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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김씨 약사
人物編
1.과거급제(科擧及第)
과거(科擧)는 각도(各道) 감영(監營)에서 행하는 향시(鄕試)나 중앙에서 행하는 생진과(生進科) 초시(初試)를 조흘강(照訖講)이라 한다.
조흘강에 급제하면 조흘첩(照訖帖)을 주는데 이것이 있어야 생 ․ 진과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된다.
이 조흘강을 초시(初試)라 하며 여기에 급제(及第)하면 초시(初試)라 불러준다. 각 지방에서 조흘강에 급제한 사람들을 4년 만에 한 번씩 과거를 보이는데 이를 식년시(式年試)라 하고 자(子) 묘(卯) 오(午) 유(酉)년에 시험을 보인다.
생원과(生員科)에서는 경서(經書)를 암송(暗誦)하게 하고 또 거기에 대한 뜻을 물어보는 시험이다.
시험관(試驗官)은 상시(上試)에 판서(判書)급, 부시(副試)에 참판(參判)급, 으로 암송(暗誦)을 들어보고 잘 외우면 통(通) ․ 약(略) ․ 조(粗) ․ 불통(不通)의 네 가지로 구분하여 통(通)은 2점, 양(略)은 1점, 조(粗)는 반점, 불통(不通)은 영점으로 하여 총 14점반 이상을 급제(及第)로 한다.
이 생원과(生員科)는 경서(經書)를 외우게 하므로서 강경과(講經科) 또는 치경과(治經科)라고도 한다.
진사과(進士科)는 제술과(製述科)라고도 하며 본과 시험에서 시관들이 임석하여 감찰(監察)들로 하여금 차작(借作) 차필(借筆)을 못하게 엄중히 단속하고, 제목(題目)을 내고 운자(韻字)를 정하여 시(詩)를 짓게 하고 시간을 엄수토록 명(命)한다. 이에 각자는 준비된 필묵으로 시를 지어 장지(狀紙)에 18수(首)를 써서 봉하여 시관에게 주고 퇴장한다.
이에 시관(試官)들은 글만 잘 지었으면 上上 ․ 上中 ․ 上下 ․ 二上 ․ 二中 ․ 二下 ․ 三上 ․ 三中 ․ 下下 로 정한뒤 상상은 9점, 하하는 1점으로 등분하여 채점한다.
생원(生員) ․ 진사(進士) 각 100명씩 200명을 뽑아 발표한 급제자 발표를 방(榜)이라 하였다.
이 생(生) ․ 진(進)과에 급제한 자중 대과(大科) 즉 문과(文科)에 응시하려는 자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을 허가하였고, 문과에 응시하려면 우선 대과초시에 급제하여야 하는데 문과 초시에서는 성균관생(成均館生)에서 50명, 한성(漢城)시에서 40명, 향시(鄕試)로는 경기(京畿)에서 20명, 전라도에서 25명, 경상도 30명, 강원도 ․평안도(平安道)에서 각 15명, 황해(黃海) ․ 함경도에서 10명씩 뽑아 대과(大科)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이렇게 생진과에 급제한 사람으로 성균관을 거치지 않아도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여 총 240명이 대과에 응할 수 있다. 대과에 1차 시험을 초장(初場)이라 하고 경서(經書)를 암송시킨다.
2차 시험을 중장(中場)이라 하는데 이때는 시부(시(試賦)를 짓는데 경서 암송에 자신 있는 사람은 초장(初場)에 응하고, 시부(試賦)를 짓는데 자신 있는 사람은 중장(中場)에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 대개 초장에 응시하여 낙제한 사람이 중장(中場)에 응시하여 급제를 노리는 것이다. 이에 제1차 초장(初場)에서 16명, 제2차 중장(中場)에서 16명 그리고 양장(兩場)에서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합격권 내에 들지 못한 한 사람을 양장시관(兩場試官)이 회합하여 선정하는 것을 생획(生劃)급제라 한다.
이렇게 하여 대과급제자(大科及第者) 33명을 선정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대과급제자가 선정되면 최후로 전시(殿試)를 거친다. 전시(殿試)는 王이 친히 임석하여 간단(簡單)하게 대책(對策)이나 표(表) ․ 전(箋) ․ 잠(箴) ․ 송(頌) ․ 제(制) ․ 조(詔) 중 어떤 것이나 일편(一編)만 짓게 하여(지금의 논문과 같은 것) 전시(殿試)의 33명의 등급(等級)을 甲 ․ 乙 ․ 丙 삼등급(三等級)으로 하고, 제일 잘한 사람을 甲이라 하여 3명, 다음 乙이라 하여 7명을, 다음 丙이라하여23명을 정하였는데 이를 甲 ․ 乙 ․ 丙 삼과(三科)라 한다
전시에서 갑과(甲科)에 급제한 첫째를 장원랑(壯元郞)이라 하고, 둘째는 방안랑(榜眼郞), 셋째를 탐화랑(探花郞)이라 한다. 그리고 생진(生進)과에 급제한 사람에게는 그 증서(證書)를 백지(白紙)에 써 주었음으로 백패(白牌)라 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면 홍색지에 써주어 홍패(紅牌)라 하였다.
이외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증광과(增廣科) 또는 별시(別試), 王이 성균관에 행차하였다가 성균관 유생(儒生)에게 시험을 보니 알성과(謁聖科) 이 알성과에 장원을 하면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불리우는 것이 통례이다.
2 무과급제(武科及第)
무과(武科) 초시도 문과 초시와 같이 중앙(中央)과 각도 감영(監營)에서 행하는데 중앙(경기 포함) 70명, 경상도 30명, 충청 ․ 전라도 각 25명씩, 강원 ․ 함경 ․ 평안도에서 각 10명씩 선발하여 청 190명을 선발하여 전시(殿試)에 응시토록 하여 활(弓)을 쏘게 하여 제일 잘 쏘는 무사(武士) 3명을 가려 갑과(甲科)에 급제케 하고, 그 중 첫째 가는 무사를 장원랑(壯元郞), 둘째를 방안랑(榜眼郞), 셋째를 탐화랑(探花郞)이라 하고, 그 다음 을과(乙科) 5명, 병과(丙科) 20명을 각각 선정하였다. 이상 문과와 무과는 양방(兩班)집 자제들에게만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며, 중인(中人) 이하는 응시할 수 없었다.
그 외 잡과(雜科)가 있는데 이는 중인(中人)들에게 보이는 과거이다. 여기에는 외국어(外國語)의 역과(譯科)로 초시에 한학(漢學=中國語) 23명, 몽학(蒙學=蒙古語) ․ 왜학(日本語) ․ 여진학(女眞學) 등은 각각 4명씩 뽑아 다시 복시(覆試)에서 중국어 역관 13명, 그다음 몽고어, 일본어, 만주어 역관(譯官) 각 2명씩을 선발하였다.
그 외 의과(醫科), 산과(算科), 음양과(陰陽科), 율과(律科) 등이 있었는데 모두 초시(初試) 복시(覆試)의 구별이 있었다.
인물고(人物考)
고려조
고려 국자감 사문박사 섬한공(高麗 國子監 四門博士 暹漢公)
시조 박사공은 신라 대보공(大輔公) 알지의 후손으로 왕손(王孫)이다. 두 형제분이 왕에게 직간을 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형은 북빈경(지금의 강릉), 아우는 시염성(지금의 연안)으로 귀양을 갔다. 공은 시염성으로 귀양 간 아우의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고금(古今)의 서적을 통독하고, 성현의 가르침에 전심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다 알게 됨으로 관서지방에서 그 이름을 떨치었다. 그곳 안찰사의 권유로 서울(개성)로 올라와 당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다음해 문과를 을과로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에 올라 천하의 준재들을 관하에 모아 학문 권장에 진력하여 유학이 날로 흥왕하고, 문풍을 크게 떨치신 대석학이시다.
배위는 신번진씨(新繁陳氏)요, 상서좌복야(常書左僕射) 진 극유(陳 克柔)공의 따님으로 아드님 3형제분을 두시었는데, 큰 아드님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준구(俊龜)공이시고, 둘째 아드님은 한림학사(翰林學士) 준용(俊龍)공이시며, 셋째 아드님은 대장군(大將軍) 준린(俊麟)공이시다. 묘소는 세월이 유구하고 그 많은 병화(兵火)등으로 실전되어, 1961년 5월 16일 4세 찬성사(贊成事)공의 묘역인 통영군 도산면 원산리에 종원들의 뜻을 모아 제단을 봉축하고, 향화를 받들어 오던 중, 1998년 산하(山下)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대종회 총회의 의결로 통영에서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6세 나복산인(蘿葍山人)공의 묘역에 유품으로 장례하고 분묘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묘하에 경원재(敬源齋)를 건립하여 향화를 받들고 있다.
