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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석에서(Auf der Galerie, 1917?), (6부 관객의 열망)
in 칼다 기차의 추억(프란츠 카프카, 이준미 역, 하늘연못, 2017), pp. 477-479(P.571)
삶의 부분 즉 블록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계열의 만남이 단지 우발인지 우연(hasard)인지 라고 물으면, 카프카는 우발에 방점을 찍을 것 같다. 현상들은 여행에서 만난 경우가 아니라 일상에서 부딪히면, 우연이 아니라 우발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발은 두 계열의 각자의 강도가 공명을 잘 일으키지 않을 경우이다. 심정(coeur)의 공명 없이 현상의 조립은 언제 “이것이나 저것이냐”는 고민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각각은 따로따로의 삶이다. 펠리체 바우어와 약혼과 파혼이 한 세기 앞선 키에르케고르의 약혼과 파혼을 생각나게 한다. (50TKH).
“제6부 관객의 열망”이란 제목은 그럴듯하지 못한 것 같다. 이 속에 7편이 들어있는데, 한 개인의 지속된 삶의 덩이가 다른 계열과 더불어 그 개인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여세피네의 이야기처럼 일대기일 수도 있다. 삶은 관객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며, 관객이 바라본 단면들로 구성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덩이가 굴러가며 부풀려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귀퉁이가 이그러질 수도 있고, 부딪혀 깨어져 모서리가 생길 수도 있다. 긴 여정에서 변곡점은 슬플 수도 있고, 담담히 받아들이면 즐거울 수도 있으며, 스르르 사라질 수도 있다. 카프카의 글에는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있는데, 어쩌면 숙명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그의 태도가 들어 있는 것 같다. - 섭리대로 살아라 ...(50T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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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유순한 동물들 15-174
2부 여행자의 하룻밤 175-289
3부 세상의 상인들 291-320
4부 법과 공동체 321-396
5부 일상의 근심 397-474
6부 관객의 열망 475
# 옮긴이의 말 / 간추린 작가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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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관객의 열망 475-565
관람석에서 / 남자 기수에 대한 고찰 / 특별석에서 / 단식예술가―네 가지 이야기들, 첫 번째 괴로움 / 작은 여자 / 단식 예술가 / 여가수 요세피네 아니면 생쥐 무리
# 관람석에서 477-479 Auf der Galerie, 1921 in Ein Landarzt(1920)
[여자곡마사의 화려함 뒷면에는 슬픔이 있다.]
서커스의 원형 공연장에서 어떤 연약하고 폐결핵에 걸린 여자 곡마사가 흔들리는 말 등에 올라타, 지칠 줄 모르고 환호하는 관객들 앞에서, 채찍을 마구 휘두르는 무자비한 지배인에 의해 수개월 동안 끊임없이 원 주위를 돌도록 강요받는다고 해 보자. (477. 시작문단)
... 그러는 동안 그녀 자신은 그에게 의지하면 말위에서 발끝으로 높이 서서는 흩날리는 꽃가루에 휩싸여 양팔을 넓게 벌리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자신의 행복을 전체 서커스와 나누려 한다. / 실은 이렇게 된 것이다. 맨 위층의 그 관객은 난간에 얼굴을 얹고 마치 힘든 꿈속으로 가라앉은 듯 대단원의 끝을 알리는 행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운다. (479, 마지막 앞부분과 마지막 문단)
# 남자 기수에 대한 고찰 480-481 [Zum Nachdenken für Herrenreiter 1914 ]
[승리한 기수의 화려한 환호의 답은 귀부인에게는 하인처럼 보일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경마 시합에서 1등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 한 나라의 최고 기수로서 인정받게 되는 영예는 오케스트라가 시작될 때 너무도 엄청나게 기쁘기에, 그 다음 날 아침에 후회가 생기는 일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이다. (480)
많은 귀부인들에게 우승자는 우습게 보인다. 왜냐하면 우승자는 뽐내기만 할 뿐, 끊임없이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고 몸을 숙이고, 먼 곳을 향해 경의 표하는 것은 시작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패배자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서 대개는 울고 있는 말들의 목을 가볍게 토닥인다. / 마침내 흐려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481)
# 특별석에서 482-485
[특별석에는 한 사람(남자)으로 직접 난간 치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에밀과 아내는 이 난간에 기대 구경하다가 놀란다.]
