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 시집 속 대표시|김명옥
질주의 중심 외 4편
그가 한뎃잠을 잔다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던 중
멈칫 발걸음을 멈춘다
벤치 위에 길게 누운 남자
아차, 하는 순간 죽음의 방패인 헬멧 벗어두고
사막의 열기나 쏟아지는 폭우에도
미로 같은 세상 헤쳐나가던 오토바이는 잠시 휴식 중이다
반쯤 열린 손아귀 속 목줄인 휴대폰도 졸고 있다
새들도 대화를 멈추고 나뭇가지 흔들며
포르르 날아오른다
싱그런 초록 노래 무한히 흘러나오는 아늑한 그늘 아래
그는 스스로 단잠을 주문하고 배달 중이다
부릉부릉, 고단한 일상을 끌고
당신의 환한 표정을 향해
그가 요란스런 삶의 바퀴를 닦으며
천천히 질주의 중심으로 굴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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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 증후군
종아리에 쥐가 사나봐요 수시로 새벽되면 나타나요 나무토막처럼 마음도 뻣뻣해져요 검색창을 두드려요 하지정맥류라는 병원 광고가 튀어나왔어요 또 마취를 해야 하나요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를 지켜봐야 하나요 약국 유리문은 마그네슘을 내미네요 순환이 되지 않으면 물구나무서기를 할까요 물이 부족하니 컵이 바쁠 수 있겠어요 낮에는 잘 보이지 않아요 탄자니아 하자베족을 불러 사냥을 부탁해야겠어요 그냥 아파트정원을 돌아다니는 얼룩고양이를 부를까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연락을 안할 지도 몰라요 난처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을 거니까요 조마조마한 밤을 덮고 누웠어요 침대가 수술실 복도를 지나네요 조그만 쥐 한 마리 쪼르르 달려가네요 형광등이 흔들려요 검은 마우스가 화면 속 초록숲으로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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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 절제
산등성이에 앉아 구름 샌드위치를 먹어요
부드러운 맛인가 하면 어느새 세찬 비가 파고들어요
흐르는 시냇물에 슬쩍 한쪽 발을 넣어보아요
아직 물살은 냉정해요
협곡을 지나 무사히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지요
점점 훈풍 불어오면 온기가 퍼질 거예요
욕망과 윤리의 시소는 어디로 기울어질까요
노천카페 앞 둥근 파라솔의 균형을 맞추어요
오른쪽에 담긴 물을 왼쪽으로 옮기며 온도를 조절해요
수호천사 미카엘이 날개 펼치고
너와 나를 화해시키려 해요
조절되지 않는 분노의 꼭짓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요
뒤집히려는 나를 붙잡아줘요
그림 속 아이리스에 앉은 나비가 날갯짓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경청만 하다가
영원히 마이크를 놓칠지도 몰라요
어제와 타협한 오늘이 고요를 가장한 채
삐딱한 사람들 심장을 어루만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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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풍경을 밀고
그림책을 빠져나온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가네
옹알옹알 꽃들이 말을 걸고
솜사탕 같은 바람이 뺨을 스치며
거대한 미래를 밀고 가네
바퀴는 언덕을 오르고 구릉을 지나
깊은 계곡을 넘네
낯선 시간을 향하여
눈과 귀를 활짝 열고 닫힌 문을 두드리네
소설책을 빠져나온 딸이 휠체어를 밀고 오네
시드는 태양을 눈썹 위에 얹고
안타까운 이별의 옛 문장을 휘날리며
사라진 모든 꿈의 후기를 밀고 오네
바퀴는 오래된 골목을 빠져 나와
비틀거리며 지나온 비탈길을 만지네
남은 시간을 향하여
깔고 앉은 추억을 조립하며 겸손한 말을 고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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킥보드는 당신을 버리고
아파트 정원으로 킥보드가 쓰러져 있다
붉은 영산홍의 가쁜 숨결 받아쓰던
긴장한 초록 이파리들이 수런거린다
룰루랄라 양탄자 타고 멀리 날아오르는
아직 스며든 즐거움이 빠져나가지 못한 듯
바퀴는 허공에서 뱅뱅 돌아가는데
어디로 달려가는지 모르는 채
씽씽 달리던 일상의 바퀴는 제동이 걸렸다
보고 싶은 사람과 만남은 자꾸 미루어지고
세월이 지나간 몸의 흠집을 닦아내느라
방을 점령한 개미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트를 가려고 길을 걷다가
꽃댕강나무를 덮친 노란 킥보드에 놀란다
번지던 아스라한 향기는 사방으로 꽉 막히고
앞서가던 시각장애인이 걸려 넘어진다
킥보드는 당신을 버리고 떠났는데
지그시 억누른 슬픔이 바퀴를 서서히 굴린다
즐거움이 언젠가 당신을 버리듯
견디다 보면 슬픔도 당신을 버린다
휘청거리는 내게 따뜻한 위로가 도착할까
지나간 자리마다 별을 심으며
일상의 바퀴를 서서히 돌리자
태양의 손끝마다 꽃들은 화들짝 피어나고
누군가 사뿐히 평온의 구역으로 착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