜯어지고 온 몸이 딱딱해지는 고투이다. 고진감래 끝에 脫却을 이룬 나비가(정신 혹은
영혼)가 날아가니 어머니이자 타자인 "풀잎이 몸을 연다"로 마쳤는데 이야기구조가 좋다. 박연숙은 바이킹을 타면서 현실로부터의
한순간의 일탈을 그려냈다. 어둠 역시 타자이고 별과 혜성과 행성이 있는 존재들의 근원인데 "눈을 뜨면 어느새/바이킹은 제자리로
돌아와 나를 토해 놓았죠"로 일탈의 경험은 순간 일뿐 현재로 돌아온 나를 말한다. 이재훈처럼 나비로 날아가 타자와 합일해야 하나.
박연숙처럼 지상으로 다시 돌아와 아찔한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야 하나.
연애편지
구절리에서 아우라지로 가는 레일바이크*를 타고 페달을 밟으면서 알았다 바퀴가 레일 위를 타고 미끄러져 가면서 절커덕 절커덕
소리 나는 걸 레일이 쭉 뻗어가다가 그 길이를 다하고 다시, 연결되기 전 서른이 오기 전에 쓰다가 쓰다가 버린 연애편지 서른
장이 들어간 틈새 위로 바퀴가 지나갈 때 소리가 난다 절커덕 절커덕 거리며
기억의 한편으로 달려갔던 기차가 철로 위를 달릴 때 왜 절커덕 절커덕 거리는 지 레일바이크를 타면서 알았다 틈새를 바퀴가
바느질하듯 다림질하듯 구겨진 연애편지를 다시, 펴면서 지나가는 소리가 절커덕 절커덕 거리며 내 가슴을 두드리며
* 레일바이크 : 철로 위를 달릴 수 있도록 만든 자전거.
(김영탁, 불표문예 2007.겨울호)
달리기
두발로선 대신 뇌가 무거워졌습니다. 수백만 년 전의 대가.
처음엔 삶의 한 풍파를 벗어나기 위해 달렸고, 그 다음엔 저기에 사랑이 있다고 해서 달렸습니다. 신념이나 욕망 같은 것들을 어깨에 얹고 달렸습니다.
곡선주로를 빠져나온 그 어느 날 이것저것 다 빼면 달리기만 남았습니다.
성채를 지을 것 같았던 신념도 내 것이 아니었고, 기름기 잔뜩 밴 욕망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보니 사랑도 없었습니다.
달기기만 남았습니다.
한 사람이 불현듯 자유롭습니다
(허연, 詩로 여는 세상 2007.겨울호)
김영탁은 굴러가고 허연은 달려가는데 전자는 연애의 추억을 후자는 인생을 달려가고 있다. 두 시인 다 체력이 튼튼한가 보다.
김영탁에게 서른 전의 인생이란 매해마다 쓴 연애편지의 연결로 이루어진 추억이다. 이음새마다 걸리는 '절커덕' 소리가 레일바이크를
타고 가는 화자의 가슴을 두드리는 형상을 그려냈다(기차통학생이었나 보다. 내 고교시절 기억에 기차통학생들은 연애사건들이
많았다.) 허연은 뇌가 무거워진 동물인 인간이 문명의 삶을 달려가는 모습을 그려냈다. "사랑","성채를 지을 것 같았던 신념".
"기름기 잔뜩 밴 욕망"의 현실목표를 향했지만 목표는 없어지고 달리기만 남았다고 고백한다. '굴러가면서' 추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달려가면서' 목표로부터 자유로워졌나?. '"남방의 선지식"처럼 순간과 현재에 집중하는 正覺들을 이루었나?
