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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개항에서부터 1910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우리 민족운동의 과제는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안으로는 조선왕조의 전제주의체제를 무너뜨리고 국민주권이 실현된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자주적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당시의 민족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전쟁, 독립협회운동, 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초기 의병전쟁은 봉건 유생층과 갑오농민전쟁의 잔여 농민군 세력이 일으킨 반외세 운동으로 출발했다. 제1단계 의병은 을미의병으로 위정척사운동을 계승한 유생들이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으켰다가 아관파천으로 해산했다. 이 시기에는 제천의 유인석 부대, 춘천의 이소응 부대, 선산의 허위 부대등이 유명했다. 이들 부대는 유생들이 지휘부를 이루어 유교적 근왕주의에 입각하여 존왕양이를 내세웠다. 따라서 이들은 국왕이 회유조칙을 내리자 모두 해산했다. 반면, 갑오농민전쟁의 반외세 반봉건노선을 계승한 농민층의 항쟁은 계속되어, 제주도에서는 ‘방성칠의 난‘이 일어나고 활빈당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유인석이 충주성에서 싸울 무렵, 강동 지역이 속했던 경기도 광주를 비롯한 여주, 이천 등지의 경기지역 의병부대는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일전을 수행했다. 단발령이 발포된 직후, 조성학, 구연영 등이 군사를 모아 이천에서 정식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했는데, 민승천이 창의대장이었고, 조성학이 도총을 맡았다. 1896년 1월 18일 일본군 수비대가 쳐들어오자 매복작전으로 격퇴했는데, 패주하는 적을 광주군 장항 장터까지 추격하여 무기와 군량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의병부대는 광주, 이천 등지를 거점으로 이현, 원산, 여주, 양지 등지를 엄중 경계했다.
2월 13일 이현에서 적군의 급습을 받은 의병부대는 타격을 입고 흩어졌으나, 곧 수습하여 2월25일 다시 이현으로 모였다. 김하례가 주동이 되었던 광주지역 의병부대는 광주군수 박기인을 처단하고 이현으로 왔다. 이때 이현에 모인 연합병력은 2천 명을 헤아렸는데, 지휘부도 재편성하여 박준영이 대장이 되었고 김하락이 군사 겸 지휘를 맡았다. 한층 정비된 의병부대는 2월28일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이동해 새로운 주둔지로 삼았다. 남한산성은 서울의 동태를 한눈에 살필 수 있고 저장된 무기와 지형 등 장기전에 대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에 친일정권은 관군을 출동시켜 성을 포위하고 여러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 좌익장 김귀성이 관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관군측은 그에게 수원 유수를, 의병진 대장 박준영에게는 광주 유수를 약속하며 간계를 썼는데, 포로가 된 김귀성이 성 안의 박준영과 내통하였다. 박준영이 군사들을 술로 곯아떨어지게 한 다음 성문을 열어 놓아, 마침내 남한산성은 함락하게 되었다. 구연영 등 의병 간부들은 일단 영남지방으로 가서 의병을 재소집하기로 하고, 3월 27일 잔여병력 9대를 거느리고 영남 쪽으로 이동하였다.
제2단계 의병은 을사의병으로 제1차 의병세력과 농민항쟁세력이 결합하여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원주의 원용팔 부대, 충청도 홍주의 민종식 부대, 전라도 태인의 최익현 부대, 경상도 영천의 정용기 부대 등이 유명했는데 영해에는 평민출신으로 의병장이 된 신돌석이 이끄는 부대가 있었다.
제3단계 의병은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해산군인과 제2단계 의병세력이 결합하여 일어났는데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 해산군인의 합세로 크게 병력이 강화된 의병부대들은 서울 진격을 위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인영을 13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여 약 1만명의 병력이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이전의 단계가 양반유생 출신 의병장을 중심으로 고립 분산적으로 싸웠고 그 성격도 근왕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이 시기에는 평민 출신 의병장이 많이 등장했고 또 합동작전을 펴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그 성격도 근왕적 한계를 벗어나 항일과 반봉건투쟁의 측면이 뚜렷해져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주였다.
이 무렵 광주 지방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이익삼 부대, 서가 부대, 윤전 부대, 임문순 부대, 권동설 부대, 성주사 부대, 고재석 부대, 이근풍 부대 등이었다. 1908년 1월 7일 의병 약 20명이 광주 동남방 경안면에서 교전하였고, 1908년 6월 27일 의병 약 20명이 광주 남방 20리 지점에서 교전하였다. 이 당시 광주지방의 의병은 대부대가 아니라 20여명 단위의 소부대 단위로 활동했는데, 게릴라전에 용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시대의 본격적인 민족해방운동은 3·1 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합방’후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국내에 남아있던 애국계몽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이로 인해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타격을 입고 기회를 기다리다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되자 이를 하나의 기회로 이용했다.