나는 칸막이를 한 특별석에 앉아 있는데 내 옆에는 나의 아내가 있었다. 자극적인 작품이 상연되고 있었는데, 질투를 주제로 한 것으로 때마침 기둥들로 둘러싸인 빛나는 홀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출구 쪽으로 가고 있는 여자를 향해 단도를 들어 올렸다. (482, 시작부분)
“지금 나를 혼자 놔두려고 하는 군요, 에밀” 그녀[아내가]가 소리쳤다. / “하지만 내게 칼이 없으면” 내가 응답했다. / “내 것을 받아요.” 그녀가 말하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작은 손가방을 뒤지더니 당연히 너무나도 작은 자개 나이프 하나를 겨우 끄집어냈다. (485 마지막 부분) [무대 위의 장면이나 특별석의 장면의 유사성이 극의 긴장감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 단식예술가: 네 가지 이야기들 486-491 Ein Hungerkünstler,
단식광대(Ein Hungerkünstler, en. A Hunger Artist, fr. Un champion de jeûne, 1922) (Erzählung von 1922 und Titel des Sammelbands mit drei weiteren Prosatexten: Erstes Leid, Eine kleine Frau und Josef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 단식광대(Ein Hungerkünstler, fr. Un champion de jeûne, 1922)(avec Première souffrance (de), Une petite femme (en) et Joséphie la cantatrice, ou le peuple des souris (en) 22). /
첫 번째 괴로움 / 작은 여자 / 단식 예술가 / 여가수 요세피네 아니면 생쥐 무리
* <첫째 괴로움> 486-491 [Erstes Leid, Première souffrance]
공중곡예는 대규모 버라이어티쇼 무대의 작고 둥근 지붕아래 높은 곳에서 행해지는 예술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것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어떤 공중곡예사가 처음에는 완벽함을 얻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중에는 폭군처럼 되어 버린 습관 때문에, 똑 같은 시도를 훈련하는 동안에는 밤이고 낮이고 곡예용 그네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생활을 바꿨다. (486)
... 하지만 수많은 질문들과 아첨하는 말들이 있은 후에야 공중 곡예사는 흐느껴 울며 대답했다. / “손 안에는 오로지 이 막대기 하나뿐이야.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이야!” (490-491) [곡예사는 가장 활발한 삶의 시기에 공중 곡예 그네 막대기 하나에 매여 살았다. 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신은 늙어가고 있고, 남은 것이라곤 막대기 하나라는 사실이 무한히 슬프다.]
