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 산 량 |
읽 기 |
환 산 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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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일 |
10-1 |
분 |
10 |
십 |
10-2 |
리 |
102 |
백 |
10-3 |
모 |
103 |
천 |
10-4 |
사 |
104 |
만 |
10-5 |
홀 |
108 |
억 |
10-6 |
미 |
1012 |
조 |
10-7 |
섬 |
1016 |
경 |
10-8 |
사 |
1020 |
해 |
10-9 |
진 |
1024 |
서 |
10-10 |
애 |
1028 |
양 |
10-11 |
묘 |
1032 |
구 |
10-12 |
막 |
1036 |
간 |
10-13 |
모호 |
1040 |
정 |
10-14 |
준순 |
1044 |
재 |
10-15 |
필수 |
1048 |
극 |
10-16 |
순식 |
1052 |
항하사 |
10-17 |
탄지 |
1056 |
아증지 |
10-18 |
찰나 |
1060 |
나유타 |
10-19 |
육덕 |
1064 |
불가사의 |
10-20 |
공허 |
1068 |
무량대수 |
10-21 |
청정 |
[역사속 수학이야기](4) 큰수의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무량대수’ 는 1다음에 0이 68개
우리나라의 금년 예산은 대략 240조원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억’이나 ‘조’라는 단위를 듣게 되는데,
여러분이 알고 있는 가장 큰 수는 얼마인가? 현대에도 아프리카나 브라질의 어느 원주민들은
‘하나’ ‘둘’ ‘많다’와 같은 정도의 수만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류 문명이 발달하면서 큰 수가 필요하게 되고,
큰 수를 나타내는 기호와 이름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한 기호와 이름에 대한 착상이 재미있고 어떤 시사점을 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호숫가에 많이 있는 올챙이로 ‘십만’을 나타내고,
(너무 많아서) 깜짝 놀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백만’이라는 수를 나타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큰 수의 이름을 살펴보자.
수를 나타내는 순수 우리말에는 열(십), 온(백), 즈믄(천), 드먼(만), 골(경), 잘(정) 등이 있다.
1만 가지 지류를 가졌다는 두만강은 ‘드먼’에서 변하여 두만강이 된 것이며,
“이 몸이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 죽어”와 같은 시조에 나오는
‘골’은 1 다음에 0이 16개 붙은 수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를 나타내는 많은 순수 우리말은 한자말에 밀려 없어지거나 쓰지 않게 되었다.
큰 수를 나타내는 한자말은 다음과 같다.
만(萬), 억(億), 조(兆), 경(京), 해(垓), 자(梯), 양(穰), 구(溝), 간(澗), 정(正), 재(載),
극(極), 항하사(恒河沙), 아승기(阿僧祇),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대수(無量大數)
이 이름들은 0이 4개씩 붙을 때마다 생긴 이름으로 무량대수는 1 다음에 0이 68개 붙은 수이다.
이 중 ‘조’까지의 수는 중국의 후한 시대에 있었는데,
당나라 때 불교의 영향으로 이렇게 큰 수의 이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항하사’는 인도의 갠지스강의 모래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를 의미한다.
‘불가사의’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의미이며,
‘무량대수’는 ‘무량수’라고도 하는데, 아미타불과 그 땅의 백성의 수명이 한량이 없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글자 수가 많은 ‘항하사’부터는 0이 4개가 아닌 8개가 붙을 때의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량대수는 0이 88개 붙은 수가 된다.
인간이 100년을 산다 해도 그것을 초로 나타내면 30억초 정도에 불과하고,
우주의 나이인 150억년도 초로 나타내면 50경초에 불과하니,
불가사의나 무량대수가 얼마나 큰 수인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큰 수는 사용되는 곳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아서
이보다 더 큰 수를 만들 필요도 없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필요하지도 않은 수에 관심을 가지곤 한다.
그래서 이보다 더 큰 수를 만들어 낸 사람이 있으니,
그는 미국의 수학자 케스너(Kasner)의 9살 난 어린 조카 밀톤 시로타이다.
1938년에 케스너와 조카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구골(googol)과
구골 플렉스라는 이름을 만들어 냈다.
구골은 1 다음에 0이 100개가 붙은 수이며 구골 플렉스는 1 다음에 0이 구골개 더 붙은 수이다.
유명한 검색 사이트인 구글은 구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려다가 잘못 써서 된 이름이라고 하니,
구골이라는 이름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수 이름이 된 모양이다.
수학적으로 재능이 있는 어린이는 어릴 적부터 일찍 큰 수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여러분도 큰 수의 이름을 새롭게 만들어 보면 어떨까?