단비문(壇碑文)은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안동후인(安東后人) 김용진(金容鎭)이 찬하였고, 묘비문(墓碑文)은 건축추진위원 사균(思均)의 찬으로 건수하였다.
판도판서 경성공(版圖判書 景成公)
3世 경성(景成)공은 대장군(大將軍) 준린(俊麟)공의 아드님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시고 연고(年高)하여 퇴관하시었다.
배위 고성박씨(固城朴氏)는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 박서정(朴瑞廷)공의 따님이시다.
아드님 형제분을 두시었는데 큰 아드님은 전공판서(典工判書) 비(裨)공이시고, 둘째 아드님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우(祐)공이시다. 묘소는 실전되어 기록이 없어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경원재(敬源齋) 경내에 제단을 봉설하고 경원재 대제에서 시제를 봉행한다.
문하찬성사 우공(門下贊成事 祐公)
4世 우(祐)공은, 판도판서(版圖判書) 경성(景成)공의 제 2자로 출생하여 고려조의 문신으로 충숙왕(忠肅王)때 사간(司諫)을 거쳐 조간(趙簡) 김태현(金台鉉)공 등과 같이 전선(銓選)을 맡았고, 비서윤(秘書尹)을 거쳐 공민왕 18년 기유(己酉) 문과에 급제하고, 동지공거(同知工擧)를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역임하시었다. 후에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증직되었다.
배위 의창황씨(義昌黃氏)는, 감찰규정(監察糾正) 황규(黃珪)공의 따님으로 아드님 형제분을 두시었다. 큰 아드님은 지단주사(知端州事) 광택(光澤)공이고, 둘째 아드님은 밀직제학(密直提學) 광후(光厚)공이시다. 건위 묘소는 통영시 도산면 원산리에 모셨고, 배위 묘소는 고성군 대가면 연지리에 모시었다.
건위 신도비는 통영 원산리 마을 앞에 1984년 10월 13일 연안김씨 세사편찬위원회 종갑(鍾甲)공이 찬하고, 글씨는 전 공주군수(公州郡守) 전 대종회장 수영(壽泳)공이 쓰고, 22대손 경시서령공파 해주종중 관선(寬善)공의 헌성(獻誠)으로 건수하였다.
밀직제학 광후공(密直提學 光厚公)
5世 광후(光厚)공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우(祐)공의 제2자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시었다.
배위 정선택주(貞善宅主) 동복오씨(同福吳氏)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오련(吳璉)공의 따님으로 아드님 형제분을 두시었다. 큰 아드님은 태상록사(太常錄事) 완(浣)공이시고, 둘째 아드님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 나복산인(蘿葍山人) 도(濤)공이시다.
묘소는 개성부(開成府) 덕달원동(德達院洞)에 모시었으나 세월이 유구하고 그 많은 병화(兵火)와 나라의 변천등으로 실전되어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죽성부인(竹城夫人) 묘 상단에 제단을 봉설하고 경원재 대제에 시제(時祭)를 봉행한다.
나복산인 도공(蘿葍山人 濤公)
6世 도(濤)공은 밀직제학 광후(光厚)공의 제 2자로 출생하여 천품이 총명하고 행의(行儀)가 바르시어 목은(牧隱)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고, 공민왕 11년(1362) 청주에서 시행한 문과에서 제2등으로 급제하여 전주(全州) 사록(司錄)을 비롯하여 어사(御使) 등을 거쳐 문하부 정언(正言)에 올랐다. 1370년 명나라 제과에 박실(朴實) ・유백유(柳伯濡) 선생들과 같이 천거되어 명나라 금릉(金陵)에서 총 급제자 120명 중 25등으로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구현승(丘縣丞)을 제수받고, 백미 100석・ 황견(黃絹) 10필・백릉(白綾) 10필과 오고석갑(烏古昔甲) 1구를 하사받았다. 2년여 봉직하고 환국할 때 명천자(明天子)는 공작족자(孔雀簇子) 두 폭과 대(竹)를 그린족자 두폭을 하사하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환국하니 공민왕은 크게 영접하고, 우사간(右司諫)에 발탁하였다. 후에 예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성균관 사예(司藝)로 있을 때에, 왕이 친서로 “김도장원 나복산인(金濤長源 蘿葍山人)” 여덟 자를 써서 하사하여 공이 사시는 고장을 팔자동(八字洞)으로 개명케 하였다.
우왕 2년(1376) 우사간・우부승지를 거쳐 지신사(知申事)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배수하였다. 이때 이인임(李仁任) 일당이 배명부원론(背明附元論)을 주장하면서 항원유학자(抗元儒學者)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때마침 공의 노비가 연경궁(延慶宮)터의 주춧돌을 가져가려다가 사헌부 관헌에게 붙들려 이인임이 대관(台官)들을 시켜 공을 불경죄(不敬罪)로 탄핵하고, 왕에게 극간하였으나 민심이 두려워 왕은 죄주지 않았다. 이때 양백연(楊伯淵)의 옥사가 일어나니 이인임 일당은 공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시켜 모진 형벌을 가하였다. 세 번이나 기절을 하시다가 끝내 운명하시었다.
이때 문하 진사(進士) 10여인이 시신(屍身)을 호위하고, 그중 이종(李悰)이 공의 시신을 안고, 물에 들어가 씻은 후 옷을 갈아입히고, 두상(頭上)에 망(網)으로 동체에 얽어 매어 안치한 후 두 번 절하고 물러가니 세상 사람들이 의인이라 하였다.
묘소는 개성부 덕달원동에 모시고 증손(曾孫) 군수 세신(世臣)공이 개성 경력(經歷)때 표석을 세웠고, 17世 상원(相元)공이 개성 유수때, 영조3년(1727)묘소가 실전되어 황해도 도관찰사 상옥(相玉)공과 협의하여 팔자동에 유허비를 세웠고, 순조 16년(1816) 판서 선(銑)공께서 유수때 유허비에 비각을 세웠고, 고종30년(1893) 24世 판서 세기(世基)공께서 유수때 비각에 단청을 하였으며, 1916년 23世 찬정 사철(思轍)공의 발의로 비각을 중수하였으나 국토분단으로 50년간 왕래가 두절되고 1968년 11월 후예들의 뜻을 모아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배위 죽성부인(竹城夫人) 安씨 묘소와 쌍분으로 제단을 봉축하였다.
아드님 4형제분은, 큰아드님은 형조판서 후 개성유후사 유후 자지(自知) 문정공이시고, 둘째 아드님은 의정부 참찬 여지(汝知) 문익공이시며, 셋째 아드님은 예빈시윤(禮賓寺尹) 치지(致知)공이시고, 넷째 아드님은 황해도 도관찰사 겸 해주목사 학지(學知)공이시다.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 김도(金濤)
김 도(金 濤)의 자(字)는 장원(長源)이요, 연안부인(延安府人)이니, 공민왕 때에 대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에 보직되었고, 다섯 번 옮기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일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홍무(洪武) 4년(1371) 제과(制科-명나라 과거)에 합격되매 동창부구현승(東昌府丘縣丞)을 칙수(勅授)하니 도(濤)가 화어(華語-중국어)를 알지 못한다 하여 사직원을 내는 동시 또 어버이가 늙었으니 본국에 돌아가기를 청원한 결과 천자(天子)하 허락을 하였다.
드디어 돌아오니 王이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제과(制科)에 오른 자가 진실로 드물거늘 하물며 이 사람이 과거에 올랐고, 또 벼슬까지 받아 이름이 일세(一世)에 떨쳐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인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는데 내 일찍이 그 오는 것을 알아서 예(禮)로 맞이하지 못한 것이 한(恨)스럽다”고 말하고, 마침내 좌사간(左司諫)・에문관 응교(藝文館 應敎)에 발탁하였고, 누진(累進)하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으며, 王 이 손수“김도장원 나복산인(金濤長源 蘿葍山人)”이라는 여덟자를 써서 하사(下賜)하였다.
우왕 때 우사예(右司藝)에 제배(除拜)하셔서 삼사우사 김속명(三司右司 金續命)을 탄핵(彈劾)하여 유배(流配)케 하였고,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전직(轉職)하였으며, 지신사(知申事)에 승직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제배하였다.
