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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장들을 둘러보는 고중상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망해 버린 평양보다는 이곳이 더 안전하고 유서 깊은 곳이므로 황성으로도 적격이오. 또한 그 주변에는 여러 성들이 산재해 있고 그 성들에는 내 종친들이 웅거하고 있소.”
좌중이 어느 정도 그의 의사에 동의하고 있음을 파악한 고중상은 그들의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힘을 주어 확언한다.
“하지만, 여기 부여성이 무너지면 동북쪽도 위험하오. 그러므로 부여성을 제 이의 도읍으로 삼아, 주력부대를 여기에 주둔시켜 이곳을 사수할 것이니 제장들은 과히 염려하지 마시오.”
제장들의 동의를 얻은 고중상은 부여성에 주력부대를 남기고 일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은 황족들이 진을 치고 있는 동북부로 간다.
하지만, 애독자님은 하나의 의문이 일 것이다. 고중상은 왜 처음부터, 당군에게 장악당한 부여성을 버려두고, 험하고 고생스럽더라도 안전하게 산악지대의 길로 우회해 동모성 쪽으로 진출하지 않았는가?
그는 왜 마치 도박을 벌이듯 부여성부터 탈환하고자 했는가? 부여성이 동북지방의 관문이고 급소라 하더라도 만에 하나 부여성을 점령하려다 실패하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가고 국가의 재건립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는 왜 하필 부여성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무모한 탈환전투를 벌였는가?
그야말로 천행으로 성을 다시 찾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 했는가? 자칫했더라면 우리가 오늘날 발해라고 부르는 대진발해국은 건설되지 못하고 역사의 판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고중상이 부여성을 되찾지 못하면 자신도 죽고 나라 수복도 영영 불가능하리라는 비장한 판단과 각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부여성을 잃은 채 동북지방에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이길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부여성은 동북지방의 관문으로서 전략적 가치가 절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의 역사적인 고도로서 상징적인 의미도 대단히 컸다. 이를 당군에게 잃은 것은, 고구려 백성들을 맥 빠지게 만들고 크게 낙심시키는 절망적 사태였다.
철옹성 같은 부여성이 당군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 근처의 속말수 아래 40여개 성이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줄줄이 백기를 들었던 것도, 고구려 백성들의 그런 절망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부여성을 탈환하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고중상의 냉철한 분별이었다. 부여성을 탈환한 후 동북의 동모성에서 힘을 기르는 것과, 부여성을 잃은 채 동모성에 할거하는 것은, 백성들의 사기와 힘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천양지차였고, 고토수복 가능성에 있어서도 전자가 훨씬 유리했다.
비유하자면, 부여성을 적의 수중에 놓아둔 채 동모성에 웅거하는 것은, 집의 대문을 도적에게 열어 둔 채, 안방에 거하는 것과 같았다. 부여성은 동북지방의 관문이고 대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천우신조로 먼저 부여성을 되찾은 고중상은 동모성으로 진출하게 되고, 동모성 일대의 남은 종친들은 만장일치로 고중상을 후고구려의 임금으로 추대한다.
원래 동북에 살던 고구려 황가 종친들은 해모수의 후예들이며, 고주몽의 자손들이었다. 고구려 6대 태왕 태조무열제가 발해바다 연안 땅을 다물하고(되찾고) 요서 십성과 여러 성을 쌓을 때, 그곳의 성들을 맡아서 발해 해안으로 이동했던 이들도 아마 그들의 일족이었을 것이다.
물론, 도읍지 경기지방 계루부의 황족들은, 동서남북 네 지방, 즉 순나, 연나, 관나, 제나부를 다스리는 종친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성씨를 모두 바꾸었지만, 원래는 그들도 모두 고주몽의 후예들이었다.
예를 들어 서부 즉 연나부 통치자들은 성이 연씨로 바뀌었다. 연개소문이 바로 그 서부 통치자들 중 하나다. 북부 즉 제나부의 통치자들은 성이 “걸걸傑傑”이라는 복성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걸걸傑傑”은, “외양이 준수하고 성질이 쾌활하다”는 뜻이다(네이버사전).
그래서 고중상(대중상)은 최초의 당나라 사료에서부터 성姓이 비하어법에 의해 그와 발음이 유사한 “걸걸乞乞(거지 중 상거지)”로 적혀있다.
대진발해국이 당나라에 대항하고 당나라를 침략하며 한 때 당을 호령했기 때문에 그런 적대감을 보인 것이다.
