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유혹 - 5 (Eva Heller 지음. 예담)
검정은 젊은이가 좋아하고, 나이가 들수록 싫어한다. 유럽에서 검정은 종말이다. 부패한 고기, 썩은 나무, 어두움과 침묵의 끝이 검정이다. 기독교에서 검정은 죽음에 대한 슬픔, 회색은 최후의 심판, 흰색은 부활이다. 죽음을 애도하는 자 검은상복을 입고 죽음을 맞은 자 하얀수의를 입어 부활을 꿈꾼다. 동양의 죽음은 하얗다. 상복도 수의도 무명끈도, 매장장의 회도, 화장한 재도 햐얗다. 동양의 흰색은 빛보다는 색의 부재(不在)다. 동양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망각이다. 검은 시체에서 유기체가 사라지면 백골(白骨)이 남는다. 세상의 처음이 햐얗듯 모든 종말도 하양이다. 동양의 생사(生死)는 사유적이다.
중세후기 예수부활의 약속이 흔들리면서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교회는 페스트의 만연을 신의 징벌이라고 해석하며 인간의 허영을 경고했고, 사람들은 모두 검정을 입었다. 15세기 유럽의 회화에서 복장은 검정 일색이다. 그래도 부자들은 푸른빛이 약간 도는 찬란한 검정을, 빈자들은 바랜듯한 천한 검정을 입었다. 스페인 귀족들은 메리노울의 검정옷에 보석을 달았는데, 보석은 오히려 검정에서 더 빛났다. 유럽의 부가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넘어가서도 검정은 지속된다. 루터는 카톨릭의 유채색 제례복을 거부했고, 쯔빙글리와 칼벵 같은 개신교 지도자는 독재자로서 절제와 금욕을 강요했다. 이제 검정은 개신교의 색이자 통제와 권력의 색이었다. 검은가운은 이후 수백년간 교수, 목사, 관리, 판사의 옷이 된다.
검정은 수도회의 색이며, 기독교 성직자의 색이다. 교회는 보수적이므로 검정도 보수적이다. 보라는 교회의 색인데, 검정-보라는 밤하늘의 색조이며, 신비로운 마법의 색이다. Versace는 “검정은 단순함과 우아함의 정수다”라고 말했다. 우아함은 화려함을 포기한다. 남성복으로서 검정은 가장 안전한 색이다. 유채색으로 관심을 끌 필요가 없는 사람, 내면의 인품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검정을 입는다. 검정은 색과 관련해 구설수에 오르기 쉬운 사람이 입으면 좋다. 검정은 얼굴에 관심을 집중시키므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다. 따라서 검정은 반유행이며 대중을 초월하며, 저항하는 자의 색이다. 젊은이가 입으면 청춘이 드러나고, 중년이 입으면 늙음이 폭로된다. 검정은 남성의 색이며, 불법과 무정부의 색이며, 파시스트와 폭력의 색이다. 검정은 쉽게 입어도 되지만, 때로는 대단히 조심해서 입어야 한다.
검정은 긍정의 색조를 부정으로 바꾼다. 빨강-검정의 배색은 미움, 빨강-검정-갈색은 잔혹한 증오다. 검정-노랑은 “조심하라”는 경고다. 검정은 악(惡)이다. ‘세상을 검게’보면 ‘검은 심장’을 가진 ‘검은 동물’이 어둠속에서 당신의 뒤를 밟는다. ‘검은 날’은 바로 그 불운한 날인데, 그 전날 ‘검은 고양이’와 ‘검은 까마귀’가 당신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검정은 두렵고 위험하다. 유영철은 항시 검정을 입었다고 한다.
