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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째 날(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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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퇴유곡의 곰소항 엘레지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무심하게 나올 수 있는가.
젓갈류를 구입, 서울 집에 탁송 의뢰하고 식당을 나와 안개가 자욱한 곰소항으로 갔다.
일제가 새 제방을 축조해 줄포항의 대안(代案)항으로 만들었다는 어항이다.
이 지역에서 다양한 농산물과 군수물자를 수탈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서는 토사로
인해 수심이 낮아져 기능을 상실해 가는 줄포항을 대신할 새 항구가 필요했다는 것.
그러나, 지금 곰소항은 썰렁하고 을씨년스럽다.
배다운 배도 드물다.
풍어의 어장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웬만한 배도 입항이 불가능해져서 모두 격포항으로
갈 수 밖에 없단다.
비록 일제가 불순한 목적으로 축항하였을 망정 전라북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였으며
유명했다는 칠산어장의 포구는 추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마치 개선(凱旋)하듯 입항하는 밤샘 고깃배들이 어항의 아침을 열고 활기에 점화한다.
어판장의 새 아침은 경매로 시작하며 즐비한 횟집들은 경매장으로 몰려든다.
보통 어항의 아침 풍경이 이러하건만 곰소항은 싸늘했다.
1자리 수를 넘지 못하는 배가 정박중일 뿐 출입하는 배도 없다.
상당수 횟집들의 텅빈 어항은 영업을 포기했다는 뜻일 것이다.
젓갈 도소매 단지의 실태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호도(虎島), 작도(鵲島)와 함께 3개의 무인도 였으며 곰 2마리와 연못이 있다 해서 웅연
도(熊淵島)라 불리었다는 곰소.
일제가 항만구축을 위해 도로와 제방을 축조함으로서 내륙이 된 곰소항은 어선150척을
수용할 수 있는 제2종어항이며 서해안 어업의 전진기지였다는데 왜 이리 되었는가.
근해의 싱싱한 어패류를 재료로 각종 젓갈을 생산하는 대규모 젓갈단지라는 곰소항.
주말이면 젓갈 쇼핑을 겸한 관광객들로 붐빈다던 어항이 주말인데도 잠자는 듯 고요한
것은 아직 이른 시간이기 때문인가 이즈음의 실상인가.
새만금방조제로 인한 참상중 하나란다.
사라진 갯벌의 문제라면 갯벌이 돌아올 때까지 참아달라고 애원하고 잠정적 대안이라도
모색하겠지만 어항 자체가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
이웃인 격포항 역시 뚜렷하게 퇴조현상을 보이고 있단다.
상당한 거리가 있는 충남 서천의 비인만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면 곰소만(줄포만)
이 직격탄을 맞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곰소항은 방조제 축조에 적극적인 나를 진퇴유곡의 궁지로 몰았다.
방조제가 선(善)이 아님은 인정한다.
그러나, 없는 선을 언제까지 찾아 헤맬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방조제는 선이 없는 현실에서는 가장 작은 악(惡)이다.
그렇다 해도, 곰소항을 떠나 범섬공원에 올라서는 내 걸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선으로 전환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람사르 협약이 절대 선은 아니다.
해발43m 동산으로 변했으나 과거에는 호도(虎島)였음을 알리기 위해 우리말로 풀어서
범성공원으로 명명했다는 30번도로변의 자그마한 공원을 지나면 곰소염전이다.
일제에 의한 곰소항의 축조로 형성되었다는 45ha의 드넓은 천일염전이다.
해안 길은 염전에서 구진 ~ 줄포자연생태공원까지 간척지와 둑길이 주를 이룬다.
부안군 진서면 구진(舊鎭)마을은 이름대로 옛 진터 마을이란다.
조선시대에는 정3품 전라우수사(수군절도사)의 통제에 있었으며 종4품 만호(萬戶)가
파견된 검모포(黔毛浦) 수군진영(鎭營)이 있었던 곳.
성터가 있으며 조선소가 있었다는 자리에는 옛 배의 널판이 남아있단다.
구진마을 앞에서는 광대한 간척지 논길과 둑길이 이어진다.
1974년 이 마을 주민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간척사업으로 얻은 농경지란다.
