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경이로움에 가득 찬 새날인 사람들에게야 새 날과 헌 날이 따로 있겠습니까만 어쨌든 세상은 새해를 맞는다고 떠들썩합니다. 디아스포라 몇몇 가족들도 그 틈에 끼어 주문진 바닷가에서 신년 해맞이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나마 일년에 한 번이라도 이렇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지 싶습니다. 물론 이런 느낌과 감동으로 매순간을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문득 작년 겨울 전체 모임 때 달력을 나눠드리면서 했던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그저 서로의 편리를 위해 만든 약속일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달력은 인간의 눈을 속이는 정교한 장치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믿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달력을 열 두 장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고 한 장에 열 두 달이 인쇄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달력을 볼 때마다 시간의 동시성을 자각하시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일 년간을 훈련하여 시간에 대한 참다운 이해, 곧 존재하는 것은 오직 '순간' 뿐임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내년 즈음에는 아예 달력을 만들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리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저의 이 기도가 정말 효과가 있었던지 올해는 정말 달력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달력을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달력을 만들 시기도 놓쳤고 그 즈음 교회 재정도 만만치 않아 그만 주문을 넣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달력을 만들지 못하게 된 것은 진실로 감사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달력이 없어 혹 불편하다면 그 불편을 느끼는 순간마다 '시간'에 관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을 '지금-여기'로 살아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그때마다 '시간이 멈추는 즐거움'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늙지 않는 비결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생활하시는 여건상 달력이 없이는 안되겠다 싶으신 분들은 서로 나눠주려 애쓰는 이웃 교회 달력을 하나 얻어 걸어두십시오. 정 쓰여있는 다른 교회이름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 부분만 칼질을 하시던가 아니면 나눠주신 정성을 생각해 그냥 두고 보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어쨌든 저는 한 해 동안 달력 없이 살기로 했으며 굳이 날짜를 따져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마다 '시간'이라는 화두를 떠올려 시간의 동시성을 온전히 자각하는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재미있을 것 같다면 여러분도 함께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장담컨대 우리가 달력을 쳐다보고, 시간을 확인하는 횟수가 줄어드는 만큼 우리의 행복은 상대적으로 커져 갈 것입니다. 바라기는 디아스포라 모든 영성 가족들이 올 한해동안 시간을 느끼지 못할 만큼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성탄과 겨울 정진모임을 준비하면서 저는 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교회 마당을 거닐고 있었는데 온 사방은 흰 눈에 덮여있었습니다. 눈 위로는 겨울 같지 않게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그 느낌은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한없는 경이로움으로 온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교회 바로 옆의 너른 밭을 보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밭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1미터쯤 되는 높이로 자라 형형색색의 표정으로 만발하게 피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저는 그만 넋이 나간 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후덕하게 생긴 농부 한 분이 밭 한가운데를 거닐며 꽃들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였는지 온 천하를 품어 안은 듯한 그런 흡족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말을 걸었지요.
"아저씨! 꽃들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농부 아저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저를 보시더니 빙긋이 웃기만 하셨습니다. 아, 그분에게서 풍겨나는 충만한 느낌은 저의 짧은 언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꽃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농부 아저씨는 무슨무슨 꽃이라고 이름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아, 이 꽃이 바로 그 꽃이구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 꽃의 이름은 까마득히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꽃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농부 아저씨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아저씨, 이 꽃이 이렇게 만발하게 피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고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농부 아저씨는 넉넉한 웃음을 지으시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씨를 뿌리고 일주일 만 기다리면 이렇게 만발한 꽃이 피어나지. 게다가 이 꽃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피어난다네. 하얀 눈 위에 씨를 뿌려도 일주일이면 꽃이 피어나지."
"그럼 아저씨! 저도 이 꽃씨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저도 심고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게요."
"그렇게 하시지. 자, 꽃씨 여기 있네."
아저씨는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큰 바가지로 하나 가득 꽃씨를 나눠주셨습니다. 저는 벅차 오르는 희열로 꽃씨를 받아들었고 그 순간 농부 아저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저는 우선 교회 마당가로 돌아가며 꽃씨를 뿌렸습니다. 마당에도, 텃밭에도, 진입로에도 한 움큼씩 꽃씨를 뿌렸습니다. 그렇게 교회 둘레를 돌아가며 한 움큼씩 꽃씨를 뿌렸는데도 꽃씨는 여전히 바가지 그득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꽃씨를 디아스포라 가족들에게 나눠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집집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게 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벌떡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 속에서 꿈 해몽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해몽은 각자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되겠지요. 다만 분명한 것은 저를 비롯한 디아스포라 가족들 모두가 눈 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을 보게 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풍요의 꽃씨를 심는 사람들은 얼어붙은 고된 삶의 현실에서 피어나는 풍요의 꽃을 볼 것이요, 사랑의 꽃씨를 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조건에 의한 거래가 아닌 주는 것으로 진정 행복한 사랑의 궁극을 체험하게 될 것이요, 영적 진보의 꽃씨를 심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만발하게 피어나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만물의 완벽을 이해하게 될 것이요, 행복의 꽃씨를 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완벽한 행복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농부 아저씨로부터 받은 꽃씨가 넉넉하게 있으니 필요로 하시는 분들은 필요한 만큼 가져가시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 저는 비몽사몽간에 저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한 산에 올랐었습니다. 제가 산에 오르기 전 비몽사몽간에 보고 들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꽤 높은 산이었습니다. 저는 그 산의 한 7부 능선쯤에 서서 정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상 부근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라!"
그 말씀은 세 번을 반복해서 들렸습니다. 이튿날 저는 전날과 비슷한 상황의 장면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그 장면 속에 주님이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모습은 성경에 기록된 변화산의 풍경과도 같았습니다. 그분은 저를 향하여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라!"
그래서 저는 그 소리를 주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무작정 한 산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체험은 기회가 되는대로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제가 그 산을 내려올 무렵 저는 제 안에 계신 예수 선생님께 디아스포라 가족들에게 전할 한 말씀을 요청했습니다.
"주님, 올해 한해 동안 우리가 마음에 새길 한 말씀을 주십시오."
그때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생각만 하면 그대로 되는 세상, 너희는 그것을 체험하리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제 안에는 감동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씀입니까? 생각만 하면 그대로 된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가 아닙니까?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생각이 창조해 낸 결과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가 우리에게 얼마나 자주 잊혀지는 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더욱 굳게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품은 생각(선택)을 바꾸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날 때 언젠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품었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불현듯 옛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디아스포라가 시작되고 난지 한참이 지나서야 이것이 바로 제가 진정으로 원했던 목회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맨 처음 생각했던 목회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목회자가 되는 '공동 목회'였습니다. 그 동안 교회에서 보아왔던 목자와 양,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서서 교회 구성원 개개인이 자신의 일(직업)을 하나님의 일로 자각하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경험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교회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목회자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임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회자가 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바로 마틴 루터가 이야기 한 '만인 제사장 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했던 목회가 '전원(田園) 목회'였습니다. 제가 전원목회를 생각한 이유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택시를 한 번 탔는데 싱글벙글 너무나 즐겁게 운전을 하시는 기사를 한 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저는 제가 가야할 목적지를 얘기한 후 그분에게 슬그머니 말을 걸었습니다.
"뭐, 좋은 일이 있으신가보죠?"
"좋은 일이 따로 있습니까? 사는 일이 좋은 일이지요."
저는 이 범상치 않은 한마디에 이분이 신앙인 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눈은 빠르게 차안을 살폈고 이내 룸밀러에 매달린 연꽃과 운전석 앞에 놓인 절 집 사진의 달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불자(佛者)이신가보죠?"
"예, 그렇습니다."
"어느 절에 나가십니까?"
"예, 도봉산에 있는 천축사에 나갑니다."
"아, 그러시군요. 천축사에는 저도 아는 스님이 계셔서 몇 번 오르내렸는데..... 절에는 매 주 나가시나보죠?"
"웬걸요. 시간이 어디 그리 쉽게 나야지요. 절에 갔다 온지 벌써 석 달도 더 지난 걸요."
저는 그만 그 말에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르침을 들었기에 그 감동이 석 달이 넘게 간단 말입니까? 그 무렵 저는 예배란 예배는 다 드리고 새벽예배도 빠지지 않는 모범 교인이라는 사람들끼리 하루가 멀다하고 다투고 시기하는 모습에 신물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문제는 가르침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불자들은 산에 오르는 동안 자신의 시름과 번뇌를 잊게 되고 법당에 당도할 즈음은 그 마음이 백지처럼 비워져 무슨 소리를 들어도 판단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집 가까운 곳이 좋은 교회'라는 구호에 따라 눈곱도 떼지 않고 달려갈 수 있으니 자신을 비울 기회는 없고 예수에 대한 지식만 쌓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설교집이다, 테이프다, 매체가 발달하면서 자판기에서 커피 뽑는 것보다 쉬운 게 목사 설교 듣는 것이 되고 보니 설교를 복음으로 듣기보다는 슈퍼마켓에서 물건 고르듯 자기 기준을 가지고 취사선택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정말 오고자 하는 갈망이 없이는 올 수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교회 드나든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작정하고 준비해야만 올 수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하는 데도 더 나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전원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직이 중심이 된 교회가 아니라 영적 자각(영성)이 중심이 된 교회'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저는 10여 년 목회를 하면서 교회가 사람을 붙잡아 두는 방식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교회는 일단 새사람이 들어오면 조직으로 사람을 붙잡아 둡니다. 무슨 선교회다, 무슨 속회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일(역할)을 주어 일로 사람을 붙잡아 둡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 가보면 일에 목숨건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러니 어찌 자리 싸움, 감투 싸움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은혜가 메마른 곳에 율법이 칼을 휘두르고 감동이 사라진 곳에 조직이 판을 치는 것처럼 이 시대의 교회가 그 꼴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영적 자각을 통하여 스스로 자기 신앙의 길을 가게 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게 바로 '영성 모임''영성 목회'에 대한 꿈이었던 것이지요.
저는 제가 품었던 이 생각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비젼을 듣게 되었고 그때 저는 그 일이 제 의사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려주신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디아스포라'야말로 제가 하고싶었던 세 가지의 목회를 하나로 통합해 놓은 그간의 생각, 그간의 기도가 현실로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하는 생각들도 이렇게 현실이 되는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깨어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 생각을 현실로 체험하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질 것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생각은 감추어진 기도요, 말은 표현된 기도이며 행동은 드러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 차리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기도요, 잠든 사람에게는 기도도 잠꼬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각과 말과 현실을 동시에 체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그 분 밑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그분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디아스포라 영성가족 여러분! 올해 한해 동안 '생각만 하면 그대로 현실이 되는 체험'들을 통해 '꽃피는 엄동설한'을 만들어 봅시다.