... 그리고 지배인은, 이제 울음을 그치고 보기에도 편안하게 잠이 든 공중 곡예사의 아이 같이 매끄러운 이마에서 최초의 주름들이 어떻게 새겨지기 시작했는지 보았다고 생각했다. (491, 마지막 문장)
* <작은 여자> 492-507 [Eine kleine Frau, Une petite femme]
작은 여자는 원래 아주 날씬한데도, 단단히 코르셋을 졸라매고 있다. 나는 언제나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본다. ... (492 첫 두 문장)
... 이미 나는 한번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이 끊임없는 분노를 가장 좋게 끝낼 수 있는지 알려 주려고 애썼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는 바로 흥분했는데, 나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시도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494)
... 그녀는 오로지 싫어하는 마음으로 멈추지 않고 부단히 그녀를 독려하고 있는 어떤 싫어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몰두하고 있다. 이 불순한 일을 더욱이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은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계속적으로 압박받고 있는 이 일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는 것 또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자의 교활함으로 하나의 타협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말은 하지 않고, 오로지 내적인 괴로움을 외적으로 표시함으로써 [동정을 사서] 그 문제를 대중의 심판 앞으로 가져가려는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그녀는 만약에 대중들이 언젠가 그들의 온전한 눈길을 나에게 돌리게 된다면, 나에 대한 대중들의 전반적인 분노가 생기게 될 것이고, 그 분노한 대중의 강력한 권력 수단은 아무래도 비교적 약하고 개인적인 그녀의 분노가 할 수 있은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바르게 나를 완전히 끝장날 때까지 심판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럴 경우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 안도의 숨을 쉬며 나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지금, 이것이 진정으로 그녀의 희망 사항이라면, 그녀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은 그녀의 역할을 넘겨받지 않을 것이다. (496) [여인이 남친에게 할 수 있는 분노의 조치는 자신의 것이지만 자신이 하기보다 타인(대중)을 통해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인공인 남친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 매번 나는 가령 가장 이른 아침 시간의 행복에 젖어 집에서 나오게 되고, 그때마다. 나는 나 때문에 분노에 가득 찬 그 얼굴을 보게 된다. 짜증을 내며 삐죽 내민 입술, 검사를 하면서 이미 하기도 전에 그 결과를 알고 있다는 시선, 그 시선은 내 몸을 훑어보면서 너무나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지만 아무것도 그 시선에서 피할 수 없고, 소녀 같은 뺨 속을 뚫고 들어가는 쓴 웃음, 하늘을 향해 하소연하며 쳐다보는 것,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손을 허리에 대는 것, 그런 뒤 분개해서 창백해지고 전율하는 것을 나는 보게 된다. (501) - [내가 이글을 읽으면서,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을 떠올렸다.(50TLD)]
직감을 가진 자를 상당히 몰두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직감 하나면 충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직감이 쓸모가 없다. 그리고 실제 항상 그런 식이었다. 이 쓸모없는 건달들과 백수들은 항상 존재했다. 그들은 그들이 가까이 있음을 언제나 지나치게 교활한 그 어떤 방법으로, 특히 친척 관계를 통해서 이해시키는 것을 제일 좋아했고, 늘 감시했으며, 늘 직감을 지겨워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결말은 그들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것뿐이다. (504)
그러니까 역시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만약에 내가 이 작은 문제를 손으로 물론 아주 살짝 가린 채 있다면, 그 여자가 온갖 소란을 피운다 해도, 나는 여전히 아주 오랫동안, 세상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나의 지금까지의 생활을 조용히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거듭 명백해지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고집하고 있다. (507, 마지막 문단)
* <단식 예술가> 507-527 [Ein Hungerkünstler, en. A Hunger Artist, fr. Un champion de jeûne.]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 사라지듯이, 단식 예술가는 단식으로 사라진다. - 이미 읽은 것이라 옮긴다. (50TKD)]