품팔이 일꾼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단다.
간척지를 메워 만들었다는 신활농장(신활마을) 길에서 모 내는 중인 부부의 설명이다.
갯벌을 막는 간척사업이 방조제 공사보다는 용이하나 변변한 장비가 없던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한계가 없는 인력(人力)에 경탄하며 걷는 길이었다.
이 지역의 갯벌은 드넓은 농지를 제공하고도 끄떡없이 건재하고 새 영역을 확장중이다.
왜 좀 더 갯벌 깊숙이 과감하게 간척사업을 전개하지 못했을까.
옛 줄포항 한하고 방대한 갯벌이 람사르협약 등록습지(갯벌습지보호구역)가 됨으로서
더 많은 농지의 확보가 어렵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람사르 협약(The Ramsar Convention on Wetlands)' 이란 물새의 서식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습지의 보호와 지속 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이다.
1971년 2월 2일, 18개국이 이란의 람사르에 모여 체결하였으며 '물새 서식지로서 특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 (The Convention on Wetlands of International
Importance, especially as Waterfowl Habitat)이 완전 명칭이다.
1975년 12월에 발효된 이 협약에 우리나라가 가입한 것은 1997년 3월.
101번째 회원국이 되었으며 2008년에는 10회 총회를 경남 창원에서 개최했다.
우리나라는 회원국으로서 습지 보호 의무를 당연히 이행해야 한다.
생명 부양의 생태계 보호는 회원국의 의무 이전에 범지구적 인간의 책무다.
그러나, 우리 서해안 갯벌의 람사르협약 등록에는 신중을 기하며 특별한 연구를 거쳐서
전략적으로 임하기를 이 늙은이는 바라며 걸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서해안 갯벌은 여느 갯벌과 다르게 신비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더구나 국지적 분쟁을 제외하면 국경 없는 조류와 동식물,생태계를 걱정할 만큼 안정과
평화를 구가하고 있지만 전쟁과 기근의 공포 분위기에서도 그럴 여유가 있을까.
스페인 사도 야고보의 마드리드 길에서 트리노계획(TRINO Project/Turismo Rural de
Interior y Ornitologia/Rural Inland Tourism and Ornithology)을 본 적이 있다.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의 광대한 곡창(Tierra de Campos) 습지가 서식처인 각종 조류
를 상품으로 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는 계획이다.
최고 귀빈이 되어있는 새들이 질투가 나도록 부러웠지만 전쟁중에도 여전히 귀빈일까.
핵보다 더 가공할 기아에 대비하려면 농토는 다다익선인데.
그러므로, 람사르 협약이 절대 선은 아니다.
마실길과 방폐장 비토사건으로 본 부안의 한계
강태공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저수지와 양어장들로 활용되고 있는 간척지 길을 따라
호암마을 입구를 지났다.
바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마을이다.
군(郡)내의 생활폐기물 매립장(부안군 환경센터)을 숲으로 가꾼 '줄포 환경센터 도시숲'
은 '마실길'로 실추된 부안군의 이미지를 회복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각종 꽃과 나무들을 식재하고 휴게소를 만들었으며 휴식공간과 가족공원, 생태학습장
등의 기능을 갖춘 숲을 조성한 것.
부안자연생태공원이 지호지간인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생태공원을 연결하는 직선 방파제 이쪽, 옛 줄포항 지역에 세운 마실길 탐방로 쉼터다.
곰소 ~ 줄포 갯벌 사이의 서해의 아름다운 비경, 즉 갯벌 위에 비춰지는 낙조와 무수한
어선의 야등(夜燈)이 물에 어릴 때의 장관을 일컫는다는 부안제1경 웅연조대(熊淵釣臺)
의 한쪽이며 줄포항의 한 지점으로 짐작되는 위치다.
20c초 서해안의 3대 어장중 하나인 칠산어장을 안고 근대항만으로 발전했다는 줄포항.
일제 강점기에 수탈물자의 반출항인 줄포항(茁浦港)은 군내 최고의 성시를 이뤘단다.
15개의 공공기관과 30여 일본인 업소,중국인 포목상과 음식점 10여곳과 유흥업소 등이
들어선 활성적 상업지였다니까.
