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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특박(삼박 사일의 외박)을 명 받았다. 그것도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서 말이다. 이등병은 아직 군대 생활에 한창 적응할 때라서 특수한 일(개인적인 질병 또는 가족과 관련한 엄중한 상황)이 아니면 외박이나 휴가를 보내지 않는다. 특박을 명 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런 가운데에 육군 이병이 외부로 맘대로 나갈 수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때였다.
박정희 정부가 무너지고 광주항쟁이 발발할 때 난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흑백 TV를 통해 간간히 광주항쟁과 관련된 뉴스를 보았다. 엄격한 정부 통제 하에 방영되는 뉴스이므로 진실이 왜곡된 채 국민들을 호도하는 뉴스였다. 나라가 분열되고 국운이 불안한 건 알았지만 그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산간벽지에 사는 사람들이 알 길이 없었다. 지금처럼 통신기술이 발달한 때가 아니어서 라디오나 TV를 통해 들려지는 대로 그저 믿고 수긍할 밖에 별도리가 없던 시절이다. 어림짐작으로 국가운명에 비상이 걸렸다는 정도밖에 몰랐다. 게다가 철없는 학생으로 더 깊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설령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고 알았다고 해도 무얼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그때 군에 입대했던 동네 형들 중엔 군인 신분으로 광주항쟁 진압군으로 투입되기도 하였다. 전투경찰로 징집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겪었을 그 엄중하고도 혼란스러웠을 상황을 우린 까맣게 몰랐다. 나중에서야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다. 내가 만약 두 해 먼저 태어나 군에 징집되었더라면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만 해도 참 아찔하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자신이 맘먹은 대로 살아지는 법이 아니란 걸 새삼 느낀다.
혼란스럽던 5공화국이 그럭저럭 자릴 잡아가자 정부는 군인들에게 정신무장을 시킨다는 이유로 5 공화국의 정당성을 학습시켰다. 마치 광대한 분량의 성경을 십계명으로 추린 것처럼 한 장의 종이에 압축해 새 정부의 정당성을 사병들에게 암기토록 했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대대장이 각 중대를 순시하며 사병들의 정신 상태를 점검하였다. 당시에 우리 중대원들은 전술도로 개척을 위해 야지에 나와 별도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대장의 방문을 앞두고 비상이 걸렸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각종 공사자재를 감쪽같이 치우고 내부반과 주변 구석구석을 윤이 반짝반짝 나도록 청소하였다. 이윽고 모든 사병들이 내무반에 집결하여 대대장을 기다렸다. 중대장의 인도로 대대장이 내무반으로 들어왔다. “ 중대 차렷,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책임” 내무반장의 우렁찬 인사가 이어지고 대대장의 훈시가 길게 이어졌다. 훈시가 끝날 무렵 대대장이 사병들을 향해 참모총장 서신 제1호(정신교육 관련)와 관련해 아무나 한 번 발표하라고 하였다. 갑자기 내무반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대대장의 요청에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다음 중대원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모두가 숨죽이고 근심하고 있을 때 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병 000 제가 발표하겠습니다”하고 그동안 달달달 외우고 있던 서신 내용을 짧지만 명확하게 발표하였다. 그러자 대대장이 환하게 웃었다. 중대원들의 안도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대대장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특박’이란 선물을 주고 떠났다. 대대장과 중대장이 떠나자 군기 군번이 내게 와서 잘했다고 격려해 주었다. 나 때문에 위기를 모면한 중대원들도 그날만큼은 부드럽게 날 대해 주었다. 사실 이등병 4호봉으로 군기가 바짝 들어 있던 나로선 당연한 발표였다. 어쨌거나 말 한 미디에 죽고 사는 게 군대다. 그러니 나의 발표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 잘 안다. 덕분에 이등병 4호봉 주제에 고향집을 다녀왔다.