무슨 얘기를 해야할 지 저도 알지 못한 채 시작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군요. 이만 설교 끝!
[기도]
아버지,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강력한 기도인지 깨닫게 하셨으니 이제는 그 기도가 현실이 되는 체험들을 올해 내내 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눈 위에도 꽃이 피는 놀라운 영성의 세계를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나를 찾아 떠난 여행·4
본문/누가복음 14장 33절
길 떠났던 이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한 여섯 회에 걸쳐 연재를 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 째 이야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기왕 시작한 글이니 어정쩡하게 끝내는 것보다야 함축해서라도 마저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주로 여행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저는 숲에서 주운 물푸레나무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임계 쪽을 향해 걸었습니다. 하장에서 출발해 한 2시간쯤 걸었을까? ㄱ자로 꺾인 어느 커브 길을 돌아 직선 도로가 열리는 시점에 들어서는데 저는 뜻밖의 사건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저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던 은색 엘란트라 승용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서더니 마주 오던 미니 밴 카니발과 정면 충돌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쾅!'하는 굉음과 함께 차는 구겨진 백지처럼 이지러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 영혼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한 영혼이 몸을 빠져 나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차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카니발에 타고 있던 두 남녀는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승용차에 타고있던 중년의 세 남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운전을 하던 남자는 장 파열에 갈비뼈가 서너 대쯤 부러진 것 같았고 뒷좌석에 앉았던 여인은 이마와 허리를 다친 것 같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신음소리를 내며 통증을 호소해 왔는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인은 석고상처럼 굳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둘러 여인이 앉은 쪽 문을 열려고 해 보았지만 제 힘으로는 어림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때쯤 근처에서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달려 왔고 저는 그들과 함께 찌그러진 문짝을 뜯어냈습니다. 그때에 물푸레나무 지팡이가 한 몫 톡톡히 감당했지요. 지렛대 대용으로 말입니다.
문짝이 열리자 팔걸이에 얹혀있던 여인의 손이 맥없이 툭- 떨어졌습니다. 저는 여인의 손목과 목덜미의 맥을 짚어보았습니다. 아무런 맥박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영혼은 이미 몸을 벗어나 이 사고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그녀의 영혼이 몸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이런 사고를 일으켰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믿거나 말거나...) 그녀는 비로소 몸을 벗어나 그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저는 한없이 자유로와 진 그녀의 영혼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합장을 하고 임종 기도를 드렸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하장 파출소 순경이 말을 붙여왔습니다.
"어디 계시는 도사님이십니까?"
저는 속으로 생각했지요.
'얼라리? 이 사람이 내가 한 때 도사(전도사)였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누?'
"도사는요. 그냥 길 가던 사람입니다."(길가는 사람이니 그것도 도사(道) 맞잖아?)
저는 순경에게 사고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연락처를 적어 준 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거 참! 뜻하지 않은 임종을 다 지켰군. 이 사람 틀림없이 기독교인이었을 게야. 목사에게 마지막 순간을 맡긴 것을 보면.....'
사실 저는 이 여인의 죽음을 빌어 디아스포라 가족들에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신년 벽두부터 죽음 얘기를 한다는 게 왠지 어색한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어 둡니다. 후일 예전에 쓰다가 중단한 '자유로와 지기 네 번째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때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어보도록 하지요.
저는 그렇게 임계를 지나 강릉으로,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무작정 걸었습니다. 때로는 죽음의 터널 같은 어둠 속으로, 때로는 어디로 이어진 지조차 알 수 없는 때로는 숲 속 오솔길로, 또 때로는 달빛에 파도가 허연 알몸을 드러내는 해변으로, 연이 닿으면 사람을 만나고 만남이 다하면 다시 걷고 그렇게 신들린 듯 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며칠간의 여행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강릉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기 전 주머니 칼 하나를 샀습니다. 왜냐하면 버스 안에서 지팡이를 보기 좋게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주까지 가는 고속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칼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서재 한 구석에 자리잡고 앉을 지팡이를 생각했지요.
'그래, 마음이 동요할 때나 결핍을 느낄 때면 이 지팡이를 보자. 그래서 내 깨달음을 기억해 내고 내 집 마당의 풍요로움을 상기하자.'
이것이 지팡이를 다듬고 있는 이유였습니다. 거기에는 분명 남들 앞에서 으스대며 자랑하고자 하는 은밀한 의도도 숨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손마디 몇 군데쯤 물집이 잡혔을 때였습니다. 고속버스는 대관령을 넘어 장평 부근을 지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팡이는 여행할 때나 필요한 것이 아니냐? 여행이 끝난 지금 지팡이를 다듬는 이유가 뭐냐?"
그 순간 그만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저의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지팡이를 훈장처럼 모셔두고 또다시 어제의 깨달음 속에 머물러 있고자 했던 것입니다. 깨달음을 붙잡아 두려는 어리석은 집착, 그것이 바로 제가 지팡이를 모셔 가는 진짜 의도였던 것이지요. 문득 언젠가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한 토막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오래 전 어떤 곳에 크신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여러 제자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지금-여기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선생님은 물끄러미 그 제자를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날도 좋은데 산행이나 하자!"
제자들은 선생님께서 무슨 가르침을 주시려나 잔뜩 기대한 채 선생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선생님은 호젓한 산길을 앞서 걸어가시며 연발 감탄사를 토해 내셨습니다.
"아, 햇살이 태고의 빛처럼 찬란하군!"
"이 나뭇잎 좀 보게. 우주의 신비가 그 모습을 드러냈지 않은가?"
"이 노래를 들어보라고. 바람이 풀잎을 흔들어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있네."
선생님은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시며 중얼거리셨습니다. 선생님이 멈추어 서면 제자들도 멈추어 서고 선생님이 걸음을 옮겨놓으시면 제자들도 다시 걸음을 옮겨놓았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한가지였습니다. 언제쯤 선생님께서 물음에 대한 답을 주실 것인가 하는 것! 하지만 선생님은 제자의 물음조차 까마득히 잊으신 것처럼 숲과 바람과 햇빛을 즐기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가 산 중턱에 이르렀을 무렵 선생님은 바위틈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셨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산을 넘는 동안 지팡이 삼아 사용했음직한 나무막대기 한 토막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막대기를 들고 이리 저리 살피시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셨습니다.
"흠, 잘 다듬으면 훌륭한 지팡이가 되겠군!"
선생님은 햇살 좋은 바위에 걸터앉으시더니 주머니칼을 꺼내 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옹이를 다듬고 껍질을 벗긴 후 막대기의 양쪽 끝도 둥그스름하게 자랐습니다. 어느새 선생님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혔고 손은 물집이 잡혀 칼자루를 쥐었던 손마디마다 부풀어올랐습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고요는 한나절 가량 계속 되었습니다. 산 중턱에는 제자들의 숨소리와 주머니칼이 만들어 내는 예리한 사각거림만이 바람결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조갑증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답을 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고 쓸데없는 지팡이 깎는 일에 한나절씩이나 시간을 허비하는 선생님의 태도가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참다 못한 한 제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벌써 저녁입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참이십니까?"
선생님은 이마의 땀을 훔치시면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벌써 이렇게 됐나? 그럼 이제 그만 내려감세."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선생님은 기분 좋게 지팡이를 짚으시며 앞서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제자들은 선생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기들끼리 수근대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였습니다. 한 노파가 꼬부라진 허리를 간신히 지탱할만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짚고 선생님 앞으로 걸어왔습니다. 선생님은 그 앞에 우뚝 서시더니 한나절 내 애써 다듬은 나무 지팡이를 노파에게 내밀었습니다.
"고맙소. 이렇게 멋진 지팡이를 내게 주다니..... 늙으니 어디 나뭇가지 하나 제대로 꺾을 수가 있어야지."
노파가 지나가자 제자들이 선생님 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선생님, 한나절 동안 애써서 지팡이를 깎으시더니 그렇게 또 선뜻 노파에게 내주시는 것은 뭡니까?"
"이게 바로 너희들이 물은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이다.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하는 동안은 영원히 그 일을 할 것처럼 정성을 들이고, 그 일을 놓는 순간이 오면 마치 언제 그 일을 했었냐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깨끗이 손을 놓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여기'를 사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을 곡해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대충, 건성건성' 해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일 때가 있습니다. 어림없는 소리지요. 그야말로 지금-여기, 즉 순간을 사는 사람만이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지금-여기, 순간을 산다는 것이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일상사 가운데 만일 어떤 일로 고통을 느낀다거나 섭섭한 감정, 또는 분노를 느낀다면 우리는 즉시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무엇무엇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그 말은 어떠한 일이, 혹은 어떠한 사람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의도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깨어졌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환상이 없으면 깨어질 것도 없고 집착이 없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을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주는 존재는 밖에 있는 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 만든 환상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이 만든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 들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왜 그 모양이냐고 질책하며 훈계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을 표현할 뿐입니다. 그 사랑의 표현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자각한 깊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뿐이지요.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한 모든 공격은 도와달라는 신호'이며 '사랑 받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상처를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를 받는 사람만 있을 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누구 때문에....'라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없는 말인 것입니다.
지난 몇 주 전 한 지역 모임에 내려갔다가 저는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 왔습니다. 무엇 때문이라고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제대로 가고있지 못하다는 저의 판단이 저를 두려움의 늪으로 몰아넣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저는 내내 내면을 살피며 주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영월을 지나고 제천 시내에 막 들어설 때였습니다. 저는 저의 내면을 향해 은밀히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하라고 한 것이 모임을 잘 운영하는 일이었느냐?"
"아니오. 저 하나라도 당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에 그토록 마음을 쓰느냐?"
그제야 제가 얼마나 모임을 운영하는 일에 마음을 썼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모임을 잘 해보려는 작위(作爲)는 사람들을 의식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저의 태도는 저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눈치를 살피고 때로는 비위를 맞추면서 그걸 사랑이라고, 배려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결국 저를 참담한 심정으로 몰아갔던 것은 깨어있지 못하여 근본을 잊게 만든 저의 집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이야말로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와 져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메신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는 이런 꿈으로 친절히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차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연료탱크에는 연료가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분 좋게 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연료 게이지에 이상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풀(F)상태를 가리키던 눈금자가 갑자기 제로(E) 상태로 뚝~ 떨어지며 연료 경고등이 켜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연료는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게이지에 이상이 생긴 것 뿐이야. 그냥 가도 괜찮아. 하지만 정 불안하다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봐. 그러면 정상이 될 거야."
