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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신앙은 과연 세상 안에 존재하는가
집 사 오 갑 석
오늘 신앙적 기준으로 볼 때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리고 그 위치는 올바른 자리인가.
로마시대 이후로 기독교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곤란 받고 있는 시점인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아니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에는 지금과 비교한다면 상식적으로는 미루어 생각컨데 숫적인 면에서는 훨씬 적었으리라 생각되어지지만 그래도 그때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죽음까지도 불사하려는 신앙에 대한 굳은 믿음과 굴하지 않는 용기의 기개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떠한가. 숫적 단순 비교로는 그때보다 월등히 많아 졌겠지만 영적인 면에서 볼 때 오히려 훨씬 퇴보되어지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덩치는 커졌지만 체력은 옛날보다 오히려 떨어진 현대인들의 비정상적인 체형과 다를 바가 없다.
더 강해질 수 있는 조건이 많은데 오히려 약해지는 우리의 모습은 왜인가.
기독교는 가난하고 부족한 자들이 의지하는 곳이고, 그래서 문명이 발달하고 더부러 인간들의 삶이 윤택해지면서 인간들이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들의 삶을 만족스레 영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인가. 기독교가 약하고 힘없고 빈한한 자들만이 의지하는 것은 정녕 아닐진대 왜 그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그런 현상은 실제로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과거 우리에게 선교했던 유럽국가는 인구 대비 5% 정도의 복음화 율을 나타내고 있으며 영적 퇴락의 현주소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아시아,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에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이니 예컨대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한 지역인 곳인 그 곳에서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무엇엔가 의지하여 취하고자 함이거나 힘들고 지친 세살 삶을 위로 받고자 하는 무의식적 잠재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급과 수요의 정비례 요소가 발생되어져 전도 의도가 스며들 여지가 많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기독교는 결국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 나약한 자들을 위한 제한적 영역의 구원밖에는 이룰 수 없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가진 자는 오만과 교만할 수 있음이니 이는 바로 모든 것들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룬다는 자만이 되어 더 넓은 세상으로 안목을 넓히지 못함이며 종내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며 결정하는 절대권자의 존재를 부인하게 되는 것인 바 바로 그 것이 인간이 빠져들기 십상인 함정이니 사탄의 표적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들에게 주신 축복의 동산에서 유일했던 금단의 열매를 인간의 소유물로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게 된 것도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스스로 권위자의 자리에 도전하는 우를 범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컨대 근본적으로 인간의 습성은 공동의 개념보다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할 수 있다. 우리보다는 나란 기준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편협되고 자기중심적으로 치우칠 우려가 강하다.
세상인 들이 교회에 나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영혼의 구원? 그건 아직 이른 이야기일 것이다. 영혼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입과 말로야 그러하다 잘도 하겠지만 진실로 진위를 구별할 수 있는 상황 하에서도 그리 대답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이러할진대 개신자나 초신자들에게 믿음과 신앙의 굳건함을 강조하며 주일성수를 외친다고 무에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교회부터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변천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이라 . 세상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데 교회는 뒤처져서도 자신의 처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일지라. 결국 선도자들이 아닌 낙오자들이나 보듬어 안고 가는 초라한 모습이 되고 그러한 역할이나마 제대로 수행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겉모습은 그러할지 몰라도 오히려 그들마저도 포용할 능력이 딸리는 모양새는 참으로 비참하기마저 하다. 