내 청소년 때의 기억에도 줄포는 부안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토사의 축적으로 항구의 기능을 상실해 일체의 임무를 대안항인 곰소항에 인계
한 후 폐항되었으며 안내판만 서있을 뿐 지금은 흔적도 없다.
BMW320을 몰고 온 한 중년이 정자로 왔다.
부안 출신 서울 거주자라는 그와 말길이 텄다.
마실길에 대한 내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 그와의 다음 얘기는 방폐장 비토사건이었다.
이번에는, 지각없는 군민보다 군수를 비롯해 당국자들의 작전 부재에 대한 그의 비판에
내가 수긍했다.
지방의 개별적 민심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세력은 재경 및 도시거주 가족이란다.
도시로 진출한 가족의 의견을 가장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가족 설득에 외곽의 각개 작전을 지원받았다면 파국이 없었을 뿐더러 방폐창
효과를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고.
문득, 유신헌법 통과를 위해 박정희 독재정권이 사용했던 설득용 편지쓰기가 생각났다.
비록 유신독재를 위해 한 짓이기는 했어도 벤치마킹을 했더라면 효과가 컸을 텐데.
지자체 부안의 한계는 마실길 이름과 방폐장 비토사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함초를 따러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그는 달려온 고향의 친지들과 넓은 갯벌로 갔다.
몹시 짜다 해서 함초(鹹草) 또는 염초(鹽草)라 하고, 아주 신령스럽고 귀한 풀이라 하여
신초(神草)라고도 부른단다.
갯벌에 붉은 카펫(carpet)을 깔아놓은 듯 멀리서 보기 좋게 자란 함초는 서해안의 갯벌
이나 폐 염전 바닥에 무리지어 자라는 명아줏과에 속한 1년초란다.
그가 만병 통치의 신약초처럼 설명했지만 워낙 무관심한 내 머리에 남아있을 리 없다.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왜 부안의 자연생태공원에서 살고 있는가
방파제 둑 차로를 따르고 배수갑문을 지나 줄포 자연생태공원에 들렀다.
20여만평의 갯벌 저류지(貯溜池)에 10리갈대숲길, 야생화단지와 은행나무숲길 및 바둑
소공원 등을 조성했으며 각종 동식물의 서식지인 생태공원이다.
생태공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위적으로 가꾼 것이지 자연은 아니다.
단조롭기는 해도 한번쯤 탐방할 만한 분위기는 형성되어 있다.
한데,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세트장이 왜 자연생태공원 안에 있는가.
동유럽 프라하(체코)의 한 모형을 왜 부안의 자연생태공원에서 만나야 하는가 말이다.
자연생태 탐방객들이 뜬금없이 프라하의 별장과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
Johannes Huss 1370?~1415)를 보고 싶다던가.
(후스는 마르틴 루터보다 1c 이상 전에 태어나 종교개혁의 물꼬를 트고 분형을 당했다)
옛 마을공동체의 한 신앙형태인'솟대'와 우리의 자연생태와 전혀 무관한 중세기 기독교
개혁자의 상(像)이 한 울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되는가.
탐방객 유치에 일조하리라는 판단에서 그리 한 것인가.
앞장에서 언급했듯이 이른바 유명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 세트장을 무분별, 몰지각하게
유치하고 있는 각 지방의 지자체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천문학적 부채에 시달리면서도 파격적인 특혜를 주었지만 매력있는 관광상품으로 거듭
나기는 커녕 관리비도 건질 수 없을 뿐 더러 애물단지로 전락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거양실(一擧兩失)의 우매한 짓을 하고 있다.
철학도 경영마인드도 모두 함량미달 단체장을 선출하는 지방자치제의 한계일 것이다.
생태공원을 나와 갯벌가를 따라 고창땅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는 벽에 부딪혔다.
양어장측에서 사유지임을 내세워 접근을 금지함으로써.
(주인이 통과를 허락하였다 해도 부안군 줄포면과 고창군 흥덕면 경계를 이루는 곰소만
때문에 내륙쪽 도로로 물러서야 함을 나중에 알았다.)