그래서 저는 시키는 대로 길가에 차를 세워서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켰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연료 게이지는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다시 기분 좋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얼마지 않아 종전과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시동을 껐다 켜고 다시 달리고 그렇게 하기를 세 번 반복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지요.
꿈은 거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저는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연료는 가득 채워져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게이지는 때때로 제로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하나이시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우리는 결핍을 느끼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또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주저함 없이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라하시니 그 말씀은 정신없이 달리던 걸음을 멈추어 서서 첫 마음을 회복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 근본을 자각하라는 말씀으로 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문득 인디언들의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한 인디언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한참을 달려가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지나던 행인이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인디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말을 타고 너무 빨리 달려왔기 때문에 미처 따라오지 못한 제 영혼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자각이 깊어질수록 삶은 고요해질 것이요, 우리의 집착이 커갈 수록 삶은 소란스럽고 고통스러워 질 것입니다. 만일 지금 자신의 삶이 견딜 수 없는 고통가운데 놓여 있다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던 자기 인생의 시동을 꺼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집착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차를 멈추고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켤 때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下)
[기도]
주님, 우리의 삶이 힘겹다면 힘겨운 삶이 지나가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힘겨운 삶을 만들어 냈는지 그 근본을 보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판단의 감옥에서 너를 풀어 자유롭게 하라!
본문/마태복음 23장 1-15절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이제와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지난 12월 어느 모임의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겪은 일이었습니다. 마침 모임 장소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저는 고속버스를 이용해 그곳에 가게 되었는데 강의를 마치고 참석하신 분들과 잠시 시간을 갖다 보니 어느새 막차시간이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고속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밤 9시. 저는 매표소로 곧장 달려가 표를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 제일 끝에 섰습니다.
"이천 한 장 주세요."
"막차밖에 표가 없습니다."
매표원 아가씨는 표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저는 표를 받아들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막차 출발 시간이 9시 30분이니 아직 30분 여유가 있군.'
그래서 저는 최대한 여유를 부리며 화장실도 다녀오고 터미널 밖 포장마차에서 토스트에 커피 한잔까지 마신 후 다시 영동선 차 타는 곳까지 왔는데 시간은 15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표를 사 놓고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이천 행 버스가 출발하는 장소로 나갔지요.
9시 20분 출발이라고 써 붙인 버스 앞에는 7명쯤 줄을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도 아마 저와 같은 생각으로 미리 나와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잠시 후 출발시간이 되자 승차 안내원이 줄을 선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두 사람만 타세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한 덜 떨어진 사람이 둘인 모양이군.'
"이제 좌석은 없습니다. 입석으로라도 가시려면 타십시오."
제 앞에 서 있던 사람까지 차에 올랐고 이제 남은 것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10분 먼저 가기 위해 1시간을 서서 갈 것이냐? 아니면 10분 늦게 가더라도 1시간을 편히 갈 것이냐?'
선택을 놓고 망설이게 될 때는 언제나 근본이 무엇인지를 물었었기에 저는 이 행동지침에 따라 다음 차를 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안 타실 겁니까?"
승차 안내원의 물음에 저는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예!"
이내 버스는 출발을 했고 승강장에는 저 혼자 덩그마니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막차가 들어오겠지.'
그런데 이상하리 만치 사방이 조용했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휴대폰 창에 새겨진 디지털 숫자가 막 25에서 26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군. 30분에 출발할 차면 25분에는 들어와야 하는데....'
그 순간 불현듯 막차가 들어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터미널 안에 있는 승차 안내원에게 달려갔습니다.
"이천 행 막차 안 들어옵니까?"
"예? 막차라니요? 좀 전에 출발한 버스가 막차였는데요?"
아뿔싸!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버스 표에는 분명히 9시 30분이라고 쓰여있었는데.... 저는 주머니에 넣어 둔 버스 표를 꺼내 보았습니다. 아아, 그런데 이럴 수가.... 버스 표에는 선명한 글씨로 9시 20분발이라 쓰여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도깨비 장난 같은 일이 다 있단 말입니까? 꼭 뭔가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멀쩡히 제시간에 도착해 제가 타야할 버스를 바라보면서도 그 버스는 제가 타야할 버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냥 보냈던 것입니다. 결국 버스 시간을 맞추지 못한 '어떤 덜떨어진 놈'이 바로 저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참 신기하지요? 승차권에 분명히 쓰여진 9시 20분이라는 글씨가 아까는 왜 9시 30분으로 보였느냐 이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매표원 아가씨는 그냥 막차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을 9시 30분 막차라고 들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저 듣고싶은 대로 듣고 나서 승차권을 들여다보았으니 거기에 쓰인 9시 20분이라는 글자도 9시 30분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가끔 사람들이 시시비비를 가릴 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 말하며 자기 주장이 옳음을 내세웁니다. 생각해 보니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야기인 즉슨 우리는 언제나 일어난 사건 그 자체를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자기 보고싶은 대로 본다'는 그런 말이지요. 아마 이런 것을 두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일어나는 사건들을 자기 편견에 사로잡혀 제멋대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눈, 그 눈은 진실로 복된 눈입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종종 그런 경우를 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했을 때 그 말 그대로를 듣기보다는 그 저의가 무엇이냐를 먼저 생각하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이미 일어난 일인 양 제 멋대로 상상력을 동원해 사건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합니다. 그래 놓고는 사건의 진의(眞意)와는 상관없이 자기 시나리오대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찌 다른 이의 말이 귀에 들어올 것이며 설사 들어온다 한들 제대로 이해 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폭력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저는 영동선 승강장에 마지막 남은 버스인 9시 30분 발 용인 행 막차에 몸을 싣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용인은 이천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비록 서툰 운전이지만 아내가 차를 몰고 나오기에 큰 무리가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해 두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에 아내도 이포에서 출발하면 얼추 도착시간이 맞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고속버스는 용인 터미널에 저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시각이 10시 10분. 갑작스레 다가온 강추위로 밤거리는 잔뜩 움츠려있었고 사람들은 허연 입김을 뿜어대며 종종걸음을 쳤습니다. 저는 차가 지나며 쉽게 발견할 만한 터미널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아내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10분 20분 흘러갔고 금새 헤드라이트를 번득이며 나타날 것 같던 아내는 1시간이 넘도록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면도날처럼 예리한 겨울 바람에 온 몸을 내어 맡긴 채 으드드 이빨 부딪치며 1시간 40분을 떨고 난 후인 자정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아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보자마자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뭘 하다가 이제냐 나타나는 거야?"
"전화 받고 바로 출발해서 부지런히 온 거예요."
"이천에서 용인이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라도 되냐? 1시간이면 새끼줄 매서 차를 끌고 와도 오겠다."
"9시 30분에 바로 출발해서 쉬지 않고 온 거란 말이예요. 길이 얼마나 험한 지 진땀빼고 왔는데 수고했다는 말은 않고 역정만 내고 있어!"
"이천에서 용인 오는 4차선 도로에 무슨 험한 길이 있다고 그래?"
"4차선 도로는 무슨..... 꼬불꼬불한 산길에 비포장도 있던데......"
저는 그제서야 아내가 엉뚱한 길로 돌아서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느 길로 왔기에 그래?"
"캄캄한 밤이라 어딘지는 잘 모르겠는데 곤지암으로 해서 왔어요."
"어이쿠! 이런. 용인 오는데 곤지암은 뭐 하러 가? 이천에서 곧바로 수원 가는 표지판만 따라 오랬잖아?"
"언젠가 서울 가다 보니까 거기에 용인 이정표가 있더라고요. 생판 모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그래도 한 번 본 곳을 찾아가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서....."
저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길을 모르면 차라리 아는 사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가든지, 아니면 지도를 펼쳐볼 일이지 자기가 아는 얄팍한 지식에 의존해 무모한 일을 벌이다니 참으로 용기가 가상타 싶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옆자리에 타게 하고 대신 운전석에 앉았습니다. 얼어붙은 손과 발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는데는 적잖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렇게 얼마인가를 달려오는데 난데없이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판단이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온 몸과 마음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요. 주님! 이게 바로 판단이지요."
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판단하지 않기!"
우리가 진실로 영적 진보를 갈망한다면 반드시 훈련해야만 하는 과제가 이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순간 그 판단 속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판단은 마치 한가지 색깔로 짙게 물들인 선그라스와 같아서 모든 사물을 그 색깔로만 보게 만듭니다.
이러한 판단은 언제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앎이, 자신의 체험이, 자신의 신념체계가 바로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눈 먼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보고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이 본 것을 절대 진리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념체계를 강요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마 23:13-15)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이 자기들을 선생이라고 불러 주기를 즐긴다.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칭호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 뿐이요, 너희는 모두 학생(學生)이다."(마 23:7-8)
그렇습니다. 학생에게 어찌 판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판단이 있다는 것은 배우기를 거부한다는 뜻이니 배움을 거절하는 학생이 무슨 학생이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선생노릇을 하고있는 것이지요.
결국 판단은 더 이상의 배움이 없을 때 생겨나는 현상이요, 배움이 없으면 진보도 멈추게 됩니다.
그래서 판단은 스스로 높다고 여기는 자들의 몫이요, 배움은 스스로 낮아지는 자들의 몫인 것입니다.
판단은 눈 먼 자들의 몫이요 배움은 눈 뜬 자들의 몫이며,
판단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나
배움은 풀어 자유롭게 하는 열쇠가 되고,
판단은 부분을 보게 하나 배움은 전체를 보게 하며,
판단은 먼길을 돌아가게 하나 배움은 지름길을 발견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 23:12)라는 말씀 속에 담긴 비밀인 것이지요.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하면 판단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방법을 '자기 부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결국 판단하지 않으려면 판단하는 자기의 기준이 없어져야 하고, 자기의 기준이 없어지려면 자기라고 믿는 것이 없어져야겠지요. 예수께서는 그 방법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날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니 이것이 바로 학생이 되는 것이요, 영원한 현재를 사는 것이며 바로 영적 진보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새로 태어나는데 어찌 판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판단의 기준이란 축적된 어제의 기억이니 그러므로 '판단하지 않기'를 훈련하고자한다면 '영원한 현재-지금, 여기를 사는 법'을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판단은 자신을 가두는 감옥입니다. 판단은 더 이상 자신이 진보할 수 없도록 얽어매는 사슬입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순간 자신은 이미 그 판단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며, 판단은 어제의 기억 속에 머물러있음이요, 판단은 자신이 눈 멀어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선언인 것입니다.
