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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장가들고 시집가다
1. 결혼인가 혼인인가?
혼례란 남자와 여자가 혼인해 부부가 되는 의식을 말한다. 혼례를 인륜지대사라 하여 인생의 출발점으로 여겼다. 그래서 혼례를 치르지 않으면 어른 취급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혼례를 하지 못하고 죽으면 상여를 탈 수도 없으며 부모에게 불효했다 하여 제사상도 받지 못했다. 혼례 때 평소 입지 않는 의관, 즉 벼슬아치들이나 입을 수 있는 관복을 입고 사모관대를 하는 것도 그만큼 혼인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을 두고 왜 결혼(結婚)이라 하지 않고 혼인(婚姻)이라 했을까? 혼(婚)이란 여자의 집이라는 뜻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든다는 말이다. 인(姻)은 여자가 의지하는 곳이란 뜻으로, 남자의 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혼인은 장가들고(婚) 시집간다(姻)는 말이 된다. 또 ‘장가(杖家)든다’ 함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살러 들어감을 뜻하기 때문에 여자의 부모를 칭할 때도 장인, 장모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혼(婚)’이 장가든다는 의미를 갖게 된 까닭은 저녁 때(昏-어두울 혼)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니 신랑을 맞는 행위가 여자 집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간에 신부 댁 부모를 지칭할 때는 혼(婚)이라 했으며, 신랑 댁 부모를 지칭할 때는 인(姻)이라 했다. 우리나라 헌법이나 민법 등 모든 법률에서도 결혼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혼인이라 한다. 남녀평등사상에도 이것이 옳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부에게 보내는 축의금 봉투를 쓸 때 흔히 축결혼(祝結婚)이라 쓰는 것은 신부에게 장가드는 것을 축하한다는 꼴이 된다. 축혼인(祝婚姻)이라 하는 것이 옳다.
2. 혼례 규범
중국 혼례 절차는 『예서』에 보이는 ‘주육례(周六禮)’와 주자가 마련한 ‘주자사례(朱子四禮’)가 있다.
주육례란 혼인의 여섯 가지 절차다.
① 납채-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고 신부 집에서 혼인을 받아들이는 일.
② 문명-혼인하기로 한 여자의 장래를 점치기 위해 어머니의 이름을 묻는 일
③ 납길-신랑 집에서 혼인날을 정해 신부 집에 알림.
④ 납폐-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예물을 보내는 일
⑤ 청기-신랑 집에서 택한 혼인날의 가부를 신부 집에 묻는 일
⑥ 친영-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
주자사례는 주자가례에 실려 있는 네 가지 혼인 절차다.
① 의혼-혼인을 논함
② 납채-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고 신부 집에서 혼인을 받아들이는 일.
③ 납폐-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예물을 보내는 일
④ 친영-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
우리나라 전통혼례는 고려 말에 들어온 주자가례가 조선 전기에 준용되면서 규범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정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내내 남자 집이 아닌 여자 집에서 혼례를 올렸다.
세속에서 행 할 때는 크게 의혼과 대례 그리고 후례와 우귀, 현구, 현구례, 근친으로 나눈다. 의혼은 혼담, 납채, 연길, 납폐를 모두 포함한 용어로, 혼례를 성사시키기 위한 절차다. 대례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 혼례를 올리는 것으로 초행,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신방, 동상례 순으로 진행한다. 후례는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난 후 시집에 와 시부모에게 인사를 올리는 절차로 우귀, 현구례(폐백), 근친으로 나뉜다.
1) 의혼(혼담. 납채. 연길. 납폐)
(1) 혼담-매파에 의해 간선
(2) 납채-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공식적으로 혼인을 청하고 신부 집에서 혼인을 받아들이는 일. 신랑 측에서 신부 집에 청혼서와 남자의 사주를 보낸다. 서식은 주소, 관직, 성명을 적고 간단한 문구로 혼인을 하게 되어 기쁘다는 뜻을 전한다. 사실상 약혼이다.
(3) 연길-납길과 같은 의미로, 신랑 측에서 천혼서나 사주를 보내면 신부 집에서 혼인날을 잡아 신랑 집에 택일단자를 보내는 절차다. 연(涓)은 ‘꼭 맞다, 고르다’라는 의미로 연길은 ‘길조를 고른다’라는 뜻이다. 또 길일을 점쳐 보낸다는 뜻도 있으며, 날받이라고도 한다. 신부 측에서 날을 받는 것은 여성의 특성에 따른 것이다. 신랑 신부 부모가 혼인한 달이나 조상의 제삿날, 삼복이 낀 달이나 짝수 달 등을 피했다.
(4) 납폐- 허혼서와 연길을 받은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혼서지(婚書紙)와 폐백을 넣은 함을 보낸다. 신랑 측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일종의 혼인 선물로, 민가에서는 예장(禮狀)이라 불렀다. 폐백을 보내는 것은 서로 공경하여 부부의 분별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남폐의 수량은 많아도 열 가지를 넘어서는 안 되고, 아무리 적어도 두 가지는 되어야 한다.