〈강문봉|경인교대 수학교육과 교수〉
숫자로 본 인연의 겁(劫)
옷깃 한번 스치는 것도
500 겁(생) 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연은 매우 소중하다.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겨서 큰 인연
보리도를 성취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인연이 없을 것입이다.
범망경에서는 선근 인연을 심은 사람끼리
만남을 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1천겁은 한 나라에 태어난다.
* 2천겁은 하루동안 길을 동행한다.
* 3천겁은 하룻밤을 한 집에서 잔다.
* 4천겁은 한 민족으로 태어난다.
* 5천겁은 한 동네에 태어난다.
* 6천겁은 하룻밤을 같이 잔다.
* 7천겁은 부부가 된다.
* 8천겁은 부모와 자식이 된다.
* 9천겁은 형제 자매가 된다.
* 1만겁은 스승과 제자가 된다.
시간으로 말해서 귀한 인연을 일기일회(一期一回)라고 한다.
다시 정리한다면.
① 옷깃 한번 스친 인연
5백겁(생) 인연. 그냥 스치는 게 아니라는 뜻이며,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적어도
옷깃 스치는 인연을 귀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그 인연에 매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② 부부 인연
7천겁(생) 인연.
이혼하면 남남으로 갈리기 때문에 자식 인연보다 적은 것입니다.
자식이 혹이라기도 하고 장애라기도 한다지만
지금 세태의 밥먹듯 하는 이혼을 생각하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③ 부모 자식 인연
8천겁(생) 인연입니다.
④ 형제자매 인연
9천겁(생) 인연.
한 태 안에서 태어나는 인연이 크다는 것이지요.
성태를 장양하면 모두가 한태에서 왔기에 사생일가겠지요.
⑤ 스승 제자 인연
1만겁(생) 인연. 세상에서 참으로 귀한 인연이다.
육신은 부모가 낳아 주지만 마음이 새로 눈을 뜨게 하는 데에는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성현들께서 불연이 혈연 보다 소중하고,
스승은 정신, 영혼의 부모다 라고 하셨으니...
과거세 인연의 내용은 대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은인이 되어 서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한 인연이고,
둘째, 빚쟁이가 되어 서로 빚을 받으러 온 인연입니다.
앞의 경우는 존경과 자비심이고, 뒤의 경우는 불화와 증오심이지요.
가까운 인연일수록 낮은 인연 되기 쉽다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인이든 빚쟁이든 간에 금생이 모두 청산을 하고
다음 생까지는 연장하지 않는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윤회를 면하려면 반드시 보살행을 해야 하고, 육바라밀의 보살행을 통해서
이번 생에서 인연의 사슬을 모두 풀어야 하겠다는 각성과
실천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타여윈 마음확립
이 인연 놀음에 빠져도 탈이요, 몰라도 탈이라
이 안에 깊은 뜻 있으니
얻으면 부처요 모르면 중생이라
코 처박고 찾으려니 더더욱 아니 뵈고,
잘 보면 보이나니 보이는 게 무엇인가
인연이라 모든 것은 내가 만든 보물이라
육근을 작용하면 그것이 업 짓는 것
한 마음 일어날 제 모든 인연 따르나니
마음작용 잘 하여서 인연복을 즐겨보세.
좋은 인연 궂은 인연 누구를 탓할 손가?
일체는 마음의 조화라네
일체가 무엇인가? 일체는 육근이라
육근작용 떠나서 어디에 도가 있나
오늘 또 업을 짓고 지금 또 업을 짓네
이것이 무엇인가 살아있음 증명이니
업 놀음 빠져나오려면 생각을 놓아보소
捨念淸淨 마음챙김 마음공부하고 보면
세상사 시비이해 내 안에 놀더이다
자타여윈 마음확립 이뤄낸 그대로.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과거의 종자인연은 무량겁을 지날지라도
마침내 멸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과거현재인과경'-<선악인과경>
나무 제불!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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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모시고 재래시장에 장보러 가면 간혹 당황할 때가 있죠? 어른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기 한두름 주세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한 두름이 몇 마리인지 모른다면 조금 당황스럽겠죠?(참고로 한 두름은 20마리랍니다.)
요즘은 대부분 미터법에 의한 단위를 쓰지만 아직도 시골에 가거나 시장에 가면 옛날 단위들이 많이 사용되고있습니다. 말, 되, 마지기, 평, 두름, 첩, 바리, 쌈, 켤레, 필, 자, 치, 척 등등
안동포를 셀 때도 아직은 옛날 단위를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베 한필, 두필 하고 셀 때 '필'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7새, 8새 라고 이야기할 때 '새'가 어떤 기준으로 정해진것인지를 확실히 모르고 안동포를 구입한다면 뭔가 조금은 허전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겠죠?