멜랑콜리아
너에게 가는 길에는 연약지반구간이 있었지 흰 스프레이로 윤곽을 완성하기까지 나는 굳기름처럼 슬펐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을 때, 뒤에서 오던 택시의 범퍼가 내 허리로 밀려들어올 때
나는 몇 번째 추간판을 지나고 있었을까? 마지막 달력을 뜯어낸 다음 텅 빈 여백처럼 나는 깨끗했네
옷을 벗고 엑스레이를 찍고 다시 옷을 입었지 계단은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하며 없는 중심을 감아 올라갔네
손을 대면 허리께에 뭉클한 네가 만져졌어 브래지어 자국은 나이테를 흉내 내고 있었네 그래,
중심은 언제나 뭉클했지 따라오던 택시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듯. 할증도 합승도 없이 지워지듯 나를 질러갔듯
(권혁웅,시사사 2008.12월호)
나비표본 상자
화려한 옷들이 진열장에 걸려있다. 나비는 바느질의 달인. 생전에 가봉을 하던 버릇대로 가슴에 시침핀을 꽂고 있다. 덧댄 자국 없는 천의무봉의 솜씨들. 그동안 주름잡은 허공은 몇 필인지?
꽃밭은 원단 도매상, 치수에 밝은 나비는 둘둘 말린 대롱줄자를 꺼내 길이를 잰다. 갖가지 원단은 꽃에서 나온다. 호랑나비
가문은 얼룩무늬, 배추밭이 친정인 노랑나비는 배추고갱이처럼 노랗다. 대대로 한 무늬만 고집한 나비의 계보에 유행은 없다.
옷 한 벌을 짓기 위해 평생을 바친 장인들, 날개옷 한 벌을 완성하고 유리무덤에 갇혔다. 입으면 벗을 수 없는, 아름다운 그 옷이 화근이다.
나비는 죽어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마경덕, 시인시각 2007. 겨울호)
憂愁라, 시들은 다 불행과 憂愁의 시들이지. 밝은 주제도 수면아래 리듬과 운율의 그늘을 깔고 있어야 밝은 주제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지. 표현들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일관했으나 내용은 다 추상들이다. 권혁웅은 너라는 중심에 대해 이야기했으나
너(타자, 연인, 운명 어떤 내용도 대입이 가능하다)는 추상이다. 중심은 택시에 받히는 실존의 위험상황에서야 뭉클하게 만져지는
무엇이고 엑스레이를 찍고 느끼는 노래부르는 계단이 감아 올리는 무엇이다(계단이 노래부른다 라는 표현이 좀 사적인 비약이다).
중심은 일상에서 만져지지 않는 추상이기에 憂愁이다. 마경덕은 "나비표본 상자"라는 아름다운 옷을 말했지만 역시 憂愁이다. 나비가
살아온 시간과 허공을 원단으로 나비라는 몸과 무늬의 옷을 지었지만 박제무덤에 갇힌 모습이기에 憂愁이다. 두 시인들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혹하다. 극도로 절제된 지적계산이 들어간 감정이기에 그렇다. 지적인 풍경의 시선을 즐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뜨거운
심장을 원하는 독자도 있다. 두 가지가 병존하기란 난제인가 보다.
三月, 李賀에게 묻다
그대 꽃다운 몸 홀연 먼 길 떠났으나 혼은 아직도 길 위에 있으매,
벌써 삼월이어서 묻는다.
눈 녹고 바람 녹고 언 길도 녹아
넘치는 술잔마다 질펀하게 흐르는 마음의 천만갈래를 더듬더듬 징검다리 수놓아 건너고자 하였으나
굽이치는 강바닥은 가량없이 깊고 멀구나.
한풍에 젊은 나이를 서둘러 떠나보내고, 떠났으나 떠나지 못한 이승의 꿈 오래오래 머물러
가슴의 불꽃은 재가 되고 뼈는 바위가 되었으니 더러 솔개가 내려 앉기도 하려니와
정수리에 흰 눈 소복 쌓여 청춘에 백발이 되었구나.
생은 본래 남루한 것이어서 부귀도 남루요 빈천도 남루요 취생몽사라도 남루이니,
남루라도 철 일러 가지에 잎은 오지 않고 잎이 오지 않으니 꽃 또한 오지 않고
벌과 나비와 그 밖의 다른 미물들도 오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으니 달빛 넘치는 술잔이 깊이 외로웠으리라.
마음의 신고를 세상 떠돌며 익힌 자조로 남몰래 물레감아 이글대는 심장을 기어이 쥐어짜고야 마는 독한 날들이
벌써 삼월이어서 묻는다.