도(濤)가 홍중선(洪仲宣)과 더불어 인물을 논평하였더니, 인임(仁任)이 그를 미워하였는데 때마침 도(濤)의 집 종이 연경궁(延慶宮) 옛 터의 돌을 가져 가다가 대리(臺吏-사헌부 하급관리)에게 붙들렸다. 인임(仁任)이 대간(臺諫)을 시켜 불경죄(不敬罪)로서 탄핵하여 국문(鞠問)을 하는지라. 환관 이득분(李得芬)이 도(濤)와 관련이 있어서 우왕에게 말을 하여 면직에만 그치게 하니 헌사(憲司)가 다시 들고 일어나 먼 지방으로 유배(流配)시키기를 청하매 득분이 또 그 현상(現狀)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양백연(楊伯淵)의 옥사(獄事)가 일어나매 도(濤)를 연계(連繫)시켜 모진 고문을 하니 기절하였다가 소생하기를 세 번 하였다. 마침내 거짓 자복을 하니 죽여서 머리를 저자에 효수(梟首)하고 그 집을 적몰(籍沒)하였다.
처음 도(濤)가 옥관(獄官)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무고(無辜)한 사람을 죽이면 도리어 그 앙화(殃禍)를 받을 것이다.’ 하니 옥관이 모두 척연(惕然-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양)하게 여겨 그 원통함을 알았다
죽음을 당하니 문하생(門下生) 진사(進士) 10여명이 문밖에 까지 따라와서 시신을 지켰으며 이종(李悰)이라는 자(者)가 있어 시체를 안고 냇물에 들어가서 그 피를 말끔히 씻고, 옷을 갈아입히고, 망(網)으로 두상(頭上)에 얽어서 동체(胴體)에 달아놓고 두 번 절하고 물러가니 세상 사람들이 의(義)로운 행실이라 하였다. 아들은 自 知, 汝知, 致知, 學知가 있다.
상찰찬(上札贊) 병서(幷書) (牧隱 李穡)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로 있는 도(濤)가 나에게 와서 청하기를, “시생(侍生)이 불초(不肖)한 사람이라는 것은 선생도 이미 아시고 잇는 처지이신바 아무 재주가 없는데 벼슬을 주시고 학문이 부족한데 고문(顧問) 자리에 두셨으며 마침내 넓은 은총을 입어 영화로운 직분에 까지 특진시키시니 진실로 만 번 죽어도 갚을 길이 없거늘, 이제 서연(書筵)에서 한묵(翰墨)하시던 나머지 또다시 성명(姓名)과 자(字)와 호(號)등 八字를 내리시니 배수(拜受)하고 돌아와 밤낮을 송구한 마음으로 지내는 까닭은 대저 어찌 남다른 은총이 이와 같이 극도에 달하였는가 하는 마음 때문이었기에 삼가 치장(治粧)을 받아 불초의 송덕(頌德)하는 시가(詩歌)를 받아 불초의 리름을 오래도록 전하고저 하옵는 바 선생께서 어찌 솔선해서 지어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나에게 도(濤)라는 이름을 주신 것도 선생님이요, 장원(長源)이라는 자(字)를 주신 것도 선생님이시며,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고 호(號)를 지으신 것도 선생님이 아닙니까? 바라옵건대 선생은 은혜를 끝까지 베풀어 주십시요.” 라고 하였다.
나 색(穡)이 엎드려 상(上)의 어찰(御札)을 살피오니, 상께서 때로 여러 신하에게 혹은 이름을, 혹은 자(字)를, 혹은 호(號)를 한꺼번에 써주신 일은 일찍이 없었으니 김군(金君)이 소망(所望)에 넘치는 경희(驚喜)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에 다시 한번 지난날 이름을 지어준 뜻과 만나게 된 내력을 기술하므로서 성덕을 칭송하고져 하는 바이다. 군(君)이 처음 진사가 되어 자작(自作)한 글을 바로 잡아 달라고 청하여 왔기에 그 글을 읽어보니 문채(文彩)가 아름다워서 문장가(文章家)의 기풍이 다분히 있었다. 입문한지 불과 열 달에 학문이 더욱 진취하므로 내가 심히 기뻐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지어 달라 청하기에 이름을 도(濤)라 한 것은 그 문장이 아름답기 때문이었고, 자(字)를 장원(長源)이라 한 것은 모든 근본(根本)을 알라는 경계의 뜻이었다. 그 후 과연 대과(大科)에 높은 등급으로 뽑혀 어사(御使)・정언(正言) 등을 거치는 동안 뛰어난 재능이 날로 빛났다.
명태조(明太祖)가 나라를 세운 후 금릉(金陵)에서 천하의 선비를 불러 대비(大比=科擧)를 보일새, 고려의 선비들이 바다 건너기를 두려워하여 움츠리고 피하거늘 군(君)은 홀로 태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내 글을 시험하리니 급제를 하고 못함과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천명(天命)이라. 어찌 응시할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과연 회시(會試)에 입격하고 또 다시 천자(天子)의 궁정에서 보인 대책(對策)에서는 二十五등이라는 높은 등급에 올랐다. 이때에 총 급제자 수가 백이십 명이었으니 군(君)의 재력(才力)을 가히 알만한 일이었다.
동창부구현승에 제수하니 사양하여 아뢰기를 “신이 말이 통하지 못하고, 또 부모가 노경(老境)에 있으니 돌아가서 어버이를 섬기도록 하여 주십시요” 하였더니 드디어 허락이 있어 곧 귀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참으로 훌륭하도다 하였다. 이로부터 특별히 두텁게 대우하셔서 지금의 어찰이 이와 같이 내린 것도 김군의 재주와 학문이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호를 나복이라 함에는 세 가지 까닭이 있다. 김씨는 본시 염주(塩州)사람이요, 외가(外家)는 동복(同福)이다. 별호 나복은 군의 부모(父母)가 살고 있는 곳인즉 군의 출생한 곳이다. 또 그 생김새가 신기(新奇)하지는 않으나 싫지도 않아서 사람에게 유익은 하되 해롭지 않으니 사람 같으면 족히 세상에 쓰일 만한 존재다.
군의 미목(眉目)이 설천민(偰天民)과 흡사하여, 어느 고관이 길에서 김군을 만나 설천민의 안부를 물으니 군이 짐짓 대답하는 체 하면서 물러갔다 하거늘, 듣는 자가 웃음을 지었다 한다. 설씨는 회골인(回鶻人-지금의 파키스탄 지방사람)이다. 그러므로 붕우들이 모두 군을 보고 이르기를 회골이라 하니, 회골은 본성이 깔끔하여 비록 의복차림은 단정하게 하나 능히 기호(嗜好)를 참고, 미식(美食)을 탐하지 않으며, 먹는 것은 나복(蘿葍)뿐인데 남겨서 버리는 법이 없으니 회골과 나복의 이야기는 이와 같은 데서 나왔다.
상(上)이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김도(金濤)는 설첩해(楔帖該)와 같다 하였는데 첩해는 천민(天民)의 숙부이다. 그런즉, 호(號)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한 것이 어찌 신(臣) 홀로의 뜻이라 하리요. 여기 김도장원 나복산인(金濤長源 蘿葍山人)이라 한 여덟자 친서(親書)는 세상에 드문 총광(寵光)이다.
무릇, 보필하는 신하로서 어찌 주상전하의 현신(賢臣)을 격려하시는 큰 뜻에 부응하도록 권면하지 않으리까? 필법을 궁구하고 성덕을 밝혀 네 번 절하고 송사(頌辭)를 사뢰나니
계절은 오직 맑고 향기로운데 군왕의 마음은 편안키만 하도다.
신하의 재능을 권장하는 생각이여 총애와 행복을 내리시도다.
엷은 서릿발은 희도록 깔려 있고 빛나는 이슬은 더욱 더 맑았도다.
붓끝의 위세가 감돌아 구를 적에 구슬은 진동하고 쇠북은 우는도다.
아름다운 별들은 맑은 하늘을 흐르는데 귀신이 유명에서 소리 없이 우는도다.
미묘함이 극치에 이르렀으니 말로는 그 형태를 이룰 수가 없고나.
성상(聖上)의 덕화는 흐르는 바람 같아서 그 스치는 곳곳마다 소리가 나도다
넓은 은혜가 금수에게도 미치나니 그대 벼슬 길에 있는 동안 이 말을 옳게 들으라.