‘합방’후 10년 동안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으로 타격을 입었고, 민족 자본가 층도 회사령으로 타격을 입었다. 노동자 역시 낮은 임금과 긴 노동시간, 비인간적 대우, 민족적 차별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처럼 사회구성원 각계각층은 식민통치의 피해를 입으면서 정치의식을 높여갔다. 여기에 일부 학생, 종교인, 지식인들이 불을 지르면서 3·1운동은 전 민족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조선 독립을 선언하며 운동을 촉발시켰지만, 이들의 역할은 대중운동을 현장에서 지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이후 청년, 학생, 교사 등 지식인과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2일 서울에서는 노동자 400여명이 만세 시위를 했고, 22일에는 남대문 부근에서 노동자 800명이 ‘노동자 대회’의 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이후 운동은 도시로부터 전국의 각 농촌지방으로 확산되어 전국의 시골장터에서는 거의 1년 반 동안이나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민족대표’들은 최고 3년형을 받았지만 일제의 회유정책으로 형기 전에 모두 풀려났다. 하지만, 약2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위 참가자들 중 7,500여 명이 피살되었고, 4만 6천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약 1만 6천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715호의 민가와 49개의 교회와 학교가 불탔다.
3·1운동은 항일운동이면서 대내적으로는 공화주의 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의 결실로 수립된 임시정부들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였다. 또한 이 운동은 무장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중운동을 고양하고 국내 사회주의 운동이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동 지역이 속한 경기도 광주군 역시 3월 중순부터 4월 상순에 걸쳐 각 면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광주군의 첫 만세 시위는 3월 12일 이병승과 문홍규의 주동으로 실촌면에서 일어났다. 이병승이 실촌면 사무소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일대를 진동하였다. 실촌면장 구연복 도 문홍규의 권유로 참여하여 관민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군중들이 곤지암으로 향하는 도중 헌병들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병승은 강원도 방면으로 피신하였고, 문홍규는 체포되어 6개월간 미결수로 있다가 태형을 받고 방면되었다.
3월 19일에는 경안면에서 약 1천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명이 사망하고 5명이 상해를 입었으며 77명이 검거되었다. 중대면 송파리에 거주하는 장덕균과 김현준은 3월 21일 독립선언문을 등하하여 송파리 주민들에게 배부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3월 26일에는 중대면 송파리와 수서리를 중심으로 약 600여명이 천중선의 인솔 하에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13명이 검거되었다. 같은 날 동부면에서도 이대헌등 수십 명이 시위하였으며 1명이 피검되었다. 이어 이대헌은 27일 30여 명을 인솔하고 동부면사무소 앞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 같은 날 동부면 망월리 구장 김교영도 9명을 인솔하고 민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동부면의 만세시위는 500여명의 주민이 합류하면서 크게 확대되었는데, 14명이 피검되었다. 또한 이 날 오포면에서는 정제화외 40여명이, 경안면에서는 수 천명이, 언주면에서는 수 백명이, 중대면에서는윤도길등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날 서부면 감일리에 사는 구의서는 40여 명과 함께 서부면사무소 앞에서 출발해 상일리 헌병주재소 앞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5일장이 열리는 장터를 이용해 운집한 주민들이 만세를 불렀던 다른 지역과 달리, 강동 지역에는 5일장이 없었기 때문에 만세를 부르기 위해 사발통문으로 날짜를 정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 당시 강동지역의 유일한 상업지역은 상일리였다. 따라서 일제는 순사주재소를 상일리에 두고 구천면, 동부면, 서부면 3개 면을 관할했다. 상일리는 이 3개 면이 접해 있는 중심지여서, 이 3개 면의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구천면의 만세시위운동은 구천면·동부면서부면의 3개 면민이 집결하여 전개한 대규모의 시위운동이었다. 구천면 내의 만세시위는 3월 27일 면의 서남단인 길리에서 발단되어 면의 동북단인 상일리로 발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날 오전 길리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어 면내 지역을 순회하며 시위하는 동안 명일리와 암사리 등지를 거치면서 시위 군중의 수는 500여명으로 증가되었고, 저녁 무렵에는 헌병 주재소가 있는 상일리로 집결하였다.
