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 김덕령과 용안김씨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그는 광주시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광산김씨 습독공 김붕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 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하루아침에 6천여 명의 의병이 모집되어 사기가 충천했다. 조정에서는 김덕령에게 익호장군(翼虎將軍)과 충용군(忠勇軍)이라는 군호(軍號)를 내리고 형조좌랑에 제수했다.
1594년(선조 28) 의병 6천여 명을 거느리고 호남, 영남, 거제도, 등지에서 신출귀몰하는 계략으로 왜적을 무찔렀고 전략노선도 발표했다. 영, 호남지방과 동해와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쳐 들어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놀란 왜장 가등청정은 몰래 화가를 시켜 장군의 초상을 들여다보고 “참으로 장군이다”라고 경탄했다. 그리고 소진(小陣)을 철수하고 대진(大陣)으로 구축해 놓고 감히 도전해오지 못했다.
김덕령은 이때 승병 팔도 도대장인 사명대사 유정(惟政)에게 격려편지를 보냈다. 또 왜적 2백여 명이 고성지방에 침입하여 남녀 50여 명을 생포해 가는 것을 그는 복병을 배치하여 모두 무사히 구출했다.
선조는 장군에게 김덕령에게 호피립(狐皮笠), 이엄(耳掩:관복을 입을 때 사모 밑에 쓰던 모피로 만든 방한구) 등을 하사했다. 1594년(선조 28)에는 이순신 장군과 거제도에서 수륙연합작전을 전개하여 왜적들을 무질렀다. 이듬해에는 곽재우와 협력하여 의령, 정암 등지에서 합동기습작전으로 왜적을 크게 섬멸했다. 그 뒤에도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다.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6년(선조30)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복을 장살(杖殺)하여 한때 체포되었다.
그러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는 대신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 해 7월 이몽학(李夢鶴)의 모반을 토벌하러 출정했다가 이미 진압이 되는 바람에 회군했다. 당시 김덕령은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서울에 압송된다.
그는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대신들 간에도 찬반양론이 분분했다. 결국 6차례의 엄형을 당한 끝에 옥중에서‘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을 남기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옥사(獄死)했다.
1661년(현종 3)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5)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 되었다. 그 이듬해에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고 벽진서원에 의렬사(義烈祠)로 사액(賜額)하였다. 묘소는 광주시 충효동 이치에 있다.
1712년(숙종 39)에는 김덕령 장군의 봉사손 수신(守信)을 음직으로 녹용하여 벼슬이 별검에 이르렀다. 1788년(정조 13)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가 내리고 이듬해 좌찬성에 추가 증직되었다. 김덕령 장군이 옥사하기 전에 지은‘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은 다음과 같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에 대한 이야기는‘연려실기술’‘동야휘집’‘풍암집화’‘대동기문’등에 전한다.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김덕령 설화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김덕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인물전설이다.
김덕령 장군의 뛰어난 용력에 대한 일화나 억울한 죽음에 관한 내용은 문헌이나 구전자료 모두 일치한다.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문헌보다는 구전설화 쪽이 보다 다채롭고 풍부하다.
구전과 문헌자료를 종합하여 김덕령 설화를 정리하면 출생, 용력 발휘 및 공을 세움, 억울한 죽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출생과정은 풍수설과 관련되어 있다. 김덕령의 비범성은 명당의 기운에서 비롯된다.
중국 지사가 보아 둔 땅을 김덕령의 부모가 몰래 조상의 묘지로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쓰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구전설화에만 나타난다.
실제로 김덕령의 용력은 대단했다. 손으로 호랑이를 잡거나 거친 말을 길들이고, 백 근의 철퇴를 양 허리에 차고 다녔다. 왜장은 김덕령의 화상(怜像)만 보고도 두려워서 군대를 철수했다. 이는 구전과 문헌에 모두 나타난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부친의 복상을 입게 되어 어머니의 만류로 출전할 수 없었다.
답답하여 싸움구경을 나갔다가 왜장의 진중에 들어가 도술로써 그들을 두렵게 하여 물러나게 한다. 이 과정에서 김덕령은 충과 효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경험한다. 이 부분은 구전설화에 나타난다.
문헌에서는 김덕령의 죽음을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 행적과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구전설화는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덕령은 용력이 있으면서도 출전하지 않았다고 하여 나라에서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으나 죽일 수가 없었다. 이 때 김덕령이 “나를 죽이려면 ‘만고충신 효자 김덕령’이란 비를 써 달라.”고 요구했다. 그대로 하자, “내 다리 아래의 비늘을 뜯고 그곳을 세 번 때리면 죽는다.”고 알려 주어 죽음을 당했다. 죽은 뒤 비문의 글자를 지우려고 해도 더욱 또렷해지자 그냥 두었다고 한다.
지난 1975년에 후손들이 김덕령 장군을 기리기 위해 무등산에 충장사지난 1974년 4월 정부에서는 장군의 묘 아래에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하여 성역화 하였다. 사우 배치는 본당인 충장사와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충장공의 수의와 관을 보관하고 있는 유물관, 동재, 서재, 은륜비각 등도 있다. 150여 평의 연못과 관리사무소 등이 한국고유의 전통양식과 정감을 살려 장엄하게 조성되어 있다. 광주시의 지정문화재 자료인 풍암정은 충장공 김덕령의 아우 덕보(金德普·1571~1627)가 세운 정자다.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시는 광주의 가장 번화가를 충장로라 이름 짓고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충장로는 광주 중심지의 상징도로다. 충장로 입구부터 광주일고를 지나 경열로에 연결되는 도로를 충장로로 부르고 있다.
한편 용안김씨(龍安金氏)의 시조는 바로 김덕령이다. 용안김씨족보(무오보.戌午譜)에 의하면 김덕령은 광산김씨 분관조(分貫祖) 김흥광(金興光)의 31세손이다. 따라서 용안김씨는 광산김씨에서 갈라진 지파다.
김덕령이 시조라는 사실이 확증된 것은 신라김씨 대종사(大宗史)와 양주김씨(陽州金氏)의 족보에 의해 밝혀졌다. 그 이전에는 김덕령의 후손임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덕령이 무고로 옥사하자 그의 부인 정경부인 이씨(貞敬夫人李氏)도 백척 벼랑에서 투신하여 자결했다. 홀로 남은 아들 김광옥(金光沃)은 전북 익산군 용안면에 피신, 본관을 용안으로 하여 신분을 감추고 살았다.
그 뒤 외숙 만송당(萬松堂) 이인경(李寅卿)의 임지인 평안도 숙천군 근처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란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이 그의 제2의 고향이고 후손들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용안김씨는 해방 당시까지 평남 안주군 운곡면 일대에 15대까지 번창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 분단으로 인해 소수의 후손들이 월남하여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실정이다.
용안은 전북 익산시 용안면의 지명이다. 원래 함열현이었으나 고려 충숙왕 때 용안현으로 고쳤다. 1914년 익산군 용안면이 되었다.
용안김씨는 조선시대에 김익수(金益秀, 1788 戊申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16년(1816) 식년시 일등(一等) 장원급제, 김응간(金應簡, 1792 壬子生) : 사마시(司馬試) 철종12년(1861) 식년시 삼등(三等) 등 모두 2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족보는 1978년도에 간행된 무오보(戌午譜)가 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용안김씨는 1985년에는 총 50가구 244명, 2000년에는 총 159가구 50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정복규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