조선조(朝鮮朝)
국구 의민 제남공(國舅 懿愍 悌男公)
13世 연흥부원군 제남(悌男)공은, 부사정(副司正) 오(祦)공의 제2자로 출생하여, 선조8년(157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등을 거쳐 현감 때(선조30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지내고, 둘째 따님 인목(仁穆) 왕후께서 왕비(王妃)로 책봉됨으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附事)에 올랐다. 외손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한다고 광해군과 이이첨 등의 무고로, 광해군 5년(1613) 게축옥화(癸丑獄禍)에 연루되어 큰 아드님 청주목사(淸州牧使) 내(琜)공과, 둘째 아드님 진사(進士) 규(珪)공, 셋째 아드님 증지평(贈持平) 선(瑄)공과 함께 4부자(父子)분이 참화를 당하시었다.
부부인(府夫人) 광주노씨(光州盧氏)는 제주도로 위리 안치되었다.
광해군 15년, 이귀(李貴) ・김류(金瑬)등의 의거로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신원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겸 영경연(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증직되고 시호를 의민(懿愍)으로 내렸고, 부부인과 전가속(全家屬)이 신원 복권되었다.
묘소는 임시 서산(西山)에 모시었다가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에 壬坐 합폄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王命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겸 대제학 신흠(申欽)공이 찬하고, 숭전대부 지돈녕부사(崇政大夫 知敦寧府事) 김상용(金尙容)공이 전서하고, 숭정대부 호조판서(崇政大夫 戶曹判書) 심열(沈悅)공이 비문을 썼다. 신도비와 사우(祠宇)는 마을 앞에 건립되었다.
왕후 인목대비(王后 仁穆大妃)
인목대비 김씨는, 선조17년(1584) 11월 병자일에 13世 제남(悌男)공의 둘째 따님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영민하고, 인자하며 사려(思慮)가 깊었고, 사리판단(事理判斷)에 정확성을 잃지 않았다.
선조35년(1602) 7월 13일 방녕 19세로 선조대왕(宣祖大王)의 계비(繼妃)로 책봉되고, 선조36년(1603) 정명공주(貞明公主)를 낳았고, 동 39년(1606)적장자(嫡長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선조41년(1608)2월 선조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이때 대비께서는 25세요 정명공주는 6세 영창대군은 3세엿다. 광해군은 15대 王위에 오르고 소북의 유영경(柳永慶), 동복(同腹)의 아우 임해군(臨海君)을 역모로 제거하거, 광해5년 문경조령에서 살인 강도를 일삼던 박응서 등 일당을 잡아 연흥부원군이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강압 고변케 하여 게축옥화를 조작하였다.
이에 연흥부원군과, 큰 아드님 청주목사 내(琜)공, 둘째 아드님 진사 규(珪)공, 셋째아드님 선(瑄)공 4부자(父子)분이 무고하게 참화를 당하셨다.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광주노씨(光州盧氏)는 제주도에 위리 안치되었고, 영창대군(永昌大君)도 겨우 여덟살 나이로 강화도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인목대비(仁穆大妃)께서도 폐모(廢母)되어 서궁(西宮)에 유폐(幽閉)되어 뼈를 깎는 고통을 당하시었다. 광해15년(1623) 김류・이귀・김자점등 서인 일파가 분연히 일어서 폭군 광해를 끌어내리고 능양군(綾陽君)을 16대 인조(仁祖)王으로 옹립하였다.
이에 대비(大妃)를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존호를 높이고 휘호를 명열(明列)이라 추가하였다.
연흥부원군과, 청주목사공・진사공의 관작을 복원하고,증직을 제수하였고, 특명어사를 제주에 보내 광산부부인 관주노씨를 모셔왔다.
인조 10년 대비께서 병환으로 와석후 6월28일 춘추 49세로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훙거(薨去)하시었다.
시호(諡號)를 시인복의왈인(施仁服義曰仁)이요 포덕집의왈목(布德執義曰穆)이라 하여 인목(仁穆)으로 존호하였고, 인조 10년 10월 6일 구리시 동구동 목릉(穆陵)에 갑좌 연향으로 모시었다.
따님 정명공주(貞明公主)는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主元)공에게 출가하였다.
부마 연성위 희공(駙馬 延城尉 禧公)
12世 희(禧)공은, 희락당(希樂堂)공의 제 2자로 출생하여 중종16년(1521) 중종대왕(中宗大王)의 제1공주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하여 연성위(延城尉)가 되었다. 중종 26년 상의원(尙衣院) 제조(堤調)가 되고, 동 26년 4월 갑술일(甲戌日)에 효혜공주께서 서거하시고, 동년 10월 11일 공께서 서거하시었다.
따님 한분이 계시어 사간(司諫) 파평 윤백원(尹百源)공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묘소는 고양군 신도읍 신원리 월산대군(月山大君) 묘역레 모시었으나 실전이다.
공은 서화(書畵)에 능하셨다.
종묘 배향
1. 영의정 문충 재찬공(領議政 文忠 載瓚公)
19世 재찬(載瓚)공은, 문정 익공(文貞 翌公)의 제1자로 출생하여 영조 50년(1774)문과에 급제하고, 에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출사하여,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등을 거쳐, 이조(吏曹)・예(禮)조(曺)・병조(兵曹)・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고, 순조6년(1806) 우의정(右議政)을 대배(大拜)하고,동9년 5월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동11년(1811) 12월 평안도 일대에 창궝(猖獗)한 홍경래(洪景來)난을 자진 출전하여 평정하였으며, 동 12년5월 영의정을 배수하고, 동15년 12월 총호사(摠護使) 삼도감 도제조(三都監 都提調)에 임명되고 영의정은 사퇴하였다. 동 17년7월 王은 공석중인 좌의정으로 세자사(世子師)를 겸직 명하였으나 단호히 사양하니, 동18년 8월26일 王은 “대신의 도리로서 어떻게 박하게 대할 수 있겠는가? 예(禮)와 의리는 분수와 때에 따라 다를 것이니 좌의정을 문외(문외)로 내치라.” 하고 다시 판중추부사로 강등을 명하고, 곧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올리더니 순조21년 11월 특명으로 영의정을 대배하였다. 공은 끝내 사양하고 고양(高陽) 감옥에 가서 석고대죄(席槀待罪)를 하였고, 동21년 2월 갑진일 왕의 부름으로 알현(謁見)에서도 끝내 사양하고, 동23년 2월 무오일 공의 병세가 악화되어 또 사직 상소를 하니 王도 하는 수 없이 윤허의 교지를 내렸다.
순조28년(1828)4월 무술일 와석 5년여에 향수(享壽) 82歲로 서거하시었다.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으로 하고 순조(純祖)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시었다
배위 초배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서윤(庶尹) 홍계현(洪啓鉉)공의 따님이요.
후배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통덕랑(通德郞) 이광술(李光術)공의 따님으로 2자1녀를 두시었다.
큰 아드님 영(鑅)공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종숙(從叔) 재옥(載玉)공에게 출계(出系)하고, 공은 동지중추부사 재완(載琓)공의 장자(長子) 헌(헌)공을 양자하였고, 2자는 전의(全義)현감을 지낸 종(錝)공이시다.
묘소는 파주군 파평면 표산리에 삼위 합폄이고, 묘비는 종자(從子) 이조판서 문헌(文獻) 노(鏴)공이 찬하고 판서 이익회(李翊會)공이 글을 썼다.
2. 이조판서 문헌 노공(吏曹判書 文獻 鏴公)
20世 노(鏴)공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 재련(載璉)공의 아드님으로 정조 7년(1783)4월 11일 출생하여 자(字)는 경유(景由)요 호(號)는 설암(雪嵒)이다.
순조7년3월 정묘 식년 진사과에 급제하고 세자익위자 세마(稅馬)로 효명세자(孝明世子)를 모시던 중 효명세자께서 공의 인품과 학행을 흠앙(欽仰)하여 공에게 설암이란 아호(雅號)를 지어 주었다.
순조 23년 배천군수(白川郡守) 재임중 계미 정시문과(癸未庭試文科)에 급제하고, 동 24년 1월 평안도 청북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불법 비위 및 선정상황(善政狀況)을 조사 보고하였으며, 동 27년3월 규장각(奎章閣) 직제학(直提學), 동년11월 홍문관 제학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加資)되었고, 동 28년 3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특별 발탁되었으며, 동년 4월 예문관(藝文館)제학, 동 5월 홍문관 제학, 동년 7월 호조판서로 등과, 5년만에 배천군수 종4품에서 정2품에 오르고, 순조30년 효명세자의 서거에 공조판서인 공께서 묘소제조(墓所提調)가 되었으나 효명세자 병중에 의약지시를 잘못했다는 탄핵(彈劾)을 받아 남해(南海)로 귀양을 갔다. 동 32년 8월 2년 만에 귀양에서 복관되고, 헌종(憲宗) 원년 5월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중국을 다녀왔고, 헌종3년 1월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경연춘추관(知經筵春秋館) 의금부사(義禁府事)・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세자빈객(世子賓客)・세손우유선(世孫右諭善)・지실록사(知實錄事)・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으로 헌종4년 11월22일 춘추 57세로 서거하시니 시호는 문헌(文獻)으로 내렸고, 고종12년 익종묘(翼宗廟 = 孝明世子의 追尊)에 배향(配享)되시었다.