그래서 뜻있는 자들의 목소리는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반적인 인간의 교육은 우리나라의 경우 초등학교로 부터 시작하여 배움의 정도나 혹은 연령에 따르는 이성의 성장에 맞춰 교육의 수준을 단계적으로 높혀 가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이는 이미 오토메이션에 의한 다문화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수준에 저만치 뒤져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세상 안에서 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공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저들에게 내미는 영의 양식을 안 받아 먹는다고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어쩌면 좀 뒤가 근질거리더라도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부성있는 행위들도 감행해야 할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쓴 약을 먹이기 위해 달콤한 사탕으로 유혹하듯 진정 저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면 자존심이나 외형적 모양새 따위는 생각지 말고 그들 속에 녹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들은 죄악 속에 있으니 구원해야 한다 하면서도 순결한 자신은 그 죄악 속에 빠지지 아니하고 생명줄만 던져 놓고는 잡기만을 기다리다가 실기하는 것이 아닌가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식이 물에 빠졌을 때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던져줄 줄을 찾아 헤매이거나 혹은 줄을 던져주고 왜 안 잡느냐고 한숨만 쉬고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우선 자신의 생명마저 생각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 들고 볼 것이다. 우린 저 세상인들에게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나야 어리석기만 하고 한낱 이론가에 불과한 우자라 방법까지 제시할 능력이 없어 늘 안타까울 뿐이다
교회에서의 교육이나 훈련. 솔직히 포장만 다를 뿐이지 막상 뜯어보면 결국은 같은 것. 하고 또 하고, 배우고 또 배우고 ........ 물론 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반비례하는 의욕과 열성은 왜 모르나. 새신자, 초신자나 교회 출석일수나 직분에 상관없이 어떤 이들에겐 참으로 은혜롭고 놀라운 체험이 되어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의욕과 도전으로 추진력을 얻을지 모르지만 또 다른 일부는 저만치 앞에 까지 갔다가 되돌아 와선 또 그 일들을 재삼 반복해야 함으로 해서 맥빠지고 열기를 식혀 버리는 행위가 되리라는 것도 감안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주님의 일과 사명에 반복이 어디 있고 지루함이 어디 있으며 사명감에 불타는데 맥 빠지고 열 식는다는 말이 웬 말인고 하면 반문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 자신을 비롯한 일반 성도의 대다수는 그 정도의 영성을 가지고 있지 못함이 현실인 즉 그 현실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여야 하지 않을까.
인도하는 자와 따라야 하는 자들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따라야 하는 자에 대한 배려 없는 인도에는 갈등과 마찰, 불순종이 생성되기 마련이다. 영혼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육신에도 눈을 돌려 고귀하고 순결한 위치에서만이 아닌 거꾸로 비틀리고 힘겨운 성도의 삶에 동참하는 그런 교회상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누가 무어라 해도 주님을 제외한 교회의 주체는 바로 성도이기 때문이다. 인도받는 성도들이 인도하는 이들의 선에 동참하기에 앞서 인도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인도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녹아들어 진실한 그들의 신앙적 현실과 영적 건강도를 체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노라면 성도들은 천천히 방향을 잡아 인도함에 동참할 것이리라 생각된다.
물론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성도들과 같은 위치와 수준에서 함께 부비며 뒹군다는 것이 결코 쉬움이 아니며 육적인 면은 물론이요 신앙적인 면에서도 많은 도전을 받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러한 도전에 흔들리지 않을 굳센 믿음이 있다면 결코 망설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관조자가 아닌 적극적인 개입자로 함께 하는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청소년 시절. 새로 오신 전도사님은 내 신앙이 추구하는 이상형이었다.
청소년들은 아직 채 영글지 않은 영혼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방황하며 반목과 회의, 그리고 와중에 번뇌와 타락까지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지 않고도 자신을 정립할 수 있다면 더없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실질적으로 크든 적든, 혹은 표면화 되거나 속으로 숨기고 잘 소화를 시키던가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 나 없이 겪는 성장통이니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 앉아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건 그대로 약이 될 수도 있음이리라.