그 뒤로 선임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상황 병이란 특수한 위치 탓도 있었지만 나름 내무반의 스타가 한 명 탄생한 셈이다. 그러나 난 여전히 이등병에 불과한 어린 사병일 뿐이다. 그럭저럭 군대 생활에 적응하며 공식적인 첫 휴가를 명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들 아는 동기도 없고 그저 집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나온 김에 입대 전 근무하던 사무실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우리 집과 가까운 마곡사에서 정밀실측조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마곡사를 찾아갔다. 날씬했던 몸이 곰처럼 두리뭉실해가지고 선배들 앞에 나타났더니 “야 정기사 너 군대 짬밥이 입에 딱 맞나 보다”하고 놀려댔다. 사무실의 모든 직원들이 마곡사 근처에 방을 얻어놓고 연일 정밀실측조사에 매진하던 중이었다. 선배가 대뜸 하는 말이 집에 있어봤자 답답할 테니 휴가기간 동안 팀에 합류해 알바라도 하라고 하였다. 얼떨결에 내게 맡겨진 일은 마곡사의 대광보전 앞마당에 세워진 오 층 석탑을 실측하는 일이다. 대개 석탑의 꼭대기는 하부의 재질과 동일한 석재로 옥개석을 만들고 그 위에 역시 석재로 상륜부를 장식한다. 그런데 마곡사 오 층 석탑은 석재 대신 청동으로 제작한 ‘풍마동’이란 독특한 상륜부를 지니고 있다. 이런 양식은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불탑양식으로 국내에선 마곡사가 유일하다. 그리하여 2024년 11월 현재 국가유산청은 마곡사 오 층 석탑을 국보로 지정할 것을 예고하였다.
풍마동 이하 석탑은 이미 선배들이 실측을 마친 상태다. 복잡한 상륜부의 풍마동 실측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풍마동엔 불교와 관련된 상징적인 동물상과 극락세계를 표현한 다양한 장식들이 부조로 제작되어있다. 게다가 그 높이만도 약 1.8m에 이를 정도로 크다. 선배들은 마침 내가 휴가 나온 걸 알고 그 일을 내게 떠넘긴 셈이다. 입대 후 약 7개월 만에 현장실측에 임하는 자세는 입대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지금은 군인 신분이란 것이고 회사에 속한 직원이 아니란 점 때문에 다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였다. 말이 실측조사지 풍마동은 그림 그리기에 가까운 그것도 최대한 실물과 동일한 그림을 모사하는 행위다. 작업하는 동안 같은 자세로 몰두하다 보면 허리며 팔꿈치가 빠지듯이 아팠다. 더군다나 입대 전과 다른 체형이다. 배는 불룩 튀어나왔지 몸은 군인으로서 경직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조사 내내 즐거웠다. 풍마동 실측조사가 거의 끝나가자 선배는 내게 또 하나의 일거릴 주었다. 대광보전 내 충량머리에 장식된 용머리와 포작에 장식된 복잡한 형태를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면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 할 몸이다. 조금이라도 일을 더 많이 하려고 선배들과 함께 민박집에서 지냈다. 하루는 도면작도 중에 막히는 부분이 생겼다. 함께 일을 도우던 후배기사와 함께 밤중에 대광보전으로 확인하기 위해 민박집을 나섰다. 모두가 잠든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경내는 칠흑 같이 어두웠다. 플래쉬에 의지해 내가 앞장을 서고 두서너 걸음 뒤에서 후배가 따랐다. 법당에 들어가기 위해 협문을 향해 플래시를 비취었을 때 우린 순간적으로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깜깜하던 협문에 불을 비추는 순간 허연 소복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이게 귀신이냐 아니면 도깨비냐 속으로 그리 생각을 하자 가던 발걸음이 땅에 딱 붙어서 움직여지질 않았다. 사람이 놀라면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온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발딱 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식은땀이 등줄기에서 흘러내렸다. 뒤에 섰던 후배는 내게 바짝 달라붙어 부들부들 떨고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순간 내 신분이 군인 아니더냐. 여기서 무섭다고 돌아서버리면 후배에게 무슨 염치가 있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무슨 귀신이냐 저건 분명 사람일 것이다. 생각하고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나도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군인이란 이름에 겁쟁이란 소릴 듣고 싶지 않았다. 막상 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할 대상을 비춰보곤 실측확인은 아니하고 얼른 돌아서 나왔다. 그리곤 뛰어가자는 후배의 말을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천천히 걸어서 경내를 빠져나왔다.
그날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다. 당시에 대한불교조계종은 내부적인 파벌(?) 싸움이 극렬하던 시기다. 그 배경은 난 잘 모른다. 다만 문화재와 관련된 업무를 보다보니 어깨너머로 주워 들었을 뿐이다. 마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다. 그러니 내홍이 없을 수 없는 곳이다. 어찌어찌해 희생된 사람 중엔 세상과 이별까지 하는 일도 발생했던 모양이다. 법당 뒤에 죽은 자의 위패를 봉안하고 그를 슬퍼하는 젊은 미망인이 그곳에서 극락왕생을 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니까 스님인가 해서 잠깐 협문에 기대서서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내가 플래시를 비취었던 것이다. 스님이 아니란 걸 알고 여인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우리가 놀라서 다시 한번 그곳을 비췄을 땐 아무도 없었다. 짧은 순간에 벌어진 그 상황에 우린 귀신 아닌 귀신이 나타났다 사라진 줄 알고 졸도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에피소드 지만 그땐 정말이지 심각했었다.