이 곳에서 각각 면내 지역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단 해산한 후 다시 이 곳까지 이동해 온 서부면·동부면의 면민들과 합세해, 1,000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 군중은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하였고 군중 1,00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헌병주재소 안으로 몸싸움을 하며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에 진압 헌병 측에서는 강력히 대응하여 밀고 밀리는 형세가 한동안 전개되었다.
이런 가운데 주재소 부근 대여섯 군데 높은 지역까지 군중들이 운집하여 주재소를 완전히 포위하게 되었으며, 군중들은 돌을 던지면서 쇄도하였다. 이에 진압 헌병은 무차별로 총을 쏘아,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시위군중도 해산하게 되었다.
그 때 마나세시위의 선봉에 선 사람은 김경배였는데, 만세를 외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함성소리에 놀란 일제 경찰이 총을 들이대 쏘아버렸다. 총알은 관통되어 김경배는 쓰러졌고, 군중들은 흩어졌다. 시위에 앞장섰던 김경배는 이후 ‘만세참봉’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다가, 1949년 80세의 고령으로 죽었다. 8·15 해방후 매년 3·1절에 상일 초등학교에서 연설을 하던 김경배의 회고에 의하면,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사흘째 되던 날 상일리에서 거사를 모의했다고 한다.
3·1운동에 대한 폭압적 탄압과 함께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했는데 강동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명일리에 가서는 키 큰 체 하지 마라는 말이 있었다. 명일리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큰 편이었고 승상산(丞相山:일명 聖三峰)에서 장차 큰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일제는 쇠말뚝을 박고 산 이름을 수상산(水相山)으로 바꾸어 버렸다. 또 명일리에서 서부면으로 넘어가는 곳에 옴메기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에서 용마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 구덩이에서는 언제나 찬물이 솟아서 나무꾼들이 옻에 오르면 이 물로 깨끗이 낫게 하였다고 한다. 이 역시 일제는 산허리를 끊어버리고 옴메기 구덩이를 메꾸어 버렸다. 그러나 1923년 구천보통학교(지금의 상일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최문찬 교장은 학교 울타리에 무궁화나무를 심고 가꾸어 제자들에게 무언으로 우리의 얼을 심어 주었다.
일제강점시대에는 1914년, 1920년, 1925년에 세 번의 큰 홍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1925년 을축년의 홍수는 미증유의 사태였다. 이 때의 홍수는 7월 9일 ~ 12일, 15일 ~ 19일 두 번에 걸쳐 연이어 발생했다.
1차 홍수 때는 6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9일 ~ 11일 사이에 폭우가 쏟아졌다.
6일부터 11일까지 내린 비의 양을 보면, 북한강 유역에서는 가평이 352㎜로 최고를 기록하였고 회양이 181.3㎜로 최저였다. 한강 본류 및 남한강 유역에서는 경성이 387.3㎜로 최고를 기록했고 영월이 126.5㎜로 최저였다. 이때 강동 지역이 속한 광주는 313.2㎜를 기록했는데 특히 비가 많이 내린 지역 중 하나였다.
1차 홍수 때인 12일 한강 수위는 욱천양수표(旭川量水標)에서 이미 11.78m에 달해 1920년 홍수 때의 최고수위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서울을 비롯해 고양, 김포 등지가 물에 잠겼는데, 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1차 홍수 때 불어난 물이 채 빠지기도 전인 15일부터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여 16일에서 18일 사이에 집중호우가 있었다. 2차 홍수 때는 북한강 유역에 특히 비가 많이 내렸는데, 15일부터 18일 사이의 강우량을 보면 양구가 519.4㎜로 최고를 기록했고 최저인 회양도 312.8㎜나 되었다. 한강 본류 및 남한강 유역에서는 의정부가 443.5㎜로 최고였고 단양이 170.3㎜로 최저였다.
이 때는 아직 저수댐이 하나도 없는 실정이어서 한강 상류인 북한강 및 남한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내린 비는 곧바로 한강 본류로 흘러들었다. 한강 제방은 1920년 홍수 때의 최고 수위인 11.78m(욱천양수표 기준)를 참작하여 13.2m로 만들었는데, 2차 홍수 때는 13.86m여서 한강제방을 범람하였다. 양수리에서 행주산성에 이르는 한강 연안 전 지역에서 범람이 있었는데, 뚝섬 일대, 용산 지역, 마포, 서강, 여의도, 영등포, 왕십리 일대의 가옥이 전멸되었다. 전차의 운행이 중지되고 철도의 모든 선로가 운행할 수 없었으며 통신과 우편이 두절되었다.
