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남원군 주포면(周浦面) 지역으로 내(요천)가 흐르므로 제구내, 제구 또는 제천(諸川)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제천리(諸川里), 도내리(島內里), 상내리(上內里) 일부와 기지면(機池面) 고룡리(古龍里) 일부를 병합하여 제천리(諸川里)라 하고 주생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주생면 제천리가 되었다. 제천리에는 제천과 서만(西滿) 등이 있다.
제천리 제천(諸川)마을
본래 남원군 주포면(周浦面) 지역으로 내(요천)가 흐르므로 제구내, 제구 또는 제천(諸川)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제천리(諸川里), 도내리(島內里), 상내리(上內里) 일부와 기지면(機池面) 고룡리(古龍里) 일부가 병합되어 제천리(諸川里)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 취락의 조성 내력은 정확히 알수 없으나 밀양 박씨, 나주 나씨, 전주 이씨 등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며, 조선시대 선조왕때 참판 지위로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던 박춘성(朴春成)의 아들 박효련(朴孝蓮)이 한양에서 남원으로 이주하여 그 자손이 번영하고, 이와 반면에 세 성씨(姓氏)중 이(李)씨와 나(羅)씨는 점차 타지로 옮겨가 밀양박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제천은 구한말까지 남생방(南生坊)의 관문으로 방의 휴게소 구실을 하여 주생의 소재지란 별명이 생길만큼 인파가 붐비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마을앞에는 요천이 유유히 흐르고 마을 입구에는 옛날에 월파정(月派亭), 도림정(道林亭)등 정자가 있어 선비들의 휴식장소로 이용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전은 농경지에 홍수피해가 잦아 영세민이 많았고 또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토질이 척박하였으나 1964년 부터 1966년 사이 요천호안 공사로 인하여 홍수를 막고 수리안전 답으로 수해가 예방되어 점차 토지가 비옥해지면서 부촌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1993년도에 86.8㏊의 농토가 구석구석 경지정리가 완료되어 기계화 영농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은 현대식 마을회관 신축과 주택개량, 부엌개량등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남원∼곡성간 국도 17호선과 전라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 하다. 마을 뒷산에는 삼충사(三忠祠)가 있는데 일명 구천사(龜川祠)라고도 한다. 구천사는 문화재 자료 58호로 관리하고 있으며 그 설립은 조선조 철종임금때 일이며, 이곳에 호조참판 박춘성(朴春成), 박흥남(朴興男), 박연수(朴延壽)등 공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주요 ��씨로는 밀양 박씨, 김해 김씨, 나주 나씨, 전주 이씨 등이 있다.
1.지리적 위치
면 소재지(서만마을)로 부터 남쪽방향 1.0㎞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뒤에는 국도 17호선과 전라선 철도가 통과 하고 있다.
2. 리 세(면적)
1997년 6월말 현재 총면적은 2,654㏊로 주생면 전체 면적의 6.9%를 점하고 전.답 비율은 논이 97.0㏊로 농경지의 82.3%이다. 임야는 22.6㏊로 총 면적의 0.8%이다. 가구수는 106호로 주생면 전체의 10.3%이고 인구는 267명(남 129명,여 138명)으로 주생면 전체의 8.7%이다.
3. 지 형
평야 지대로서 토질이 비옥하고 수리 안전답으로 미곡위주의 농경이 주종을 이루며 산이 총면적의 0.8%을 점하고 거의 송림으로 덮어 있으며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4 교통 및 통신
남북으로 연결하는 국도 17호선 5.3㎞가 잘 포장되어 있고 군 도로는 3호선이 제천에서 도산으로 이어지고 농어촌 도로로는 제중선 308호선이 제천∼중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전가구에 전화가 설치되어 100% 이용하고 있다.
5 관광.문화.체육
문화재 : 구천사(문화재 자료 58호)가 있다.
6. 종교시설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천교회가 있다.
제천리 서만(西滿)마을
본래 남원군 주포면(周浦面) 도내리(島內里) 지역으로 섬안 또는 서만(西滿)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제천리(諸川里), 도내리(島內里), 상내리(上內里) 일부와 기지면(機池面) 고룡리(古龍里) 일부가 병합되어 제천리(諸川里)에 편입되었다. 남원시로 부터 서남쪽으로 8㎞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큰 냇물이 흘러 물이 맑고 사람 살기가 좋다하여 서기 1600년(宣祖때)경에 남양 방씨(南陽房氏)가 처음 자리 잡아 소수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 후 방씨(房氏)는 점차 줄고 파평 윤씨(坡平尹氏), 문화유씨(文化柳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등 여러 성씨들이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어 현재와 같은 마을을 형성 하였다. 이 마을은 요천(蓼川) 냇물의 지류가 여러 갈래로 마을 중심을 흘러 섬(島)과 같이 생겼다하여 [섬안], [섬말]이라 불러 오다가 도내리(島內里)로 바뀌었다. 그 후 마을 서편에 조그만 언덕이 반달 같이 생겼는데 달처럼 초생달 부터 점점 커지며 보름이 되면 덩실한 만월처럼 둥글게 될것이라는 상상하에 달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만월이 된다는 뜻으로 1900년경 마을 이름을 서만(西滿)으로 고쳤다 한다. 또 일설로는 [섬말]이 너무 딱딱하므로 오랜 세월동안 부르다 보니까 섬말, 또는 섬안이 [서만]으로되어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서만(西滿)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히 섬안 즉 도내리(島內里)였다. 예전에는 큰냇물이 주변에 흘러 대어(大魚)를 낚았으며 마을 남쪽에 큰 연못이 있는데 용(龍)이 등천했다 해서 [용쏘]라 했는데 1900년 부터 물이 적어 연못은 전답으로 변하였다. 이 마을 남양방씨는 조선조(朝鮮朝)에 진사 3대가 배출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방씨 자손은 하나도 살지 않고 인근에 여러개의 묘만 남아 있다. 다수 성씨로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등이 있다.
1. 지리적 위치
면 소재지에서 0.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뒤로는 전라선 철도와 남원∼곡성간 국도 17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2. 리 세(면적)
1997년 6월말 현재 총 면적은 2,654㏊로 주생면 전체 면적의 2.7% 를 점하고 전답 비율은 논이 32.2㏊로 농경지의 83.0% 밭은 6.6㏊로 농경지의 17%이다. 가구수는 53호로 주생면 전체의 5.2%이고 인구는 133명(남 63명, 여 70명)으로 주생면 전체의 4.3%이다.
3. 지 형
평야지대로 야산이 가까이 산재해 있어 농토는 수리안전 답으로 비옥하고 앞에는 요천이 흐르고 마을 뒤로는 전라선 철도와 남원~곡성간 국도 17호선이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4. 교통 및 통신
남북으로 연결하는 국도 17호선 5.3㎞가 잘 포장되어 마을 뒤로 통과하고 있으며 전가구에 전화가 설치되어 100%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