이번 기회에 안동포를 세는 단위, 확실히 한번 알고 넘어가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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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이 35~36cm, 길이가 40자(22m)인 안동포를 1필이라고 부릅니다. '어?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 것 같네요. '1자라면 30.3.cm이고 40자라면 13.2m정도일텐데 왜 22m나되지?' 보통 1자라고 하면 30.3cm이지만 삼베를 잴 때 쓰는 자는 50.5cm를 기준으로 사용합니다. 다른지방의 삼베의 경우 폭이 35~36cm, 길이가 20자(10m)를 1필이라고 하여 단위를 맞추지만 안동포와 남해포의 경우에는 40자를 1필로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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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의 가늘고 굵음을 뜻하며 1새는 80가닥의 올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같은 폭에 들어가는 올의 개수를 의미합니다. 면적이 같은 곳에 한 새(80올)를 더 넣으려면 그만큼 올이 곱고 가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7새인 안동포의 경우 폭 36cm안에 560올(7새×80올)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가 클수록 그만큼 더 촘촘해 옷감은 더욱 부드럽고 고급스러워집니다. 새가 클수록 베를 짜는 시간도 많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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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쓰이는 1자의 단위는 30.3cm이지만,안동포와 같이 삼베를 잴 때에 쓰이는 자는 그 단위가 50.5cm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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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안동포 1필로 남자옷은 2벌, 여자옷은 1.5벌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차이가 조금 나긴 하지만 갖은 수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안동포 4.75필 정도가 소요됩니다. 수의(壽衣)의 크기는 일반의류에 비하여 매우 크게 만듭니다. 수의를 입혀드릴 때 고인을 과도(過度)하게 움직이지 않도록하기 위해서입니다.
수의1벌 만드는데 필요한 원단의 양은 대략 남자용은 180-190자(95m)이고,
여자용은 남자용 보다 조금 적게듭니다. 보통의 삼베들은 20자를 1필로 하기 때문에 9.5필 정도가 필요 하지만, 안동포나 남해포등은 1필은 40자로 하기때문에 4.75필 정도가 들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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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도량형(度量衡)
우리는 흔히 중국의 도량형을 1척(尺)은 30.3cm, 1장(丈)은 3.03m라는 식 으로 알고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어느날 문득 그 문제를 생각해 보고 내가 알고있는 것이라는게 그저 어 림짐작,
어디선가 줏어들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중국, 그것 도 현재가 아닌
옛 중국을 배경으로 글을 쓰면서 정확한 도량형도 모른다는 것이 창피해 그 자세한 사항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맙소사,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라도 웬 시대마다 그렇게 다르고,
지역마다 편차는 또 그리 많은가? 게다가 용도에 따라 또 다르다니!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지역마다 마지기의 평수가 서로 다르고,
돼지고기 와 상추의 한 근(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해는 했다. 그러나 용서는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두고 그냥 사용했다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진시황은, '도법(度法)·형석(衡石)·장척(丈尺)을 하나로 하고,
수레는 바퀴 사이의 거리를 같게 하며, 문서에 쓰여지는 문자를 통일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아울러 도량형을 통일하는 조칙(詔 則)을 공포하고 표준기(標準器)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반포했다고 한다. 그때 그가 정한 일 척(尺)은 현대의 미터법으로 보면 23cm, 이 기준이 한나라때까지 내려왔다.
<삼국지>에 나오는 팔척장신이니,
구척거한이니의 사내들이 알고보면 2미터 40이나 2미터 70의 거인들이 아니라
1미터 80과 2 미터의 그냥 키가 큰 사람들인 것이다. 이 아담한 척도가 이후 점점 커져서 명나라 말에 오면 일 척이 32cm 이상이라는 정도까지 증가하는데,
그 이유는 재미있게도 세금때문이었다. 옛 중국의 조세제도는 실물지조(實物地租), 즉 베나 쌀같은 실물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같은 베 열 자(尺)를 세금으로 걷어도 23cm가 기준이면 230cm밖에 안되지만 32cm가 기준이면
320cm를 걷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무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곡물, 포목 등 현물을 중심으로 하는 납세제도 하에서 봉건지배층은 도량형의 규격을 확대시킴으로써
그 차액만큼의 이득을 올릴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리고 위의 사실은 척도의 분화라는 기현상을 가져왔다. 경제활동에 사용되는 규격이야 권력자들의 이해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 이지만,
천문관측에 사용되는 규격이나 토목사업에 관련된 규격은 쉽게 변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문척(天文尺)·영조척(營造尺) 등 경제활동과 분화된 척도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일례로 명나라 때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천문기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척도인 천문척(天文尺)은
진시황 이후로 크게 변함이 없어 24.5cm이지만 건축용의 자인 영조척(營造尺)은 32cm,
재봉용(裁縫用)의 자, 즉 포목을 잴 때 쓰는 자인 재의척(裁衣尺)은 34cm였다. 이런 기준에 근거해 글을 쓸 수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리 쉽지도 않을 것같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그 비석에서 동쪽으로 10척, 남쪽으로 다시 10척을 가면 거기 비급을 숨겨두었다.