판단이 있으면 선호(選好)가 생기고
선호가 있으면 집착(執着)이 생기며
집착이 있으면 고통(苦痛)이 생깁니다.
그러니 판단의 감옥에서 자신을 풀어 자유롭게 하십시오.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마 7:1-2)
[기도]
주님, 판단하지 말라 시는 당신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우쳐 주시니 고맙습니다. 다시는 판단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삶의 막다른 길] 홈에 올려 놓았던 글을 찾기 어렵다고들 하셔서 설교 코너에 옮겨 놓습니다. 이 글을 다시 읽다보니 최악의 상황을 두고 최상의 해석을 했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저는 벌써 이포에서 1년 가까이를 살고 있네요.^^ 최상의 해석을 하라는 말씀은 결국 '네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이니 기왕이면 최상의 해석으로 최상의 현실을 창조해 가 보자구요.
최상의 해석을 하라
본문/마가복음 14장 3-9절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경험의 연속입니다. 어떠한 경험을 하지 않는 채, 그냥 보내는 순간은 한 순간도 없습니다. 눈 내리는 거리를 걷는 경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경험, 감기 몸살로 앓아 눕는 경험, 가족들과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경험, 잠을 자는 경험...... 만일 나는 아무 경험도 하지 않겠노라고 방안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다면 그는 아무 경험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만일 이 모든 경험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임을 자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경험도 가벼이 여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원하는 경험, 원하지 않는 경험의 경계는 없어지고 맙니다. 경험은 그저 깨우침의 통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각하고 나면 우리가 마다할 경험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경험은 고마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바뀌어버릴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든 즐거운 경험이든, 건강한 경험이든 병들어 눕는 경험이든, 태어나는 경험이든 죽음의 경험이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자각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을 우리는 생사를 초월한 사람, 진리를 앎으로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직 '깨어있음'으로만 가능한 영성의 세계입니다. 깨어있지 않고서는 자신의 경험 속에 담아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한 큰 선생님께 어느 날 제자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수행을 하십니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먹고, 눕고, 걸을 뿐이다. 이것이 내 수행의 전부이다."
특별한 수행법을 알고 싶었던 제자에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습니다.
"선생님, 그런 수행이라면 우리도 합니다. 우리도 먹고, 눕고, 걷습니다."
"그렇다. 누구나 먹고, 눕고, 걷는다. 하지만 먹으면서 먹는 줄 알아차리고, 누우면서 눕는 줄 알아차리고, 걸으면서 걷는 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습니다. 모든 경험을 수행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깨어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도려내고 싶은 기억이나 부끄러운 과거, 가슴아픈 상처 따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자신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준 고마운 경험들일 따름이지요.
결국 경험을 통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다는 말은 경험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운데 최상의 해석을 선택했다는 말과 같은 것이 됩니다.
99년 당회를 일주일 여 앞둔 어느 날, 교회가 세 들어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신경질부터 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습니까? 8년 동안 사정 봐주며 있게 해 줬더니 말 한마디 않고 가지를 않나, 주인도 모르게 세입자가 바뀌지를 않나 이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교회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집 비우세요."
30분 가량을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쏟아 붓더니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세를 준 주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는 전화기에다 대고 코가 땅에 닿도록 '죄송합니다'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꽤 긴 시간동안 저는 그녀의 거친 소리들을 묵묵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기하게도 그녀의 상스러운 말에 화가 난다거나 감정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제가 참 기특했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자신의 거친 말들을 대꾸 없이 받아 준데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화가 좀 누그러진 탓인지 목소리가 부드럽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로 초면에 실례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실례가 됐지요. 실례도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수화기에다 대고 그렇게 대답했다는 게 아니라 제 속으로 만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녀가 조금 누그러진 틈을 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집을 비우라는 말씀입니까?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이번에는 집세를 시세대로 올리려고 합니다. 매 번 세를 올리려고 하면 교회가 하도 힘들다고 사정을 하는 통에 그러지 못했는데 이번엔 안되겠습니다. 교회가 갑작스럽게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닐 텐데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해줄 수 없을 것 아닙니까?"
저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세상 최고의 재벌을 아버지로 둔 사람을 우습게 아는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세대로 올리신다는 게 얼마를 말씀하시는 것인 지요?"
"한 천 만원은 올려야 되지 않겠어요?"
"잘 알았습니다. 저희도 성도들과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저는 전화를 끊으며 짧은 외마디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버지, 이 경험은 또 무엇입니까?"
제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벼락같이 떨어지는 그분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분도 역시 짧은 외마디로 답변 하셨습니다.
"너희가 해석할 수 있는 최상의 해석을 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너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저 개인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영성 가족 모두를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회에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제 성격에 돈과 관계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돈을 어떻게 마련해서 이 일을 해결할 것이냐'가 아니라, 갑자기 닥친 이 일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냐'의 해석을 물으신 것이라고 이해되어 졌기에 저는 디아스포라 모든 영성 가족들에게 '공동의 해석'을 의뢰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해석만 잘하면 그대로 되게 하시겠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저는 저으기 가슴이 부풀어 당회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드디어 홍천 대명콘도에서 당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토요일 밤 프로그램이 끝나고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디아스포라 가족들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최상의 해석을 의뢰했습니다. 그리고는 각자의 해석-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당회 때에 이야기하자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묵상과 식사, 주일 대예배에 이어 당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결산 보고와 임원 세우는 일을 마치고 기타 토의 시간에 저는 어제 밤 의뢰한 해석을 들어보자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모임에 참석하셨던 분들은 모두 아시다시피 사건에 대하여 '해석'-무슨 뜻이냐?-하시는 분들은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해결 방법'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겠습니까? 최상의 '공동의 해석'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적잖이 실망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날 아무런 해석도 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서울로 향하는 차안에서 아버지께 다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아무런 해석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저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
그 순간 제 가슴에 새겨지는 또렸한 그분의 답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희들의 현주소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하여 모두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각자의 바탕생각들을 읽게 될 것이다. 이제 곧 그들의 깨달음이 너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들은 최상의 해석을 할 것이다. 그것을 믿고 기다려라."
그분의 말씀대로 이튿날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왜 '해석'은 하지 못하고 '판단'만 하고 있었는지, 자신들이 무엇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어떤 편견과 오만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한 주일 동안 전해진 각자의 해석을 한데 모아 이제 '공동의 해석'을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집주인을 통해 일으키신 사건은 이런 메시지입니다.
'너희가 정진할 영성 훈련의 터전을 새로운 곳에 마련하라!'
우리는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 50평의 영성 훈련 공간을 마련할 것입니다. 그곳은 우리 모두의 영성의 진보를 위하여 정진 모임을 가질 수 있는 먹고 훈련하고 누울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월례 모임이나 지역별 정진 모임이 가능해 지겠지요.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분을 통하여 땅을 빌려주시겠다니 우리는 전세금으로 집을 짓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의 보증금이 천 사백 만원이니 그 나머지야 이 일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아버지께서 채우시겠지요.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최상의 해석'을 했고 남은 것은 그분의 약속대로 '그대로 되는 일'뿐입니다. 아마도 2000년 5월 말 즈음이면 우리는 그곳에서 입주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한가지의 경험을 놓고 해석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터무니없이 세를 올리라는 주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1)교회 문을 닫으라는 말씀인가? 2)주인이 억지를 부리니 싸우라는 말씀인가? 3)그 동안 싸게 있었던 것을 감사하라는 말씀인가? 4)새로운 터전을 준비해 놓았으니 그곳으로 옮기라는 말씀인가? 등등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해석'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내는 해석이 바로 '믿음의 분량'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최상의 해석'이 어떤 것인지 그 모범을 보이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도 그 예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마을 시몬의 집에서 머무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식사를 하고 계시는데 마리아라는 여자가 찾아와 300 데나리온이나 하는 값비싼 향유를 열어 예수의 머리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화를 내며 마리아를 나무랐습니다.
"어쩌자고 이렇게 비싼 향유를 허비하는가? 300 데나리온의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충분히 도울 수 있을 텐데."
300 데나리온이면 우리 돈으로 천 오백 만원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놀랄 만도 하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도리어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두어라. 왜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언제나 너희들 곁에 있어서 하고자하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입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가 든 옥합이 깨어진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고 난 뒤였습니다.
이미 향유는 예수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것은 다시 담을 수도 되가져다 팔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아무리 제자들이 그 향유의 값을 따지고 그것을 팔면 어떠어떠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노라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를 나무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걸요. 이제 남아있는 일은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입니다. 사건은 바꿀 수가 없지만 '해석'은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일어난 사건을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사건에 휘말려 보이는 것 밖에 보지 못하는 눈을 가졌다면, 예수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가장 아름다운 사건으로 해석하는,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상황을 순식간에 반전시켜 놓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가 정말 예수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사랑은 사람들이 보기에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마터면 정말 무모한 일이 될 뻔한 사건 속에서 예수는 사랑의 진실을 보았고, 그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거기에 최상의 해석-의미부여-을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해석은 그대로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 사건을 이야기하며 마리아의 이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성 모임 디아스포라의 최고 행복이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지신 분, 모든 사건의 최고 해설가-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예수를 선생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 지 그 진가를 알고 모시는 사람과 남들이 모시니까 덩달아 모시는 그런 사람들과는 천지차이지요.
그 선생님께서 디아스포라 영성 가족 모든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오늘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그 일을 놓고 염려하지 말아라.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해석을 선택하라. 그리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기도]
주님,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에 휘둘려 고통 속에 머물러 있던 지난 시간을 떨쳐내고, 최상의 해석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을 얻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것이 바탕생각이며 의식의 전환임을 알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지난 자료들을 들춰보다 디아스포라 초창기에 주보에 실었던 설교가 눈에 띄였습니다. 디아스포라 홈에 올리지 않았던 글이기에 금주의 설교로 이 글을 올립니다.^^ 요즘 제가 글쓰는 일에 많이 게을러진 것 같지요? 그래도 안달하지 않고 잘만 살고 있으니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내가 운전을 하면 더 빠를 것 같았으나
본문/마태복음 11장 28-30절
이번 주는 꽤나 분주한 날들이었습니다. 주일 오후에 출발해 마산에서 저녁집회를 인도하고 이튿날 새벽 참에 길을 나서 천안 호서대학에 들렀다가 예산에 가서 이현주 목사님을 뵙고 교회에 돌아오니 밤 10시가 되었습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 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온 동행이 있는 탓이었습니다.
