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연호동(蓮湖洞),
연꽃이 아름다웠던 연지(蓮池) 마을
개관
연호동은 수성구 고산2동의 법정동이다. 대덕산에서 북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는 당고개-두루봉-담티-연호산-모봉-형제봉을 지나 팔현 마을 금호강에서 흐름을 멈춘다. 이 산줄기는 조선시대를 거쳐 1980년까지 경산과 대구의 경계가 됐다. 연호동은 연호산(129.6m) 남쪽 구릉지 평야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는 비옥하고 넓은 충적지 들판이 있었으나 물이 부족해 연호지, 연호내지, 연지못 등 연(蓮)과 관련된 못을 여러 개 축조했다.
최근 연호동과 이웃 마을인 이천동에는 연호지구를 중심으로 법조타운, 신혼 희망타운 등을 연계한 복합타운이 조성 중이다. 범안로를 기준으로 서쪽 이천동은 ‘역세권 주거생활구역’, 동쪽 연호동은 ‘역세권 업무·첨단산업구역’으로 조성된다. 동시에 고부가 첨단기업을 유치해 인근 수성알파시티와 연계 발전할 수 있도록 스마트시티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주요 유적과 유물은 조선시대 고분으로 토광목관묘 29기, 분청사기와 청동 제품, 관정(管井·우물) 등 108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지명 유래
연호동은 1635년경(인조 13) 제갈문몽(諸葛文夢)이란 선비가 개척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이곳에 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어 마을 이름을 ‘연호’ 혹은 ‘연지(蓮池)’라 불렀다고 한다. 연호동은 지금도 못이 여러 개 있는데, 옛날에는 홍수가 지면 지금의 범안로를 따라 있었던 고래들, 서중들을 통해 금호강 물이 마을(연호네거리 일대)까지 들어와 들판이 온통 호수 같은 늪지대가 됐다. 이 늪에 연꽃이 피면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연호란 마을 이름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연지를 중심으로 남쪽에 있었던 윗마을을 상연지(上蓮池), 아랫마을을 하연지(下蓮池)라 하고 그밖에 자연부락으로 안뜸, 아랫마실 등이 있었다.
연호동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산군 경계 및 명칭을 변경할 때 연지 주변에 형성된 연지 마을과 연지 남쪽에 있었던 상연지·하연지를 합쳐 형성된 마을이다.165) 연호동은 「호구총수」(1789)에 처음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는 연지와 상연지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연호는 연지와 상연지로 분동(分洞)됐다가 다시 합동(合洞)된 것으로 추정된다.
165) 조선총독부경상북도고시 제24호(1911.9.21).
도장골(陶場谷)·도장지(陶場池)
연호동에서 고모동 가는 길목 양지바른 곳에 그릇 만들기에 좋은 흙이 많이 있었다. 옛날 이곳에 이 흙으로 옹기를 구워 파는 옹기굴이 있었기 때문에 도장골이라 불렀다. 옹기를 만들기 위해 흙을 파낸 구덩이는 농업용수를 저장해 못으로 사용하면서 도장못이라 불렀다. 현재 오성 아파트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연지’가 도장지로 추정된다.
밤못·밤지·밭지·밖지
밤못은 둘레 약 200m의 작은 못이자 마을 이름이다. 밤못은 못 주위에 밤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밖지·밭지는 본동 바깥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밤못 북쪽에는 밤산 마을이 위치하고 있었다.166) 하지만 1954년 항공사진에는 10호 규모 밤지 마을은 보이나 밤못은 보이지 않는다.(‘연호내지’ 사진 참조) 참고로 옆 마을 이천동에 같은 이름의 밤지가 있다.
166)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51쪽.
상연지(上蓮池)·하연지(下蓮池)
지금의 연호동 골짜기 안쪽에 있는 연호내지(蓮湖內池)를 기준으로 북동쪽에 하연지, 아랫마을, 남서쪽에 상연지, 서쪽에 안뜸, 남동쪽에 밤지가 있다. 연지 마을에서 연호내지에 이르는 넓은 ‘내지들’은 현재 연호지구에 수용돼 사라지고 없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하연지에 15호, 안뜸에 7호, 상연지에 27호, 밤지에 10호 정도 민가가 보인다.(‘연호내지’ 사진 참조)
서중들·고래들·사리골
범안로와 달구벌대로가 교차하는 연호네거리에서 북동쪽 가천동 금호강에 이르는 남북으로 길쭉한 들이다. 들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을 기준으로 서쪽을 서중들, 동쪽을 고래들이라 불렀다. 고래들에서 솔정고개 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사리골이라 불렀다.