신덕리 선양마을을 지나 고창군쪽 군계(郡界)인 목우 마을로 들어섰다.
이 길이 옛 동학농민군 진격로란다.
1894년 무장(茂長)에서 기포(起包)한 농민군이 고창에서 숙영한 후 흥덕 사포를 경유해
이 길 따라 줄포로 갔다는 것.
조선총독부는 동학농민혁명사를 정리할 때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저항한 고부농민들의
단순한 민란으로 축소하고 지역을 초월한 혁명성을 고의로 은폐 왜곡하려 했다.
한국의 친일 사학자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기폭제로 알려진 고부의 민란은 탐관(貪官) 조병갑(趙秉甲)의 가렴
주구(苛斂誅求)에서 비롯된 단순한 사건이었을 뿐이며 1차 봉기지는 고창의 무장이다.
무장에서 봉기해 흥덕을 거쳐 줄포로 간 농민혁명군이 고부로 입성했다.
이상은 신진 민족사학자들의 주장이다.
동학란을 동학혁명으로 바로잡은 것은 그들의 공이다.
그들은 삼별초의 난으로 왜곡, 비하되었던 항몽투쟁도 삼별초혁명으로 바로잡았다.
역사의 신을 믿음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려는 황당한 세력이 상존하고 있는 세태지만.
목우교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 나는 이들 신진 사학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다.
해안문화마실길과 선운산 죽염
목우교 이후는 미당 서정주의 시문학관(생가)까지 17km 해안문화마실길을 택했다.
목우~(김소희 생가)~신촌~신농~상포~반월~(김성수 생가)~신기 등의 마을을 거치는
길인데 다른 명칭은 세계5대 갯벌습지 탐방길.
전라북도민에게 마실은 마치 윤택한 삶의 한 부분을 뜻하는 듯 처처에 마실길이다.
농경시대의 평야지에서 민초들의 생활문화로 정착되었다 해도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마실문화의 정리와 대체가 필연인데도 마치 회복운동이라도 전개할 작정인가.
부안의 해안 마실길과 달리 충격적이지 않은 까닭은 그 길의 성격차(差)에 있을 것이다.
해안길은 남하하다가 사포마을, 김소희 생가 입구의 다리를 건너 서북쪽으로 P턴한다.
200m쯤 비켜있는 판소리의 대명사, 고 김소희(故金素熙) 명창의 생가를 그냥 통과했다.
늙어가면서 우리의 전통가락에 끌리면서도 갈길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국악계의'마지막 자존심'이라는 예인 외길의 무형문화재(판소리)인데.
<만정(晩汀/김소희의 號)그대의 노래 소리에는
고창 흥덕의 옛날 못물에 몇 만 년 이어 핀 연꽃이 들어 있도다.
학같이 훤출하고 거북이처럼 질기던 이 겨레의 바른 숨결이 잠겨 있도다.....>
시어(詩語의 마술사 미당 서정주의 비문이다.
방파제 둑길, 갈대숲 갯벌과 함초 갯벌길, 양어장길,농로 등으로 난 해안길을 따라 신촌
마을 외곽을 지나다가 들일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마을 아낙네들을 만났다.
오후 5시가 넘었음을 의미하므로 걸음이 더욱 거세게 빨라질 수 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아낙들은 미당 생가까지 가려한다는 타관 늙은이에 관심은 갖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만행(萬行)하던 젊은 한 때에는 대부분의 경우 관심이 곧 숙박의 편의 제공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즈음에는 그같은 인정이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진다.
신농마을을 지나 미당의 생가가 8km쯤 남은 상포마을 목전에 당도했을 때 해가 무기력
하게 서해로 빠져들고 어둠이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밤 길을 걷지 않으려면 해안에 자리잡은 멋쟁이 상포정(象浦亭)에 집을 지으면 되지만
도중에 저녁거리를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도 2시간쯤의 야행이 불가피했다.
해안 마을들은 물론 바다에 떠있는 배에도 점등이 시작된 시각.
곰소만 저쪽, 북서쪽 해안마을들의 중심에 있는 곰소항 불빛이 지근으로 다가왔다.