귀신이 조화를 부려 한낮이 깜깜해지고 황사비를 퍼붓고 번개 치고 우박까지 쏟아 붓는다면
붉은 비단주머니에 시 한 수는 더하여질 것인데
가슴에 품은 절창을 언제 풀어놓을 것인가, 시인이여!
길은 외지고 이승엔 한이 많으니,
(홍순갑, 딩하돌하 2007.겨울)
울음의 진화
포대기에 싸인 너는 울음으로 존재한다 울음소리는 어미에게로만 향한다 한 생명의 뿌리가 동백꽃처럼 빨갛다
한해 두해 팥단자와 떡국을 먹는다 어미젖이면 족했던 네 울음은 귀 뚫린 이 모두 듣고 눈 달린 이 모두 보아라 태풍 만난
우듬지처럼 두손 두발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아기집에서 놀던 손발짓 그대로다 그러나 눈물로 세상의 양수를 다 채울 수는 없다
멈칫멈칫 두리번거린다 토막울음 운다
다시 십수년 너도 사랑을 앓는 나이 섧고도 부끄러워라 자궁처럼 이불 둥글게 말아 눈물 슬어놓는다 스스로 만든 동굴의
눅눅함으로 살집 부풀린다 슬픔도 무게가 있음을 안다 제 어둠을 팔베개하고 등짝으로 운다 땅이 꺼진다는 것을 안다 정확히 세 번
무거운 어깨로 눈물샘 뿜어 올린 뒤 딱 한번 등짝 내려뜨린다 습지도 결국 잦아든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짓는 그늘이 그중 두텁다는
것을 안다
어느덧 너도 손차양 아득한 세월의 어미아비가 된다 손발 고요해진다 어깨를 들먹이지 않는다 눈에 밟히는 살붙이들 반대쪽으로
등 돌려 마른 눈자위 훔친다 이제야 울음은 진화의 꼭지에 다다른다 졸아붙은 눈물샘 대신 콧물이나 훌쩍인다 양수에서 출발한
손짓발짓은 콧물로 마침표를 찍는다 하지만 콧물의 나날은 짧다 시원의 탯줄인 양 쫄쫄거리다 멎는다 이젠 헛기침으로도 끌어올릴 게
없다 기침의 끝자리에 목숨만이 간당거린다
눈물은 드디어 끝장난다 흡(吸)! 눈물의 길마저 거둬들인다 순간 임종을 지키던 피붙이들의 손발과 어깨와 콧구멍이 바빠진다
슬하 남은 것들이 저승으로 떠난 너의 첫 날숨을 울음으로 들여앉힌다 호(呼)! 숨통은 한 통속인 것이다 둥근 우주의 숨길이
그리하여 한 끈으로 이어진다
(이정록, 창비 2007 가을)
눈물로 독자들의 심장에 호소하겠다는 전략의 시들을 골라보았다. 홍순갑은 천재이나 불우했던 李賀에게 시인의 심정을 의탁해
"심장을 기어이 짜고야마는 독한 날"들과 "가슴에 품은 절창"의 한을 풀어놓았다. 표현대로 "붉은 비단주머니에 시 한수"가 더해진
시가 나왔다. 이정록은 사람을 눈물로 대치해서 일생을 그려내었다. 존재와 삶 자체가 눈물이라는 얘기이다 "눈물의 진화"란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눈물에 무슨 목표가 있겠는가 "눈물의 변화"가 맞다. 마지막에 눈물은 우주의 숨길로 회귀하므로 눈물의
영원회귀이다. 감상이지만 감상이 아닌 눈물이야기가 이 시의 장점이다. 왜 눈물바람들이지? 단도직입으로 얘기하면 시인들의 사회적
보상이 낮아서다. 천신만고 애간장을 끓여 시를 생산해보았자 누가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야지. 돈이 되나, 권력이 있나. 명예라도
얻어야 분이 덜할 것인데 삼 만 명 인플레시인사회에서 이름내기도 어렵다. 시인들이여 눈물을 그쳐라. 눈 밝은 사람들이 읽어준다.
자화자찬해서 나 같은 사람이 읽어주고 소개한다.
김백겸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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