2012년 마곡사 현장 답사 갔다가 촬영한 풍마동 (본인촬영자료). 1987년 일병휴가차 나왔다가 본인이 그린 마곡사오층석탑 풍마
동 도면(문화유산청 자료 발췌)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세워 놓아도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결코 올 것 같지 않던 제대일이 내게도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랬다고 군 생활 말년은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난 그렇지 못했다.
외박 증을 끊어 시내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거기까진 좋았다. 외박이란 지정된 경계 밖으론 절대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런데 무슨 배짱이라고 난 오산에 계신 누님 집에 간다며 이수지역을 이탈하였다. 하필이면 그 무렵 ‘군 풍기문란행위 근절’이란 이름으로 삼엄한 감시령이 떨어진 때였다. 00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어떤 중사가 내게 다가와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표를 보고도 관등성명을 묻는 것이 영 기분이 좋지 않아 어물댔다. 그러자 그가 잽싸게 내 이름 석 자와 계급을 메모장에 적더니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오랜만에 외박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영 기분이 찝찝하였다. 그러나 이미 몸은 이수지역을 이탈한 상태였다. 즐겁게 외박을 마치고 난 아무렇지도 않게 부대로 복귀하였다. 누구 하나 어디서 무엇을 하다 들어왔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의 일은 그렇게 잊혔다. 드디어 제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우리 대대로 전문이 하나 도착했다. 대대 내 3중대 정 아무개 병장을 군법에 따라 영창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일 없다.
결국 나와 함께 이수지역을 이탈했던 졸병과 함께 영창신세를 지게 되었다.
영창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워커 끈, 허리띠, 군번줄을 압수당했다. 절대로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 땅을 향해 숙인 자세로 양쪽 엄지손가락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걷도록 명령을 받았다. 어쩌다 고개를 쳐들었다간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매질을 당해야 했다. 말로만 듣던 군대 영창 안은 세로로 철근이 약 10cm 간격으로 고정돼 있었다. 정해진 철장문은 겨우 구부려야 들어갈 정도의 좁은 문이었다. 그 안에 예닐곱 명이 일 열로 정좌를 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조금이라도 몸을 뒤척이면 바로 앞으로 불려와 철장에 매달리는 기합을 받았다. 안쪽 구석엔 높이 두 자 정도 되는 플라스틱 오줌통이 하나 있었다. 큰 볼일은 밖으로 나와 지정된 장소에서 해결했다. 첫날 저녁이 되자 자신이 여기에 왜 들어왔고 그 까닭으로 일정기간 동안 교화를 받아야 할 이유에 대해 A4 용지 앞뒤로 빽빽하게 적은 글을 외우라고 했다. 주어진 시간은 딱 십 분이다. 한참 어린 졸병인 헌병에게 온갖 더러운 욕을 들어가며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으려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러나 여기가 어딘가 계급장은 뜯기고 하나같이 똑같은 죄수들 아니던가. 난 속에서 오기가 뻗혔다. 이를 단단히 물고 암기에 임했다. 드디어 줄지어 앉은 순서대로 암송을 했다. 암송에 실패한 사람들은 한 명씩 일명 ‘명태 말리기’란 기합을 받았다. 주어진 시간 동안 철장에 매달린 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야 한다. 그러다 땅에 발이 닿는 순간 머리를 철장 사이에 들이밀라고 한다. 몸은 빠져나갈 수 없지만 이마는 철장 밖으로 조금 튀어나온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던 헌병이 철모를 벗어 이마를 후려친다. 이때 통증을 별로 못 느끼면 도리어 헌병 선임이 후임 병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얼차려를 준다. 그러곤 다시 좀 전에 하던 것을 이어서 하라고 시킨다. 선임에게 얻어터지고 들어온 헌병 졸병은 눈앞에 뵈는 게 없다. 그저 머리가 뻐개지든 말든 힘껏 내리친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난 글자 한 자 안 틀리고 모두 암송했다. 내가 봐도 놀랄 일이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 많은 내용을 십분 만에 외울 수가 있었을까. 그런데 헌병이 하는 말이 “야 이 xx 끼야 너 같은 놈 첨 본다. 이걸 다 외우냐 별 미친놈 다 보겠다” 하곤 자기가 한 말이 있으니 그냥 자리에 앉아있으라고 했다.
