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천운영)
다이제스트: 김지영 |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미를 그려 달라 했다. 남자가 가져온 인쇄물은 거미라기보다는 커다란 홍게처럼 보였다. 그가 원하는 건 거미의 털이나 대칭으로 잘 뻗은 다리가 아니다. 남자는, 나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 한다. 바늘집에서 5호 바늘을 꺼내 알코올램프에 달군다. 불꽃 속의 바늘이 거뭇거뭇해지다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소독한 바늘을 내려놓고 소독 솜으로 남자의 허벅지와 내 손을 닦아낸다. 남자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말들을 계속할지도 모른다. 두 번의 작업을 같이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남자는 두려움을 침묵으로 이겨내지 못했다.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남자도 담배를 물고 골리앗 거미를 내려다본다. 남자는 이제 손바닥만한 외피를 얻었다. 그가 손바닥만큼 강인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형사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에서 전화가 왔다. 미륵암 주지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일간 경찰서에 참고인으로 출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미륵암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서 날개치듯 퍼덕거렸다. "김형자 씨가 어머니 맞으시죠? 김형자 씨가 스님을 죽였답니다.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데. 여보세요? 듣고 있습니까? 김봉환을 아십니까? 그 뭐야 법명은 아, 현파, 현파 스님이라고." 내 혀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현파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거센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이루며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낡은 승복조차 복숭아 빛 피부의 스님을 기억해냈다. 전화선이 꼭 불길한 해충이 나오는 통로처럼 느껴져 전화기 코드를 뽑아버렸다. 그러나 나는 곧 냉정해졌다. 구입해야 할 잉크 목록을 만들고 냉장고에 남아있는 생수를 확인한 후 대형마트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 거대한 곡물창고를 방불케 하는 대형마트에는 카트를 밀며 쇼핑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생수 한 묶음과 독한 술 몇 종류를 바구니에 담고 곧장 육류 코너로 향한다. 얼지 않은 삼겹살 부위, 아롱사태 덩어리 채, 살이 제법 붙은 돼지 등뼈 그리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떡심 있는 등심과 스테이크용 안심을 한 팩씩 골라 담는다. 냉장고에서 서늘한 바람이 몰려온다. 다리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하다. 배와 가슴을 따라 급속 냉각되듯 마비 증상이 오고, 결국 두 주먹 불끈 쥐고 드러눕는 간질병.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엄마의 손을 잡고 미륵암을 향해 오르던 비탈길. 새차게 고개를 흔들며 마트에서 빠져나온다, 쇼핑봉투가 제법 무겁다, 걸음이 빨라진다. 빨리 집에 들어가 고기 육질의 맛을 느끼고 싶다.
이중으로 된 승강기 문이 거드름을 피우며 천천히 닫힌다. 두개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누군가의 손이 쑥 들어온다. 왼쪽 다리가 완전히 들어왔을 때 문이 활짝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남자는 등을 돌린 채 가쁜 숨을 내뱉고 있다.
승강기가 움직이지 않는다. 여전히 일 층에 머물러 있다. 짐을 모아 팔 층 버튼을 누른다. 그때 남자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누르고 위태롭던 쇼핑 봉투가 터진다. 몸을 수그려 물건들을 줍는다. 한손으로 물건들을 감싸 안고 몸을 일으킨다.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내 가슴에 올려준다.
승강기 문이 열리고 나는 오른편으로 남자는 왼편으로 방향을 돌려 걷는다. 이쪽 복도 끝이 806호이므로 남자의 집은 801호다. 문득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던 것 같다. 쇼핑한 물건들을 발로 밀어 넣고 문을 닫는다. 바닥에 뒹구는 고기 봉지에서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다. 허기가 진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비닐 포장을 뜯고 들짐승처럼 맨손으로 날고기를 집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오후 두 시. 집을 나와 한강 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길은 두텁고 긴 힘줄처럼 도시 한가운데로 뻗어있다. 스님을 생각하다가 미륵암에서의 새끼 고양이를 생각해낸다.
땔감으로 쓸 나무더미 사이에 이제 막 낳아놓은 새끼고양이를 보게 되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새끼고양이 몸에 손을 댄 순간 어디선가 어미고양이가 나타나 기습을 가했다. 나는 새끼고양이를 들고 뛰었다. 산 아래 공중변소에 몸을 숨겼다. 고양이는 작고 여리고 아름다웠다. 새끼고양이를 변기 속으로 던지기까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구더기가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변기통 속으로 새끼고양이가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 보았다.