지난 몇 십 년에 걸쳐 단식 광대에 대한 흥미는 매우 즐어 들었다. 전에는 이러한 종류의 대형 공연을 독자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해 볼 만했는데, 오늘날에는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지금과는 다른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도시 전체가 단식 광대 대해 관심을 보였다. 단식하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모두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단식 광대를 보고자 했다. 나중에 가서는 종일 조그만 격자 창살 우리 앞에 죽치고 앉은 예약 신청자들도 있었다. 밤에도 효과를 높이기 위해 횃불을 켠 상태에서 관람하게 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우리를 야외에 옮겨 놓았으며, 이럴 때는 단식 광대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관람거리가 되었다. 단식 광대는 유행 따라 관람하게 되는 어른들에게는 단지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어린이들은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또 안전을 위해 서로의 손을 꼭 잡고서 단식광대를 바라보았다. ... (165, 시작 문장이다)
... 그러니까 40일째가 되는 날에는 꽃으로 장식된 우리[울타리]의 문이 열리고, 열광하는 관중이 원형극장을 가득 채웠으며,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했다. 두 명의 의사가 우리 안으로 들어가 단식 광대에게 필요한 검진을 했고, 그 결과가 확성기를 통해 장내에 울려 퍼졌다.(170) ... ...그가 참고 버티면서 계속 단식을 하겠다는데, 왜 대중은 이를 참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그는 또한 지쳐 있었고, 짚 위에 편안하게 주저앉아 있었는데, 이제 벌떡 일어나서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음식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171) ... ... 이제 단식광대는 이 모든 것을 참아냈다. 머리는 아래로 굴러 내릴 것처럼 가슴 위로 축 늘어져 있어 그곳에 붙어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몸은 속이 텅 빈 껍데기 같았다. 두 다리는 자기 보존 본능에서 무릎에 꼭 붙어 있었지만, 발을 디고 있는 지면이 마치 진짜 땅이 아닌 것처럼 헛발질을 하면서 진짜 땅을 찾고 있었다. (171-172)
“단식은 제가 해야만 하는 것이고, 저로서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식 광대가 말했다. /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감독이 물었다. “왜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건가?” ...“왜냐하면 저는 제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냈다면, 이런 이목을 끄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었을 것입니다.” /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다. 그런데 그의 지친 눈에서는 여전히 더 이상 자부심이 넘치는 확신은 아니지만 계속 단식하겠다는 굳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 “자 이제 처리하지!” / 감독이 말했고, 사람들은 단식광대를 짚더미와 더불어 묻어 버렸다. 그가 있던 우리에는 젊은 표범 한 마리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황폐한 상태에 있던 우리에 이런 맹수가 이리저리 딩구는 것을 보는 것은 아무리 무딘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기분전환이 되었다. 표범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감시인들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표범의 입에 맞는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표범은 자유조차도 그립지 않은 모양이었다. 팽팽해서 거의 찢어질 정도로 모든 필요한 것을 갖추고 있는 표범의 고상한 몸뚱이는 자유까지도 함께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 자유는 이빨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표범의 목구멍에서는 관중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열기와 더불어 삶에 대한 기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관중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울타리] 주변에 몰려들었으며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182-183 마지막 문단들) - in 카프카 단편집(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pp. 163-183) (펌, 50QLB)
* <여가수 요세피네 아니면 생쥐 무리> 528-563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 Joséphie la cantatrice, ou le peuple des souris.]
[요세피네의 개체성으로서 영혼이 있다. 계열들을 펼쳐나가지. 그 영혼은 그 종족의 생장과 성장 그리고 늙음에서도 그녀의 영성(영혼성)은 흐른다. 그녀의 사회성은 예술성에서 돋보인다. - 쥐 종족의 심층과 심층에서 표면으로 한 계열로서 요세피네를, 그리고 표면에서 한 개체 이미지로서 요세피네가 예술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노동할 수 없을 정도로 늙고 죽는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50TLD) ]
우리의 여가수 이름은 유세피네이다. 그녀의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노래의 힘을 알지 못한다. 우리 종족이 모든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녀의 노래에 감동받지 않은 자가 없으니 그 만큼 더 높이 평가된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조용한 평화를 안겨주는 것이다. (528)