본 소설에서는 그의 혈통이 원래 고주몽에 속해 있으므로, 고씨로 칭했다.
고중상이 발해바다 서편 발해군 땅을 버리고 서압록의 동쪽 옛 고리국의 성읍 남부여성(장당경, 개원시)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부여성으로 진격한 후, 발해군 땅은 당나라 치하에 들어간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나라는 발해군 땅의 고구려 황족들을 위무하기 위해 대대로 그들에게 명목상의 발해군 관작을 수여한다.
훗날 당나라가 대진발해국에 사신을 보내, 조영을 발해군왕에 봉한다는 등의 쇼를 벌인 것도, 원래 발해바다 서편 발해군 땅이 조영 선조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중상은 동북부로 이동해 혈족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후고구려 황제로 즉위한 후 동모산에 산성과 궁실을 짓고 그 주변 땅, 지금의 돈화시 일대를 도읍지로 삼는다.
군사적 정치적 안정성, 지리에 익숙한 고향, 지지자들인 친족들의 존재, 환웅임금의 옛터. 이런 몇 가지 이유들로 고중상은 그곳에 터전을 잡았으리라.
하지만 대진발해국이 훗날 땅을 요서까지 넓혔을 때 앞으로 나아가, 황성을 다시 길림(부여성)이나 개원(옛 장당경)으로 정했어야 마땅했다. 뒤로 후퇴해서 안주해 있다가 정보에 어둡고 안일에 빠져 요나라에 당했던 것이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다. 황성을 계속 안쪽으로 후퇴시켜 북한 평양까지 내려갔다가 망한 것이다. 이는 모두 진취성의 부족에 기인한다. 고구려 멸망시의 평양성이 요양 지방이라는 학설도 있지만 말이다.
왕성을 뒤로 물러나게 하면 안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다. 진취성을 갉아먹고 무사안일성만 키우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수도를 남쪽으로 내리면 안 된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국민의 호연지기적 기상을 은연중 잠식하고 무사안일주의를 부추긴다. 휴전선에서 가까운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이어서 위정자들과 백성들을 일깨우기에 얼마나 좋은가?
통일 후 수도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 당연히 지금의 평양이다. 평양에 수도를 두고 북한의 개발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그리고 국경인 신의주를 제 2의 수도로 키우며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 서울은 경제중심지로 놓아두면 된다.
고중상은 동모산에 이르러 성을 세우고 나라를 선포한 후, 다물, 고토회복을 국시로 삼고 부여성을 전진기지로 삼았다. 부여성 밖, 아리하 강변에는 거대한 연병장을 만들어, 거기서 직접 군사를 훈련시켰다<협계태씨족보>.
당나라 관할지역 영주 계성에 있는 그의 부친 고승으로부터 사자가 당도한 것은, 그가 마침 아리하 강변에 머물고 있을 때다.
고승은 편지에서 그곳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며, 당나라 안의 고구려 백성들이 세력을 얻을 때까지 당분간 허리를 굽히고 당나라와 화친하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나라에 칭신稱臣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집어 삼킨, 철천지원수 같은 당나라가 아니던가?
고중상은 신음했다.
‘내가 당나라와 계속해서 싸운다면, 내 부친과 아들은 반역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허리를 굽히고 당나라에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렇게 하려면, 부친과 장남은 자유를 잃고 당나라에 볼모가 되어야 한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형국이었다. 어떻게 부친과 아들을 민족의 반역자로 만들 수 있겠는가? 반면에, 대고구려가 어찌 당나라에 칭신하며 조공을 바친단 말인가?
그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고뇌하고 있을 때 서쪽으로부터 몇 명의 사자가 도착했다. 당나라 조정에서 보낸 사신들이었다.
당 조정은 국서에서 어이없게도, 그에게 진국왕도 발해군왕도 아닌, 그보다 한참 낮은 관작 진국공震國公에 홀한주도독을 제수하고 있었다. 무 태후의 당나라 조정은 고중상의 세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를 조롱하고 있었을까?
낙양성의 밤은 아름다웠다. 화려한 황궁에는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었고, 거리에도 등불을 켠 곳이 많았다. 둥글게 무르익기 직전의 달을 옹위한 채, 은하수와 별들이 춤을 추고 있다.