내가 죽거든 그걸 파내어 익혀서 복수를 , 으, 으, 으 !" 사부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면서 그렇게 유언하는데 제자가 죽어가는 사부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사부님, 그게 천문척에 근거한 거리입니까, 아니면 영조척?
십 척이면 나중에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그렇게 애매하게 말씀하십니까?
가시려거든 정확히 가르쳐 주고나 가셔야죠!"
별로 재미도 없고, 짜증나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야설록 프로>의 작가들끼리 의논을 했다.
우리들 만이라도 기준을 정해놓고 도량형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현대 중국의 도량형이다.
즉, 일 척을 33.3cm로 보는 도량형이다. 참고삼아 말해두지만 일 척이 30.3cm라는 것은 우리나라 단위이다. 마침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하이텔 통신을 통해서 이홍기님의 화폐와 물가에 관한 자료를 얻게 되어 이 두 가지를 같이 정하기로 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또 그리 정확한 척도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지만 대충 기준을 잡아놓았으니 보시면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조금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두 가지 전제. 첫째로 각 단위의 상호관계는 다음과 같다. 길이의 단위는 분(分)·촌(寸)·척(尺)·장(丈)·인(引)으로 커진다. 뒤에 나온 것이 앞 단위의 열 배다. 용적의 단위는 약( )·합(合)·승(升)·두(斗)·곡(斛)으로 커진다. 역시 뒤가 앞의 열 배. 무게의 단위는 조금 달라서 24수(銖)가 1냥(兩), 16냥이 1근(斤), 30근이 1균(鈞), 4균이 1석(石)으로 되어있다.
이는 일상 생활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무게의 단위가 획일적인 체계화에 대해 가장 큰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둘째로 사람의 키를 지칭하는 수식어인 오척단구, 칠척장신 등 등의 표현은 그대로 사용한다.
엄밀하게 길이를 재어서 칭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수식(修飾)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오척이 아니라 육척에 조금 못 미치는 키면 어떤가,
그냥 키가 작다는 뜻만 전해지면 그만일 것이다. 그래서,
길이 1장(丈) : 3.33m 1척(尺) : 33.3cm - 한 자(尺)라고 부를 때도 같다. 1촌(寸) : 3.33cm - 한 치(寸)라고 부를 때도 같다. 1리(里) : 500m *이것도 우리나라와 달라서 혼동이 되겠지만 옛날에는 1리가 2km인 때도 있었으니,
그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이다.
무게 1근(斤) : 500g
시간 한 시진(時辰) : 2시간 일 각(刻) : 15분 한 식경(食頃) : 30분 - 밥 한끼 먹을 시간이라고도 한다. 일 다경(茶頃) : 15분 - 차 한 잔 마실 시간.
무협소설에서 자주 쓰이는 도량형을 대충이나마 이렇게 정한다. 여타의 단위는 이것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될 것이다.
중국의 화폐와 물가
이홍기(HiTEL ID : Lrudla)
무협소설을 보면 은자 열냥이 4인 가족의 한달치 생활비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과연 옛날 중국의 물가는 어느정도 일까? 뭐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내 생각엔 은자 열냥 이라면 일반농민의 일년 치 수입 이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고대 중국(춘추전국 에서 한초 까지) 에서는 일반 거래엔 동전이, 상업 적 거래엔 황금이 사용 되었는데
이때 황금과 구리의 가치비율이 1 : 130 정도였다. 정말 깜작 놀랄정도로 싼값의 금 이었다.
고대중국에 황금이 어느정도로 풍부 했나를 알수있다.
동전은 나라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로 제작 되다
진의 통일이후 둥근모양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반량전 으로 그 형태가 통일된다.
이것은 오수전으로 불리며 후대에 까지 유통된다. 그러나 그토록 풍부하던 황금도 서역과의 교역이 시작되며 급격히 유출 되어 후한(後漢)으로 들어오면 거의 현물경제로 바뀐다. 우리가 흔히 보는 0.1냥 짜리 동전은 당나라의 개통원보가 시작이며 송나라때에 급격히 보급된다.
