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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31217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230122 주일 설날 2
오늘 우리나라 전통 명절인 설날에, 골로새교회에 주신 말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모든 성경이해의 초점은 그때에, 거기에 그 말씀이 왜 주어졌는가를 살피면 바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수 있습니다.
먼저 골로새는 어디며 어떤 교회였는지를 보십시다.
골로새 지도1)
골로새 교회가 위치한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로서 브루기아 주의 서남쪽에 있는 리쿠스(Lycus) 평야 중앙을 흐르는 메안더(Meander) 강의 지류인 리쿠스 강 계곡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즉 인근의 라오디게아(Laidea)에서는 동쪽으로 약19km 지점에, 또 히에라볼리(Hierapolis)에서는 남동쪽으로 약 21km 떨어진 지점에 골로새시가 위치해 있었습니다(4: 13).
이 도시는 한때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가는 주요 무역로 상에 위치하여 모직과 피륙 공업이 발달한 상공업의 중심지였으나 무역로가 동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웃해 있는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 같은 도시들이 번영하게 되고 골로새는 쇠퇴하여 바울 시대에는 작은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는데 그 지역의 원주민들과, 그리스에서 온 이주민들 그리고 여기에 안티오쿠스 3세(Autiocuslll)의 유대인 이주 정책에 따라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골로새는 작은 도시였으나 다양한 문화적 현상과 종교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나타났습니다.
한편 골로새 교회는 골로새서와 골로새에 살고 있던 빌레몬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인 빌레몬서의 내용을 볼때 골로새 교회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에바브라가 세웠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간접적으로 골로새 교회를 세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3년 동안 사역할 때 사업차 그곳에서 머무르는 중에 빌레몬, 아킵보와 함께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는데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빌레몬과 함께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골로새 교회는 주로 개종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1 : 21, 27;2:13) 골로새에는 이미 이주해 온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으며 이들이 점차 교회에 들어옴으로 골로새 교회는 여러 가지 사상들로 인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에바브라가 당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혼합주의적인 이단들의 가르침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민족이 모여서 살았던 골로새에는 여러 배타적인 사상들과 유치한 사상들이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이단들의 거짓 가르침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 골로새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절대적인 구주시요 그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하게 믿도록 하며 이단들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견고한 신앙을 가지며 성결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기록하여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를 전부와 후반부로 나눌 때 전반부 1:1-2: 23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변호 변증하고, 후반부 3:1-4:18절, 끝절까지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삶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권면이 시작되는 3장 말씀은 1절에서 4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聖徒)는 더 이상 땅엣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아야 함을 말씀함으로 성도의 삶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어지는 5절에서 17절 말씀은 성도의 삶의 원칙이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시는 말씀,
즉 성도가 하늘에 속한 자로서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보다 구 체적으로 밝히는 말씀입니다.
우선, 5-11절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사람이 된 성도가 벗어버려야 할 것들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즉 이 땅은 아담의 선악과 범죄 이후 온갖 죄악과 부패로 가득 왔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를 아는 자라 할지라도 생활 가운데서 자신을 방치하면 이와 같은 죄악된 환경에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악에 오염된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 12절에서 17절 말씀은, 새 사람인 성도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한 말씀으로
새로운 성도의 위상 곧 새 사람이 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중점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새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된 성도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봅시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그러므로
- 이 말은 골로새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 마땅히 이행해야 할 바가 있다는 것을 안내하는 말입니다.
▶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 이 문구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하심을 입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물론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창세 전에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그 택하심을 입은 결과로, (1) 그들은 거룩하게 되었고, (2)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영원히 입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른 것 없음에도 남달리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성도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방심하지 않고 도리어 열심을 품고 선을 행합니다.
▶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
여기에 언급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이 다섯 가지의 덕목들은 새 사람을 입은 사랍들이 자신의 속성으로 담고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①"긍휼"(스플랑크, 오이크티르무)이란 말은 직역하면, "긍휼의 감정"이니 인격의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불쌍히 여기는 열정을 말합니다.