그는 다름이 아닌 손 위 동서였습니다. 그는 한국 어느 신학대학에서 미국 드류대학교와 함께 하는 목회학 박사 과정에 입학을 했는데 공부에 필요하다며 노트북 컴퓨터를 필요로 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019 PCS 덕분에 새 컴퓨터가 생겼는데도 저는 아직 수년간 익숙해진 노트북을 사용해 디아스포라 주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제 노트북을 가져가겠다고 그날 밤 들이닥친 것이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새 컴퓨터와 친해지지를 못하니 이런 방법으로 친해지게 하시려나보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미 익숙해 진 노트북인지라 선뜻 내줄 마음이 생기지를 안았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자신이 필요하다며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는데 저는 장성한 딸 시집보내는 어미 심정으로 노트북을 바라보았습니다.
'참 수고했다. 네 덕분에 내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구나. 고맙다. 잘 가서 잘 살아라'
그는 밤늦게 까지 노트북에 들어있던 문서들을 새 컴퓨터에 옮기는 작업을 했고 거의 밤을 지샌 채 이튿날 아침 8시가 되어서야 집을 나섰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게 소중했던 또 하나를 하나님께 되돌려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저는 그를 역에까지 배웅을 한다고 차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아무래도 마을 버스를 기다려서 역에까지 가는 것보다야 이게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지방 사경회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아침 10시이니까 시간이야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5분이면 다녀올 줄 알았던 온수역을 자그마치 1시간이나 걸려서야 다녀왔으니 말입니다.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인지 조차 제대로 모르니 저는 아직도 촌놈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 생각이 됩니다.
저는 9시가 조금 넘어서야 집에 되돌아 왔고 서둘러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집을 나서니 9시 40분이었습니다. 사경회가 열리는 오류동교회에 10시까지 가기에는 너무나 벅찬 시간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제 머리 속에서는 차를 가지고 가는 일과 마을버스를 타는 일 중 어느 것이 빠를 것인가를 계산 하다가 끝내는 마을버스를 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 10여분쯤 기다리더라도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5분 남짓 시간이 흐른 후에 마을 버스가 왔고 저는 쫓기는 마음으로 차에 올랐습니다. 성공회대학교 앞을 지나 경인로에 접어드는데 편도 5차선 도로는 승용차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차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텅- 빈 차선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버스 전용 차선이었지요. 마을버스는 단 5분만에 저를 동양엘리베이터 빌딩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도저히 시작시간에 맞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저를 마을 버스는 5분이나 여유 있게 목적지에 데려다 준 것입니다.
저는 거리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들고 여유를 부리며 횡단보도 앞에 섰습니다. 자가용 승용차들이 횡단보도마저 점유한 채 꼼짝 않고 서 있었기에 저는 차들의 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디서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소리가 저에게 들려졌습니다.
"봐라! 네가 너를 운전해 가는 것과 내가 너를 운전해 가는 것, 어느 것이 너를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게 할 것 같으냐?"
저는 건널목을 다 건넌 후 멈춰서있는 자가용 승용차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렇게 도로 위에 멈춰 서 있는 사람들도 딴에는 빨리 잘 가보겠다고 선택한 방법일 것입니다. 이어서 또 한 소리가 제 마음에 들려졌습니다.
"내가 너를 사용하는 것과 네가 너를 사용하는 것, 어느 편이 너를 더 잘 사용하겠느냐?"
저는 지금까지 적잖은 경험을 통해서 나름대로는 잘 해 보겠다고 한 것들이 얼마나 일을 그르쳤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수년 전 교회의 얼크러진 문제를 풀어보려고 할 때에 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자네가 유능해 지는 만큼 하나님께서 무능해 지시고 자네가 무능해 지는 만큼 하나님께서 유능해 지시는 것이라네. 자네가 문제를 풀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욱 꼬일 걸세.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걸리적거리며 훼방이나 놓지 말고 좀 비켜 드리게. 그분이 일하실 수 있도록 말일세."
저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에 말씀대로 해 보았고 그 덕분에 얻은 자유와 감동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그와 같은 말씀을 들었으니 이는 분명 근자에 살아가는 저의 꼬락서니가 한심하고 딱하셨던 모양입니다.
사실 요즘의 제가 그렇습니다. 디아스포라 영성 모임을 놓고도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도 하고 저만큼 앞서서 잔머리를 굴리기도 합니다. 어쩌다 다른 교회의 강단에라도 서게 되면 내 입을 통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설교를 잘 해보려고 애쓰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건 설교를 마치고 난 후 사람들이 저의 설교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 가에 관심을 쓰고 있는 저를 보면 단박에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맡겨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웬걸요! 아직도 저는 이 모양입니다. 이렇게 기회만 생기면 제가 주인인 양 저를 운전하려고 드니 저의 주인이신 하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오죽 답답하실까 싶습니다.
지난여름 수련회 기간 중 영성 모임 디아스포라에 관해 이현주 목사님께 말씀 드렸을 때 그분이 제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께 한 번 맡겼다고 다 되는 게 아냐. 순간순간 되찾아 오거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네. 깨어있고 또 깨어있게."
그런데 이 깨어있는 것마저도 제 힘으로 할 수 없으니 도대체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 것은 저의 친절한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저를 깨우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내가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분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운전을 하면 훨씬 빠를 것 같았는데 도리어 그 반대로 그분이 운전하시는 차에 몸을 실었더니 제가 가고자하는 곳에 훨씬 먼저 도착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제딴에는 빨리 가려고 선택한 것이 도리어 먼길을 돌게 하고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너무나 어렵고 멀어 보이는 길이 도리어 가장 빠른 길임을 다시 한번 깨우쳐주시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는 주님께서 버스 운전사의 모습으로 저를 찾아오셨던 것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
저는 오늘의 이 본문 말씀에서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여보게, 자가운전을 하느라 수고가 많네. 이제 그만 자네 차에서 내려 내가 운전하는 버스에 오르는 게 어떻겠나! 자네가 가고자 하는 곳에 내 편히 데려다 줌세."
1.우리 삶을 짓누르는 중압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는 요즘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행복하십니까?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진정 행복하십니까?"
저는 유감스럽게도 서슴없이 '예'라고 대답하는 분들을 얼마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고통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저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데에 모든 고통의 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것이란 다름 아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벌써 몸의 구석구석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IQ는 200이상으로, 다리는 롱다리로, 얼굴은 인기 탤런트보다 더 멋지게, 가슴과 허리, 힙 사이즈는 미스코리아처럼 모조리 뜯어 고쳤겠지요. 세상에는 아픈 사람도 장애인도 없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단 말입니다.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내가 내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나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겠지요. 내 것이라 할 '나'가 없거늘 나의 소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내 것이 아님을 깨닫기까지는 계속해서 '자기 것 만들기 놀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해 보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마다 그들은 짜증스러워 하고 미워하며 스트레스로 밤잠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다른 이들을 마음대로 해 보겠다고요?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자기 마음에 맞도록 뜯어고쳐 보겠다고요?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주변 사람들을 내 마음에 들도록 바꿔 놓으면 행복해 질 거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을뿐더러 삶의 중압감과 질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죽음의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겠지요.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님을, 자신의 주인이 따로 있었음을 말입니다.
2.참된 쉼을 얻으려면 예수의 가르침을 쫓아라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인이 자기가 아님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이 염려할 일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쉼"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말씀은 자신이 온전히 부정되어 더 이상 자기 것이라고 고집할 자아가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고 또 아무 것도 붙잡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칫 겸손하다라는 말을 겸양을 떠는 것과 비굴함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겸손이란 비워질 대로 비워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내 멍에를 메고"라는 말씀은 "예수의 가르침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가르침대로 해 봄으로써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몸으로 하는 공부이지요.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체험을 통한 앎"이라는 말이 됩니다.
말씀을 다시 풀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비울 대로 비워 더 이상 '나'라고 고집할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내게는 오직 아버지와 그분의 뜻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때에 나는 비로소 참다운 쉼과 행복을 만났다. 나는 내가 누리는 그것을 너희에게도 주고 싶다. 만일 너희도 그것을 얻고 싶다면 내 가르침대로 해 보아라. 그러면 너희도 그 쉼이 무엇인지, 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3.예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참된 쉼과 행복을 주는 예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 하면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지식인과 신학자들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 하셨겠지요. 예수의 가르침을 세리와 창녀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요즘 설교 원고를 쓰고 예수어록을 해설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점점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자꾸만 되묻게 됩니다. 혹 그렇게 느끼신다면 가차없이 저의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그분의 가르침만 보십시오. 문득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한 신학자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주님 앞에 가셨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는지 물으셨습니다.
"저는 성서신학을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강의도 했고 주님의 가르침을 해설하는 주석 책도 출판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팔렸는데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시켜 그 주석 책을 찾아오도록 했습니다. 베드로는 끙끙거리며 한 질의 주석 전집을 들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중 한 권을 뽑아들고 한참을 뒤적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런 말도 했었냐? 도무지 어려워서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구나. 이 주석 책을 해설하는 해설서가 또 하나 있어야겠어."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쉽고 간단한 가르침은 바로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음을 알아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 곧 자기 인생의 참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자가 운전을 그만두고 아버지께서 운전하시는 거대한 우주버스에 몸을 싣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쉼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디아스포라 영성가족 들이여!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시키시지 않습니다. 언젠가 공보처의 신지식인 CF에 출연한 한 개그맨 영화감독은 '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가르침이 한없이 어려울 것이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가르침이 한없이 쉬울 것입니다.