송나라 일대에 보급된 동전만 약 2억 관 즉 2000억 개의 동전이 보급된다.
(약간의 절2전을 포함해도 1500억 개 이상은 확실히 생산 되었으며 중국의 구리광산은 송대에 거의 고갈되었다.)
당시의 물가 상황은 확실히 알수없지만 당현종의 개원 년간에 쌀 1석 비단 1필이 동전 200개에 거래 되었다 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번영을 나타내기 위해 들먹인 수치이고,
또 송대에는 급격히 보급된 화폐로 인해 이보다는 훨씬 물가가 높았을 것이다.
사실 이정도로 막대한 양의 화페가 민간에 보급되고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원래 상업의 발달로 인해 화폐의 유통량이 확대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송대에 한하여 말하자면 오히려 정부에 의해 강제로 보급된 막대한 양의 화폐로 인해 상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발전이 일어나 는 약간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은이 본격적으로 화폐로서 사용된것은 송대 중반 부터로 보이고 어음이 등장 한것도 이때로 보인다.
원대에 들어와서는 은의 해외유출로 인해 지폐(교초)가 사용되는데 지폐가 등장 한것은
금나라 부터지만 이때의 지폐는 남발로 인해 가치가 없었고
원대의 지폐는 통화가치를 지닌 지폐로 널리 통용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면 이에 대해 신기한 눈으로 보는 것이 보인다.) 원대에는 중통초와 지원초 두가지 지폐가 사용되었고 중통초 5에 지원초1의 가치로 통용되었다.
어떻게 그 당시에 은과의 태환이 보증되지도 않는 지폐가 가치를 잃지 않고 통용 되었냐 하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원대의 지폐는 은과의 태환이 아닌 소금과의 태환이 보증 되었다. 중국에서 소금이 국가의 전매품 이었고 높은 세금이 매겨져 있던걸 생각 하면 될 것이다. 중통초는 처음엔 태환 지폐였지만 은의 부족으로 인해 불환지폐로 바뀌고
그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자 지원초를 발행하여 이를 수습했다. 그러나 원이 멸망하며 이러한 지폐의 가치가 일거에 소멸하여 휴지가 되어 버리자
중국에서는 자본의 총소멸 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현상과 주원장의 개인적인 신념으로 인해 명대 초기에는 현물이 화폐의 역할을 한다. 명대초기에는 은의 사용이 금지 되었고 동전도 한정적 으로만 사용 되었으나 중기에 와서는
은이 실질적인 화폐로 사용되며 국가의 재정도 은으로 처리 되었다. 당시의 물가를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강남의 조세 400만 석이 은 100만냥으로 납부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풍년에는 은 1냥에 쌀 8,9석 정도 했다고도 한다.
흔히 무협지에 나오는 황금 100만 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금액인지 알만 할것이다. 당시 국가의 1년 세입은 명초에는 은 2백만냥을 조금 초과한데 불과했고 (이것으로도 흑자를 유지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인해 중과세가 부과되었을 때도
은 1천만냥을 넘기는 일이 없었으며 임진왜란에 응원군을 보내는데 소요된 몇백만 냥 가량의 은이 명나라의 존폐를 흔들어 놓기도 했다. 훨씬 풍요해진 청나라에 와서도 국가의 1년 세입은 몇천만 냥에 불과했다.
물론 당시 황실의 사치나 관리들의 축재 액수등을 보면 당시 민간의 상업활동이 국가 재정에
비해 상당히 활기차고 풍요했음을 알수 있는데 당시의 기록에 담비의 모피로 만든 최고급 의복이
은 3냥 이었다 하며 홍루몽에는 은 1냥의 월급을 받는 자리로 가기 위한 암투가 보이고 있다. 인삼은 귀물 이었으며 은과 같은 무게로 거래 되었다 한다. 황금과 은의 환율은 자세히 알수 없지만 20 : 1 이상으로 추측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면 6:1이니 8:1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것은 특수한 이야기로 보인다.) 은과 동전의 환율은 공식적 으로는 은 1냥에 동전 1관(1000문)이지만 민간에 유포된 은의 양에 따라
달라서 은 1냥의 가치가 동전 700개 정도에서 3000개 사이를 왕복 한걸로 보인다.
(동전의 유통량이 막대했던 송대에는 4000개 이상으로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홍루몽에 보면 1냥의 가치가 동전 2000개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봐서 우리가 보는 무협이 거의 명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얼마나 평가절하된 화폐를 사용 하는지 알 것이다. 결국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무협에서의 화폐가치는 은 1냥이 동전 2000개 정도로 보고,
황금과 은의 비율은 1 : 20 정도,
은 1냥에 쌀 2석 에서 5석 정도를 적절히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마침 섬유사전이 있어서요.