이때 강동 지역 역시 피해가 컸다. 구천면 풍납리는 피해가 막심하여 전 부락이 유실되어 그 흔적도 남지 않았다고 한 당시의 기록은 그 참상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풍납동에서 왕십리까지 배로 다녀야 할 만큼 피해가 컸는데, 옹기를 굽던 200채의 가마와 집 등이 모두 물에 잠겼다. 신천·잠실 등 송파 지역 역시 전 부락이 유실되었는데, 이때의 홍수로 한강의 흐름이 바뀌어 송파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버리고 현재 송파동으로 되어 있는 가락동 지역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1876년 개항이후 외국 자본주의 세력의 침투가 본격화되자 토착자본도 여러 가지 형태로 대응해 갔다. 먼저, 갑오개혁 때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됨으로써 특권성이 없어진 서울의 시전상인들은 황국중앙총상회를 조직하여(1898), 외국 상권을 제한하고 자기들의 상권을 보호하려 했다. 이들은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에 동조하여 철시(撤市)를 단행하기도 하면서 상권수호운동을 적극적으로 펴나갔으나, 독립협회와 함께 정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일본인들이 증기선으로 세곡(稅穀)운반을 독점함으로써 타격을 받게 된 경강상인 중 일부는 기선을 구입하여 이에 대응하기도 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미곡 유통업에서는 ‘을사조약’전까지는 상권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개성상인들도 서울 이북지방에서는 계속 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객주와 여각들은 개항 초기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1890년대 이후 외국 상인들의 내륙행상이 본격화되면서 개항장 객주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항 후의 상권 변화는 종래의 유통체계에 변화를 초래했다. 조선 후기부터 성행했던 송파장은 1876년 개항 이후 일시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갑오개혁으로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자, 시전상인과 사상도고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송파시장의 존재가치가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철도나 선박 같은 새로운 근대적 교통시설이 도입됨으로써 종래 교통중심지에 위치했던 송파시장의 상권이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일제강점시대로 접어들면서 송파시장은 공설시장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으나 일반 시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특색이 있다면 우시장이 있었다는 점이었는데, 경기도 내의 15개 우시장 중에서 4,5위를 점할 정도로 거래가 성했다. 그러나 1925년 대홍수로 송파부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 주민들이 가락동으로 이주하게 된 데다가, 1929년에는 동대문 밖 숭인동에 도수장(도수장)이 설치되면서 우시장 역할도 병행하게 됨에 따라 송파장의 우시장은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구천면 지역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됨으로써 송파장의 쇠락은 가속화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유지 조항년 외 16명은 암사리에 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오던 중 1925년 가을 경에는 개시일까지 잡았으나, 송파시장의 유지 및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부득이 중지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구천면에 새 시장이 생기면 송파시장의 존속여부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양측이 대립하던 중 1927년 봄에는 구천판매장합자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여 경성부 당국에 인가 신청을 냈다.
이 회사의 최초 목적은 시장을 유치하는 것이었지만, 송파 주민의 반대로 여의치 못하자 발기자들은 회사 명칭으로 12일 개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중대면의 송파 주민들은 송파 시장이 폐지가 될까 우려하여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1927년 11월 26일 오후 7시 송파 주민들은 송파리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21일 11시 송파구장 강윤성과 송파청년회장 김동식을 필두로 하여 리민대회에서 선출된 위원7, 8명 외에 30여명이 구천판매장에 난입하여 매매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의하면, 구천판매장합자회사는 설립일이 1927년 9월 27로 되어 있으며, 주소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암사리 528-2이다. 자본금은 20,000원이며, 해산물을 구입하여 위탁판매하고 운송하는 것이 이 회사의 주 업무이다. 사장은 조항년이며 사원으로는 유희민, 서상철, 산본매길(山本梅吉), 유병찬 외 11명이다.
시장의 발전은 그 지역의 인구수와도 연관되는데, 1925년에는 구천면, 중대면, 언주면, 대왕면 4개 면 중에서 제일 인구가 작았던 구천면이 빠르게 성장하여 1944년에는 언주면을 제외한 3개 면의 인구가 거의 비슷하게 되었다.
8·15이전까지 구천면에서 인구가 제일 많았던 곳은 암사리였고 그 다음이 성내리였다. 그래서 국민학교 운동회 때 마을대항 줄다리기나 모래가마니 메고 뛰기를 할 때면 언제나 서로 맞수가 되었다.
※ 자료발췌 : 강동구지 (江東區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