[기도]
주님, 우리는 지금 참된 쉼을 찾아 방황합니다. 인생의 자가 운전을 그만두고 아버지께서 운행하시는 완전의 세계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고통스러운 인생이 아니라 행복한 인생이 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읽을 말씀/요한복음 15장 14-15절
몇해 전 여름, 한 모임에서 주최하는 여름 수련회에 후배 전도사님 내외와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껏 영성에 관한 관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었고 또 지금도 적잖은 시간을 영성훈련에 할애하고 있는 분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참 좋은 도반이었기에 서슴없이 그 모임에 함께 가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둘째날 밤 시간이었습니다. 공식 모임을 끝내고 우리는 마당가에 설치한 텐트 옆에 둘러앉았습니다. 준비한 가스등에 불을 밝히고 커피를 끓여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별빛마저 쏟아질 듯 낮게 내려앉은 참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그 밤 후배 전도사님은 자신의 오랜 화두 하나를 털어놓았습니다. 함께 있던 우리 모두는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심각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화두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다 싶어 그 일을 시작해 보면 얼마가지 않아 시들해지고 맙니다. 차라리 누군가가 '너에게는 이 일이 어울려! 그러니 이렇게 해봐'라고 시켜 준다면 그건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한 분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저도 그래요. 차라리 누군가가 시켜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도 잘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구도 저를 대신해서 선택해 줄 수는 없겠지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저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몰라요."
그날 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게 뭔지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를 때 자신을 통해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깨닫는 것과 같은 일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체험적으로 알기까지는 참으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아도 몸으로 믿어지지는 않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의심없이 믿어진다면 세상에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겠지요. 염려할 것도 걱정할 것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난 추석 때였습니다. 그 여름밤에 후배 전도사의 말에 맞장구를 쳤던 사람이 저희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시키는 것은 잘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시키는 것에 대로 잘 하기는커녕 판단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걸 깨닫는 순간 제가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 지요. 만일 시키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해봤다면 저는 이미 상당한 영성의 진보를 이루어 냈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시키는 대로 해 보려고 해요."
그가 말하는 '시키는 대로'는 '가르침대로'라는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곁에 '가르침'이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 '가르침'을 따르려는 우리의 '믿음'이 없었을 뿐이지요.
그의 고백을 듣는 동안 그가 얼마나 대견스럽고 아름다워 보였겠습니까? 그 덕분에 이렇게 설교할 '꺼리'도 하나 얻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자신 안에' 온전히 거하는 비밀을 설명하시고 난 후 마침내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친구'는 시키는 대로하는 '종'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자유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가 우리 안에, 우리가 아버지 안에' 온전히 머물러 있는 이 진리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 자유가 바로 완전한 행복이요, 완전한 사랑이며 아버지와의 하나됨입니다. 이 자유가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르침은 모두 '완전한 자유-행복, 사랑, 하나님 나라-를 얻는 방법'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날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친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더불어 3년을 사시며 충분한 가르침을 행하셨고 더 이상 남겨둔 비밀이 없다고 생각하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그 말뜻을 이해하고 예수의 '친구'로 살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성령'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지만 말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을 '자유인'으로 만드시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도 그분의 '친구'가 되어 '자유인'으로 사는 길이니까요.
1.나를 따라 오너라!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하신 첫 번째 일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 "나를 따라 오너라" 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베드로야, 야고보야! 지금까지 너희의 인생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너희가 진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겠다. 너희의 인생을 나에게 맡겨라!"
그들은 그 말에 그물을 팽개치고 예수를 따라 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생의 최우선 과제를 '예수를 따르는 일'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자신이 진짜 사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사는 인생은 헛된 것이며 무효』일 뿐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사 그들이 많은 업적을 남기는 인생을 살았다해도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로 살지 못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눅9:25)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신이 진짜 사는 이유를 알고자 함이요, 남의 흉내를 내는 인생이 아닌 자기가 자기로 살고자 함이요, 다시는 빼앗기지 않는 참행복을 얻고자 함인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의 말로 바꾸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2.참 자유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자유인-참 행복을 얻은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눅9:2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마11:29)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위의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를 부인하고'와 '내 멍에를 메고'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시키시는 대로하는 "종"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예수의 종이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에게는 자신의 의지랄 것이 없습니다. 어떤 판단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의 뜻에 따라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자기 부정이요 주인을 향한 절대 믿음입니다.
일본의 큰 선생이셨던 신란은 자신의 스승인 호오넨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비록 호오넨 성인한테 속아서 염불을 했다가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如是我聞' 중에서)
이 얼마나 엄청난 믿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간혹 참다운 선생을 만난다거나 그의 가르침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해 보기를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혹 그가 참다운 선생이 아니라면?'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더 깊은 세계로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작은 그릇으로 큰그릇을 담아내는 방법이 있습니까? 제자가 선생을 헤아릴 방법이 있습니까? 종이 주인을 판단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만이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종으로 부려먹는 악덕 노예주가 아닙니다. 세상에 하실 일이 없어서 우리를 이용하고 등쳐먹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분의 관심사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자유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종이 되라시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3.완전한 종이 됨으로서 얻어지는 자유.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가르침대로 해 보는 것입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해 보았을 때에서야 비로소 그가 말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 할 어떤 길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께서 시키시는 것을 단 한가지만이라도 제대로 해 보았다면 이미 그가 말씀하시는 구원과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며 이미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신명으로 넘쳐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요? 정말입니까? 정말 그의 가르침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대로 해보지 않습니까? 야고보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요, 그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그 가르침대로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비로소 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나 그것은 내 말이 아니요 예수의 말이 되며, 또한 예수의 말을 하나 그것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게 된 나의 말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와 내가 분리되지 않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인 상태이며 참 나인 "자유인"의 상태입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1-32)
사랑하는 디아스포라 영성가족들이여!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참 자유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십시오.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요,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 곧 그가 시키는 대로하는 것입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해보면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앎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 진리에 이른 사람, 그는 예수의 친구이며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이 되고싶습니까? 그렇다면 종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막10:44)
*홈에 올리지 않은 설교 원고가 있길래 올려 놓았습니다.^^
오전 9시/디아스포라 예배 집례 : 신앙의 家 長
오전 11시/영문밖에서 드리는 예배 집례 : 김종률 목 사
촛불 점화 / 집례자
찬양과묵상 / 다같이
모시는찬송 / 성령이여 오소서 눈감고 다같이(2회 반복)
예배를위한 기도 / 다같이
이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으나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여
늘 부족하고 모자라는 궁핍의 경험만을 불러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이 일러주시는 방법을 따라 믿음으로 구하오니
우리의 믿음이 아름다운 현실을 창조하게 하옵소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사
언제나 우리가 당신 안에 있다는 것과,
서로가 하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찬 송 / 485장 다같이
중보 기도 / 9시:가 족 중. 11시:김미현 집사
성 경 / 마태복음 22장 37절
말 씀 / 기도의 법칙-이렇게 기도하라! 김종률 목사
*이번 주는 여름휴가를 맞아 찾아오시는 손님들을 맞느라 설교 원고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홈페이지를 뒤지다 보니 어떤 분이 '초인생활' 가운데 한 부분을 발췌해서 올려놓으셨기에 그 말씀으로 이번 주 설교를 대신합니다.(김종률 목사)
"기도의 법칙이란 이미 얻을 줄로 믿고 구하면 받게 된다"(마가복음 11장 24절)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이미 받았다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법칙에 따른 올바른 기도 이지요.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우리가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알 것이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잘못 구했다는 것을 알아야만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잘못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네 마음(heart)을 다하고 목숨(soul)을 다하고 생각(mind)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7절)는 말씀은 기도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나 불신앙을 몰아내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주어졌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은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 되는(at-one-ment)데 있습니다. 온 세상이 자기를 반대할지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만 의지하는 흩어지지 않는 마음만이 기도의 응답을 가져옵니다. 예수께서는 이 점을 '나만으로는 할 수 없으나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무한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기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를 드릴 때는 완전한 상태를 구하는 긍정적인 말만하고 부정적인 말은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바라는 이상의 씨를 마음속 깊이 심고 다른 것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병을 고쳐 달라고 구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가 되기를 구할 것이고, 불화와 갈등에서 건져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삶이 되기를 구할 것이며, 궁핍을 면하게 해달라고 구할 것이 아니라 풍요로움이 넘치게 되기를 구할 것입니다. 벗어나고 싶은 불만족스러운 상황은 낡은 옷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에서 떼어 내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기쁘게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버렸으면 다시는 되돌아보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no-thing),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nothing).
마음속의 빈 공간을 무한한 선(善)이신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씨가 되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는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구하는 순간 이미 얻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구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풍요라는 생각을 지키십시오. 다른 생각이 들면 즉시 하느님의 풍요와 그 풍요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생각을 돌리십시오. 구한 대로 이루어 졌음을 믿고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구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고 있고, 또 좋은 것만 구했기 때문에 좋은 것만을 받아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십시오.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아뢰십시오. 그러면 영혼 중심의 비밀을 보시는 아버지께서 자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믿음을 가지고 구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그리고 올바른 기도의 법칙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또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하는 말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완전합니다.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물론이고,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까지도 아낌없이 부어 주셨고 또 부어 주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 문을 열어 쌓을 곳이 없도록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나 붓지 않나 나를 시험해 보아라."(말라기 3장 10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마음을 다하고(With All My Heart),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와 하나이며 만물의 근원적인 존재임을 제 마음 중심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전지 전능하시고 만물 속에 편재해 계신 영(靈)이십니다. 당신은 사랑과 지혜와 진리이시며, 당신은 지혜와 권능을 통하여 사랑으로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제 영혼의 생명이시며 저의 전 존재가 당신께 의지해 있습니다. 당신은 또 제 생각의 주체이십니다. 제 몸과 제가하는 일을 통해서 당신이 나타납니다. 당신은 제가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요, 끝이십니다. 제 마음속에 심어진 소원은 당신의 생명에 의해 활기를 띄게 되고, 때가 되면 믿음의 법칙을 통하여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영적인 차원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믿음의 법칙이 완성되어 현실로 나타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가 이미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2.목숨을 다하고 (With All My Soul)
아버지, 제가 지금 아뢰고 있는 소원은 제 영혼의 토양 속에 씨앗으로 심어졌고 활기를 부여하는 당신의 생명에 의해 싹이 터 현실로 활짝 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제 영혼이 사랑과 지혜와 진리이신 당신의 영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성령의 역사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구하는 저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영원한 젊음이 저를 통하여 나타나게 해주소서. 조화와 행복과 풍요로움이 넘치게 해주소서. 바라는 것을 보편적인 실체 세계에서 이끌어 내는 방법을 깨달아, 모든 선한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이것은 저 자신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3.생각을 다하고,(With All My Mind)
아버지, 제가 바라고 있는 것은 이미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제가 바라는 것만 생각합니다. 어두운 침묵의 대지를 뚫고 씨앗에서 싹이 터 나오듯이, 제 영혼의 보이지 않는 침묵의 영역 속에서 저의 소원이 형태를 띠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고요히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제 소원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지금 제가 원하는 것은 완전하게 꽃피어 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속에 계긴 아버지시여, 보이지 않는 곳에 게시면서 제 소원을 늘 이루어 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당신의 보화를 아낌없이 부어 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제 삶의 온갖 선한 소원을 만족시켜 주십니다. 저는 당신의 풍요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과 제가 하나이며 당신의 모든 자녀들 또한 당신과 하나임을 압니다. 당신의 모든 자녀가 이같이 깨닫기를, 그러므로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쓰고자 합니다. 아버지여,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4.힘을 다하여(With All My Strength)
아버지,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성령 안에서 이미 받았다는 사실과 이제 그것이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정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영혼과 육체를 다 바쳐 제가 바라는 소원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마음으로 바라는 것과 모순되게 행동이나 생각은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성령 안에서 저에게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운 것만을 소원하며, 그것의 완전한 이상을 영혼 속에 품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저의 이 완전한 소원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형태로 이루고자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제 안에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생명과 건강과 영원한 젊음을 주셨습니다. 조화와 행복과 풍요도 허락하셨으며, 보편적인 실체 세계로부터 원하는 것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알게 하셔서 모든 선한 소원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여러분의 잘못이지 결코 하느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도 요구를 되풀이하지 말고 엘리야처럼 자신의 잔이 채워질 때까지 끈질기게 잔을 들고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대적(對敵)과 주위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기도는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면 그 믿음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며, 여러분의 믿음이 알려질 것입니다."(초인생활 P185-190에서 발췌)
헌금 드림 / 찬송 498장 다같이
알림과사귐 / 다같이
결단과파송 / 다같이
집례자/ 성도 여러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넉넉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화를 누리십시오.