일반적으로 면,마는 "통" 견(비단)은 "필"이라고 한대요.
재단하는 방법에 따라 그 길이는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다고 하며, 일반적으로
1. 폭이 좁은 직물의 경우 면,마는 36.56m, 레이온이나 화학섬유 직물은 27.42m,
2. 중간 폭인 직물의 경우 면, 면혼방직물의 경우 27.42 혹은 36.56 m
3. 폭이 넓은 직물의 경우 모직물은 27.42m, 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폭이 좁은, 중간인, 넓은" 이런 말조차도 참으로 애매하지요. 한국의 직물단위는 그런 것 같습니다.
서양의 단위가 항상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1촌 한 치 1척 한 자 한 길
1. 치 = 촌[寸]
척관법(尺貫法)에 의한 길이의 계량단위인 자[尺]의 보조계량단위 촌[尺]의 순수한 우리말.
1치 = 1.1930inch = 3.0303cm
2. 자 = 척(尺)
자는 손을 폈을 때의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서 비롯된다.
자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온 상형문자(象形文字)이며,
처음에는 18c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차차 길어져 한(漢)나라 때는 23cm 정도, 당(唐)나라 때는 24.5cm 정도로 되었으며,
이보다 5cm 정도 긴 것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로 했으나, 세종 12년의 개혁시에 31.22cm로 바꾸어 사용해 오다가
한말(1902년)에 일제의 곡척(曲尺)으로 바뀌면서 30.303 cm로 통용되었다.
1963년 계량법이 제정되어, 현재는 거래 ·증명 등의 계산단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자 = 1척 = 10치[寸] = 10/33m = 30.30 cm
3. 보
보통 장년 남자의 발걸음이 기준이 된다. 이 방법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처음에는 1보의
길이가 주척(周尺) 8척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에는 주척 6척 4촌, 후에 주척 6척, 주척 5척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한국에서의 보는 토지측량에도 사용되던 중국과는 달리 처음에는 단지
거리측량에만 사용되었다. 그 후 중국의 제도를 본따 1보를 표준척도의 6척으로 하였으며,
견포의 길이를 재는 데도 사용하였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보의 길이가 바뀌었지만
1444년(세종 26) 이후로는 다시 6척이 1보가 되었다.
1보 = 6척 = 181.80cm = 1.82m
4. 장 (丈)
중국 주(周)나라에서는 8척을 1장이라 하고, 성년 남자의 키를 1장으로 보았다
(당시의 1척은 지금의 1척보다 작았다).
사람의 키만한 길이를 '한길'이라고 하는 것도 거기서 유래된 듯하다.
1장 = 10자[尺] = 3.03m
5. 길
원래 사람의 키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차차 길게 잡아 8척(자) 또는 10척을 한 길이라
하게 되었다. 물건의 높이나 깊이를 어림잡는 데 쓰인다.
강물이나 바닷물의 깊이를 잴 때에는 fathom(패덤)의 역어로서 쓰이는 일도 있는데
이 경우의 한 길은 6ft(1.83m)에 해당한다.