검정에 비해 회색은 쇠약해지고 오염된 모호한 색이다. 바랜 검정과 더러워진 흰색이 회색이다. 회색은 스스로 드러나지 못하고 늘 주위에 자신을 맞춘다. 주변색에 따라 밝게도 어둡게도 아름답게도 추하게도 변한다. 회색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정신적이지도 물질적이지도 않다. 회색은 노인이며, 모호하며, 권태, 고독, 공허이다. 괴테의 Faust에 등장하는 4명의 회색여자는 근심, 결핍, 죄, 곤경이다. 회색잎의 로즈마리는 슬픔의 상징으로 묘지에 심는데, 꽃말은 ‘배신당한 사랑’이다. ‘회색여자’는 기억나지 않는 여자다. 회색은 삶의 기쁨을 파괴하는 비참한 색이다. 회색은 반대색은 밝음과 즐거움의 색인 노랑과 주황이다.
회색은 숙고와 이성의 색이지만, 불안을 머금고 있어서 인기가 없다. 불안의 색조는 여럿이다. 노랑은 거짓에서 오는 불안, 분홍은 아무것도 모르는 불안, 갈색은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불안, 회색은 무력한 불안이다. 회색은 무관심과 무감정의 색이므로, 색채도 느낌도 파괴한다. 그래서 회색은 잔혹하다. 회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회색은 가려져있으므로 올빼미, 박쥐, 좀, 쥐, 모기처럼 은밀하다. 은밀함에는 악이 붙어 다닌다. 회색은 시대에 뒤진 색이며, 과거의 색이며, 망각의 색이다. 수녀(修女)와 수사(修士)들은 순종, 순결, 청빈의 3가지 서약을 하는데, 극도의 청빈을 지키는 카푸친 수도회와 시토 수도회는 회색을 입는다. 성경에 나오는 ‘좁고 험한 길’이 회색이며, 예수가 입었던 옷, 순례자의 옷, 테레사 수녀의 옷이 회색이며, 스님의 누더기 옷이 회색이다. 회색은 비참한 삶이 강요하는 빈곤과 어쩔수 없는 겸손을 상징한다. 회색은 싸구려의 색이며, 공장처럼 외관이 무시되는 콘크리트 건물의 색이다. 회색은 곰팡이이며, 악취와 쓰레기이다. 회색은 먹을 수 없고, 때가 타지 않으며, 질기고 가난하다. 고아원, 수용소, 교도소가 온통 회색이다. 회색옷은 실제보다 더 싸구려로 보인다. 때때로 빛나는 회색모피와 윤기있는 회색모직은 우아한 절제미를 보여주지만, 이것을 세상은 은색이라고 부른다.
남성정장의 기본은 검정일까 회색일까? 영국은 궁정문화가 아니라 상공업자와 은행가의 문화였다. 이들의 옷은 직업을 상징하듯 건실하고 실용적이었다. 무광택의 소재, 몸매에 따른 디자인, 눈에 띄지 않은 색채였다. 여름정장은 밝은 회색, 겨울정장은 어두운 회색, 넥타이도 회색이 품위가 있다. 회색정장에 파란 넥타이도 괜찮은데, 회색-파랑의 색조는 학문과 객관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유일하게 긍정적인 회색의 색조다.
긴 글, 읽어주어 감사....끝. 염명천. ♧
첫댓글 좋은 글 고맙다. 색에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하는 글이다. 고생했겠네 쓰느라고.
옷 입을 때는 색보다는 사이즈가 일단 맞아야해
이게 얼마만이야, 참 머언 길을 돌아 국화꽃 계절에 무사히 도착했구나. 환영!
나는 갈색과 회색이 참 좋던데, 이 책에서는 아주 나쁘게 평하고 있더라. 위 글의 2/3은 책의 내용에서, 1/3은 내가 살을 붙였네. 한번쯤 읽어보세요. 읽는 시간이 즐거운 참 드문 책~~~~
색의 의미와 그 색을 좋아하는 것은 다르고
또 색의 의미와 그 색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전혀 무관하지 않을까?
이야... 숨차다. 다읽고나니까는 그런데 생각나는것은 하나도 없네.
곧 세윤이에게서 청구서 날아오겠다. 상담 잘 받아봐. 싸게 잘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 잊지말고ㅋㅋㅋ
안심해 하규야. 숨차고 싶은 사람 억지로 숨 안차게 하고 청구서 날리지는 않아. 그건 강매에 해당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