다같이/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아멘)
결단 찬송 / 495(1,3)장
축 도 / 김종률 목사
"모든 형제자매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고린도전서 16장 20절)
검은 성지(聖地)의 희망 만들기
1.
어빙스톤이 쓴 '빈센트 빈센트 반 고호'를 참 감명 깊게 읽었었다. 특히 고호가 본격적인 그림을 시작하기 전 보리나쥬의 광산 지역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이야기는 목회 초년병인 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고호가 마을의 회관을 빌어 시작한 교회가 어느덧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 근처의 커다란 창고 하나를 빌어 교회로 꾸미고 이전 예배를 준비하던 날. 그는 하루 종일 테리(폐탄 덩어리)로 쌓아 올린 산 꼭대기를 헤매고 있었다. 이전 예배 때에 사용할 연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고호는 땅거미가 낮게 깔릴 즈음에야 한 자루의 폐탄 덩이를 메고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약속한 예배 시간이 이미 임박해 있었다. 고호는 서둘러 난로에 불을 피우고 새롭게 단장한 예배당을 한바퀴 돌아본 후 이미 암기하다시피 한 설교 원고를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 읽었다. 고호가 옷을 갈아입고 예배당에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실내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준비해 놓은 의자에는 더이상 사람이 앉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도 검은 얼굴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고호는 몹시 상기된 얼굴로 예배를 진행했다. 다른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준비한 설교를 퍼부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해 있었고 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다씩의 축하 인사를 고호에게 전하고 모두 돌아갔다. 고호는 조금 느긋해진 마음으로 예배당을 정리한 후 자신의 하숙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예배 시간 내 흘렸던 땀을 씻기 위하여 겉옷을 벗고 거울 앞에 다가섰다가 고호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얼굴이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되어 검게 번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료를 준비하기 위하여 테리산을 헤매느라 얼굴이 숯검뎅이가 된 것도 모르고 깜빡 씻는 것을 잊은 채 예배를 집례했던 것이었다.
그제서야 고호는 무엇이 사람들을 그토록 감격하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다음 주일부터 고호는 예배에 들어가기 전 거울 앞에 서서 탄가루 분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비록 사람을 감동시키는 얄팍한 방법을 터득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목회와 설교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는 끝내 가장 열악한 막장을 찾아 탄을 캐는 전도사, 광부들과 함께 사는 구도의 길을 떠났다.
훗날 보리나쥬의 사람들은 그를 고호라는 이름으로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보리나쥬의 청년 예수'라는 이름으로 그를 기억했다.
참목회를 꿈꾸던 전도사 시절,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한 번 광산촌에서 목회를 하고 싶었었다.
2.
목회자와 교우들 간의 갈등으로 두동강 난 탄광촌의 한 교회가 담임자를 찾는다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부임을 결심했다. 고호를 읽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듣던 탄광촌,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부임 설교를 마치고 난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막장에 들어 갈 기회를 얻었다. 석탄 공사의 전기 과장으로 일하는 교회의 장로님 덕분이었다. 해발 630미터인 지상에서부터 약 1킬로미터를 수직으로 하강하는 바다 밑 225미터. 채탄은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탄을 찾아 암반을 뚫고 채탄을 위한 길을 내는 굴진 작업은 바다밑 450미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석탄 공사 정문까지 마중을 나온 장로님을 따라 작업복을 갈아입고 노란 안전모를 눌러썼다. 이마에서 쏟아지는 한줄기 불빛, 희망 없는 세상살이와도 같은 캄캄한 굴 속에서 이들은 아마 이 빛 한줄기에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아침 8시, 갑반 출근을 서두르는 채탄부들과 함께 인차(人車)에 몸을 실었다. 축전지(밧데리 카)가 끄는 인차가 수평 갱도를 달리기 20여분, 간간이 켜진 전등불 아래로 걷고 타고, 수평과 사선으로 이어지는 좁은 굴을 따라 바다밑 225미터의 채탄 현장에 도착한 것은 입갱한지 한시간여 만이었다.
평균기온 섭씨 31도. 서 있기만 해도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 내렸다. 급격히 낮아진 기압과 분진, 매캐한 가스 냄새로 골이 지끈거렸다. 이런 작업환경에서 탄을 캔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수년전 광부의 아내들을 모아 채탄 현장을 돌아보게 했었다고 안내하는 장로님이 입을 열었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집을 나가는 아낙들의 탈선을 조금이라도 막아 보자는 광산 당국의 배려로 이루어진 일이었지요. 한번은 광부의 아내들이 직접 채탄 경험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었습니다. 한나절을 진땀을 흘리며 채탄부와 함께 일하고 점심을 먹기 위하여 방독 마스크를 벗었는데 자세히 보니 한나절을 함께 일한 사람이 자기 남편이더라는 것입니다. 도시락을 앞에 두고 서로 부둥켜안은 두 부부는 통곡을 하며 그 길로 광산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아내들의 현장 견학은 영영 없어지고 말았지요"
"이젠 석탄 산업의 사양화로 모두 폐광이 되고 오갈데 없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으니...."
씁쓸하게 한 마디 덧붙이던 장로님은 끝내 말을 맺지 못했다. 문득 이사야 선지자의 남은 자 이야기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이들은 어떠한 희망으로 오늘을 지키며 살아가는 걸까?
"목사님, 채탄 한번 해 보실래요?"
내심 기다리던 일의 기회가 온 것이다. 장로님은 채탄 선산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이내 곡괭이 자루를 내 밀었다. 나는 넘겨받은 곡괭이로 거대한 탄 덩이를 찍어 대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들의 희망을 캐내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날마다 들려오는 소문이라곤 인원 감축이니, 석탄 수입이니, 머지않아 문을 닫느니 하는 소리뿐이니 이들이 여기서 내어 몰리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지난 겨울, 잠시 다니러 오셨던 윤구병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가 계시는 변산 반도로라도 세간을 챙겨 떠나야 한단 말인가?
장로님은 내가 캐낸 탄 덩이 중에 두 개를 주워 들었다.
"목사님, 이 중에 어느 탄이 더 좋은 탄 같습니까?"
하나는 유난히 매끄럽고 반짝거렸으며 다른 하나는 숯덩이 모양의 무광택 탄이였다. 나는 매끄럽고 반짝거리는 탄덩이를 가리켰다. 장로님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짝거리는 탄을 똥탄이라고 부르고 이놈을 괴탄이라고 부릅니다. 괴탄은 참나무가 탄이 된 것으로 화력이 좋은 양질의 탄입니다. 그러나 이놈(똥탄)은 제대로 연소도 안되는 질 낮은 탄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두들 똥탄을 선택하지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천박한 반짝임에 속고 사는가? 존재의 가벼움을 숨기기 위해 천박한 반짝거림으로 우리를 치장하고 사는가? 튀지 못해 환장을 한 이놈의 세상에서 말이다. 기실 반짝거린다고 모두 금(金)은 아니다.
곡괭이 자루를 주인에게 건네주고 지상으로 오르는 길에 한 선배를 생각했다. 바닷가에서 목회를 하며 몇 년 후 안식년이 되면 고기잡이 배를 타고 교우들의 삶터로 나아가겠노라던 괜찮은(?) 선배를.
그렇다. 여기 성지를 두고 또 어디로 성지순례를 떠난단 말인가? 반짝이는 눈알로 깊이 없는 우리네 삶을 꿰뚫어 보며 날 선 곡괭이로 죽음의 희망을 캐내는 광부 예수를 여기에 두고.
3.
박종희 씨의 결혼 주례를 했다. 이미 그는 신부와 수년을 함께 살았고 두살박이 딸까지 있었다. 그간 여러가지 사정으로 결혼식을 미루다가 이제서야 식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종희 씨의 형인 박종규 집사를 불러 결혼식 절차에 관해 의논을 했다. 순서지와 축가는 교회에서 준비하기로 했고 반주는 박집사와 가까이 지내던 이숙희 권사의 딸 선옥이가 맡기로 했다. 그런데 그만 반주를 의뢰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빚어지고 말았다. 박집사의 어머니인 김녹규 집사가 속해 있는 속회에서 금요예배를 드리던 중 반주 이야기가 나왔고 이미 반주가 의뢰 된 것을 알 까닭이 없는 김녹규 집사는 홍집사의 딸 보영이에게 반주를 맡기겠노라고 덜컥 약속을 해 버린 것이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금요일 새벽, 반주 문제로 시끌시끌하기에 진상을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문제였다. 생존을 위한 본능일까? 교인들은 이미 두패로 갈라져 선옥이가 햬야한다, 보영이가 해야 한다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급기야 내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먼저 이숙희 권사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권사님,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언니인 선옥이가 양보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권사는 펄쩍 뛰었다. 지금까지 장로네 가정이라고 당하며 살아온 게 어딘데 또 장로 딸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상처를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홍집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어차피 먼저 얘기 된 게 선옥이에게 였으니 보영이가 양보 해야 옳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홍집사의 대답도 단호했다. 자기는 그깟 것들한테 자존심 죽이며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재는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조금 번거롭지만 결혼식 자체를 연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피아노와 키보드를 함께 써서 둘 모두에게 반주의 기회도 주고 결혼식도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찬 축제의 자리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음향을 대여하는 집에 가서 키보드의 음량을 소화할 수 있는 스피커 두 대를 예약해 놓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막다른 길이었다. 둘 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혼식은 신랑 신부를 위한 자리가 아니냐고, 누가 무엇을 하면 어떠냐고, 우리야 그저 신랑 신부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 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반복해서 이야기 해도 그들은 콧방귀도 꾸지 않았다. 난감했다. 이제는 둘 다 하든, 둘 다 하지 않든 둘 중의 한가지라고 생각이 됐다.