오직 요세피네만이 우리에게 들을 수 있는 자격을 주고 그 외에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자격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의하면 바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 다른 것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529)
요세피네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휘파람만 부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 그녀가 이 일반적인 휘파람 불기의 한계를 거의 넘어서지 않는 것이,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것 같은 데, 설마 사실이라면, 이 일반적인 휘파람 불기를 어떤 평범한 토목공사 인부는 힘들이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반면, 어쩌면 그녀의 능력은 이 흔한 휘파람을 부는데 있어 결코 온전하게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 같은데,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자칭 예술가를 자처하는 요세피네를 반박하긴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의 대단한 영향의 수수께끼를 더욱더 풀어야 할 것이다. (531) [죽 읽어 가면 요세피네가 가수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영혼의 활력을 잘 알지 못하지만 활력이 있다는 것을 알듯이, 요세피네의 음악성도 악성(樂性)으로 활력이 있다는 것인가 보다. (50TLD)]
.. 우리 무리 자체가 그러한 여성적인 모습을 많이 갖고 있는데, 그 속에서도 그녀는 눈에 띄게 다정했다. 그런 그녀가 당시에는 정말 뻔뻔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녀의 대단한 감성 속에서도 어쩌면 바로 그것을 느꼈는지 자제를 했다. 어느 경우든 그녀는 휘파람 부는 것과 그녀의 예술 사이의 모든 관계를 이렇게 부정하고 있다. 반대의견을 가지 자들에 대해서 그녀는 단지 경멸과 십중팔구는 시인하지 않겠지만 증오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보통의 자만심은 아니다.(533)
그런데 그녀는 늘 그러하다. 모든 사소함, 모든 우연, 모든 반항적 태도, 일층 앞 쪽 관람석에서 삐꺽거리는 소리, 이 가는 소리[쥐들이니깐], 방해되는 불빛, 이 모든 것들을 그녀는 노래의 효과를 높이는데 적합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정말 그녀는 들리지 않는 귀들 앞에서 노래를 한다. 열광과 박수는 부족하지 않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진정한 이해를 그녀는 오래 전에 포기하게 되었다. (535)
그리고 우리 종족은 종종 아주 분명하지도 않은 목적들 때문에 이리저리 쏜살같이 움직이는데, 그렇게 거의 항상 활동 중인 대중을 자신의 주위로 모으기 위해서, 요세피네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은 반쯤 벌리고 눈은 높은 곳을 향한 채, 자신이 노래할 거라른 것을 암시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대부분 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것을 할 수 있는데, 그곳이 꼭 멀리 보이는 장소일 필요는 없다. (537)
무엇이 우리 종족으로 하여금 요세피네를 위해 그렇게 애쓰도록 물아대는 것일까? (538)
그럼에도 지금 요세피네와 종족 사이의 관계에서 더 어렵게 밝혀져야만 하는 다른 것이 여전히 안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요세피네는 반대 의견으로 자신이 종족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나쁜 정치적 상황이나 경제적 상황에서 이른바 그녀의 노래가 우리를 구하고, 다른 아닌 그것을 노래로 실현하고 있고, 설령 노래가 불행을 몰아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에게 그 불행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준다고 그녀는 믿고 있다. (541)
... 물론 그녀는 우리를 구하지도, 또 우리에게 어떠한 힘을 주지도 않는다. 이 종족의 구원자인 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 종족은 고난에 익숙하고,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결심을 빨리하고, 죽음을 잘 알고 있고, 무모한 환경에서 겉으로는 벌벌 떨면서도 부단히 살고 있고, 게다가 무모하면서도 그와 똑 같이 다산(多産)인데, 뒤늦게 이런 종족의 구원자인 체하는 것은 내가 말하지만 쉬운 일이다. 우리 종족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를 구했다. (542)
그러나 그녀는 그것[노래] 또한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예술은 주의를 끌지 못한 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완전히 다른 것들에 몰두해 있고, 오로지 노래를 위한 정적이 내내 흐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이들이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오히려 옆에 있는 이의 털가죽에 얼굴을 묻고 있고, 요세피네는 그러니까 저기 위에서 헛되이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휘파람 소리에서 무언가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로 밀고 들어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 침묵하기를 강요하면서 혼자 뽐내고 있는 이 휘파람 소리는 마치 종족의 전령처럼 거의 모든 개인에게로 간다. 힘든 결정의 한 가운데 있는 요세피네의 가냘픈 휘파람 소리는 반목하는 세상의 소요 한가운데 있는 우리 종족의 궁핍한 생활과 거의 같다. (544) [진솔한 영혼은 묵언 수행의 공명 전파처럼 퍼져나간다. 심층(궁핍한) 생활의 공감대는 종전체 온생명에 퍼져있다.]