함에 넣는 예물은 지역과 신분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선물 목록을 적은 물목과 신부의 상·하의 두벌, 채단과 혼서지다. 혼서지는 “저의 *째 아들 **이 나이가 찼으나 짝이 없었는데, 소중한 따님을 아내로 삼게 해주시어 조상의 예로써 삼가 납폐의 예를 행하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쓴다.
함을 지고 가는 사람을 함진아비라 하는데, 대개 첫째 아들을 낳은 사람이 한다. 함진아비는 앞으로 나갈 수 있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는다. 밀고 당길 때는 팔로만 해야 한다.
2) 대례(초행,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신방, 동상례)-혼례식이다.
(1) 초행-혼례를 올리기 위해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는 것이다. 신랑의 친구와 숙부, 하인 등이 동행한다. 신부 집 근처에 도착한 신랑은 일종의 대기실에서 성복(盛服)을 한다.
전통혼례 때 신랑신부는 성복을 한다. 신랑과 신부는 1품 정승이나 대군과 부인의 옷을 혼례복으로 입는다. 비록 집안이 가난할지라도 고관의 복장을 하고 말을 타고 관청의 서리에게 청사초롱을 들려 신부 집에 갈 수 있었던 것은 혼례에 필요한 도구 등을 나라에서 빌려주는 관습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혼례 때 나라에서 혼례복을 비롯해 말이나 청사초롱을 들고 갈 하급관리까지 빌려주었다. 성복을 한 신랑이 신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부정을 없애는 뜻으로 신부 집 대문 앞에 놓은 짚불 위로 넘어간다.
(2) 전안례-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기러기를 바치는 것이다. 혼인날 말 탄 신랑 앞에 기러기 아범이 색실로 머리를 감은 기러기를 보자기에 사서 들고 간다. 신부 집에 도착하면 신랑이 기러기 아범에게서 기러기를 넘겨받아 신부 집에 바친다. 기러기를 바칠 때는 전안상이라 하여 상 위에 보자기를 펼쳐 놓고 그 위에 기러기를 올려놓으면 신랑이 절을 한다. 그러면 신부 어머니가 기러기를 치마에 싸서 신부가 있는 방 안에 들어가 신부 앞에 밀어 넣어 그대로 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또한 기러기가 날아갈까 봐 대청에 있는 쌀뒤주나 떡시루를 엎어 놓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혼례 때 쓰는 기러기는 신랑신부를 상징해 암수 두 마리로 알고 있지만, 기러기아범이 안고 가는 기러기는 한 마리다. 일반 가정에서는 닭을 기러기 대신 닭을 사용하기도 했다. 혼례에서 기러기를 주요한 예물로 사용한 것은 중국 후한시대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백호통의』에서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기러기가 때 맞춰 그 절기를 놓치지 않고 남북을 오가는 것에서 여자도 혼기를 놓치지 말아야 된다는 의미다. 또한 기러기는 나를 때나 멈출 대 행렬을 이루는 면에서 장가들고 시집가는 예에서 장유유서가 있으니 추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러기는 음양에 순응한다는 면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므로 기러기는 혼기, 질서, 신의, 음양에의 순응의 의미를 갖는다. 신랑의 맹세다.
(3) 교배례-신부가 초례청으로 나와 신랑과 신부가 첫 대면하고 서로 마주 보고 절을 하는 것이다. 교배상을 가운데 두고 신랑은 동쪽에 신부는 서쪽에 자리잡는다. 서동부서라 한다. 먼저 신부가 두 번 절하면 신랑이 답으로 한 번 절한다. 신부가 다시 두 번 절하면 신랑은 답례로 한 번 절한다.
(4) 합근례-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신랑과 신부가 청실홍실을 드리운 표주박 술잔에 술을 부어 마시는 의식이다. 신부가 먼저 입에 살짝 댄 것을 신랑에게 건네주면 신랑은 이를 받아 마신다. 답례로 신랑은 수모가 따라준 술을 입에 대었다 내려놓는다. 이렇게 두 번 반복한 후 셋째 잔은 서로 교환하여 마신다.
(5) 동상례-혼례를 마친 신랑 신부가 첫날밤 신방을 차리고 난 다음 날 저녁 신부 집에서 마을 청년들을 초대하여 대접한다. ‘신랑 다루기’, ‘신랑 달여먹기’라 한다.
3) 우귀-대례를 마치면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 간다고 한다. 신부를 태운 가마가 신랑 집 가까이 오면 사람들이 나가 목화씨, 소금, 콩, 팥 등을 뿌려 잡귀를 쫓는다.
4) 현구고례-혼례를 마치고 온 신부가 시부모님께 첫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이를 ‘폐백드린다’고도 한다. 신부가 집에서 준비해 온 대추, 밤, 육포, 닭, 엿 등으로 상을 차리고 시부모에게 큰절을 네 번 하고 나면 시부모가 덕담을 하며 대추나 밤을 며느리 치마 위로 던져준다.
대추는 신선의 선물로 장수를 뜻하며, 아들 낳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다.
밤은 까느라 정신없이 살라는 의미다.
엿은 입을 다물라는 뜻이다.