무 태후의 배려로 낙양궁 안의 별관에 묵게 된 조영은 뜰 밖에 나와 밤하늘을 쳐다보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내일이면, 중국의 무사들과 겨루어 고구려의 무예를 드날려야 한다. 하지만 전에 중국 무사들과 겨루어본 적은 거의 없다.
할아버지 고승의 신신당부에 따라, 고려 백성으로서 외방外邦에서 몸조심하느라 거친 무예를 시험해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원치 않아도 그의 무예, 아니 고려의 무예는 무대 위에서 청천백일 하에 드러날 것이다.
조영은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송막도독 이진영의 가신장인 거란 무사 신창 이해고와 비기곤 했지만, 그와 단 한 번도 겨루어본 적이 없다.
신창 이해고도 내일 연무장에 나타날 터다. 어쩌면, 이루하도. 혹시 여미아도?
조영은 설레는 가슴으로 가끔씩 한숨을 쉬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했다.
“아,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미아의 하나님.”
조영은 자신도 모르게 “여미아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다.
‘여미아의 놀라운 무예를 나는 친히 목격했다. 혹시 이루하와 여미아 앞에서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답답했다. 조영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낙양성 낙양 황성의 남문인 단문端門 밖 광장에는 경무대競武臺가 마련되고 이른 아침부터 군중이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다. 젊은 남자들의 무예를 즐겨 관람하던 무 태후가, 돌연 흥이 일어나 고려인 조영과 몇몇 유명한 젊은 협사들을 데려오게 해 무술 시연 대회를 열게 한 것이다.
이 무술대회를 위해 무 태후는 승려 회의를 은밀히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부탁했다.
“아사阿師! 그대가 이번 무술대회에 나가 자리를 빛내주었으면 좋겠어요.”
무후가 요청하자 회의가 대답했다.
“제가 출가한 몸으로 어찌 사사로이 무예를 겨룰 수 있겠습니까?”
“아니에요. 그대는 강호 고수들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들었는데, 일찍이 그대의 무예를 구경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과 겨루는 것은 보지 못했어요. 이번 기회에 당신의 그 놀라운 검술에 가랑잎들이 나뒹구는 광경을 꼭 보고 싶군요.”
무 태후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치기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회의는 난처한 듯 말했다.
“소승은 출가 후 창검을 멀리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옛날의 기예를 모두 잃었습니다.”
“백마사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겨우 일 년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듣기로는 사찰 안에 연무장을 만들어놓고 무예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헛소문을 들은 건가?”
회의가 대꾸를 못했다.
“그러지 말고 꼭 보여줘요. 당신의 멋진 무예를 만인이 볼 수 있게.”
“젊고 아름다운 놈들이 구름같이 모여들 터인데, 나 같은 거렁뱅이 승려가 거기 나가서 뭘 하겠습니까?”
승려 회의의 말투에 모종의 질투심이 섞여있음을 눈치 챈 무 태후가 미소로 대답했다.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지 말아요. 내 눈에는 아사만큼 멋진 남자가 없어요.”
“이번에 폐하께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한 남아를 발견하고 그의 무예를 시험해 보고자 무술대회를 열게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사실이 아닌가요?”
“아사! 누가 그런 허튼 소리를 해요? 내가 무예 구경을 좋아한다는 것, 아사도 잘 알지 않아요?”
무 태후는 마치 어린 소녀처럼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젖비린내 나는 젊은이들하고 겨룬다는 것 자체가 제겐 큰 모욕입니다.”
“아사는, 딱 한 번만 출전해주시면 돼요. 최후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승자의 콧대를 꺾어버리면 그만이에요.”
회의가 말없이 망설인다.
“내가 적당히 요리해 둘 거예요. 아사가 얼마나 놀라운 인재인지 만백성이 알아줬으면 해요.”
말을 하며 무 태후는 회의에게 눈짓을 했다. 염려하지 말라는 표시였다. 반드시 그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리라는 약속 같기도 했다.
“흐흠. 정 그러시다면, 폐하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아사, 잘 생각하셨어요.”
무태후가 이토록 집요하게 회의의 무술대회 출전을 종용한 것은, 그의 진짜 실력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가 혹시 자신이 다른 멋진 젊은 남자에게 마음을 주려한다고 오해할까 염려해서인지도 모른다.
황궁도 사람 사는 곳이다. 그곳에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의 정이 있고 암투가 있고, 시기 질투가 만연했다. 세간의 남녀들에게서 벌어지는 치정癡情들이 그곳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무 태후는 독점욕과 자아성취에의 욕망, 영웅심이 유별나게 강하면서도, 또한 사랑에 굶주린 외롭기 짝이 없는 일개 여자였다. 그녀의 외로움은, 그녀가 나라의 최고 자리에 앉아 한 나라를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보통의 아녀자들보다 몇 십 배 강렬했다.