영창 이일 째 되는 날이다. 아침부터 우린 어디론가 일열 종대로 줄지어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헌병들이 사용하는 식당이었다. 도착했을 땐 이미 배식이 모두 끝났고 하나 둘 빈 잔반 통을 커다란 통에 집어넣고 있었다. 우린 주방으로 불려가 놓고 간 식기와 수저를 세척하는 일을 했다. 물론 밥을 굶은 상태로 말이다. 주방과 식당 내부를 깨끗이 치우자 그때서야 남은 음식을 먹게 했다. 그때 난 국을 좀 더 먹으려고 했다. 순간 내 뒤통수에서 우렁찬 쇠 국저 소리가 땡 하고 들렸다. 뜨거운 국물이 목 뒷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세상 태어나서 이런 수모는 처음 겪었다. 다시 영창으로 들어와 각자 세면을 하고 이번엔 막사 뒤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끌려갔다. 그곳엔 야산을 개척해 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곡괭이와 삽을 주며 지정된 장소를 원하는 깊이로 파내라고 하였다. 그곳엔 병장계급을 단 헌병 한 사람이 남아 우릴 감시했다. 그런데 그 병장이 어디선가 본 듯하였다. 그도 날 보더니 “어어” 하며 놀라는 눈치였다. 알고 보니 논산훈련소 동기였다. 난 반가움에 웃어야 할지 창피함에 숨어야 할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 그 친구가 먼저 날 불러서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고 나머진 하던 일을 계속하게 하였다. 처음엔 죄인의 신분으로 관등성명을 댔다. 그러자 그가 손사례를 치며 그만두라고 했다. 우린 반말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물었다. 내 얘길 다 듣고 동기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곤 자기가 편한 곳으로 배치해 주겠다고 했다. 셋째 날 아침 나는 별도로 불려 나와 헌병의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부대 내 관사였다. 가정집처럼 생긴 그곳에 들어가 내가 하는 일은 하루 종일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는 거였다. 낮엔 아무도 없어서 빈집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헌병이 날 데리러 왔다. 그렇게 관사를 오가며 편하게 영창생활을 한지 약 열흘 정도 되었다. 내일이면 영창을 떠나 자대로 돌아가는 날이다. 세상에 이렇게 기쁠 수가 있을까 죄수복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나로 돌아간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영창생활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하루 24시간 내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었다. 꼭 필요한 말, 즉 대변, 밥, 물 말고는 아무 말을 못 하게 하였던 것이다. 한 번은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 공용 오줌통에 시원하게 볼일을 보는 데 다른 감방 안에서 어떤 녀석이 육두문자를 써 가면서 “야 씨 00아 누가 오줌 누며 소리 내라고 했냐.”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놈은 겨우 상병인 데 하도 이곳을 들락거려 헌병들도 그를 함부로 손을 못 대고 있다고 했다. 영창 생활이 아니라면 벌써 제대할 군번이라고도 했다. 하필 그놈을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누가 내 등을 툭 치며 반갑게 웃고 있었다. 상병계급을 단 바로 그놈이었다. 난 그냥 씩 웃어주고 말았다. 그놈이 제대 후 제대로 살아갈 놈은 아니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암튼 열흘간의 영창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자대로 복귀하는 날이다. 내 몸은 이미 피골이 상접하여 쓰러지기 직전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 따라 온 같은 중대 졸병(일병)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난 낼모레면 곧 제대할 몸이고 졸병 녀석은 한창 군기 왕성할 군번이다. 녀석이라고 괜찮을 이 없다. 나야 그나마 훈련병 동기 덕에 편안한 영창생활을 했지만 졸병은 매일 헌병들에게 시달렸다. 그러니 나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지 않을 거란 걸 난 잘 안다. 우릴 태우기 위해 부대에서 차가 들어왔다. 나를 보는 선임하사가 어이없다는 듯 씩 웃었다. 나도 그저 씩 웃어 보였다. 선임하사는 차 안으로 들어가 앉고 나와 졸병은 짐칸에 앉았다. 차가 서서히 헌병부대를 빠져나오자 난 헌병부대를 향해 있는 힘껏 고래고래 소릴 질러댔다. 열흘 동안 말 한마디 못한 답답함이 드디어 풀리는 것 같았다. 거기서 당한 온갖 모욕과 설움이 터지라고 질러대는 목소리를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졸병 녀석도 나를 따라 고래고래 욕지거릴 해댔다. 군대란 참... 군대 생활 33개월을 모두 마치고 보란 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제기랄... 군대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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