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18. 하빈에서 질그릇 굽던 이는 순(舜)임금만이 아니었다
‘정관지치(貞觀之治)’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주로 평가받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정관’이라는 말은 바로 이 당태종의 연호(年號)[황제의 재위 기간에 붙이는 칭호]이다. 따라서 정관지치는 당태종이 천자의 자리에서 치세를 하던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이른바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시절로 내세우는 때가 바로 이때이다.
그런데 중국역사에 있어 역사시대 이전의 시대까지를 모두 통틀어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꼽는 때는 ‘요순시대’이다. 요순시대는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으로 알려진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던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요임금이 세운 나라는 당나라[도당·陶唐·당태종의 당나라와는 다른 나라], 순임금이 세운 나라는 우나라[유우·有虞]이다. 참고로 요임금이 세운 당(唐)나라[B.C.2357]는 단군왕검이 세운 우리의 고조선[B.C.2333]과 건국연대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순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하빈에서 질그릇을 구웠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에 순임금이 하빈에서 도자기를 구웠다니 말이다.
1. 순임금, 농사짓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고
앞서 태고정에 걸려 있는 오봉 이호민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순임금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순임금은 요임금에 의해 ‘픽업’되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유교 경전에서는 순임금을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왕위를 넘겨준 요임금과 왕위를 넘겨받은 순임금의 관계가 좀 그렇다. 둘은 서로 부자 혹은 형제와 같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왕위를 넘겨주고 넘겨받기 전까지는 서로가 완전히 남남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왕조국가의 왕위계승 방법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또는 형이 동생에게, 그것도 아니면 할아버지가 손자, 숙부가 조카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것이 일반적인 왕위계승 방법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요순시대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다. 혈육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이 아니라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성인의 덕을 갖춘 인재를 찾아내어 그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한 것이다.
요임금이 남남인 순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처럼 순임금 역시 남남이었던 ‘우(禹)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이런 식[선양(禪讓)]의 왕위계승은 우임금에서 끝이 났다. 우임금이 남이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세상의 왕들은 인재를 찾아 왕위를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이었다.
한편 유교 경전인 서경(書經)과 맹자(孟子)는 물론 사기(史記)와 같은 역사서 등에 순임금과 관련하여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텍스트가 하나 있다. 순임금이 요임금에 의해 ‘픽업’될 당시 순임금이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짓고,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구웠으며, 뇌택(雷澤)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다는 텍스트이다. 여기서 역산·하빈·뇌택은 지금의 산동성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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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전서「권25 성학집요」 위정 제4하. 순임금이 역산에서 밭 갈고 하빈에서 질그릇을 굽고 뇌택에서 고기잡이를 하였다는 텍스트는 우리나라 선현의 문집 등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역산에서 농사짓고, 하빈에서 질그릇을 굽고, 뇌택에서 고기를 잡았다.’는 이 유명한 텍스트는 유교·유학에 있어 요임금과 함께 최고의 성인으로 추존된 순임금을 상징하는 대표적 키워드이다. 그런데 혹시 아시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 땅에 ‘하빈’이라는 지역이 있으며, 그 옛날 이곳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도곡(陶谷)’[질그릇 굽는 골짜기]이라 칭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
2. 하빈에서 고기 잡고, 도곡에 은거하다
조선시대 우리 대구를 대표하는 유학자(儒學者)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달성십현(達城十賢)’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달성[대구의 별칭]을 대표하는 열 분의 훌륭한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이중에는 박종우(朴宗祐)[1587-1654]라는 인물이 있다. 자는 군석(君錫), 호는 도곡(陶谷)인데 별칭으로 ‘하빈조수(河濱釣叟)[하빈에서 고기 잡는 노인]’라고도 칭했던 인물이다. 그는 취금헌 박팽년 선생의 6세손으로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친 인물이다.
대구유림 3세대의 선두주자였던 박종우는 일찍부터 낙재 서사원과 한강 정구 양 문하에 나아가 수학했다. 당시 지역사회에서는 그를 일러 문장(文章)·절의(節義)·덕행(德行)을 모두 갖춘,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큰선비라며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또한 세상은 그를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도 불렀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큰 고초를 겪었다. 그때 그는 신하된 도리로 편히 지낼 수 없다 하여, 거적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서 50여 일간 노숙(露宿)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전도 굴욕’의 소식이 전해지자 ‘거꾸로 된 세상에 글은 남겨 무엇하리오.’라며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한 후 자신의 평생 저술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19년의 세월 동안 하빈 묘골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달성십현의 한 분이자, 대구지역 숭정처사의 한 분이기도 한 도곡 박종우. 그는 인생 말년을 자신의 호처럼 이곳 하빈에서 질그릇을 굽고, 물고기를 잡으며 은거한 것이었다. 마치 4,300년 전 중국의 순임금처럼 말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두 사람의 삶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박종우는 하빈 땅에서 처사(處士)로 일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생각건대 두 사람 모두 도가 통할 때는 세상에 나아가 천하를 다스리고, 도가 통하지 않을 때는 물러나 은거하라는 성인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산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말인데 순임금의 삶은 행복한 삶이고, 박종우의 삶은 불행한 삶이었을까? 글쎄다.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유가(儒家)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인물은 모두 이도사군(以道事君)[도로써 임금을 모시다]을 행한 인물이다. 때에 맞게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스스로의 도를 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두 사람의 삶을 놓고 지금 세상의 시각으로 섣불리 행·불행을 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박종우는 사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贈職)되었다. 참고로 그의 아버지인 박충윤과 백부인 부총관공 박충후, 숙부인 소학 박충서 3인은 임진·정유 양란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혹시라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 육신사를 여행할 계획이 있는가. 그렇다면 육신사 아래에 있는 도곡 박종우 선생의 재실인 ‘도곡재(陶谷齋)’도 꼭 한 번 들려보기를 권한다. 특히 봄·여름·가을, 철따라 변하는 도곡재 뜰의 꽃밭을 감상하는 재미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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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역사인물 동산에 세워져 있는 도곡 박종우 선생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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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재 사랑채.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박팽년 14세손]이 1778년[정조 2]에 지은 집으로 1800년대에 와서 박종우의 재실인 도곡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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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재 안채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하자면 달성군 하빈면 지역은 본래 ‘다사지’로 불렸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인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전국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개명할 때 지금의 ‘하빈’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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