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이먼드 카버?
얼마 전 김중혁 산문을 읽던 중 ‘레이먼드 카버’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왠지 이름은 친숙했지만(작가라기보다는 영화계 인물처럼 느껴지는 이름이랄까) 접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김중혁씨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다보니 자연스레 그가 언급한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 것이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별 검증도 없이 세 권의 책을 사버렸다)
책 표지에 써있는 약력을 잠깐 살펴보자.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1980년대에 미국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를 주도하였으며,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대가’ ‘체호프의 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불린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오는데 글쎄…… 미국문학에 별로 관심이 없고, 헤밍웨이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모르고, 체호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나로서는 ‘글쎄’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읽고 얘기할 수밖에.
2. <당신, 의사세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아놀드 브레이트’이다. 어디 가서 자기 이름을 댈 일도 별로 없을 이 남자가 하는 일은 낮 시간을 어찌어찌 소일하다가 밤이 되면 출장 나간 부인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부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하고 빨리 전화를 끓으려고 하는데(부인 전화를 놓치면 안 되므로) 여자는 어물거리며 자꾸 질문을 하고 아놀드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불편하던 아놀드는 차츰 이 통화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급기야는(!) 자신을 한 번 찾아와 달라는 여자의 요구(그것도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이 여자가 미모의 여성이라든가, 전에 만난 인연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극적인 요소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미리 말하자면 이 여자의 정체는 끝까지 알 수 없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내 보기엔 아주 시시했으며 여자는 아놀드보다 젊다는 것을 빼고는 볼품없어 보였다. 횡설수설 이어지는 여자의 대사 속에서 “당신, 의사에요?”라는 말이 튀어나오지만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을 뿐 중요하게 들리진 않았다. 브레드는 그저 ‘아니오’라고 대답했으니까. 절망적이게도(?) 이 시시한 만남 속에서 두 사람은 입맞춤을 하고 여자는 ‘날 잊으면 안 돼요’라는 역시나 맥락 없는 대사를 하면서 또 와달라고 한다.
부인의 전화를 받는 것이 임무인 이 남자는 외출에서 돌아와서는 벨이 울리자 그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는다. 감 잡으셨는지?
한 참 후에 다시 벨이 울리자 이번에는 전화를 받는데 그 첫 마디가 의미심장하다. “아놀드, 아놀드 브레이트입니다.”
3.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남자 주인공 랠프는 대학 시절 만난 매력적인 여인 매리언과 결혼해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매리언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두 아이는 사랑스러웠으니까. 다만,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그 부인이 외도했다는 ‘믿음’이 문제였다.
삼(사)년 전의 일이었지만 랠프는 그 생각을 잊지 못했고, 사실은 꽤 자주 생각이 났다. 그 날은 다른 부부들과 모임을 갖는 날이었는데 매리언은 취한 상태로 에밀리의 남편인 미첼과 술을 사러 나가서 세 시간동안이나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매리언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랠프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밤, 랠프가 또 그날에 대해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매리언이 불쑥 그 사건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이때다 싶은 랠프는 ‘쿨한 척’ 오래전 얘긴데 어떠냐며 그날의 대해 얘기해 보라고 거칠게 다그친다. 금발은 멍청하다, 라는 서양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매리언(금발인지는 모르겠으나)은 멍청하게도 그날에 대해 다 털어놓고야 만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던 그녀는 사실은 키스를 했었다고, 사실은 차에서......!
랠프는 쿨함을 집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내 격하게 흥분해서는 늦은 밤 집을 뛰쳐나와 술집을 전전하며 방황한다. 그는 대범(?)하게 술집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오늘 밤 부인의 외도를 알게 되었다는 말을 뇌까리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군다.
아침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 랠프, 그에 얼굴은 맞은 흉터가 역력하다. (남자가 여자건 어두운 골목을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법이다) 아이들이 놀라서 수선을 피우자 잠에서 깬 매리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이때 랠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시크하게 한 마디를 내뱉는 것이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4.레이먼드 카버!