배위 정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영의정 익정용구(翼貞用龜)공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두시었다.
묘소는 고양군 신도읍 덕은리 대덕산 문정공(文貞公) 묘하에 丑坐로 合窆이시다.
서원 배향(書院配享)
이조(李朝)는 건국초부터 유교중심 정책을 써서 고려의 사원(寺院)을 대신하여 서재(書齋) 서당(書堂) 정사(精舍) 선현사(先賢祠) 향현사(鄕賢祠) 등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재(齋)와 사(祠)의 두 기능을 겸한 것이 못되어 1542년(중종37) 순흥(順興)에 고려의 학자 안향(安珦-安裕)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었다. 그 후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을 세워 명종5년(1550) 이퇴계(李退溪)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액(額)을 하사하고, 책, 노비, 전결(田結)등을 주어 장려하엿다. 이것이 사액(賜額)서원의 시초가 되어 황폐되어 가는 향교에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었다. 한편 서원은 양적인 증가뿐만 아니라 일종의 특권적인 것이 되어 여기에 부속된 토지에는 조세를 부과하지 않았고 양민에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軍役)에 기피하였다. 이에 서원의 남설(濫設) 누설(累設)은 조정의 중대한 사안으로 1644년(인조22)에는 서원 설치를 허가제로 하였고, 그 후 계속 서원정비에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여 정조 때에는 650개의 서원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이 섭정한 고종1년(1864)부터 서원에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를 폐쇄하고 대원군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대부분의 서원이 정비되어 사표(師表)가 될 47개 서원만 남았다.
나산서원(蘿山書院)
영조(英祖)43년(1767) 전남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全南 潭陽郡 水北面 蘿山里)에 호남(湖南) 일대의 유림(儒林)들이 듯을 모아, 六世 도(濤) 나복산인공(蘿葍山人公) ・ 七世 자지(自知) 문정공(文靖公) ・七世 여지(汝知) 문익공(文翼公) 삼부자분의 문장(文章)과 절의(節義)를 추앙하여 나산서원(蘿山書院)을 세우고, 삼부자(三父子)분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춘추로 지방 유림들이 향화를 받들어 왔다. 그러던 중 고종(高宗)5년(1868) 훼철령에 의하여 훼철(毁撤)되고 광무(光武)8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으며, 원창(院倉)은 직막(直幕)으로 개조하여 직강공(直講公)파 나산종중(蘿山宗中)에서 관리하고 있다.
가. 밀직제학 나복산인 도공(密直提學 蘿葍山人 濤公)
6世 도(濤)공은, 밀직제학 광후(光厚)공의 제2자로 출생하여 진사과에 급제하고 청주 친시 문과에서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문하부 정언을 사직하고 1370년(공민왕19년) 명(明)나라 제과에 박실(朴實)・유백유(柳伯濡)선생들과 같이 천거되어 명나라 금능(金陵)에서 시행한 과거에서 총 급제자 125명중 25등으로 급제하엿다.
이때, 박실・유백유 선생은 낙방하고, 공께서만이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구현승(丘縣丞)을 제수 받고, 2년여 봉직중 고국의 친로(親老) 봉양을 걱정하여 명천자에게 사표를 제출하였다. 환국할 때 명천자는 크게 공로를 치하하고 작별을 아쉬워했다. 환국하니 공민왕(恭愍王)은 크게 영접하고, 우사간(右司諫)에 발탁하였다.
지신사(知申事=都承旨)등을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이때 친원파(親元派) 이인임(李仁任) 등이 배명부원론(排明附元論)을 주장하면서 항원(抗元) 유학자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있을 때, 때마침 양백연(楊伯淵)의 옥사가 일어나자 공을 이에 무고히 연루시켜 우왕5년(137907월 참화를당하시었다.
공의 字를 장원(長源)이라 함도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께서 짓고, 명 도(濤)도 선생이 짓고, 호(號) 나복산인(蘿葍山人)도 목은 선생이 지으셨다.
공은 전남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 나산서원(蘿山書院)에 배향되시었다.
배위 죽성부인(竹城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안수제(安受禔)공의 따님으로 4남1녀 5남매분을 두시었다.
나복산인 공께서 참화를 당하시고 전 재산을 몰수당할 때, 죽성부인께서는 40세 전후로 그 큰 환란을 당하고도 큰 아드님 문정공(12세)・둘째 아드님 문익공(10세)・셋째 아드님 예빈시윤공・넷째 아드님 해주목사공과 따님 5남매분을 나라의 동량(棟樑)으로 기르신 장하신 현모양처(賢母良妻)이시다.
나복산인공의 묘소는 개성 덕달원동에 모셨으나 실전되었다. 죽성부인 묘소는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에 酉坐로 사대방분(沙臺方墳)으로 모시었고, 나복산인공은 1967년 배위묘소 옆에 제단을 봉설하였다.
나. 개성유후사유후 문정 자지공( 開城留後事留後 文靖 自知公)
7世 자지(自知)공은, 나복산인공의 제1자로 고려 공민왕16년(1367)12월17일 출생하여 11세때 천하 준재(俊才)들만 수학하는 양산독서당(陽山讀書堂)에서 수학하였고, 우왕(隅王)5년 13세때 아버님 나복산인 공께서 참화를 당하시고, 우왕11년(1385) 을축(乙丑) 식년문과에 18세로 급제하여, 태종(太宗)4년 사헌부 집의(執意), 동7년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 형조참의, 병조참의,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세종 즉위년(1419)에 태실도제조(胎室都提調), 동년12월 호조참판, 세조원년 2월 예조참판으로 장일통요(葬日通要)를 편찬하여 반포하였고, 세종2년 1월 대사헌(大司憲), 세종4년 9월 원주목사(原州牧使), 세종5년 7월 평안도 관찰사 겸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세종8년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부유후(副留後), 형조판서, 세종15년(1433) 개성유후사 유후(留後)를 역임하였다. 공은 음양(陰陽)・복서(卜筮)・천문(天文)・지리(地理)・음율(音律)에 통달하시고 외화(外華)를 즐기지 않으셨다.
세종17년(1435) 2월23일 향수 69세로 서거하시니 시호(諡號)를 문정(文靖)으로 내렸다. 공은 아버님 나복산인공과 아우 문익공과 함께 담양 나산서원에 배향되시었다.
배위 쌍절정부인(雙節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는, 의정부좌찬성(左贊成) 조호(趙瑚)공의 따님으로 9남1녀 10남매를 두시었고, 9兄弟분은 각 파조이시다. 묘소는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어머니 죽성부인 묘앞에 쌍분으로 모시었다. 양평군 지방유적 30호로 지정되었다.
다. 좌참찬 문익 여지공(左參贊 文翼 汝知公)
7世 여지(汝知)공은, 밀직제학 나복산인공의 제2자로 고려 공민왕19년(1370)에 출생하여 字는 자행(子行)이요, 호는 창주(滄洲)이시며, 목은 이색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 20세로 기사 식년문과에서 장원을 하셨다.
사헌부 규정으로 출사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태조원년 8월 계림판관(鷄林判官)・사간원 정언으로 권신(權臣) 정도정(鄭道傳)을 탄핵하였다. 뒷날 정도전이 그때 성랑(省郞)들이 모두 파직되었으나 김여지(金汝知)만은 그대로 두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공은 즉일로 사직하였다.
그후 사간원 헌납(獻納)・병조정랑을 거쳐 태종3년(1403) 사헌부 장령(掌令)・지봉주사를 지내고, 동 4년 예문관 직제학에서 사헌부 집의로 옮겼다가 병환으로 사퇴하였다.