솔정고개·송정고개·송정현(松亭峴)
솔정고개는 달구벌대로와 월드컵로가 만나는 월드컵삼거리에 있는 고개다. 솔정고개를 경계로 서쪽이 연호동, 동쪽이 시지동이다. 과거 솔정고개는 대구-경산 간 관도(官道)에 있던 고개로, 고개를 중심으로 10리에 이르는 소나무 숲이 있어 ‘식송정(植松亭)’이라 불렸다. 소나무 숲을 식송정으로 부른 것은 많은 길손들이 이 소나무 숲을 정자 삼아 쉬어 갔기 때문이다. 식송정의 이름을 따라 솔정고개로도 불렸으며, 「지명조사철」(1959)에 의하면 솔정고개를 중심으로 20호, 13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송정마을이 있었다. 송정마을은 지금의 월드컵 삼거리 인근에 있었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는 송정주막(솔정주막)이 등재되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좁은 고갯길이었고 고갯마루에는 당나무 한 그루와 당집이 있었으며, 나그네를 위한 정자도 하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 남쪽으로 매호천이 흘렀으며, 주위에는 높고 낮은 둔덕과 들이 펼쳐져 있었다. 옛날 솔정고개는 연호동 일대 늪과 연꽃 만발한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경치가 좋은 고개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솔정고개에 신작로가 생기면서 비로소 우마차가 넘나들 정도로 넓혀졌고, 정자는 활용이 적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한다.167) 1954년 항공사진에도 현 삼성라이온즈파크 자리에 2호, 월드컵삼거리 동쪽에 20호 정도 민가가 보인다. 삼성라이온즈파크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 작은 연못을 낀 구남산장이 있었다.
167)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56쪽.
연지(蓮池)·연못둑
연지는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범안로와 달구벌대로가 교차하는 연호네거리 일대에 있었던 늪지대로 갈대와 연꽃이 많았다. 금호강이 홍수로 범람하면 지금의 범안로를 따라 있었던 고래들, 서중들을 통해 금호강 물이 연지까지 들어와 늪이 마치 호수처럼 보여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부터 이곳에 연을 많이 심고 보호해 연지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연호지(蓮湖池·삼성라이온즈파크 남서쪽)를 축조했고, 이후 옛 연지는 전부 매립해 논으로 만들었다. 1918년 지도에는 연지가 나타난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연지가 매립되어 논으로 변했으며, 지금의 달구벌대로에 해당하는 도로변으로 약 25호 규모의 연지마을이 보인다. 지명조사철(1959)에 “옛날에 연이 많이 있는 못의 둑에 부락이 있으므로 연못둑이라고 칭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내용으로 보아 연지를 연못둑이라고도 칭한 것으로 보인다.
연호내지(蓮湖內池)·내지
연호내지는 연호동 남서쪽 골짜기 안에 있는 작은 저수지로 1927년 준공됐다. 연호내지 인근에 안뜸, 상연지, 밤지 마을 등이 있다. 연호내지 내력에 대해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산2동 마을이야기(고산2동, 2020)에 “연호내지는 아주 오래전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들어진 연못으로 추측하는데, 그 근거는 내지를 정비할 당시 땅속에서 토관(어떤 분은 목관)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이미 우리 조상들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조달하기 위해 관로를 만들어 시공했다는 것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일제강점기 초였던 1918년 제작된 지도에도 내지가 나타난다.(‘연지’ 사진 참조) 참고로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못의 대부분은 기존 못을 확장·개수한 경우가 많다.
연호동 주막
과거 연호동에는 주막이 여러 집 있었다. 이와 관련해 고산2동 마을이야기(고산2동, 2020)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연호동에 일곱 채 주막이 있었고, 이곳에서 일곱 가지 술맛을 볼 수 있었다. 연호내지 못둑 가에 있는 주막집에서 뜨끈한 선지국과 막걸리 한 잔으로 지친 몸과 허기를 채우며 사람도 쉬고 소도 쉬었다 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