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자
(이사야 1:1-9)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 하였고
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섬기는 것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참되다’는 말은 ‘진실하다, 투명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행하실 일을 미리 말씀하시고 또 그와 같이 진행하십니다. 그는 인간을 살리실 때에도, 원수된 자들을 지옥에 멸하실 때에도 ‘이런 자는 살리라’, ‘이런 자는 망하리라.’ 하고 미리 말씀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십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기에 사람들은 그를 상상 속에 있는 철학적 존재로 생각합니다. 철학이란 쉽게 말해서 인간의 생각을 의미합니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생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신(神)이 아니고 실존하시는 신이십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세상이 직접 볼 수 있는 모습으로 현현하신 분입니다.
갓난아이는 생후 육 개월이 지나야 비로소 부모를 알아본다고 합니다. 그전까지 갓난아기는 눈을 뜨고 있어도 부모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반면 부모는 갓난아이일 때부터 자기 아이를 알아보고, 아이를 위하고 사랑합니다. 만일 부모가 없다면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에 이미 우리에게 살 길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자기를 보여주시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숨김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빛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 곧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인간의 시력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으나, 예수님은 인간의 눈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빛으로 나타난 분이십니다. 사람의 시력에는 한계가 있어 사람의 눈이 감당할 수 없는 빛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지 못했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 빛을 보고 눈이 멀었다가 사흘 만에 성령에 의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 곧 하나님의 빛을 봐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눈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한계입니다. 그 이상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빛으로 깨닫지 못하고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요 1:9-10).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 예수라고 하는 나사렛 사람을 보내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마침내 십자가에서 달려 죽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들어오는 자를 예수님과 똑같이 대우하실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홍수 중에도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가족들은 물에 가라앉지 않고 살아났던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와 같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미리 예언하시고 반드시 성취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실 일들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기독교가 종교와 다른 점은 예언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날 것과 예루살렘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되 그 전에 한 제자에게 은 삼십 냥에 팔릴 것이다라는 내용까지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예언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가 하실 일을 투명하게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그대로 이루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믿음, 곧 성경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예수님과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원받는 지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로 데려가신 일을 믿는 자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같이 살리라는 약속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양심보다 강하고 영원해,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면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의(義)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주신 믿음만을 의로 여기시고 그 의를 가진 자를 살리십니다. 그분의 의는 양심보다 강하고 영원합니다. 우리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무시하고 자기 의와 공로만을 내세웁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참으로 사랑 받고 신뢰 받고 존경 받는지를 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만큼 존중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온 월삭과 제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싫증을 내셨다고 했습니다(사 1:11-14).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만홀히 여기다’는 ‘경히 여기다, 소홀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히 여기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소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선물로서 복을 받자!
십계명의 첫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자존자시요, 창조자시요, 심판자시요,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공의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전에 인류에게 은혜로 아들을 보내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란 선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선물로 우리에게 아들을, 곧 믿음을 주셨습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는 거룩하지 못하니 행위로 복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복 받고, 은혜로 구원을 얻고, 은혜로 부활하고, 은혜로 승천해야 합니다. 은혜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공의로 인류를 다루실 것입니다. 축도가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도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은혜 받을만한 때가 지나가면 공의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자들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첫 번 계명의 의미,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나를 따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제자는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마 8:21-22). 사람들은 초상집에 갈 때에 검은 정장을 차려 입습니다. 이처럼 죽은 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하나같이 경건합니다. 또한 시신을 다룰 때도 얼마나 경건한지 마치 신(神)을 모시듯 조심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을 신을 대하듯 경건하게 대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만홀히 여깁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으레 장례식에 갈 때는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지만 예배 드리러 올 때에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또한 장례식장에 부의금을 가져갈 때는 깨끗한 봉투에 돈을 넣어 가져가지만 예배 시 헌금을 할 때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말라기 1장 8-9절에서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신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서 하나님께 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느냐며 불평합니다. 그날에는 많은 사람이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나이다!’ 하고 말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7:22-23). 누구든지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는 주님이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홀히 여기는 자에게 도움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에 중요한 약속이 생기면 예배는 뒤로 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에 소홀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사 1: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계명을 어긴 자를 하나님은 돕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자는 곧 첫째 계명을 어긴 자입니다.
매주일 연보를 미리 준비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중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물질 하나라도 경히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속여 내놓았을 때 베드로는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행 5:9)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천대에 이르지만 아비의 죄악은 삼사 대에 이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첫째 계명을 그대로 준행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일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첫째 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내 영혼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