나는 박종규 집사를 불렀다. 이제는 어떻게 해도 욕을 먹을 수 밖에 없으니 혼주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한 사람을 취소 시키고 한 사람에게 단단히 약속을 해 두라고 일렀다. 결혼 준비로 분주한 사람에게 이런 불필요한 일로 마음을 쓰게 해서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그날 밤, 목사관은 전화벨 소리와 높아진 언성으로 가득 채워지고 말았다. 애꿎은 사모는 몇 시간씩이나 온갖 쌍욕들을 들어야 했고 그들은 모두 일방적인 감정만 퍼붓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밤 새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결혼식장으로 나아갔다.
선옥이도 보영이도 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1시. 신랑 신부는 하객들의 외로운 박수 소리에 맞추어 입장과 퇴장을 했다.
작년 겨울에 속초 청호동엘 갔었다. 시를 쓰시는 이상국 선생과 함께 밧줄을 당겨 건너는 갯배를 타고 갔다. 함경도 피난민들이 정착한 정호동, 그들이 사는 집들은 모두 낡고 허술했다. 간간이 해방 직후에나 보았음직한 루핑 지붕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임시로 살고 있는 것 뿐이라고 이상국 선생이 설명했다. 곧 돌아갈 수 있겠지 하며 그저 임시로 지낸 세월이 50년이었던 것이다.
청호동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곳 광산촌 사람들도 그저 임시인 삶을 하루 하루 이어가고 있는 것 뿐일 수도 있었다. 나야 운이 좋지 않아 여기까지 왔지만 막장까지 굴러 온 너희 부류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람에 대한 멸시, 상대적 우월감. 한 몫 잡으면 곧 이주할 것이라는 부평초잎 같은 꿈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여기에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머물러 있을 뿐.
이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견디지를 못한다. 상대방이 누구이든 한바탕 해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터득해 낸 저마다의 생존 방법일까? 내일 따져봐도 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에겐 오로지 오늘만이 있을 뿐이다.
4.
교회의 석축 공사 둘째날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한바탕 싸움판이 벌어졌다. 내일 단합 대회를 갖기로 한 제2여선교회에서 사전에 차량 운행 신청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차량 관리 위원장인 양 집사와 기사인 임 권사는 차량 운행 일지와 차량 사용 신청서를 작성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도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동의를 했다. 그때 느닷없이 곱지 않은 말로 이들의 대화에 끼어 든 것은 사회봉사부장 전 장로였다.
"그딴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어! 교회가 이따위로 냉랭하니까 그 딴것들을 따지고 있지."
"장로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발끈하고 나선 것은 임권사였다.
"그럼 안 그래? 그딴게 뭐가 필요해. 필요하면 쓰고 사후에 보고하면 되지."
"사회 봉사부에서나 그렇게 하세요. 남의 부서 일에 가타부타 하지 마시고요."
"뭐야?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 교회에서 돈 받고 일하는 주제에."
"교회에서 장로라고 말 그렇게 막 해도 되는 거야?"
둘은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멱살잡이라도 할 태세로 벌떡 일어섰다. 어이가 없었다. 이들 둘이 하루 이틀의 감정으로 이러는게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담임목사인 내 앞에서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됐다.
나는 남은 밥을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고 숟가락을 놓았다. 그대로 넘어가서는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두 분 다 이쪽으로 와 앉으세요."
나는 빈 탁자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전 장로가 나를 노려보았다.
"뭐하세요. 이쪽으로 와 앉으시라니까?"
"건방지게 누구보고 오라 가라 하는 거야? 오려면 당신이 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장로님, 지금 저에게 하신 말씀이십니까?"
"그럼 당신보고 했지 누구보고 해. 건방지게."
"건방지다고요? 그게 장로님이 목사에게 할 수 있는 소리입니까?"
"왜 못해! 당신이 목사면 목사지. 누구보고 오라 가라 하는 거야?"
둘을 화해시키고 타이르려 시작한 일이 엉뚱하게 불똥이 튀고 만 것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던 집사들이 나서서 장로님을 말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만 참고 있던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말았다. 문득 이들이 나를 담임목사로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건방지다고요? 내 지금까지 목회 하면서 그런 소리 처음 들어봅니다. 아무리 쪼개지고 목사 내 쫓은 교회라지만 당신들이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 동안 연회로부터 미움받고 지방 목사님들로부터 내돌림 당해도 내가 꿋꿋하게 당신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그래도 당신들이 나를 담임목사로 생각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군요. 나를 담임목사로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거기 까지는 그래도 내 할 말을 했다고 생각이 되었다. 아무리 막장에서야 위 아래 없이 반말을 한다고 해도 교회에서 만은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만 나는 다음 말을 무책임하게 내 뱉고 말았다.
"이제 내가 더이상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군요. 나를 담임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목회를 하겠습니까? 이번 주일날 이임 인사하고 떠나겠습니다."
"떠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누가 있어 달라고 붙들었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목사관으로 내려왔다. 뒤에서 들려 오는 소리들이 꿈결에서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내에게 누가 오더라도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을 때에는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몇 시간이든 그 속에 들어가 있었다. 밖에서는 여집사들이 울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내가 그들을 돌려보내는 소리가 들렸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술렁대는 소리가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 왔다.
'어디 속좀 타 보라지. 내가 당신들에게 얼마나 과분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나를 이렇게 대접해? 내가 갈 데가 없어서 당신들 같은 말썽꾸러기들과 입씨름이나 하고 있는 줄 알아, 고얀 것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그런 생각으로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런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느닷없이 귓전을 스치는 음성이 있었다.
"예? 건방지다고요?"
"그럼 네가 제대로 된 놈이라고 생각했냐? 글줄께나 읽었다고 무슨 선심이나 쓰듯 설교를 하고 예배 마치고 나면 혼자 흐뭇해하며 당신들에겐 과분한 설교였다고 오만 방자를 떨었잖냐?"
"그거야 이 사람들이 알아먹질 못하니까...."
"그래도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네가 배운 지식 나부랭이로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다니. 내가 너를 왜 여기까지 오라고 했는데, 네놈은 그건 생각지도 않고 교인들이 이러니 저러니 하며 시건방만 떨고 있으니. 내가 눈꼴이 시어서 한마디했다. 이 건방진 놈아."
나는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이상 물 속에 몸을 담그고 교인들의 속을 태울 수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차려 입고 금요 심야 기도회에 올라갔다. 교인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의 한마디 한마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격의 고백이었다.
그날밤 전 장로는 너무도 왜소해진 모습으로 담임 목사실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마주 잡았다.
아, 그러나 어쩌랴.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또다시 시건방을 떨고 있으니. 독자들이여, 부디 용서하시라.
(수년 전 '기독교 사상'의 요청으로 썼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이 글들은 이현주 목사님께서 사곡 골짜기에 계시며 쓰신 것들입니다. 디아스포라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자 이렇게 대신 글을 올립니다. 특히^^ 포항에 계시는 나눔님께 이 글을 띄웁니다.
쓸쓸함
선생님, 오늘 종일토록 참 쓸쓸했습니다.
알고 있다. 축하한다.
축하한다고요?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하루 종일 쓸쓸했다는 사실을.
그게 어째서 축하받을 일입니까?
무엇보다도, 네가 아직 살아있지 않느냐? 죽은 자는 쓸쓸할 수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내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니 축하할 일 아니냐? 그래, 온종일 그냥 쓸쓸하기만 했느냐?
왜 쓸쓸한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쓸쓸한지 알아냈느냐?
곁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전에도 사람 없는 데서 온종일 말 한 마디 없이 라디오도 듣지 않고 지내봤는데 그때엔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곁에 사람이 없어서 쓸쓸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만, 비 오는 날이 어디 오늘 하루뿐인가요? 결국, 왜 이렇게 허전하고 쓸쓸한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질문이 잘못되었으니 대답이 나올 수 있겠느냐? 나왔다 해도 엉터리였을 것이다.
질문이 잘못되었다고요?
무슨 일이 있을 때 그 일이 왜 일어났느냐-를 묻는 것은 그 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 맹인이었던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겠지? 사람들이 내게, 그가 왜 맹인으로 태어났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 때문도 아니고 저 때문도 아니고 다만 그에게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왜'를 묻는 대신 '어떻게'를 물을 때,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의미를 띄게 된다.
저의 쓸쓸함을 통해서, 쓸쓸한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또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절대로 무엇을 안다고 또는 무엇을 한다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너무나도 작고 못난 존재임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라. 만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조심 또 조심하여라. 참 좋은 생각을 하였다. 또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용숙이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사람을 여러 번 울게 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미안하고 후회스러웠습니다. 그 빚을 갚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지나치게 감상적인 발언으로 들린다. 이제 남은 세월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거라. 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暗)이라 하지 않았느냐? 용숙이도 너에게 진 빚이 있을 터이니 서로 갚으면 보기가 괜찮겠구나. 또 무슨 생각을 했느냐?
용숙이 뿐만 아니라 누구를 만나든지 지극 정성으로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이다. 또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생각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쓸쓸하냐?
모르겠습니다.
쓸쓸함도 너에게 온 손님이다. 지극 정성으로 대접하여라.
어떻게 하는 것이 쓸쓸함을 잘 대접하는 겁니까?
쓸쓸한 만큼 쓸쓸하되, 그것을 떨쳐버리거나 움켜잡으려고 하지 말아라. 너에게 온 손님이니 때가 되면 떠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