태종7년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를 거쳐 승정원 우대언으로 승진하였고, 동 10년 지신사(도승지)가 되었고, 예문관 제학에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다가 형조판서로 배수되고, 태종18년 하정사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병환으로 잠시 휴직하였다. 공은 임종이 임박하여 친히 붓을 들고 자녀 서에게 유서하시기를 “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을 책망하는 데는 밝은 법, 더군다나 사람이 죽을 때 하는 말을 옳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만하다. 내 일찍이 선친을 잏ㄹ어서 친훈(親訓)을 듣지 못해 인격과 언행을 깨닫지 못하여 업신여김을 받을만한 행실을 많이 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찌 미치랴. 너희들은 나를 거울삼아 이점을 경계하라. 임금의 일에는 충성을 다하고, 일가친척에는 친목하며, 붕우(朋友)간에는 신의(信義)를 갖도록 노력하고, 모든 일에는 항상 청렴결백한 버릇을 소학에서 가르치는 이와 같은 습성을 항상 가슴에 길이 다스려 잊지 말라. 상례와 장례는 주자(朱子) 가례에 따라 행하라.” 하셨다.
공은 사람됨이 관후(寬厚)하고 충근하여 재상의 재목이었으나 능히 크게 쓰이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그 때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었다. 이에 시호는 문익(文翼)으로 내리었다.
배위 초배 정부인 서원이씨(西原李氏)는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승원(李承源)공의 따님이요.
후배 정부인 초계정씨(草溪鄭氏)는 군사(郡事) 정주(鄭㴻)공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어머니 죽성부인 묘 앞에 酉坐이다.
공의 아버님 나복산인공과 백형 문정공과 같이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 나산서원(蘿山書院)에 배향되시었다. 양평군 지방유적 4호로 지정되었다.
삼봉서원(三峰書院)
삼봉서원(三峰書院)은 영주시(榮州市) 이산면(伊山面) 신암리(新岩里)에 임진왜란 때에 원종공신(原從功臣) 12世 김개국(金盖國)공의 위패를 배향했던 서원으로 고종5년 훼철령(毁撤令)으로 훼철되고 공의 사당(祠堂)만이 남아있다.
12世 개국(盖國)공은, 명종3년(1548) 10월26일 금산훈도(金山訓導) 몽득(夢得)공의 제1자로 출생하여 字는 공제(公濟)요, 호는 만취당(晩翠堂)이시다.
공은 천성(天性)이 총민(聰敏)하고 지기(知氣)가 고결(高潔)하여 사마시 생원과에 급제하였고, 선조24년(1591) 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다음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군(倡義軍)을 초모(招募)하여 의병장으로 출전(出戰)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선조28년(1595)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로 출사하여 형조 ․ 예조 정랑을 거쳐 선조34년 옥천군수를 제수받고 선정을 베풀던 중, 친상(親喪)으로 사직하고, 지성으로 여막에서 3년 상기를 마친 후 질병으로 복직을 못하고 선조36년(1603) 4월 29일 춘추 56세로 서거하시었다.
동 40년(1607) 나라에서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훈작(勳爵)하고, 효종5년(1654) 공의 출천지(出天之) 효행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에 증직하고, 삼봉서원에 배향되시었다.
영조50년(1774) 공의 5대손인 첨지중추부사 상현(相玄)공께서 만취당일고(晩翠堂逸稿)를 간행하였다.
배위 숙부인(淑夫人) 예안김씨(禮安金氏)는 찬의 김부민(金富民)공의 따님이요. 이조판서 김담(金淡)공의 현손(玄孫)으로 4남 1녀를 구시었다. 큰 아드님은 생원 여엽(汝燁)공이시고, 둘째 아드님은 첨지중추부사 여환(汝煥)공이시며, 셋째 아드님은 진사 여욱(汝煜)공이시고, 넷째 아드님은 통덕랑 여혁(汝爀)공이시다.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두암마을에 자좌 합폄으로 모시었고, 묘비는 판윤(判尹) 홍만조(洪萬朝)공이, 묘지(墓誌)는 대사헌 이세택(李世澤)공이 찬하였다.
노강서원(老江書院)
노강서원은 평안남도 안주군 노강촌에 있으며, 노강서원은 13世 연흥부원군 제남(悌男)공께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선조대왕을 수행하여 관서지방(關西地方)으로 피난중, 공께서 안주 노강촌에 3년간 머물면서 그곳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그 후 그 곳 주민들은 공을 경모(敬慕)하여 노강서원을 세우고, 춘추로 불망지정(不忘之情)의 향화를 받들던 중 영조17년(1741) 생사당(生死堂) 철폐령에 의하여 철원되었다. 그 후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공이 글을 짓고, 안주목사 이백(李伯)공이 글을 써 유허비가 문하생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공의 6대손인 대사헌 재인(載人)공께서 태천(泰川) 현감 때 비각(碑閣)을 세웠으며 7대손인 대사성 선(璿)공께서 안주목사 재임 때 노강촌 유허지에 유허비를 세웠다.
13世 제남(悌男)공은, 부사정 오(祦)공의 제2자로 출생하여 선조35년(1602) 이조정랑 때, ENFwOM 따님이 선조대왕의 계비(繼妃)로 내정되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왕비로 책봉되시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오르고 연흥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인목대비께서 선조 35년 큰 따님 정명공주(貞明公主)를 낳으시고, 동 39년 적장자 영창대군을 낳으셨다.
이때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은 광해군(光海君)과 대북당에 맞서기 위하여 합계(合啓)하기를, “하루 속히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세자(世子)로 책봉하고 중외에 선포하소서.” 하였다. 이에 선조대왕은 원임대신들의 의견도 들어보자고 하였다.
이를 접한 광해는 유영경을 참하라고 상소하게 하였고, 선조대왕은 이것이 무근지흉론(無根之凶論)이라고 노여워하고,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을 귀양 보내도록 처벌을 내렸다. 죄인들이 귀양지에 도착도 전에 선조대왕께서 훙서(薨逝)하니 광해군이 등극하고, 식의 대상인 영창대군으로 인하여 공의 4부자분과 사위 현감 심정세(沈挺世)까지 참화를 당하였다. 우리 연안김씨는 한 씨족의 성장성세(成長盛勢)가 좌절되고 전 씨족이 사회의 지탄에 고장을 떠나 산간벽지로 벼슬을 버리고 몸을 피하게 되었다.
배위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광주노씨(光州盧氏)는, 장사랑(將仕郞) 노게(盧垍)공의 따님으로 3남2녀를 두시었고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시었다. 인조반정으로 환가하시어 장손(長孫) 천석(天錫)공의 임소(任所)인 홍산(鴻山)현에서 인조15년(1637) 9월14일 향수 81세로 서거하시어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에 합폄하였다. 부부인의 묘지(墓誌)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찬하였다.
문형 대제학(文衡 大提學)
문형(文衡)은 문과(文科)를 거친 문신(文臣)이라도 반드시 호당(湖當) 출신이라야만 문형(文衡)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문형이란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인데 문형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해야만 했다. 문형은 이들 삼관(三館)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館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職)이므로 더 할 수 없는 명예로 여겼고, 품계(品階)는 판서급(判書級)인 정2품이었지만 명예로는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나 육경(六卿=六曹判書)보다 우위로 쳤다.
좌의정 희락당 안로공(左議政 希樂堂 安老公)
11世 안로(安老)공은, 안락당 흔(訢)공의 제3자로 성종12년(1481)에 출생하여 字는 이숙(頣叔), 호는 퇴재(退齋)・희락당(希樂堂)・보락당(保樂堂)으로 연산7년 사마시(司馬試)에서 두 형님과 같이 삼형제분이 연벽(聯璧)으로 급제하였다. 동 12년 별시문과에서 장원(壯元)하고, 중종(中宗) 원년(1506)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출사하여 사가독서(賜假讀書)를 하고, 동2년 11월 사간원 정언(正言)・홍문관 부교리(副校理), 동 9년 10월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 동 11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동 15년 12월27일 공의 제2자 희(禧)공이 중종대왕의 제1공주인 효혜공주(孝惠公主)화 혼인하여 연성위(延城尉)에 봉작되었다. 동 18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오르자 삼정승(三政丞) 영의정(南)・좌의정(李)・우의정(權)은 공이 왕실(王室)과 연혼하고 판서지열에 오르니 앞날이 두려워 王에게 아뢰기를, “김안로는 재학(才學)이 있고, 청명(淸名)이 있으나 의논(議論)으로 일을 꾸미기 좋아하고, 문장(文章)이 능하고 일에 밝고 재명이 있어 젊은 사람들이 앙모(仰慕)하여 그이 의론(議論)이면 따르니 이에 붕당(朋黨)을 이루고 있으니 金安老를 처단하라.”고 계속 간하여, 한때 파주(坡州)를 거쳐 개성(開成)에 귀양을 갔으며 동 24년 5월 귀양에서 복권되었다.