6. 리 (里) = 마장(馬丈)
1리 = 1,296자 = 1,296×1자(10/33m) = 12,960/33m = 0.392km = 약0.4km |
♣ 옛날 거리측정단위 보(步) ♣
진시황이 전국을 평정한후 통일한 것 중 하나가 길이.넓이,부피,무게 등의 단위인 도량형(度量衡) 이지요 만약 도량형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면 지역마다 정보의 편차가 심하고 이는 전국을 통치하는데 혼란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도량형의 통일은 이런 정치적 목적에서 시작 되었지만 이로인해 가장 혜택을 받은 사람은 전국을 상대로 장사를하는 상인들이라 하는군요
이때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이 길이 였는데 길이를 알아야 영토 넓이를 알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통일적인 도량형을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해왔으며 중앙에서는 전국 표준의 자(尺)인 기준척(基準尺)을 마련하여 늘 보관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이 기준척은 왕조와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았으며 그래서 전쟁이나 반란등으로 수도가 함락될때 빠뜨리지 않고 챙겨가야할 중요한 품목중 하나였어요
물론 이 중요한 기준척이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거리를 측량할때의 단위, 신발을 재는단위, 옷을 재단할때 재는단위 등 분야에 따라 다른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조선시대 때에도 건물을 지을때 사용하던 영조척(營造尺), 포목과 의복 등에 적용되던 포백척(布帛尺) 제사용의 제기와 관련된 조례기척(造禮器尺), 그리고 거리나 면적등을 잴때 사용하던 주척(周尺)등 다양했지요 그래서 그 여파가 지금까지 밀려와 건물을 말할때는 평으로 옷을 잴때는 인치로 그릇을 말할때는 미리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은 말하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지도에 사용되던 주척이 가장 중요했는데 이 주척(周尺)의 이름은 옛날 주(周)나라에서 사용했다 하여 주척이라 불렀다 하네요 그런데 이 주척의 단위는 즉 1자(尺)라는 의미인데 현대로 말하면 23.1cm이지요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길이의 단위로 촌(寸)-척(尺)-보(步) -장(丈)-리(里)-식(息)으로 되어 있어요 촌(寸)은 “손의마디”라는 뜻으로 10촌이 1척이니까 2,31cm 이지요 보(步)는 “한걸음”이란 뜻으로 6척(1.386m)이고 1장은 10척(2,31m)이 되지요 그리고 180장이 1리(415,8m)이고 30리가 1식(12,474km) 이지요
그런데 왜 이런 길이의 단위가 나왔는지 이해하려면 1식(息)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이해 해야할 필요가 있어요 식(息)이란 “쉰다”는 뜻으로 거리 단위에서는 한번 쉬어가는 거리란 의미이지요 그러면 이런 1식의 거리를 어떻게 측정하였는지 알아보기로해요
경국대전에 1식이 30리로 되어있고 1리가 180장으로 나오니까 1장(2,31m)단위로 쟀을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1장 단위의 줄자라도 갖고 다녔다는 이야기인데 일부지역 이라면 모르겠지만 전국에 그물망처럼 퍼져있는 수많은 길의 거리를 그렇게 쟀을리가 만무 하지요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지혜로워 1장이 10척이기 때문에 1리는 1,800척이 되고 1보가 6척이니까 1리는 300보로 딱 떨어 지고 있어요
1식이 한번 쉬어가는 거리인데 이때 가는 것은 말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가는 거리 이지요 그리고 거리의 단위안에 보(步) 즉 걸음걸이라는 것이 들어 있어요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것일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때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걸음걸이가 길이를 재는 단위가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수 있어요 그렇다고 무턱대고 걸으면서 거리를 재는것은 아니었지요 6척이 1보라는 기준이 있었으며 거리를 잴때면 그 기준에 맞는 걸음걸이를 했던 것이지요
물론 아무리 편차를 줄이려 해도 걸음걸이로 거리를 측정하면 오차가 날수밖게 없고 이는 근대식 측량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아닐수 없지요 허지만 조선시대에는 100%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거리측량이 별로 의미가 없던 사회였어요 얼마를 가서 점심을 먹고 얼마를 가서 하루를 묵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대였지요 이는 국가에서나 민간에서나 마찬 가지였지요
앞에서 6척인 1보를 현대적인 단위로 보면 1,386m가 된다고 했어요 그럼 1,386m를 줄자로 잰후 직접 걸어보는 실험을 해보면 가랑이를 쫙 펴야만 1보의 길이와 비슷해 지지요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현대 사람들보다 키도 아주 작았고 왜소했는데 어찌하여 보폭이 찢어질 듯 벌여야 되는 걸음을 1보라 했는지 알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의문점을 옛문헌에서 찾을수 있었지요 예부터 우리나라 1보의 거리는 왼발-오른발 이나 오른발 –왼발이 아니라 왼발-오른발-왼발이나 오른발-왼발-오른발의 길이였던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1보=1,386m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지요
다시말해 거리를 재는 단위로서의 1보는 산책하거나 금강산 구경할 때 걷는 걸음이 아니라 산넘고 물건너 구불구불 난길을 급히 과거시험보러 갈때의 보폭이었지요 또 특이하게 크거나 작은 사람의 보폭이 아니라 평균적인 사람이 걷는 보폭을 기준으로 하였지요 그래서 걸음걸이 측정의 편차가 다소 있다고 하더라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네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리나무"가 있어요 ‘십리 절반 오리나무’라는 옛 노래말 가사처럼 오리나무는 옛날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로 삼아 오리(五里) 2km 마다 심었다는 지표목이었지요 그래서 나무이름이 "오리나무"가 되었다 하네요
오리나무는 술을 물이 되게 하는 작용을 한다고 하지요 옛날에 술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 산에 땔감을 하러 갈때도 꼭 술병을 가지고 다녔는데 어느날 술병 마개를 잃어 버려 길 옆에 있는 오리나무 잎을 뜯어 술병마개로 썼다가 나중에 술을 마셔보니 술이 물이 되어 버렸다는 일화가 있어요 이처럼 오리나무는 술을 해독시키는 작용을 하지요 술은 화기(火氣)를 많이 품고 있는 반면에 오리나무는 화기를 진정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술이 만취된 사람이 오리나무 밑에서 잠을 자면 술이 쉽게 깬다 하네요
그래서 옛조상들은 행여 길을 가던 나그네가 술이 취했을때 한잠자고 술깨고 가라고 오리(2km)마다 "오리나무"를 심었는지도 몰라요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
(不積跬步, 無以至千里.♣荀子♣)
"규보"란 오른쪽 발이건 왼쪽발이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것,
천리 길도 그처럼 한 발짝씩 내디딤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 또한 평소의 끊임없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말이다.