육포는 부귀의 의미다.
그 다음으로 시조부모와 시부모 형제들에게 두 번 절하고 손위 시숙 내외에게는 한 번 절한다. 시누이와 시동생과는 맞절을 한다.
신부는 신행 후 3일부터 부엌을 드나들며 살림을 시작한다. 시집에서 처음 짓는 밥은 친정에서 가져온 찹쌀에 팥을 넣어 지으며, 친정에서 가져온 반찬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대접한다.
신부가 시집에서 생활하다 친정에 처음 가는 것을 근친(覲親)이라 한다. 시집온지 사흘, 한 달, 또는 일 년 만에 간다. 물론 신랑이 동행한다. 여기까지 해야 혼례가 끝나는 것이다.
3. 혼례 시간
혼례는 저녁에 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혼례를 뜻하는 ‘혼(婚)’을 풀어보면 금세 납득이 간다. 남자(氏)와 여자(女)가 어느 날(日) 맺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女 ’만 떼어내면 바로 저녁을 뜻하는 혼(昏)자가 된다. 이처럼 저녁 무렵에 혼인을 행했기 때문에 황혼 혼(또는 어두울 혼 昏)자를 써 혼례(婚禮)라 한 것이다.
또 혼례를 저녁에 치렀음은 불을 밝히는 횃대나 초의 사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혼례 때 종친과 문무 1품 이하는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 집에 갈 때 횃불로 앞길을 밝히고, 신부가 가마에 타고 신부 집에 갈 때도 횃불로 길을 밝히도록 명문화했다. 오늘날은 초롱으로 바뀌었다.
옛날에는 물리적으로 혼례를 저녁 무렵에 치를 수밖에 없었다. 신랑이 신부 집에 가는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례는 자연스럽게 신시, 즉 오후 3시~5시 사이에 행하게 되었다.
또 음양으로 볼 때 저녁 무렵인 신시는 음기가 때에 맞아 만물이 타고난 성질을 부여받는 시기다. 또 만물이 그 형체를 완성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신시를 지나 유시(오후5~7시)가 되면 음양이 서로 같아져서 조화를 이룬다. 즉 12시인 오시에 가장 많아진 양기가 점점 소멸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음이 점점 성장하여, 신시가 되면 오시에 일어난 음이 3음으로 커졌다가 유시에 음양이 서로 같아진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혼례 시간은 벌건 대낮이 아닌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저녁 무렵이다.
어쨌든 부부의 결합을 ‘혼인’이라 한 것도 신랑은 저녁 때 신부를 맞이하고, 신부는 그를 따라 신랑 집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도 오후나 밤에 혼례를 치렀다.
4.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린 이유
고구려 사람들은 혼담이 성립하면, 여자 집 뒤에 서옥(?屋 사위서. 집옥)이라는 작은 집을 지었다. 이 서옥에서 동숙하며 자녀를 낳아 장성하면 비로소 처자를 본가로 데려간다. 이를 서유부가혼(?留婦家婚) 또는 남귀여가(男歸女家)라 한다.
고려시대에 와서도 이러한 풍속은 처가에 머무는 기간만 조금 짧아졌을 뿐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다른 의관문물은 중국 제도를 따랐으나 혼속만은 고유풍속을 지켜 쉽게 바뀌지 않았다. 중국은 우리와 달리『주자가례』에 준해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친영례를 행했다. ‘친영’이란 신랑이 신부 집에 와 신부를 데리고 본가에 가서 혼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통 혼속은 중국과 달리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음양의 원리에 따른다면 여자는 음이고 남자는 양이기 때문에 중국처럼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려와 본가에서 혼례를 치러야 맞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통 혼속에서는 신랑이 처가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아무런 의식도 없이 신부와 첫날밤을 보낸다. 둘째 날에는 처가 친척들과 신랑 친구 그리고 하객들을 위해 잔치를 벌인다. 셋째 날에 혼례상을 차리고 신랑 신부가 혼례를 올린다. 혼인식을 마치고 남은 음식을 갖고 신랑과 신부는 신랑의 집으로 간다.
조선시대 이전엔 일반적으로 남자는 서른에 장가들고 여자는 스물에 시집갔는데, 조선시대에는 남자는 보통 15세, 여자는 14세가 되면 혼인할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장가들고 시집가기도 했다. 나이 어린 신부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전의 혼인연령을 생각해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부 집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라는 것도 역시 설득력을 약하다.
혼인예식을 치루면 신부는 친정을 떠나 신랑 집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신부와 신부 집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스라엘도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5. 성서에서의 혼례
창세기 24장(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맞이하는 과정)을 참고하시오.
북방기마민족에게는 형수수취제로 부친/형님이 죽으면 아들/동생이 서모(庶母)/형수를 취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은 한족에게는 없었던 풍습으로 수많은 한족 신하들이 그 부당함을 아뢰었을 것이나, 황실 혈통의 풍습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으로 당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래의 형사수취제(형수수취제)는 한족의 왕조에서는 볼 수 없었다.
고구려에도 있었다.
첫댓글 한지훈 출석합니다
이성민 출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