동 26년 의흥대호군(義興大護軍)에, 동년 6월 한성부사(漢城府使), 동년 9월 에조판서, 동년 10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동년 12월 겸 지경연사(知經筵事)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 받고, 동 27년 세자시강원 좌빈객(世子侍講院 左賓客), 동년 8월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동 28년 3월 호조판서로, 동29년 7월 숭정대부 판의금부사, 동년 11월 의정부 우의정을 제수 받고, 동 31년 5월 찬집청(撰集廳) 도제조(都提調)로 삼강행실(三綱行實)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등을 편찬하였으며, 동년 6월 좌의정을 제수 받고, 영경연사(領經筵事)에 오르고, 이때 윤원형(尹元衡) 형제의 밀고로 王은 윤안인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중종 32년 10월28일 공은 진도로 귀양 도중 진위갈원(振威葛院)에 당도하였을 때 사약(賜藥)을 받고 서거하시었다.
공의 직책은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 領經筵春秋館事 觀象監事 世子師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사 관상감사 세자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이시다.
배위 인천채씨(仁川蔡氏)는 참판 인천군(仁川君) 시 양정(襄靖) 채수(蔡壽)공의 따님이요, 4남1녀를 두시어 큰 아드님은 홍문관 수찬(修撰) 기(祺)공이고, 둘째 아드님은 연성위(延城尉) 희(禧)공이요, 셋째 아드님은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휘(휘)공이시고, 넷째 아드님은 양송거사(養松居士) 제(褆)공이시다.
묘소는 구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에 모시었으나 서울시의 개발로 화성군 비봉면 자안리에 면례 안장하였다.
청백리(淸白吏)
청백리(淸白吏)는 그의 인품(人品) 경력(經歷) 치적(治績) 등이 능(能)히 모든 관리(官吏)의 모범이 될 만한 인품(人品)이어야만 청백리로 녹선(錄選)된다. 청백리로 뽑히면 품계(品階)가 오르고 그 자손(子孫)은 음덕(蔭德)으로 벼슬을 할 수 있는 특전(特典)이 있다. 따라서 본인(本人)은 물론 일문(一門)의 큰 영예이다. 청백리는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의 이품이상(二品以上)의 관원(官員)과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등이 후보자(候補者)를 엄격(嚴格)한 심사(審査)를 거쳐 王의 재가(裁可)를 얻어 녹선(錄選)하였다.
공조참의 안락당 흔공(工曹叅議 安樂堂 訢公)
10世 흔(訢)공은, 세종30년(1448) 호간 우신(友臣)공의 제 2자로 출생하여 세조13년 진사과에서 장원급제하고, 성종2년(1471) 별시 문과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출사하였다. 성종6년 2월 승문원(承文院) 교검(校檢), 동7년 승의랑(承議郞)으로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동9년 1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성종10년 시강관(侍講官)으로, 동년 12월4일 하정관(賀正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동 13년 시독관(試讀官), 동 14년 2월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홍문관 전한(典翰)을 제수 받고, 동 15년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동 17년 7월 공조참의(工曹叅議)에 올랐다. 병환으로 풍질(風疾)이 발생하여 사직하고, 동 18년 2월 호분위(虎賁衛) 상호군(上護軍)으로, 동년 5월 충무위(忠武衛)행 호군(護軍)으로 옮겼다. 동 20년 1월 성종대왕은 와병(臥病)중인 공에게 탕약(湯藥) 강활유풍탕(姜活愈風湯)을 하사하였다.
동21년 3월 오사도중교전국책(吳師道重校戰國策) 一질을 왕에게 진상하였다. 연안온정(延安溫井)에서 요양(療養)을 하고, 성종23년 1월13일 향년(享年) 43세로 서거(逝去)하시었다.
공은 정헌대부 이조판서(正憲大夫 吏曹判書)겸 지경연 춘추관사(知經筵 春秋館事)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贈職)되시고, 청백리에 선(選)되시었다.
공은 성종(成宗)년간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서 시문(詩文)에 출중하셨으며, 그 시문유고(詩文遺稿)를 중종11년 제3자인 좌의정 희락공께서 문집(文集)을 출간하여 원본(原本)은 국립도서관과 충남대학교 도서관에 진귀본(珍貴本)으로 보존하고 있다.
배위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윤씨(파평윤씨)는 현감 윤지(尹墀)공의 따님으로 3남3녀를 두시었다.
큰 아드님은 이조참판(吏曹參判) 안정(安鼎)공이시고, 둘째 아드님은 이조좌랑(吏曹佐郞) 안세(安世)공이요, 셋째 아드님은 좌의정 희락당 안로(安老)공이시다.
묘소는 파주군 교하면 교하리에 卯坐로 쌍분이다.
신도비는 대제학 이행(李荇)이 찬하고, 묘지(墓誌)는 동지중추부사 신종호(申從護)공이 찬하였다.
영의정 충정 전공(領議政 忠貞 詮公)
10世 전(詮)공은, 세조4년(1458) 지중추부사 호간 우신(友臣)공의 제3자로 출생하여 字는 중윤(仲倫),호는 나헌(懶軒)이시고, 성종11년 경자(庚子) 사마시에 급제하고, 동 20년 기유(己酉) 식년문과에서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출사하여 부수찬(副修撰)을 겸하고,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선정(善政)을 베푼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연산1년 내직으로 상경하니, 지방민들은 그 어른의 공을 기리고자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그 은덕을 추모(追慕)하였으며, 연산2년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을 거쳐 전한(典翰)으로, 동 4년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연루시켜 파직되었고, 연산10년 3월 대사성(大司成)에, 동년 5월 다시 산청(山淸)으로 귀양을 갔다.
중종 원년 9월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 예조참판(參判)을 제수 받고, 중종4년 한성부판윤(判尹), 이조판서 ․ 예조판서를 거쳐, 동 10년 4월 의정부 우찬성(右贊成)겸 세자보양(世子輔養) 예문관제학, 동 14년 11월 우의정(右議政)에서, 동년 12월 17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로 좌천되고, 중종15년 2월15일 영의정(領議政)겸 세자사(世子師)를 제수 받고, 동 16년 8월 사직(辭職) 상소를 하였으며, 병환중이시라 수십차 사직 상소를 하였으나 그때마다 王은 불윤하고, 약재를 하사하였으며, 중종18년 2월18일 영의정 재직으로 서거하시니 향년 66세이셨다.
공은 청렴과 근신(勤愼)을 스스로 지키신 당대에 추앙을 받은 영의정으로 청근하고 빈한하여 나라에서는 4월의 녹봉(祿俸)을 내렸다.
공은 아량(雅量)이 맑고 소박해서 가재(家財)가 없으며, 마치 산야(山野)에서 묻혀 사는 촌로(村老)같이 청아(淸雅)함에 탄복을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시고 청백리(淸白吏)에 選되시었다.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이시다.
배위 초배 정경부인 풍천노씨(豊川盧氏)는 충주 판관(忠州判官) 노균종(盧勻從)공의 따님이요, 후배 정경부인 진천송씨(鎭川宋氏)는 감역(監役) 송환주(宋環周)공의 따님으로 4남1녀를 두시었다.
큰 아드님은 함종현령(咸從縣令) 안도(安道)공이요, 둘째아드님은 참봉(叅奉) 안우(安遇)공이시고, 셋째 아드님은 연산현감(連山縣監) 안수(安遂)공이시며, 넷째아드님은 증참판(贈叅判) 안달(安達)공이시다.
묘소는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 호간공(胡簡公) 묘하에 子坐로 각폄(各窆)이고, 신도비(神道碑)는 상촌(象村) 신흠(申欽)공이 찬하고 현손(玄孫) 규(珪)공이 글씨를 썼다. 향토유적(鄕土遺蹟) 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종공신(原從功臣)
원종공신(原從功臣)은 공신의 시상(施賞)에 각 등급의 주장이 되는 정공신(正功臣) 이외에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의 칭호로써 이는 공신의 자제(子弟) 및 사위(婿) 또는 그 수종자(隨從者)에 대한 시상으로 이태조(李太祖)가 건국한 후 개국공신을 정하고, 개국공신들을 도와 태조의 잠저(潛邸)에서 일을 보았거나 공신의 자제로서 공이 있는 사람을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의 칭호를 준 것이 처음이다. 이들 원종공신을 3등으로 나누어 각각이 등급에 따라 녹권(錄券) ․ 노비 ․ 토지를 주었다. 이에 공신 상훈이 있을 때마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을 정하여 시상하였다.
내자시윤 해공(內資寺尹 侅公)
8世 해(侅)공은 문정공의 제6자이시다.