이 책은 분명 내가 즐겨 읽던 소설들(장편이든 단편이든)과 ‘다르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다. 작가마다 개성이 다른 수준이 아니다. 전에 읽던 소설들이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결코 상업영화를 폄하하는 게 아니다)였다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독립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딱 한번 서울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 단편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받은 묘한 감흥을 이 책을 읽으면서도 받았다.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하는 뚜렷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호기심이 증폭되는 시점에서 맥없이 끝나기 일쑤다.
그럼에도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책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 이야기가 드라마적 요소라는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과 흡사해서가 아닐까 싶다. 예컨대 보통의 문학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지나치게 말을 잘 한다. 인물들의 대화는 매끄럽고 문장은 가지런하다. 그들의 대화는 좀처럼 삼천포로 빠지지 않는다. 실제 사람들의 대화는 이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우리는 상대방의 의도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흐름에서 엇나간 말대답을 하기도 하고 거기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파생되는데도 어색하지 않은 냥 지나가곤 한다. 레이먼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런 방식으로 대화한다. 때론 상황과 맞지 않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던지고 갑자기 짜증난다고 말하기도 한다. 처음엔 이 인물들이 비정상적으로 다가오지만 이내 깨달을 것이다, 우리의 실제 대화가 이렇다는 것을.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며 인생의 비밀에 다가가기를 기대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건 인생에 대한 거대한 물음이 아니라 설명하기 어려운 유치하고 사사로운 감정들이다. 레이먼드는 작품 속에는 이렇듯 ‘사건’이라 부르기엔 민망하지만 우리의 감정을 들었다 놓는 일상의 불편한 시빗거리가 드러난다. 작가가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들을 관찰하고 살폈을지 생각해보면 약간 거북스럽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먼저 발가벗지 않았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으리라.
짧게 펼쳐지는 22편의 이야기들 속의 인물들은 그저 우리를 스쳐지나갈 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제한된 시간 속에서 제한된 이야기만을 전달할 수 있듯이 이들 역시 우리에게 짧은 분량에 해당하는 짤막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지나간다.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말이다. 우리가 꾸준히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서로의 다음이 어떨지 짐작할 수 없는, 바로 그것처럼.
첫댓글 레이먼드 카버라는 작가를 소개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다 보니 좀 길어졌어요. 말랑말랑하고 훈훈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아니다보니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박찬욱 감독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그의 영화가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을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보고 나면 왠지 모를 불편한 느낌까지도 비슷해요. ^^
근래 알게 된 작가 중 가장 신선한 작가임은 틀림없네요. 리얼리즘 소설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아..식곤증으로 인해 주옥같은 빅피쉬님의 감상문이 읽혀지지가 않아요. 이따가 집에가서 집중해서 읽을래요..
아웅 졸려라.. 밥을 너무 많이 먹었.... ㅠ_ㅠ
음... 잘 읽었어. ^^
그러니까... 나도 그런걸 느낄 때가 많아..
말이란 수단을 사용함과 동시에 내 의도가 빗나가게 이해되고 있다고 ㅠ.ㅠ
각이 조금 빗나가게 이해되면 시간이 흐르면 꽤 커지잖아. ㅋㅋ
뭐 그렇다고 ㅋㅋㅋ
그래도 계속 시도해봐야겠지
내 언어가 너라는 별에 가 닿기를.
그렇다고 ㅎㅎ ^^
듣고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
그렇네요 ㅍㅎㅎ
매력적인 작가네요...
이 글만 봐도 벌써 단편영화 두 편 본 것 같아요.
뻔한 결과가 아니라 약간은 허무한 맺음...
그래서 뭔가 찜찜하지만 그게 바로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버리는...
여러 작품을 읽었는데 사실 '아!'하고 다가오는 작품은 많지 않았어요. 무슨 얘기지? 하는게 대부분 ^^;;
그런데 확실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작가인 것 같아요.
지금은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구나' 하면서 책을 읽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