종일 걸었건만 지호지간이라니 여기 또한 교량이 필요한 곳 아닌가.
포구들이 즐비한 서해안이야 말로 구도자의 자세를 요구하는 길이다.
상포정에서 반월마을 앞까지는 여광에 의지해 걸을 수 있었으나 반월 이후 칠흑의 갯벌
둑과 양어장둑은 등산용 헤드 플래시에 의지하여 걷기는 애로투성이 길이다.
지리멸렬한데다 부실하게 축조된 낡은 둑들의 일부는 반 이상 유실 또는 붕괴됐는데도
보수는 커녕 위험표지 하나 서있지 않아 야간에는 위험천만한 길이다.
가냘픈 소형 플래시가 적발하지 못해 하마터면 생매장당할 뻔 했다.
아쩔한 순간을 연거푸 겪고 나서는 맥빠진 다리가 자신있게 움직이지 못함에 따라 저녁
식사를 이유로 상포정에서 마감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생태공원의 국수 1그릇이 오늘 식사의 전부였다 해도 굶는데 이골이 난 늙은이 아닌가.
여기 양어장 주인들은 안전불감증자인가 일부러 모르쇠 하고 있는 것인가.
이들은 어느 날 큰 홍수에 피해를 입게 되면 뻔뻔하게도 천재보상을 요구하고 나서겠지.
어쩌면 피해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닌지.
오늘날에는 최고급 고층 주거타운으로 거듭났지만 1960년대 초까지도 상습 수해지역이
었던 이촌동(서울 용산구) 일대의 수재위문금품을 노리던 상습 수재민들 처럼.
여름이 오기 전에 후조처럼 몰려와서 홍수를 기다렸다가 답지하는 위문금품을 챙긴 후
역시 후조처럼 돌아가곤 했던 그들과 다를 것 없다 하면 명예훼손이 될까.
더듬듯 해서 신기마을 차로에 진출해 불켜있는 외딴 집에 들어가 미당 생가를 물었다.
동남쪽 불빛 환한 마을이라니까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겠으나 식당 있는 마을을 원하면
남서쪽 선운사 마을까지 좀 더 멀리 가야 한단다.
미로같은 둑길을 헤매느라 이미 밤9시가 넘었는데 시골식당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체념하고 어둠속에서 쉬다가 좁은 농로 타고 차량 불빛이 자주 명멸하는 길에 올라섰다.
미당 생가와 선운사 쪽으로 통하는 22번국도다.
마침내 암흑의 질곡에서 해방되었다는 기분 탓이었을까.
몇발 가지 않아 왼쪽 언덕바지에서 내려오는 트럭과 충돌할 뻔 했다.
많이 놀란 듯한 1톤 트럭의 운전자는 걷기 위험한 밤길이라며 나를 차에 태웠다.
큰 교통사고로 번질 뻔 했던 곳 바로 위위 산록에서 죽염(竹鹽)을 생산하고 있다는 그는
내가 선운사 입구로 가려 하는 이유를 듣고 내게 한 제의를 해왔다.
친구들과의 회식을 위해 가는 길인데 함께 가서 식사한 후 자기 집에서 유숙하라는.
나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숙박은 전혀 문제거리가 아니었지만 식사는 공복상태인 내게 유일한 현안이었으니까.
22번국도를 타고 달려간 흥덕면 소재지 식당 '해물천국'에서 나는 칙사대접을 받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그의 세 친구 부부로 부터.
그들은 자기네의 친구로부터 거의 강권해서 나를 회식에 동참하게 했다는 경위 설명과
친구의 자의적 소개가 있을 뿐인 생면부지의 늙은 불청객인데도게 그랬다.
귀로에도 선운사 주변에서 야영하려는 나를 선운리 자기 집의 대궐같은 별채 황토방에
묵도록 막무가내였다. <계 속>
첫댓글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2013년에도 건승하시고 끊임없는 걷기를 하시기 기원합니다. 저는 3월 제2차 까미노(포루투갈) 및 유럽 음악기행을 꿈꾸고 있습니다. 국토종주는 문경에서 일단 스톱(날씨와 집안 사정). 이달 하순 제주도 올레길 예정입니다.
부디, 좋은 여정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