세조원년 12월27일 주부(主簿)로서 수충위사(輸忠衛社) 동덕좌익(同德佐翼) 원종공신(原從功臣) 3들에 책록되고, 내외직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내자시윤(內資寺尹)을 역임하시었다.
공은 천품이 소탈하고 담박하여 공명과 부귀에 뜻이 없음으로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 금서(琴書)로 낙을 삼아 가사까지도 돌보지 않으셨다.
성종4년(1473) 서거하시어,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시었다.
배위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참판(參判) 성개(成槪)공의 따님으로 2남3녀를 두시었다.
큰 아드님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우신(友臣)공이시오, 둘째아드님은 예조참판(禮曺參判) 제신(悌臣)공이시다.
1女는 부사(府使) 초계(草溪) 정윤식(鄭允烒)공에게 출가하고, 2女는 별좌(別坐) 전의(全義) 이중희(李仲禧)공에게 출가하였고, 3女는 영가군(永嘉君) 권람(權擥)공에게 출가하였다.
묘소는 파주군 파평면 두포리(탁천동)에 卯坐 합폄이다.
사포서 사포 제공(司圃署 司圃 禔公)
12世 제(禔)공은 좌의정(左議政) 희락당(希樂堂) 안로(安老)공의 제 4자로 중종19년(1524) 11월22일 출생하여 字 는 계완(季緩)이요 호는 양송거사(養松居士) 또는 취면(醉眠)이시다.
음사(蔭仕)로 출사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행(行) 사포서(司圃署) 사포(司圃) 역임하고, 선조(宣祖)4년 수충공성(輸忠貢誠) 익모수기(翼謨修紀) 광국(光國)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명나라의 역사에 이씨 왕계가 이인임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던 것을 바로 잡아 놓은 훈공임)되고, 공은 일찍이 벼슬을 버리고 서화(書畵)를 벗 삼으셨다. 서화는 당세에 이름을 떨쳐 시(詩)에 최간역(崔簡易), 서(書)에는 한석봉(韓石峯)과 더불어 당세의 삼절(三絶)이라 했다.
배위 의인(宜人)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충의(忠義) 권량(權亮)공의 따님으로 무후이다.
아드님은 중형(仲兄) 사산감역(四山監役) 휘(휘)공의 제2자 봉선(奉先)공을 양자(養子)하였다.
묘소는 옛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 원곡동이었으나 서울시의 확장 개발로 화성군 비봉면 자안리로 이장하였다.
증 예빈시정 득추공(贈 禮賓寺正 得秋公)
13世득추(得秋)공은 장사랑(將仕郞) 이(䄜)공의 아드님이시다.
임진왜란에 부장(部將)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워 효충장의(効忠仗義) 적의협력(迪毅協力)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내금위(內禁衛)를 역임하시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증직(贈職)되시었다.
배위 증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화천수(花川守) 이랑(李琅)공의 따님으로 아드님 형제분을 두시었다.
큰 아드님은 통훈대부 행(行) 진위현령(振威縣令) 준(埈)공이시고, 둘째 아드님은 고성군수(高城郡守) 돈(墩)공이신데 고성공은 아드님 9형제분을 두시어 7개 종중으로 번창하였다.
묘소는 파주군 교하면 교하리 선영국내 참판공 묘 동록에 子坐 합폄이다.
능성현령 효남공(綾城縣令 孝男公)
公은 中宗朝의 領議政 10世 詮公의 증손이며, 선략장군충좌위부사정 증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겸영경연춘추관관상감사(宣略將軍忠左衛副司正 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觀象監事) 12세 오(祦)公의 장자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제남(悌男)公의 실형(實兄)이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백부(伯父)이시다.
벼슬은 통훈대부행능성현령 나주진관병마동첨절제도위(通訓大夫行綾城縣令 羅州鎭管兵馬同僉節制都尉)였으며,
선조40년(1607) 조정에서 효충장의(効忠仗義) 적의협력(迪義協力)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훈작되었다.
공은 광해5년(1613) 계축옥화(癸丑獄禍)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을 비롯하여 조카 래(琜)공, 규(珪)공, 선(瑄)공 그리고 외동아들인 근(瑾)공 등이 화를 당할 제 61세의 고령으로 유배지인 해남(海南)으로 압송되었다. 도중 남쪽 해변에 당도하였을 적에, 아우와 조카들이 이미 몰살을 당한 집안에 나마저 죽고 없어진다면 누가 이 집안을 다시 일으키겠는가. 오직 가문을 이어야겠다는 일념에서 몸을 피하여 경남 의령군 가례면 대천리에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진양하씨(晋陽河氏) 승용(承龍)공의 따님을 후배로 맞아 오매불망하던 아들을 얻으니 이가 곧 중생(중생 - 千里 머나먼 곳에서 낳았다는 뜻)공이고, 초배 광주정씨(光州鄭氏) 습독(習讀) 정은(鄭誾)공의 따님에서 낳은 분이 진산군수(珍山郡守) 근(謹)공이다. 1子 근(謹)공의 후예들이 당진(唐津) 시곡종중(柿谷宗中)을 이루고, 2子 중생(重生)공의 후손들이 의령종중(宜寧宗中)을 형성하고 있다.
公은 명종8년(1553)에 출생하여, 광해 13년(1621)3월27일에 인조반정을 보지 못하고, 춘추 69세로 한많은 생을 마쳤다.
공의 묘소는 의령군 가례면 대천리 점동곡 신좌이고, 초배 숙인 광주정씨(淑人 光州鄭氏)의 묘소는 고양군 원당면 목희리에 있으며, 후배 숙인 진양하씨(淑人 晋陽河氏)는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 진형동에 묘소가 있다.
동지중추부사 준남공(同知中樞府事 俊男公)
13世 준남(俊男)공은 충좌위(忠佐衛) 사정(司正) 불(祓)공의 아드님으로 명종17년(1562) 11월26일 출생하여 자(字)는 사언(士彦)이시다.
선조25년 임진왜란에 수문장(守門將)으로 크게 전공을 세워 효충장의(效忠仗義) 적의협력(迪毅協力) 선무(宣武)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계축옥화(癸丑獄禍)때는 김포신곡(金浦薪谷)에서 피화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충순위(忠順尉)를 제수 받고,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光海君)과 그 아들 세자(世子) 질(桎)을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는데 질(桎)이 수비군(守備軍)의 눈을 피하여 땅굴 70여척(尺)을 뚫고 도망친 사고가 발생하여 세상이 현란할 때 공께서 충순위로서 이질(李桎)을 잡았다. 금천현감(衿川縣監), 낭천(狼川 =華川)현감 등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시어 삼세추증(三世追贈)의 은전(恩典)을 받고 인조 24년(1646) 2월29일 향수 88세로 서거하셨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는 윤대생(尹大生)공의 따님으로 아드님 한 분을 두시었다.
아드님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숙(璛)공이시다.
묘소는 고양시 원흥동 충정공 묘하 子坐 합폄이다.
훈련원도정 호공(訓鍊院都正 灝公)
16世 호(灝)공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하석(夏錫)공의 제1자로 인조27년(1649) 7월18일 출생하여 자(字)는 중호(仲浩)이고, 호는 위은(渭隱)이시다.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숙종6년 경신(庚申) 대출척(大黜陟)의 역모고변(逆謀告變)에 크게 공을세워 분충효의(奮忠效義) 병기협모(炳幾協謨)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고, 문성공(문성공)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케 하라는 상소(上訴)를 올렸다.
숙종7년 3월 오위도총부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된 후 훈련원(訓鍊院) 초군(哨軍), 동 참군(叅軍), 동 주부(主簿), 동 8년 6월 오위도총부 부사직(副司直)등을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을 역임하고, 숙종대왕(肅宗大王)으로부터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받으셨다.
공께서 숙종 말기의 서인(西人)들의 몰락에 연루되어 공주 효포(孝浦)로 낙향(落鄕) 세거(世居)하였다.
숙종44년(1778) 4월 12일 향수 70세로 서거하시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시었다.
배위 증 정부인(貞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이방직(李芳直)공의 따님으로 효종3년(1652) 11월27일 출생하여 숙종44년(1718) 4월8일 향수 67세로 1남 2녀를 두고 서거하시었다.
아드님은 동몽교관(童蒙敎官) 상태(相兌)고이시다.
1女는 거창(居昌) 신만택(愼萬澤)공에게 출가하시고, 2女는 노언극(盧彦極)공에게 출가하였다.
묘소는 공주군 정안면 화봉리에 합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