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한시로 읽는 역사이야기(20)
조선 후기 박태상이 중국 심양을 지나며 읊은 시
조해훈(시인·고전평론가)
아! 나는 태어날 때 값으로 난리를 치렀고(嗟我生來値亂離·차아생래치난리)/ 놀라운 오만가지 일들을 일찍 들었다네.(驚心萬事早聞知·경심만사조문지)/ 어찌 이곳에 직접 올 줄을 기약했겠는가(那期此地身因到·나기차지신인도)/ 당시의 일을 말하려니 눈물이 절로 흐르네.(欲說當年淚自垂·욕설당년루자수)/ …
위 시는 조선 후기 숙종 대에 호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만휴당晩休堂 박태상(朴泰尙·1636~1696)의 ‘심양을 지나며’(過瀋陽·과심양)로, 그의 문집인 ‘만휴당집(晩休堂)’에 들어 있다. 시의 앞부분만 인용했다.
박태상의 본관은 반남(潘南·현 전라남도 나주시)으로, 자는 사행士行, 호는 만휴당萬休堂·존성재存誠齋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박정朴炡이고, 아버지는 우승지 박세견朴世堅이다.
『국조인물고』 권 14 ‘경재卿宰’에 보면 박태상은 “신해년(1671년 현종 12년)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뽑혀 탁명坼名되니, 시험을 주관한 여러 공들이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탁명’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봉미封彌를 임금 앞에서 뜯는 것을 말한다. 봉미란 과거의 답안지 오른편 끝에 응시자의 성명·생년월일·주소·사조四祖 등을 쓰고 봉하여 붙인 것이다.
위 시를 보면 박태상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역시 『국조인물고』에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12월 5일에 태어났다.’라고 적혀 있다. 그는 태어난 값을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은 것으로 비유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사람들로부터 병자호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상처를 입히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끌고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병자호란 이후 수많은 조선인이 끌려왔던 심양에 오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히 마음이 아프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병자호란은 음력으로 병자년인 1636년(인조 14) 12월 8일부터 정축년 1월 30일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이에 대해 조선과 후금의 사정을 간략해보겠다.
1627년 후금(後金·뒤의 청나라)은 1627년에 조선에 대한 1차 침입(丁卯胡亂·정묘호란)을 하였다. 이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하였으며, ‘형제의 맹약’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온갖 요구와 압박을 가해왔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였다. 그러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다시 약속하자는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더 심한 변경 지역을 침략해 온갖 약탈을 자행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말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자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인조 임금에게 척화斥和를 요청하는 이가 많았다.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였다.
같은 해인 1636년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다. 그해 11월 심양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 왔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청 태종은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다음 날인 2일에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고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입했다는 급보가 12일에 조정에 알려졌다. 13일 오후 늦게도 재차 장계가 도착했다. 청군이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자 조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음 날인 14일에는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급히 강화도를 수비하도록 했다.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원손元孫, 둘째 아들 봉림대군, 셋째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성안으로 들어왔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의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3,000명이었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이 있었다. 청군의 선봉 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남한산성으로 구원을 오는 조선 각지의 구원병은 모두 청군에게 붕괴되고, 산성은 안과 밖이 끊어졌다.
청과 화해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主戰派가 여러 차례 논쟁을 거듭했다. 주전파 역시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화해를 하자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한편 강화도를 방어하던 군사들도 청군에게 무너졌다. 청군은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건물과 집들을 모조리 불사른 뒤 다시 물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강화도에서 순절한 사람으로는 원임대신 김상용 등의 관원과 어린이, 부녀자들도 많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는 주화론이 우세해 인조는 11조문의 조약에 합의했다. 11조문은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관계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등이었다.
마침내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해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뒤의 효종)을 볼모로 삼고,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윤집·홍익한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군에게 강제로 끌려간 수만(다른 기록에는 50만) 명을 데리고 오는 게 큰 문제였다. 그 대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비싼 경우는 1,500냥에 이르렀다.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1645년(인조 23)에 환국했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위 시를 지은 박태상은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89년(숙종 15) 겨울에 청나라에 조위사弔慰使로 청의 수도인 연경에 가 이듬해인 1690년 봄에 돌아왔다. 연경에 가면서 심양에 들러 위 시를 지어 아픈 역사를 되새겨본 것이다. 그는 이후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696년 이조판서로 있다가 지병으로 사직한 후 그해에 세상을 버렸다. 박태상의 묘는 대전에 있다.
-------------------------------------------
조해훈|1960년 대구 출생으로 국제신문 기자, 동아대 홍보팀장 등을 역임했다. 1987년 《오늘의문학》,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사십계단에서』, 『생선상자 수리공』 등 여러 권을 펴냈다. 최계락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지리산에서 고정박물관 「목압서사」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