고난에 처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너그러운 마음을 의미하는데, 영적으로 부요한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사람의 가련한 정형편 살피는 데 민감합니다.
=>긍휼을 옷입으라=>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라!!
②"자비"(크레스토테스)란 말은 성격의 인자함을 의미하는 바, 엄격과 정반대되는 뜻입니다(롬 11:22).
이런 성격은 위에서 말한 긍휼을 근원으로 하고 긍휼이 대외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③"겸손"‘ (타페이노프로쉬네)은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빌2:3).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려면, (1) 자신의 부족과 결함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하며, (2) 심판은 현재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나중까지가, 끝까지 겸손이 중요함으로).
④ "온유"(프라오테스)란 말은 남에게서 손해와 방해를 받고도 격분되거나 원한을 품거나 반격하거나 복수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을 대하거나 사업을 경영함에 있어서는 조급함, 경솔, 잔인, 속단, 흥분 등과 정반대되는 인내, 신중, 온순, 온화, 조절, 포용, 침착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유불급-넘침도 모자람도 다 나쁜데, 넘침은 더 나쁩니다
⑤"오래 참음"은 나를 괴롭게 하는 시험거리로 인하여 변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특히 남이 해롭게 하거나 혹은 은혜를 배반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노하지 않고 변함 없이 덕행(德行)을 계속함을 의미합니다.
ex)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5:22)에서 오래 참는 덕의 필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사단은 그가 시험하는 사람을 폭력으로 정복할 수는 없으므로, 같은 시험을 오랫동안 계속함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질그릇과 같아서 계속적 시험에는 넘어가는 줄 사탄이 알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렸습니다. 이와 같이 오랜 시험과 유혹을 이기려면 우리는 오래 참는 덕을 소유해야 됩니다".
▶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우리의 행동과 습관은 옷과 같이 남의 눈 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남의 평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행동과 습관들은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이 나타나서 그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의로운 행실의 소유자를 깨끗한 옷을 입은 자라고 합니다.
계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제 13절 말씀은 앞절에서 말씀하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5가지 덕목을 적용하는 말씀입니다.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1)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적용으로서의 "용납"할 것을 말씀하고, (2) 긍휼, 자비의 적용으로서의 "용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만이 있거든에서’ 불만(몸페)은 ‘비난’ 또는 ‘다툼’을 상정하는 단어로 불만이 있을 때 용납하지 않으면 비난과 다툼으로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납’ (아네코마이)은 자신 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제하고 양보하는 것을 말하며, ‘용서’ (카리조마이)는 은혜를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상대방이 자신을 비난한다 할지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은혜를 베풀라는 말합니다.
이처럼 새 사람의 특징은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 분을 내거나 복수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며, 오히려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우리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그의 원수가 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께서는 자기가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대하여 불평을 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마 거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큰 희생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모든 덕행의 근본인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사랑’ (아가페)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요일 4: 8) 모든 기독교 미덕들의 총체이며 핵심이다(Abbott, Ramsay).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도 ‘사랑’이 우위에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고전
13: 13).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과 소망’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소유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케 하며,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성경은 새 사람인 성도들에게 기독교의 모든 덕목들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누차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
바울은 새 사람에 대한 비유를 계속해서 의복을 입고 단장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의복에 있어 띠란 입고 있는 옷을 하나로 묶어 보기 좋게 해주고, 활동 하기 편하게 해줍니다.
그와 같이 사량은 기독교의 모든 덕목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균형 있게 그 덕목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런데 여기서 ‘띠’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순데스모스’(σύνδεσμος)로
그 단어는 ‘-과 함께’라는 ‘순’이라는 말과, ‘묶다’ ‘연결하다’는 뜻의 ‘데스모스’(δεσμός)의 결합어입니다.
누구와 함께 묶다, 무엇과 연결하다의 의미입니다.