순자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비유 이야기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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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에게는 손톱, 발톱도 이빨도 없다.
또 튼튼한 뼈도 없다 그러나 땅을 파서 흙을 먹고 땅속에 물을 마신다.
한 가지 일에 전념하면 그럴 수가 있는 법이다.
이에 비하여 게는 8개의 발, 그리고 2개의 집게발이 있는데도 뱀이나 뱀장어가 파놓은 구멍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한가지 일에 전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쌓아 나가지 않는 자에게는 영예(榮譽) 따위가 찾아오지 않는 법이며 눈에 뜨이지 않는 곳이라 하여 일손을 멈추는 자에게 빛나는 성과가 있을리 만무하다"
출처 : 인생백년을 읽는 한권의 책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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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척과 영조척
도량형 중의 하나로 길이를 재는 단위이자 기구.
도량형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형화된 도량형이 나오기 이전에는 성인 남자의 신체 일부를 이용하여 사물의 길이나 양을 측정하였다.
길이 단위로 등장하는 한 자라는 단위는 원래 한 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척(尺)이라는 글자 모양이
손바닥(口)의 아래로 양 손가락이 잔뜩 벌어진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량형의 역사도 일찍부터 시작되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척(尺)ㆍ석(石)ㆍ근(斤) 등의 단위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것이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중국식 도량형제로 개혁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표준척으로 사용되어 온 고구려척은
중국 은(殷)나라 척도인 것으로 보이는 기전척(箕田尺)이 사용되어왔다.
통일신라 때에는 당나라에서 당대척(唐大尺)과 주척이 도입되어 기전척과 같이 통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도량형 제도는 성종대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공전 도량형조에 규정되어 있다.
그 종류로는 황종척ㆍ주척ㆍ조례기척ㆍ포백척ㆍ영조척이 있다.
이것은 자의 쓰임새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황종척은 각종 악기의 제조와 음률을 맞추는 표준자이다.
주척은 주로 측우기 등 기구를 측정하거나
사대부집 사당의 신주(神主)를 만들 때 사용하며,
그밖에 도로의 거리수, 묘지의 영역, 훈련관 교정의 거리수, 활터의 거리수를 잴 때,
그리고 토지를 재거나 시체를 검시(檢屍)할 때도 사용하였다.
주척은 원래 주나라 때 거리, 면적 등을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기준자로써
삼국시대에 당나라로부터 들어와 고려, 조선시대까지 사용하였다.
조례기척은 종묘나 문묘 등의 각종 예기를 제작하는 데 사용하는 자로 예기척이라고도 한다.
포백척은 포목의 무역과 의복을 만드는데 쓰는 자로서 침척(針尺)이라고도 한다.
포백척은 옛날부터 우라 나라에서 사용해온 자로 지방에 따라,
또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길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세종 12년에 다른 도량형기는 모두 교정되었으나 포백척만은 교정되지 않아서
세종 13년에 각 관으로 하여금 죽척(竹尺)을 만들어 경시시(京市署)로 보내어 교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조척은 원래 곡척(曲尺), 대척(大尺), 금척(金尺) 등으로 불리웠다.
가옥과 성벽, 봉화, 사직단(社稷壇) 등의 단, 산릉(山陵)과 궁궐 등을 건축하거나,
되, 말 등의 양기(量器)를 만들 때 표준척으로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각종의 자를 미터법으로 환산해보면 그 평균 수치가 다음과 같다.
황종척(黃鐘尺)은 34㎝, 주척(周尺)은 20㎝, 영조척(營造尺)은 30㎝,
조례기척(造禮器尺)은 28㎝, 포백척(布帛尺)은 46㎝이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도량형 문란의 원인 연구(하원호, 한국사연구 59, 1987) 한국의 도량형(국립민속박물관, 1997) |
첫댓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