전쟁기념관 앞에 서 있다. 입장권을 끊고 기념관 안으로 들어간다. 유리관 속에 무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스님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한다. 나는 복도 귀퉁이에 있는 귀주대첩 기록화에 발목을 붙잡힌다. 바람이 날리는 말갈기는 더없이 부드러워 보였고 죽음을 마주한 병사들조차 무용을 하듯 생기가 있다. 인정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한 건 풍경화가 아니라 원색의 고통과 절규다.
어지럼증이 인다. 버둥거리며 출구를 찾는다. 나는 거인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난쟁이처럼 버둥거리며 전시관을 통과하다가 전쟁체험실로 향한다. 매표원에게 표를 건넨다. 고개를 들어 매표원을 올려다본다. 빳빳하게 다려진 유니폼, 날이 선 카라 사이로 선을 들낸 하얀 목덜미. 801호 남자다. 체험실 안으로 재빨리 들어간다.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둡다. 포성이 울린다. 화약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고함과 비명, 지원을 요청하는 군소리, 작전을 지시하는 상사의 외침이 어둠을 삼킨다. 두터운 귓볼에 뜨뜻한 입김이 느껴진다. 점점 거칠고 빨라진다. 포격이 멎는다. 동시에 숨소리도 멎는다. 빨간 조명이 켜진다. 붉은 방을 두리번거리며 밖으로 나온다. 801호 남자였을까? 코끝에 화약 냄새가 진동한다.
"노환에 의한 자연사로 잠정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심하게 뱉는 문형사의 말은 공복에 피우는 새벽 담배처럼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나는 경찰서 입구 층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 부리를 바라보았다. 미아가 된 것 같다. 간질 발작이 다 나아 미륵암을 떠나 먼지 쌓인 한복집으로 돌아왔다. 미륵암에서의 모든 일을 지운 나와 달리 엄마는 그곳으로 돌아갔다. 스님을 죽인 건 엄마가 아니다. 나는 미륵암으로 발길을 옮긴다. 숲에 둘린 미륵암은 스스로 숲이 된 듯 고요하다. 마당에는 마른 솔잎들이 잔뜩 쌓여 폐가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와 내가 머물던 방으로 들어간다. 엄마가 입었을 옷가지와 이불이 눅눅한 냄새를 풍기며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 가구 하나 없이 휑하다. 창가 위에 놓인 라면 박스 위에 예불 책과 바느질그릇 싸구려 화장품이 놓여있다. 나는 엄마의 침낭과 바늘쌈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김 사장이 어느 날 화투판을 전전했다는 남자 한 명을 데려왔다. (김 사장은 내게 바늘 다루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다.) 김 사장이 데려온 남자의 어깨엔 푸른 닻이 가슴팍엔 커다란 사각형이, 배엔 다섯 개의 직사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직사각형은 오광을 그린 거라며 부적이라 생각한다 말했지만 공허한 몇 가락 선일 뿐이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호랑이와 다섯 개의 직사각형 안에 일, 삼, 팔, 비, 똥 다섯 개의 광을 그려 넣는다. 문신을 마치고 나가는 남자의 어깨가 든든해 보인다.
초인종이 두 번 울린다. 김 사장일 거란 생각에 문을 연다. 801호 남자다. 남자가 들어오도록 길을 비켜준다. 남자가 소파에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는다. 남자는 염탐하기라도 한 듯 나에 대해 읊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강력한 무기를 무엇이든 그려달라 요구한다. 그가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고 보드랍다.
불판 위에 두툼한 쇠고기를 얹는다. 벨이 울린 건 한 쪽 면이 익어 고기를 뒤집을 때였다. 문형사였다. 뜸들이던 문형사는 엄마가 자살했다는 애기를 어렵게 꺼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다. 미륵암에서 가져온 엄마의 침낭과 바늘쌈을 꺼낸다. 엄마가 가장 아끼던 일제 바늘쌈이다. 1호부터 20호까지 금빛 머리를 빛내며 꽂혀 있는 바늘들. 바늘을 뽑아든다. 스무 개의 바늘 모두 끝이 잘려져 있다. 엄마가 일부러 바늘 끝을 잘라낸 것이다. '바늘을 잘게 잘라 매일 마시는 녹즙에 넣으면 내장을 휘돌아다니면서 치명적인 상처를 내. 그리고 아무런 외상없이 죽음을 부르지.' 엄마의 생생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있다.
그는 매일 저녁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벨을 누르지 않아도 그가 나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 주었다. 이제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Copyrightⓒ 유용선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