그 전도사님은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개울가에서 텐트를 치고 서로 부등켜 안고 새우잠을 자기도 하고 술, 담배를 같이 하기도 하면서 그들 속에서 그들의 아픔이나 고통을 함께 하면서 결국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후일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항상 신앙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기준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셨다. 언젠가 그런 전도사님의 뜻을 물었을 때 그 분이 하신 말씀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너희 또한 나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요, 너희 속에서도 난 나를 지킬 수 있음이니 난 너희에게 손을 잡으라 내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의 손을 잡으러 가서 너희들을 하나님 앞으로 끌어 내리라는 내용의 말을 해주었는데 밖에서 보는 것이 아닌 함께 하는 신앙의 높은 뜻을 그때 나름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준 말이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믿음과 몸은 망가져도 저들을 구원하리라는 위대한 사랑. 그런 진실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어 우리 청소년들은 아마도 그 분이 순교의 현장에서 우리를 부른다면 많은 인원이 서슴없이 동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 때를 상고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심장은 마구 날뛰며 나를 떨리게 하고 있음이라. 이 것이 바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의 제시가 아니겠는가.
말과 교육과 훈련만으로 이루어지는 가시적 효과는 일시적인 것이라 확신한다. 당장은 성도수가 늘고 교회가 발전하는 듯 하지만 가슴과 마음, 그리고 영혼으로 느껴지는 확신이 없이는 바람 불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사상누각이요, 보기엔 좋아도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비개인 하늘의 무지개일 뿐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전 제시에 의한 동기 부여가 중요한 것이다. 왜 해야 하는가, 난 왜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이 있어야 하며 그 물음의 답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 믿는다. 그 답은 아직 못 받은 자들도 있겠지만 반대적으로 이미 받은 자도 있으리라. 결국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 대답의 묻혀진 실체를 스스로 끄집어 내어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생성시켜 주는 계기가 필요할 뿐이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건전지로 움직이던 로봇이 그 힘이 약해지거나 다 떨어지면 건전지만 바꿔주면 또 다시 강력한 움직임을 가짐과 같이 이미 준비된 이들에게는 결정적 한 요소만 충족된다면 그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음이라.
단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은 만능이 아닌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요, 자전거는 잘 굴러 이동하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임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이다. 시계에게 왜 한자리에만 있느냐고 구박하고 자전거에게 왜 시간을 알려 주지 않느냐고 꾸중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음의 극치이며 또 당하는 이들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한다면 각 개체를 가지고 논할 것이 아니라 자전거와 시계를 합체하면 될 것이다. 그리하면 타고 이동하면서 필요할 때 시각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치는 이렇듯 단순하다. 그런데 교회는 바로 그런 이치를 무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획일화된 틀 속에서 누군가 의해 이미 그어진 선을 따라 그 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아둥바둥대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쓰름하다. 두날개에서도 주장하는 바지만 은사로 사역하라는 것에 동감함이 크다. 사람이 천태만상으로 다르듯 각 자가 가진 성향이며 그릇이며가 다를진대 그런 것을 고려치 않은 막무가내적인 사역에의 순종에 맞닥드리면 참으로 난감하다. 어떤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며 때우듯 넘어가고자 함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한즉 무슨 성과며 효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순종을 원하거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던져지는 사명이나 의무적으로 행하는 사명은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 자신의 생명수를 헛되게 쏟아 버리는 행위와 같음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 아닌가.
오늘날의 교회는 단순화가 아닌 다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교리와 믿음과 순종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신앙적 욕구도 충족시켜 주어야 하며 신학적인 면도 역시 그러하며 인간적인 면까지도 수용해 주는 아량도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성도의 사역만을 원하는 곳이 아니라 힘들고 지친 세상의 육신을 쉬게 하고 그럼으로 해서 교회와 세상이 어느 선까지는 상존하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인은 힘들고 피곤하며 곤란 받아 상처 입은 나약한 존재이다. 교회는 그들이 주님의 강한 군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닥달하고 몰아 세울 것이 아니라 평안과 안식으로 그들의 영과 육을 다독이고 위로하여 회복시키기를 우선해야 할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이나 체계가 있어야 한다. 준비된 자에게 훈련을, 훈련된 자에게 사명을, 사명자에게 지원을, 그리고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계획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간구함이 옳지 않겠는가.
난 주님 가신 정도를 따라 갈 능력도, 자신도 없는 자이지만 선택 받은 자 중에서 가장 작은 모습으로나마 미력을 더하고 싶음이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