우리 종족은 청년기를 알지 못하고, 아주 짧은 유년기도 거의 알기가 어렵다. 규칙적으로 요구가 생겨나긴 하지만 모두가 아이들에게 어떤 특별한 자유와 어떤 특별한 보호를 보장해 주고 싶어 하고, 조금은 태평하고 조금은 생각없이 주의를 뛰어 돌아다니고 조금은 놀 수 있는 아이들의 권리를 높이 평가하려 하고 있고, 모두들 도와서 그것들이 실현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한 요구가 생겨나고 거의 모두가 그것에 동의한다. (546)
하지만 우리 종족은 아이다운 것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너무 일찍 늙기도 한다. 우리의 아동기와 노년기는 다른 종족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청소년기가 없고 금세 어른이 된다. 그런 뒤 아주 오랫동안 어른으로 있다. (548)
그런 것으로 보아 요세피네는 거의 법 밖에 있고,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설령 그것이 전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 할지라도 괜찮고, 그녀의 모든 것이 용서되고 있다고 미루어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요세피네가 하는 요구들이 완전히 이해가 되는 듯도 하다. 정말로 종족이 그녀에게 선사한 이 특별하고도 그녀 이외에 아무에게도 부여되지 않은, 실제로는 법을 부정하는 선물인 이 자유 안에서, 모두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어쩌면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552)
[쥐에 관한 영화 이야기를 들뢰즈/가타리가 한 이야기가 있는데, 결국 주인이 지하실에 유인되어 쥐들에게 찢어 죽는다는 이야기. 어디서 봤더라? (50TLD)]
이미 오래전부터, 어쩌면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경력이 시작된 이래로 이미, 요세피네는 그녀의 노래를 고려하여 모든 노동으로부터 면제되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 그러면 누군가는 매일의 양식에 대한 걱정과 평소 우리의 생존 경쟁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걱정을 그녀로부터 대신 떠맡아야 될 것이고, 그것은 십중팔구는 무리 전체에게로 전가될 것이다. (553)
이제 요세피네는 그녀가 말로 요구한 것을 얻으려고 실제로 애쓰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현명하다. 그녀는 일을 기피하지 않고, 그리고 더구나 일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체로 낯선 일이다. 그녀는 그녀의 요구가 승인된다 할지라도 분명히 예전과 다름없이 살 것이고 노동이 그녀의 노래에 전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노래가 더 아름다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554-555) [그녀는 늙어 간다]
그 진정한 즐거움이란 것이 그런데 예전부터 요세피네의 노래에서 이 즐거움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것은 종족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요세피네가 요구하는 입장에서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은 고음을 속이지도 않고 대중에게 아첨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 했던 그대로 조용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여 말한다. 그러나 노동해방[늙음]을 위한 그녀의 투쟁에서는 다른 방식이다. 그것 역시 그녀의 노래를 위한 투쟁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 그녀는 노래라고 하는 훌륭한 무기를 가지고 직접 투쟁하지 않는다. 모든 방법이 충분히 훌륭하다는 것이다. (559)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는 최근, 가장 새로운 소식은 그녀의 노래가 기다려졌던 어떤 시간에 그녀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 추종자만 그녀를 찾는 것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찾기 위해 나섰지만 소용이 없다. 요세피네는 사라졌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러한 부탁조차도 결코 받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이번에 완전히 우리의 곁을 떠났다. (563) [늙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어서 뒷방 차지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요세피네는 그녀의 의견에 따르면, 선택된 자들에게 준비되어 있는 현세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우리 종족의 셀 수 없는 많은 영웅들 속으로 기쁘게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향상된 해방 속에서 그녀의 모든 동료들처럼 금세 잊힐 것이다. (565, 마지막 문단) [죽고 나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7:31, 50T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