자신보다 네 살 어린 남편(고종, 628-683)은 삼년 전에 이미 죽었다. 그녀 주위에는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남자들이 무수했으나, 그녀의 외로움을 알고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남성은 없었다. 모두가 자신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생쥐였다.
하지만 승려 회의만은 달랐다. 이 친구는 작년에 처음 자기 앞에 섰을 때,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로서 빈한하기 짝이 없는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대면해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자기를 두려워하거나 긴장하지도 않았다.
얼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옛날의 반안潘安(서진의 문인. 247-300) 같고, 들은 풍월인지 실제로 공부한 것인지는 몰라도 시문詩文 나부랭이를 얼마나 잘 읊어대는지, 송옥宋玉(서기전 290-222. 전국시대 초나라 문인)과 비견될 정도였다.
첫눈에 반한 무 태후는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무 태후는 승려 회의와 흡사한, 아니 회의와는 아주 색다른 영기를 발산하는 한 고려인과 조우한 것이다. 이방의 옷을 입고 자기 앞에 우뚝 선 고려인은 자신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으며 자기 앞에서 위축되는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당당하고 멋진 장부의 기개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남자다운 아름다움이 그에게서 물씬 풍겼다. 풍소보 회의는 기생오라비처럼 얼굴이 미끈했으나, 이 젊은이는 의연한 영웅의 기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낯이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외방인 가운데 이런 남자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수년 전 천개소문(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천남생의 아들인 천헌성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점이 보였으나, 그는 자기 앞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고, 또 그리 미남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무예만은 알아줄만 했다.
무술대회에 승려 회의가 출전한다고 하자, 그의 위세를 잘 알고 있던 서경과 낙양성 군대 안의 무사들은 하나 같이 출전을 사양했다. 하지만 딱 한 사람은 예외였다. 그는 황궁수비대 우림군羽林軍에 소속한 이기원李奇原이라는 젊은 장수였다.
그 밖에도 대강大江(양자강) 남북에서 여러 무림 명가名家의 자제들이 참여했다.
거란인으로는 송막도독 이진영의 가신장 신창 이해고가 왔고, 영주도독 조문홰의 부장 서연도 나왔다.
고려인 출신으로는 조영 외에 연개소문의 손자인 우위右衛대장군 연헌성이, 서쪽의 전장戰場으로부터 돌아오기 바쁘게 특별히 무후의 부름을 받고 이 대회에 참석한다.
연헌성은 당나라에 귀순한 연남생의 아들로서 당년 서른여섯 살이었으며 당 조정에서 상주국上柱國, 운휘장군雲麾將軍의 칭호를 수여받고, 우위대장군 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무 태후의 은택을 입어 우우림군상하右羽林軍上下로 봉직하고 있었다.
우림군은 황궁수비대였는데, 연헌성은 그중에서도 황제의 친위대인 백기대百騎隊에 배속되었다.
그의 출생연도에 관해 659년 설이 있으나, 그게 옳다면 그가 6,7세 어린 나이에 부친 연남생에 의해 당나라에 파견되고 다시 그 나이에 당나라에서 우무위장군 칭호를 받아 고구려 국내성의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다는 얘기다.
더구나 고구려 멸망 연도인 668년에 그가 불과 10살 나이로 평양성 함락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은 수긍하기 힘들다.
1920년대에 낙양에서 발견된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의 나이 16세에 부친과 함께 당나라에 귀순했으니(666년), 그는 659년이 아닌 651년에 태어난 게 거의 확실하다.
그의 묘지는 부친 연남생의 묘지와 함께 현재 낙양 북쪽 맹진현 송장진 동산두천 남쪽 500미터 밭 가운데 보존되어 있다.
젊고 아름다운 무림 명가의 무사들과 이국의 협사들이 무술대회에 참석한다고 하자 궐 안의 다른 여인들뿐만 아니라 젊은 공주들까지 이를 구경하고자 앞을 다투어나왔다. 그녀들도 호기심 많은 아가씨들이고, 또 멋진 낭군을 그리워하는 처녀들이었다.
그 공주들 가운데, 당 고종 이치의 딸 태평공주太平公主가 있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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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9. 9. 초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