이 말은 나 스스로의 힘으로 묶는 끈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에 의해서,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서로가 묶이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묶이는 띠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함께 묶여 있는 띠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함께 주님의 몸으로 묶여 있는 띠를 말입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에 그 단어가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서로 서로 다른 환경과 상황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아 함께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면, 서로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사랑하고 용납하여 성령의 띠로 하나로 묶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도 각각 다른 위격과 위치와 역할이 다르지만, 하나로 묶여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 것처럼 에베소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 골로새교회를 이루는 성도들, 우리 혜광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그렇게 사랑의 띠로 매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성령께서 우리 각자 각자를 주님 안에서 묶이게 하시는 것입니까?
서로 좋은 일도 함께 나누고, 어려운 일도 함께 나누며, 서로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의 띠, 사랑의 줄이 묘약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모든 일 위에 사랑을 더하면 됩니다.
그러면 온전하게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교인들도 이렇게 사랑의 띠로 서로 매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와 우리 교회가 화평한 가운데 우리에게 맡겨 주신 복음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 봅시다.
이 사랑의 띠를 설명절에 우리 집에, 우리의 가정들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대 명절(名節)인 설날입니다.
설날의 '설'은 새해의 첫머리를 뜻합니다.
설날은 한 해의 첫날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설날의 중요 풍속으로는 명절마다 반드시 행하여 온 차례(茶禮)와 성묘, 세배입니다. 차례와 성묘는 조상님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예식이며, 세배는 가문과 이웃의 어른들에게 드리는 새해 인사입니다.
설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명절은, 물론 세계 여러나라의 명절이 다 그렇겠지만 명절은 사람들을 만나, 예를 갖추어, 음식을 나누는 교제가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제사의 경우, 제사음식은 풍성하게 차려야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실제 차려진 음식은 조상들이 드시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참여 후손들이 함께 나눕니다.
그래서 먹는 곳에서 인심난다는 말처럼 풍성하게 나누는 음식이 동기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기 때문에, 제사상은 걸게 차려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명절에는 반드시 모든 가족, 가문이 모여서 제사하고 성묘하고 세배를 나누었습니다.
이웃집에 세배를 가도 꼭 세배상을 차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명절의 참 뜻은 헤어져 살던 가족과 가문이 또 이웃과 이웃이 만나 교제하며 음식을 나누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데 있습니다.
제사와 세배는 모여서 준비된 음식을 먹으며 정을 나누는데 필요한 장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과 교제가 목적인 명절이, 많은 사람이 오가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차례는 걸게 지내는데, 그 목적인 사랑과 교제는 이루어지고 있느냐?
물론 평소에는 모두가 바쁘게 살기 때문에, 설령 가족이라고 해도 충분하게 마음을 터 놓는 대화가 부족하지만 그러면 명절에는 어떤가?
명절 역시 동일하게 분명히 모이고 음식은 나누지만 사랑과 교제가 힘들다면 가정의 회복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많은 사람이 우려하는 가족의 붕괴, 가정의 붕괴가 결혼 안하기, 자녀 안낳기, 낳아도 하나만 낳기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국가의 미래가 대한 매우 어둡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기를 여유가 없이 너무나 바쁘고 삭막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교회의 첫 번째 기능, 책임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교회의 첫 기능(책임)은 교제에 있습니다.
교제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여기에서 성도끼리 교제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요, 수평적으로는 성도끼리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화목제물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교제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그 첫째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인 예배를 첫째로 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만 아니라 성도 사이의 교제가 있어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5-40. 가장 큰 계명
35.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초대 교회는 한마음 한뜻으로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기쁨으로 떡을 떼어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랑의 교제를 하였으니 영으로 거듭난 인간들이 사랑으로 친교를 맺은 사회가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곳에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제의 정신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적은 무리라도 사랑에 엉키어 주님을 사모하는 친교의 희열이 넘치는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교제가 본질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말씀증거가 있고 봉사가 나옵니다.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예배는 있으나 성도와 교제하는 친교는 없다시피 합니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라고 하십니다.
교회 역시 오늘날의 가정 못지 않게 사랑과 교제, 대화의 회복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전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오늘 우리의 전통 명절인 설날에,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가정도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